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691 - Chapter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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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1화

지금까지 그의 행동은 도무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이쯤 되자 최수빈은 그의 말투와 태도 속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남자의 눈빛은 어둡고 깊었는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최수빈은 비웃듯 짧게 웃더니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그렇게 참고 살았어요? 몇 년을? 말 한마디 없이?”정해진 운명이었을지는 최수빈도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분명 그 안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깔려 있었다.주민혁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안에는 최수빈이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똑똑...”바로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민혁아, 밥 먹자.”주선웅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최수빈은 잠시 주민혁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깊은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민혁 씨, 말이 안 통하는데 우리 둘 앞으로 다시 얘기할 일도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아요. 난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사람이랑 엮이고 싶지 않거든요.”주민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를 믿는다면 그냥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뭐요?”이 말에 최수빈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내가 왜 무조건 믿어야 하지?’전생에는 바로 그런 태도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탓에 결국 끔찍한 참사를 불러왔던 거였다.지금은 절대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다.“내가 뭘 겪었는지 제대로 안다면 그런 말 못 할 거예요. 민혁 씨는 본인 멋대로 판단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그는 최수빈과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특히 아직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하다가 번번이 실망만 하게 된 주예린에게는 더더욱 말이다.말을 마친 최수빈은 조용히 돌아서서 문을 열었고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마음이었다.주민혁은 아마 단 한 번도 용서를 구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어차피 최수빈은 이미 떠날 사람이었기에 그가 어떤 사람이든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그녀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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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애초에 최수빈의 진짜 정체를 알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막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서 진서령은 관계를 다시 이어볼 수 있을지, 혹시라도 재결합의 가능성이 있는지 슬쩍 떠보는 듯했다.원금영은 그런 진서령을 쓱 훑어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건 사람 자체냐, 아니면 그 사람이 가진 신분이냐. 기회주의적으로 굴고 아랫사람 무시하는 버릇... 절대 좋은 게 아니다.”한 치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 말에 진서령은 표정이 확 굳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전... 그냥 젊은 사람들 결혼 생활이 걱정돼서 그랬던 거예요.”“그만해. 밥이나 먹자고.”주기훈이 말하자 대화가 그제야 끊겼다.식사 후, 원금영은 방에 들어가 쉬고 주기훈은 주선웅을 다시 서재로 불러들였다.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는 이 집에 있는 모두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최수빈은 처마 밑에 서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둠이 내려앉으며 점점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보기 좋아?”등 뒤에서 주민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최수빈은 냉담한 표정 그대로였다.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예린이 초등학교 들어가잖아. 어떤 학교 보낼지 정했어?”그러자 최수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희미한 등불 아래,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다.“민혁 씨가 상관할 일인가요?”“네가 재혼한다 해도 반대는 안 할 거지만...”그가 담담하게 말을 덧붙였다.“우리 형은 안 돼.”최수빈은 피식 웃었다.“이미 이혼했잖아요.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민혁 씨가 반대할 권리도, 동의할 필요도 없어요.”주민혁의 표정이 서서히 얼어붙어 갔다.“그렇게 좋아, 그 인간이? 예린이에게 잘할 거라고 믿는 거야? 약 먹여서 널 데리고 가려던 사람인데도?”“적어도, 그냥 무시하고 방치하던 민혁 씨보다는 낫죠.”주민혁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목소리에도 어느새 날이 서 있었다.“꼭 쓰레기통에서 남자를 골라야 직성이 풀려?”“뭐라고요?”인간은 독해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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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그가 지금 말한 이 모든 것은 결국 최수빈이 은산시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명분이었다.‘내가 떠나려고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정식 발령도 아직 내려지지 않았는데 내가 은산시를 떠날 걸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단순한 추측일 뿐인데 그걸로 내 마음을 꺾으려는 걸까?’길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두려워서 움츠린 채 그 자리에 머문다면 괜찮아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현실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눈앞에 있는 남자가 낯설기만 했던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고 눈빛도 어느새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민혁 씨가 뭘 안다고 그래요? 위험이라는 게 뭐고 누가 그런 걸 꾸미는지도 나로선 알 길이 없어요. 그런데 민혁 씨 말만 믿고 따라오라고요? 다른 이를 믿는 한이 있어도 민혁 씨는 절대 못 믿어요.”그녀의 눈빛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마치 이제는 완전히 주민혁과 선을 긋겠다는 듯 말이다.“착각하지 마요. 내 인생은 민혁 씨가 참견할 일이 아니에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든, 그건 민혁 씨랑 아무 상관없어요.”이에 주민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고 저도 모르게 이마가 찌푸려졌다.최수빈의 감정을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나와 어떤 관계도 맺고 싶어 하지 않네. 모든 연줄을 끊어내려 하고 있어.’그가 말없이 서 있는 걸 보고 최수빈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나에게 줄 수 있는 대답도, 내가 원하는 소식도 없다면 굳이 찾아와서 말 걸 이유 없어요. 우리 사이에 더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요.”목이 잠긴 탓에 주민혁은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입술이 살짝 움직였지만 결국 하려던 말은 삼킨 채, 무표정한 얼굴로 아주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최수빈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그리고 복도 끝 모퉁이에 다다르자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어두운색의 옷차림에 어둠 속에 거의 녹아든 듯한 모습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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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최수빈은 문득 떠올랐다.주민혁이 반복해서 끊임없이 그녀에게 주선웅과 거리를 두라고 말했던 그 순간들이 말이다.그리고 지금, 바로 그 주선웅이 눈앞에서 직접 해명하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 중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인지 최수빈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때문에 주선웅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벌써 해가 졌네. 같이 돌아갈까?”말이 없는 최수빈을 바라보며 주선웅이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옛날얘기는... 괜히 꺼내서 뭐하겠어. 별 의미도 없는데.”눈빛이 짙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최수빈 역시 억지로 끝까지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다.주선웅이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니 그녀도 더 묻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형, 잠깐만.”두 사람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뒤에서 주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차분하고 담담한 눈빛을 한 채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최수빈은 쓱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더니 고개를 돌려 주선웅을 향해 말했다.“전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주선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비 오는 날에는 길 미끄러워. 조심해서 가.”그렇게 최수빈이 자리를 뜨자 그곳에는 두 형제만 남았다.주선웅은 고요한 눈빛으로 주민혁을 바라보았다.“나한테 먼저 말을 걸 일이 거의 없는데... 오늘은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 길목에서까지 날 부른 거야?”아마 이제 더는 참지 못하는 듯했다.그는 계속 최수빈의 주변을 맴돌았고 조용히 숨어서 상황을 살폈다.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형 스스로도 잘 알고 있잖아.”그러자 주선웅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아버지랑 똑같네. 아버지는 내게 너 자신을 알라 했고 너는 내가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하잖아.”“그런데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수빈이랑 가까이 지내는 게 그렇게도 위협이 돼? 입으로는 신경 안 쓴다더니 지금 하는 짓은 뭐야?”주민혁은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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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주선웅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주민혁을 바라봤다.방금 주민혁이 던진 말 속에는 마치 주선웅이 무슨 일을 하든 그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듯한 뜻이 깔려 있었다.하여 주선웅은 입꼬리를 씩 비틀며 말했다.“넌 사람을 항상 너무 나쁘게만 봐. 그러니까 너는 평생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너의 인생은 앞으로도 절대 편안하지 않을 거야.”그러더니 손을 들어 주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가끔은 말이지, 네가 좀 더 순수하고 단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주선웅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담담히 속내를 털어놓았다.“요즘 문득 그런 생각도 해. 우리도 평범한 집안의 형제들처럼 형은 아껴주고 동생은 존중해주고 그렇게 살 순 없었을까 하고. 우리가 이복형제인 건 맞지만 난 한 번도 널 친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거든. 그런데 넌 왜 항상 나를 밀어내는 거야?넌 언제나 온몸에 가시가 잔뜩 돋아 있어.”그 눈빛에 진심과 의문스러워하는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산속에서는 습한 공기와 차가운 바람이 한가득이었다.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산, 습한 공기와 차가운 바람 속에서 주선웅의 말은 묘하게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다.그리고 주선웅의 그 한마디는 괜히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마치 착한 역할도, 나쁜 역할도 전부 자기 몫이라도 되는 듯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옳은 말처럼 내뱉고 있었다.하지만 주민혁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들어보니 괜찮네. 나도 그런 인생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어. 형이 돌아와서 주상 그룹을 맡아주면 난 집에서 빈둥대는 철없는 도련님으로 살아도 좋겠지.”“귀국해서 플라잉 테크에 들어간 건 우리 주씨 가문에 뭔가 불만이 있어서야? 아버지는 늘 형이 돌아와서 회사를 맡길 바랐어. 그런데 형은 끝끝내 그 뜻을 거절했지.”주민혁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나도 형이 돌아오길 바랐어. 하지만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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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지금 어디서 지내세요?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병원에는 안 들르셔도 돼요? 상처도 다시 한번 확인하거나 소독은 받아야 할 텐데... 그냥 퇴원하신 거예요?”그를 바라보자 최수빈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걱정이 밀려들었다.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의사도 입원 치료를 권했건만 주선웅은 하필 이런 민감한 시점에 굳이 퇴원해버린 것이다.주선웅은 고개를 저었다.“별일 아냐, 자주 있는 일이니까.”이 말에 최수빈은 문득 말문이 막혔고 운전대를 쥔 손에도 어느새 불필요할 만큼 세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칼에 찔린 일을 자주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칼에 찔리는 게 일상이라니... 해외에서 어떤 생활을 해왔기에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설마 피와 칼날이 오가는 세계에서 살았던 건가?’최수빈은 오늘 주민혁이 방 안에서 했던 말들이 다시 떠올렸다.‘지금의 선웅 오빠가 예전의 그 선웅 오빠가 맞기는 한 걸까? 오빠가 해외에서 돌아오며 데려온 사람들, 오빠의 곁에 선 인물들, 그 모든 배경과 힘은 도대체 어떤 것들일까? 그 관계망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걸까...’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렇게 최수빈은 주선웅을 그가 당분간 머물고 있는 집까지 데려다준 후 조용히 차를 몰고 떠났다.떠나기 직전, 주선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데려다줘서 고마워. 원래 같으면 이 시간에는 내가 너를 집에 바래다줘야 정상인데... 돌아가는 길 조심해.”최수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누가 누구를 데려다주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냥 시간이 되고 길이 맞으면 되는 거죠.”최수빈이 떠나자 주선웅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그러자 거실에서 주선웅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오늘도 그 여자애가 데려다줬구나. 확인은 해봤니? 주민혁이 그 애를 신경 쓰고 있는지? 주민혁의 약점을 찾겠다는 건에는 동의해. 하지만 그 핑계로 계속 그 여자와 어울리려는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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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최수빈은 박하린을 바라보며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처럼 도도하거나 고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지금 이 순간, 박하린 역시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그리고 박하린의 눈빛 속에는 상대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분명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늘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다른 사람은 다 깔보는 표정을 하네? 네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최수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들을 테니까 어디 한번 말해봐요.”박하린은 냉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갔다.“예전에 나는 너를 그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의 뒷받침을 받으며 공부하는 모습... 학교에서도 너에 대한 소문이 끊이질 않았지. 천재라나 뭐라나... 설마 그 천재가 네 얘기일 줄은 정말 몰랐어.”최수빈의 정체가 드러났던 그 순간, 박하린의 세계는 송두리째 무너졌다.전업주부와 과학계의 천재라는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도저히 연결되지 않았으니 말이다.겉으로 보이는 최수빈은 지식이라곤 하나 없어 보이는 여자였고 학력조차 변변치 않은 인물이었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과학계를 이끄는 천재일 수 있단 말인가?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사회에서 한참 멀어진 줄로만 알았고 그런 최수빈을 박하린은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결국 끝까지 따라잡지 못했고 그게 가장 분한 점이었다.그리고 지금, 그 최수빈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박하린의 마음을 더 찢어놓았다.지금의 최수빈은 과학계의 신처럼 군림하고 있고 자신은 쇠창살 안에 갇힌 죄인 신세에 앞날도, 미래도 없는 나락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때문에 최수빈이 지금 무슨 의도로 질문을 던지러 온 것이든 박하린은 그저 묘한 만족감만 느낄 뿐이었다.‘아, 최수빈도 모르는 게 있네?’박하린은 쓴웃음을 지었다.“나는 네가 못마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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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박하린은 한때 자신이 곧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스스로 엄청난 연구 성과를 만들어냈고 이번에는 최수빈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결과물이 알고 보니 수년 전 최수빈이 이미 개발한 것이었다.박하린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지금 너 봐봐. 원하는 건 다 가졌잖아. 명예도 있고 돈도 있고 사람들은 너를 신처럼 떠받들고 과학계에서는 너 하나 보고 달려들고 있어. 그런데 그런 너조차 결국은 나한테 뭔가를 물으러 온 거잖아? 너도 고민이 있겠지. 너도 알지 못하는 게 있다는 뜻이겠고.”박하린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내가 한번 맞춰볼까? 너한테 닥쳤던 그 일들 때문이지? 네가 겪은 위협, 혹시 그게 내 짓은 아닐까... 그걸 묻고 싶은 거잖아. 그게 설령 내 소행이 아니더라도 너는 내가 그 일의 배후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박하린은 고개를 저었다.“확실히 말할게. 그 일의 배후가 누군지는 나도 몰라. 그리고 나 그렇게 멍청하게 위험한 짓 안 해.”최수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지금 이 여자의 말 중 어느 정도가 진심일지 그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걸 눈치챈 듯 박하린이 비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너한테는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일 테지. 그래, 맞아. 민혁 오빠는 나한테 아무 약속도 한 적 없어. 그 사람은 그냥 아버지의 압박에 떠밀려 날 책임지려 했던 것뿐이야. 그게 그 사람의 의무였고 나는 그걸 이용했을 뿐이지. 덕분에 너와 그 사람 사이에는 오해가 수없이 쌓였고. 하지만 생각해봐. 민혁 오빠도 날 이용한 거야. 그건 다르지 않아.”그러다 갑자기 박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가끔은 너 같은 여자들이 부러워. 사랑도 집착도 다 내려놓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남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거든. 처음에는 네가 그냥 참고 참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아예 관심이 없는 거였더라. 그 사람한테 마음이 없으니 내가 뭘 해도 넌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라.”최수빈은 담담히 물었다.“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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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박하린은 스스로도 이 모든 선택이 잘못이었다는 걸 몰랐을까?사실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너무 주민혁에게 기대고 있었고 그의 곁에 서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컸다.모든 것이 뛰어난 그 남자는 존재 자체가 눈부셨다.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이목을 끌고 사람은 그런 것에 이끌리기 마련이다.박하린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 눈빛에는 실망과 절망이 가득했다.“예전에는 그냥 친구로서 나를 아껴주는 줄 알았어. 그 사람이 나를 띄워줄 때, 난 그게 사랑인 줄 알았거든. 하지만 그 모든 건 신기루였고 나 혼자 만든 착각이었지. 돌고 돌아 결국 깨달았어. 내가 제일 우스운 존재였단 걸.”가끔은 진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가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그녀가 잘못한 건 분명했다.주민혁을 너무 신경 썼고 주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자리에 집착했으며 그의 곁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으니 말이다.하지만 주민혁은 박하린에게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그녀에게 베푼 모든 건, 단지 주 회장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때문에 주민혁이 박하린을 적당히 받아주었으나 박하린은 이를 진심으로 믿었다.섣불리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자신이 가진 자원과 인맥을 현명하게만 썼다면 지금쯤 박하린은 과학계에서 꽤 괜찮은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인내심이 강한 주민혁은 박하린이 주변에서 서성이는 걸 참아줬다.단 선만 넘지 않는다면 말이다.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무심했다.요구하면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 뒤에 어떤 대가가 따를지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박하린이 저지른 진짜 실수는 최수빈을 수차례 공격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주민혁에게 있어 금기였다.웃으며 말하고 있었으나 박하린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리고 최수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 한켠이 복잡하게 흔들려 눈살을 찌푸렸다.박하린은 분명 재능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비록 허세와 빈말이 많긴 했지만 그 속에는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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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박하린이 끊임없이 일으킨 일들은 매번 거의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그러다 결국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깨달았다.주민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나 있었던 거였다.그렇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민혁은 박하린을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그런 말들은 하린 씨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으면 돼요. 굳이 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어요.”“너 정말 지금까지도 그 사람한테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거야?”박하린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믿을 수가 없네. 네 마음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감정은 흔적으로 남아.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야.”최수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사랑이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가장 쓸모없고, 가장 무가치한 단어였다.지금의 그녀는 남녀 간의 감정 따위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딸을 잘 키우는 것과 그 아이가 무사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었다.그리고 지금은 모든 일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전생의 최수빈은 그 모든 위협과 함정들 속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갔다.전업주부로 살면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고 꾸준히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는데 언제부턴가 그녀의 주변은 온통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박하린은 최수빈을 보며 계속 웃었다.“넌 그 사람하고 이번 생에 절대 이어질 수 없어.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애초에 너랑 함께할 생각이 없었거든. 많이 받긴 했지만 그만큼 내가 너 대신 많은 위험을 막아줬어. 네가 겪은 모든 일의 배후를 내가 알 리가 없지. 그게 정말 내가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너는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위험을 다 내가 불러온 줄 아는데 어쩌면... 나나 시후가 너랑 주예린의 방패였을지도 몰라.”박하린은 눈을 감았다.“시후가 공부도 잘하고 인성도 좋았던 건 네가 잘 키워서였어. 그런데 내가 돌아온 후, 그 애를 망쳤지.”그녀는 깊이 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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