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121 - Chapter 130

168 Chapters

제121화

“너를 암살하려 한 자는 이미 죽었다. 본왕이 사람을 시켜 계속 추적하게 할 것이니 안심하거라.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역시 신수빈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태후의 짓임을 알면서도 그는 끝내 못 본 척 한 것이다.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 속의 실망은 감출 수 없었다.그때, 태의가 들어왔다. 이도현이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다고는 하나 여기는 신수빈의 방이었다. 그의 존재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명성에 해가 가기에 결국 측실 쪽으로 빠져나갔다.태의는 맥을 짚은 후, 처방을 내리며 당부했다.“마님의 태는 이미 안정되었고 큰 문제는 없사옵니다. 다만 다소 놀라신 것 같으니, 이틀 약을 복용하면 무사하실 것이옵니다.”신수빈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 전의 창백한 얼굴은 모두 이도현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없으니 더는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은보에게 태의를 보내드리라 하고 금자를 향해 말했다.“지금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는지 보거라. 너희 자매도 하루 종일 굶지 않았느냐?”“왕야께서 이미 당부하셨으니 곧 음식을 가져올 것이옵니다.”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현이 다시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이미 돌아간 듯했다. 그는 은보에게서 신수빈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서난각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는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멀리서 태후가 머무는 서난각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그는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시위를 불렀다.“여인을 하나 찾거라. 출신은 상관없으니 본왕의 뜰로 들여보내면 된다.”시위는 잠시 멈칫했다. 왕야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첫 번째는 다섯 달 전, 왕야가 궁에서 지독한 약을 맞고 돌아왔을 때였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깨끗한 여인 하나를 찾으라 했는데 이번에도 또 필요해진 것일까?“왕야, 어떤 여인을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어떤 기준이시옵니까?”이도현은 한동안 침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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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어진 태후라면, 병든 명부를 억지로 불러 문안을 올리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가장 화가 난 사람은 주서화였다. 본래 신수빈이 죽은 후 자신이 곧 정실로 봉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신수빈의 명은 끈질겼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겨우 태기만 흔들리고 놀란 정도라니!신수빈이 임신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아는 바였고 윤서원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그는 화가 나고 분해서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신수빈이 감히 다른 남자의 애를 가졌다니!주서화가 돌아와 울며 물었을 때 윤서원의 신경은 이미 한껏 곤두서 있었다. 게다가 그날 이도현이 자신을 도발하던 눈빛이 자꾸 떠올라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이도현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그래서 사건의 진상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그 아이는 주서화와 혼인하기 전에 가진 것이고 그녀를 집으로 들인 후에는 한 번도 신수빈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변명했다.결국 주서화는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신수빈을 더욱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장차 적자를 낳게 된다면 윤 가에서 그녀의 지위는 더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태후에게 또 한 번의 매복 살해를 꾸미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이때 춘진각 서행랑에 머무는 윤서령은 핑계를 대며 반 달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신수빈과 매일같이 태후에게만 들락거리는 주서화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닌가 싶어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저녁에 주서화가 돌아오는 틈을 타 윤서령은 직접 만든 호랑이 머리 모자를 들고 본전으로 갔다.“마님 돌아오셨습니까? 제가 요 며칠 심심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은 조카를 위해 호랑이 머리 모자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장차 틀림없이 호랑이처럼 위풍당당한 장군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요.”윤서령의 말은 주서화를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호랑이 머리 모자를 받아들었다. 솜씨는 그저 그렇고 급히 만든 티가 났지만 뜻은 괜찮아 보여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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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금자의 말을 듣자마자 신수빈은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너의 말은 그들이 이도현을 계산하려 든다는 것이냐?”참으로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이도현이 누가 약을 넣었는지 모른다고 해도 나중에 깨어났을 때 곁에 있는 여인이 윤서령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살아있는 채로 껍질을 벗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한 번 자는 것만으로 잔혹하고 권세가 천하에 퍼진 섭정왕을 몰아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작 어떻게 죽게 될지도 모를 인생인데.윤서령이 이토록 목숨을 내던진 걸 보면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서 씨의 계략일 터.신수빈은 오히려 그 장면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스스로 손에 피 묻힐 필요도 없어질 테니까.금자는 말을 마친 뒤 신수빈에게 물었다.“마님, 제가 왕야께 다시 알려드릴까요? 정말 그 사람들의 계략에 걸려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신수빈은 곧바로 그녀를 제지했다.“그럴 필요 없다. 몸이 깨끗한 여인이 스스로 들어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왕야께서도 손해 볼 것은 없지. 어쩌면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마님께서 이렇게도 대범하다고?’“마님, 질투 나지 않으시옵니까?”“내가 왜 질투를 해야 하는 거지?”금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남녀 사이 일은 잘 모르지만 왕야가 마님에게 무척 잘해준 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만약 그 여자가 왕야 곁에 남아서 첩이라도 되면 어떡하려고 그러시옵니까?”신수빈은 금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금자는 자신의 왕야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했다.“첩이 되면 또 어떻다는 것이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금자는 그제야 깨달은 듯 낮게 탄식했다.‘왕야 쪽은 뜨겁게 마음을 쏟지만 정작 마님께서는 왕야한테 아무런 흥미도 없구나.’그녀는 전에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자주 싸우는 걸 목격했었다. 아저씨가 마을 어귀 과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아주머니는 끝도 없이 들들 볶았다. 언니 말로는 아주머니가 아저씨를 신경 쓰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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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말을 마친 금자는 잠시 멈춘 듯한 신수빈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금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입가에는 가볍게 올라간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마님, 화나지 않으시옵니까?”“내가 왜 화를 내야 하지? 그가 누구를 들여오든 내 눈에는 모두 윤서령과 같을 뿐인데.”금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렇지만 저는 자꾸 다르게 느껴지옵니다. 윤서령 아가씨께서 왕야를 속이시려는 거잖습니까? 그러니 왕야께서는 억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시겠지요. 한데 이번의 진 아가씨는 왕야께서 좋아서 들이신 거라고 했사옵니다. 자꾸 마님 것을 빼앗아갔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옵니다.”신수빈은 웃으며 금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어리석은 아이야. 나는 윤 씨 집안의 마님이다. 왕야는 내 것이 아니고, 나 또한 왕야의 것이 아니니 이 점을 잘 기억하거라.”금자는 여전히 신수빈이 억울하다고 느꼈다.“세자께서는 마님께 잘 대해주지도 않는데 정말 평생 이렇게 후부에 머물고 싶으신 것이옵니까?”신수빈은 이미 불룩하게 오른 배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제는 넉넉한 옷을 입어야 조금 감춰지는 정도였다.“내가 이미 후부에 시집왔으니 당연히 평생 지내야겠지.”금자는 알아듣지 못해 애매한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신수빈과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속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신수빈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굳이 자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금자는 기분을 추스르고 곧장 즐겁게 뛰어나가 놀았다.신수빈은 금자의 뒷모습을 미소로 배웅한 뒤 계속 아이의 옷을 만들었다. 비록 자수를 놓는 시녀들이 있었지만 연우의 옷만큼은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다.지난 생에서 그녀는 연우를 가혹하게 대했었다. 이른 나이에 어려운 글을 잔뜩 외우게 했고 주서화와 대립하던 시기에는 아이를 정성껏 돌보지 않았다. 연우의 일상은 항상 유모와 하녀, 그리고 자수 시녀들이 도맡아 처리했었다.이번 생에 다시 기회가 주어진 만큼 더욱 소중히 여기리라.연우는 잠시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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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그가 이미 느긋하게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기에 신수빈도 조급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더니 시선을 무심코 잔으로 돌렸다.“이건 무슨 차인 것이냐?”“서호 용정입니다.”이도현은 알아차렸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너의 본가가 항주라는 걸 깜박했군.”용정은 신수빈이 어려서부터 마셔온 차였다. 그래서 친정 쪽에서도 이를 알고 해마다 가장 좋은 용정을 그녀에게 보내오곤 했었다. “왕야께서는 높은 자리에 계시니 좋은 물건이야 늘 보셨겠지요. 제가 가진 이 정도 차가 뭐 그리 귀하겠습니까.”“본왕은 이 서호 용정이란 걸 정말로 마셔본 적이 없다. 오늘이 처음이다.”전조는 멸망하기 전 대주와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두 지역은 따로 통치했던 터라 서로 간의 무역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 서호 용정은 항주에서 나는 차였고 전조의 황실과 백관들의 몫도 충분치 않았으니 마셔본 적 없다는 이도현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더 있느냐?”이도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신수빈을 바라보았다.“조금 담아주거라. 본왕이 가져가서 마시고 싶다.”“공교롭게도 이게 마지막 한 통뿐입니다.”신수빈은 그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이도현은 그녀를 흘끔 보더니 차가운 위세를 꺼내 든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무려 감찰사 자리를 차 한 통과 바꾸지 못하겠다는 것이냐?”신수빈은 순간 멈칫하며 놀란 눈으로 이도현을 바라보았다.“왕야께서 말씀하신 건, 저희 셋재 오라버니의 관직입니까?”촛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그녀의 두 눈은 마치 흑요석처럼 유광을 띠며 빛났다.“그렇지. 너는 그럼 본왕이 누구를 말하는 줄 알았느냐?”이도현의 미간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냉혹한 기세와는 달리 촛불 아래에서는 은근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신수빈은 요 며칠 그 일에 대해 물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뜻이 마침내 오늘 이루어지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차오른 것이었다.“지금 당장 왕야께 가져오겠습니다!”그녀의 눈에는 웃음이 번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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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그녀는 슬쩍 눈을 내리깔며 금세 번져 오르는 혐오를 조용히 숨겼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순순히 그의 품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왕야, 며칠 사이에 화기가 올라 입안에 구창이 생겼습니다.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왕야께서도 저를 조금 아껴주시고 오늘은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그녀의 목소리는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렀고, 살며시 감겨드는 듯 나긋나긋했다. 가느다란 음색 속엔 살짝 애교와 유혹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남정네 하나쯤 굴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그녀를 데리고 피서 행궁까지 오게 한 것도 가까이 두기 위해서였고, 오늘 밤 그녀를 찾아온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지금 그녀가 그의 품속에 있으니 이도현의 마음속에는 이미 욕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런 그가 순순히 이 흥을 억누르고 돌아갈 리가 없었다.이도현의 손은 신수빈의 허리 뒤쪽에서 점점 위로 올라가며 그녀의 옷자락을 구겨 놓았다. 탁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본왕이 듣기로는 회임하고 석 달이 지나면 방사를 해도 무방하다더군.”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신수빈은 그의 품 안에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이도현은 그녀의 반응을 느끼고 기분이 약간 상했다.그녀는 언제나 배 속의 아이와 관련된 말만 나오면 이런 표정을 지었으니까.신수빈 역시 이도현의 불쾌감을 느꼈다. 혹여 또다시 자신의 아이에게 위협을 가할까 두려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왕야… 제가 마다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호수에 너무 오래 있어 태기가 약해져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왕야께서는 기개가 높으시고 용맹이 뛰어나시니… 제 몸으로는 도저히 왕야를 모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이도현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그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잔물결처럼 번지는 물빛 속에서 간청이 어리는 것을 보자 문득 마음속에 비교심이 피어올랐다.“본왕과 그 폐물 중, 누가 더 용맹했느냐?”그 말은 신수빈의 존엄을 진창에 짓이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끝내 그녀는 눈을 떨구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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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이도현은 바깥쪽에 누워 눈썹 사이에 짙게 내려앉은 피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예 곯아떨어져 가늘게 숨만 쉬고 있었다. 이도현은 그녀의 손목을 살포시 내려놓고는 조용히 옷을 걸쳐 입은 뒤 방을 빠져나왔다.오늘 밤 시중을 드는 건 금자였다. 이도현이 문을 나서는 순간, 금자는 마지못해 인사를 올렸다.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금자답게 지금의 인사에서 예전의 공손함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금자를 한 번 바라보았다.금자는 그 시선에 눌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이도현은 그녀와 시간을 끌 여유가 없어 차갑게 한 마디만 던졌다.“말하거라.”“왕야께서 새로 들이신 여인의 존재를 마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옵니다.”이도현은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곧 금자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알려드린 건 접니다.”“무슨 말을 한 것이냐?”“다 말했사옵니다. 왕야께서 이틀이나 조정에 나가지 않으신 것부터 시작하여 태의가 약을 보내온 것까지 전부 말이옵니다! 그리고 밖에서 떠도는 말들도 모두 얘기해 드렸사옵니다.”금자는 순진하게 두 눈을 깜박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도현은 이 아이를 다시 신수빈에게서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듣고 무슨 말을 하긴 했느냐?”“했사옵니다.”이도현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금자는 물음에만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뭐라고 하더냐?”그러자 금자는 기침을 한 번 하여 태도를 가다듬고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마님께서 이르시길, 제가 마님의 곁에 있는 한 그분을 주인으로 섬겨 오직 마님에게만 충성해야 한다고 하셨사옵니다. 마님께서 하신 말씀을 밖으로 누출한다면 그건 불충이라 하셨지요. 왕야께서 요 며칠 전, 저와 은보에게 마님을 주인으로 모시라 허락하신 이상, 저는 그런 불충한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사옵니다.”금자는 의기당당하게 말을 끝내고 이도현의 어두워지는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그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가는 모습에 금자는 씩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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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신수빈은 그가 여전히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불안해졌다. 잠시 뒤면 해가 밝아질 텐데 혹여나 그가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누군가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왕야, 이제 진짜 돌아가셔야 합니다.”이도현은 그녀의 눈썹과 눈빛 사이에 어른거리는 걱정의 기색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금 사람들의 눈에 띌까 두려운 것이었다.그러나 이도현은 조금도 급해하지 않고 그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본왕이 옷 갈아입는 것을 시중 들거라.”신수빈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걸고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옷걸이에서 그의 옷을 꺼내어 하나하나 가지런히 입혀주었다. 그녀가 옷자락을 매만지고 허리띠를 정돈해 주는 틈을 타 이도현은 그녀의 셋째 오라버니인 신도연의 손으로 직접 쓴 자필 원고본인 수고에 대해 이야기했다.“네 셋째 오라버니의 수고와 도면을 모두 보았다. 확실히 흔치 않은 재주를 가졌더군. 그 도면은 강을 다스리는 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산천의 형세를 분석한다면 군사에도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이번에 그에게 하도 감찰사 직을 맡긴 것은 먼저 능력을 다져두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본왕이 자연히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그 말을 듣자, 신수빈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머물렀다.“그렇다면 제가 셋째 오라버니를 대신하여 왕야의 은총에 감사드리겠습니다.”이도현은 양지 같은 그녀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올렸다.“너란 여자는 본왕에게서 무슨 좋은 것을 얻어낼 때만 곱게 굴지. 정말이지 작은 여우 같구나.”신수빈은 눈빛을 흘리며 그의 가슴 앞 옷깃을 부드럽게 쓸었다.“왕야께서는 어리석은 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제가 능력 없는 사람을 추천했다면 왕야께서 중용하셨겠습니까? 제가 이익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왕야께서 제 덕을 봤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어차피 인재 하나 얻게 된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이도현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손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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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신수빈은 이미 태후를 피해 반 달이나 숨어 지냈으나 옹 왕비의 생신 연회만큼은 피할 수 없어 마지못해 참석했다.한편, 윤서원은 상처가 거의 다 나았는지 주서화와 함께 나란히 거닐고 있었다. 그의 뒤에 떨어져 한가롭게 걷고 있는 그녀의 기분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명양 장공주는 신수빈이 홀로 있는 모습을 보고 다가와 함께 발을 맞추었다.“장공주를 뵙습니다.”“윤씨 부인은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신수빈은 명양 장공주가 걸친 옷이 항주의 특산인 장화사와 장화금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 비단은 얼마 전 그녀가 호심도에서 태후의 악의를 막아준 데 대한 감사로 명양 장공주에게 보낸 것이었다. 오늘 그녀가 일부러 그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고 왔으니 신수빈은 그 속에 담긴 호의를 곧장 알아보았다.옹 왕비의 생신 잔치 하루 전날은 흐린 날이었다. 천문대의 예측에 따르면 옹왕비의 생신날도 여전히 흐릴 예정이었다. 이에 옹왕비는 태후와 상의해 서원 쪽에서 마구 경기를 열기로 결정했다.따가운 볕이 사라지니 공기는 오히려 시원하고 상쾌했다. 이 씨 황실의 선조가 관외에 거주했던 터라 대주 왕조의 세가 자제들은 모두 기마와 활쏘기에 능하다는 것을 신수빈은 알고 있었다.서원에 있는 많은 세가 규수들은 기장을 차려입고 있었기에, 당당하고 밝게 빛나는 모습이 그녀의 부러움을 자아냈다.신수빈은 강남 출신이었다. 강남은 지난 수십 년간 전조가 다스렸고 여인은 삼종사덕 아래 대문 밖을 나서지도 못했으며 말은커녕 외출할 때조차 부축을 받아야 했다. 문약함마저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있기에 대주 왕조의 풍조와는 전혀 달랐다.대주 역시 전조의 여성 규범을 배우긴 했으나 전조에 비해 훨씬 나아져 여인은 화이하거나 과부가 되어도 재가할 권리가 있었고 미혼 남녀가 혼인 전에 봄맞이를 나가거나 마구를 치는 일도 흔했다.경기를 보는 장공주의 마음이 들떠 보이자 신수빈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공주께서도 한 번 내려가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관두어라. 나중에도 기회는 많다. 소예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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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그러는 동안 섭정왕은 그녀가 내민 손끝을 따라 잔을 기울여 술을 마셨다.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태후의 얼굴빛은 서리가 내릴 듯 음침하게 굳어버리더니 곁에 앉아 있는 신 씨를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납작한 비단 부채를 가벼이 흔들며 경기장 안의 시합에만 전념하고 있었지, 이쪽의 일에는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는 듯했고 이도현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신 씨를 쳐다보지 않았다.태후의 시선은 다시 그 여인의 얼굴에 꽂혔는데, 시선이 너무 강해서 마치 그 얼굴에 천 개의 상처라도 내어 줄 기세였다. 그때, 소영이 가볍게 기침을 하며 태후에게 눈치를 주었다. 관료가의 부인들과 귀부인들이 모두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태후는 그제야 깜짝 놀라 눈길을 거두었다.자신보다 몇 살 어린 섭정왕을 바라보는 명양 장공주는 오히려 잔뜩 흥이 나 있었다. 그와 태후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일과 요 며칠 새 익히 들었던 소문까지 더해지자 더더욱 관심이 갔다. 그녀는 잠시 이도현 곁의 아가씨를 살펴보고는 다시 태후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곁에 있는 신수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다들 말하길 왕숙의 새 총애가 태후와 닮았다 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너와 더 닮은 것 같은데?”“공주님께서는 농담하지 마옵소서. 저는 섭정왕의 애첩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데, 어찌 닮았겠습니까?”“정말 닮았다니까! 몸매도, 생김새도 확실히 너와 다 비슷하더구나. 다만 너의 용모에 따라가지 못하기는 하지.”명양 장공주는 그저 한마디 하고는 다시 시선을 경기장으로 돌린 후 더 이상 이런 풍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신수빈도 장공주가 더 말하지 않자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아까 그녀가 잠시 멈칫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여인이 주는 느낌은 어쩐지 낯익었으니까. 그러나 신수빈은 곧 생각을 털어버리고 장공주가 말해주는 경기의 흐름에 귀를 기울였다.홍팀의 점수가 점점 뒤처졌고 그중 한 명이 말에서 떨어지며 인원이 모자라게 되었다. 패색이 짙은 팀에 들어가려는 이는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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