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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211 - チャプター 220

307 チャプター

제211화

그는 기병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밤이슬의 습기가 그대로 배어든 듯, 눈썹과 눈매에는 달빛의 맑은 기운이 있어 차갑지만, 온화한 기색 또한 어려있었다.그는 지금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얇은 옷차림에 젖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물기가 은은히 얼굴에 서려 복숭앗빛 뺨과 고운 안색이 반쯤 드러난 모습은 요염하면서도 아리따웠다.천하에 더할 나위 없는 절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만이 비출 뿐이었다.그는 수년간 전장을 누볐다. 대군이 어느 땅에 이르든 현지의 주둔 장수나 지방 관원이 으레 미인을 바쳐 왔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정사에 뜻이 없었기에, 그런 일들이 모두 공허하고 천박하게 느껴졌다. 몇 차례 거절하자 그가 미색에 뜻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미인을 바치는 이도 드물어졌다.그때의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여인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사람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한 겹, 한 겹, 마음을 해부하듯 파고드는 힘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눈앞의 신 씨가 바로 그런 미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범속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이렇게 별과 달을 밟으며 서둘러 달려오게 될 줄은 이도현 스스로도 몰랐다. 그녀가 놀라 멈칫하는 표정 하나까지 그는 모두 눈에 담았다.이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신수빈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몸을 굽혀 인사를 올리려는 순간, 그는 긴 팔로 그녀를 들어 올리듯 감싸안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신수빈의 코끝에 땀과 이슬 냄새, 그리고 풀과 흙의 냄새가 뒤섞여 스며들었다. 솔직히 말해 좋은 향은 아니었기에, 최대한 참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왕야께서 어찌 오셨습니까?”“황릉 제사가 끝나고 백관들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마차가 너무 느려 본왕이 먼저 돌아온 것이다.”그는 말하지 않았다. 해마다 팔월까지 행궁에 머물던 자신이 올해는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 백관들을 일찍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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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왕야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시녀들을 불러서 시중을 들게 할까요?”“필요 없다.”신수빈은 큰 수건과 향비누를 욕조 곁에 두고 밖으로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시녀들은 이도현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신수빈은 혼자 천으로 천천히 머리칼을 닦았다. 그녀의 머릿결은 풍성하고 길었다. 어릴 적부터 곱게 길러 온 검은 머리라 씻고 나면 쉽게 마르지 않았다.그녀는 조심스레 닦으며 생각했다. 머지않아 백관들이 경성으로 돌아올 터이니 이제는 양회 염세의 일을 본격적으로 파고들 기회를 찾아야 했다.셋째 오라버니의 일도 이제는 물고기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나머지 이도현이 이미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 것이냐?”신수빈은 어깨에 무게가 실리며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미 그녀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신수빈은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에 쥐며 말했다.“머리카락이 너무 길어 늘 번거롭습니다. 매번 반나절은 걸려야 마르니 며칠 뒤엔 조금 자를까 합니다. 쪽을 틀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니까요.”이도현은 선반에서 새 수건을 하나 집어 들고는 그녀의 머리를 대신 닦아 주었다.“이대로가 좋다. 본왕은 이게 마음에 든다.”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초야의 밤, 그녀의 머리카락이 풀어져 베개 위를 가득 덮었던 모습을. 누우니깐 더욱 도드라지던 그 고운 자태를.이도현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인내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는 수건을 바꿔 가며 그녀의 머리를 반쯤 마를 때까지 닦아 주는 등, 어느새 시중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신수빈은 동경 속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의 짜증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오늘 밤 그가 어떤 요구를 할지 마음속으로 가늠해 보았다.“왕야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일찍 경성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이도현은 말끝을 흐렸다. 사실 조정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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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신수빈은 지금 순간의 이도현이 몹시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느꼈다. 멀쩡히 잘 있던 와중에 갑자기 진심이니 뭐니 물으니 말이다. 그녀 같은 사람에게 어디 진심이 남아 있겠는가? 그리고 그 같은 사람에게 진심을 바칠 자격이 또 어디 있겠는가?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어쨌든 한 번쯤은 얼버무려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진심이란 게 무엇인지, 사람에게 과연 몇 푼이나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저는 왕야 외에 그 누구와도 이런 식으로 가까이 엮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이 대답은 마치 답을 준 듯하면서도 교묘히 비켜 간 말이었다.하지만 이도현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여인이 사내를 마음에 둔다는 건, 결국 가장 가까운 일을 함께하고자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신수빈은 그의 눈가에 다시 웃음기가 번지는 것을 보고서야 방금의 대답이 무사히 통과했음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하를 불러 소주방에 가서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오라고 시켰다.부엌의 화로 위에는 이미 진한 육수가 푹 고아지고 있었고 요리하는 여인은 곧바로 국수를 말아 국물에 담았다. 그녀는 청하의 지시에 따라 졸인 고기를 썰어 접시에 담아 몇 가지 반찬과 함께 주거로 보냈다.신수빈은 머리카락을 반쯤 뒤로 틀어 올리고는 나머지는 어깨로 늘어뜨린 채, 그릇과 수저를 반듯하게 놓으며 상을 차렸다. 이도현은 자리에 앉아 그녀가 큰 그릇의 국수를 작은 그릇으로 덜어 채소와 고기를 위에 곁들여주는 다정한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는 문득 집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친이 살아 계실 적, 연병장에서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늘 음식을 차려 두고 끝까지 지켜보던 그때가 떠올랐다.“같이 좀 먹지.”신수빈은 고개를 저었다.“저는 배가 고프지 않으니, 왕야께서 드시지요.”이도현은 서둘러야 했고 정오에도 식사를 거른 터라 사양하지 않았다.신수빈은 그가 큼직한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졸인 고기 역시 반 근은 족히 먹어 치운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그녀의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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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촛불을 끄고 침상 머리맡의 촛대 하나만 남겼다. 실내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그 어둠은 사람 마음속의 욕망을 은근히 부추겼다.신수빈이 휘장을 걸던 금고리를 풀어 내자 장막이 조용히 내려앉았다.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남자는 눈길로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는 알수없는 기색이 묻어나 있었다.신수빈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며 그의 발치 쪽으로 올라 침상에 몸을 눕혔다. 그 순간, 바깥쪽에 있던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왜 그렇게 멀리서 자려 하는 것이냐?”낮고 거친 목소리가 위에서 울렸다. 신수빈이 고개를 들자 그의 짙고 검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속 욕망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강압적이고 집요한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신수빈은 그가 이 창란원에 하루 더 머무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정을 챙겨야 했고 그가 절제 없이 굴어 몸에 흔적이라도 남는다면 하인들의 눈길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한 기색이 떠올랐다.“왕야, 여기서는 얌전히 있으면 안 될까요?”이도현은 그녀의 뜻을 바로 헤아리지 못한 듯 잠시 멈칫했다.신수빈은 차마 말을 잇기 어려운 듯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는, 낮은 목소리로 간청했다.“부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세요… 이 침상에서는 하지 말아 주시면 안 될까요?”그의 귀에 그녀의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스며들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이곳은 그녀의 뜰이고 윤서원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혹시 윤서원이 이 방에서, 이 침상 위에서 그녀와…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욕망의 불길은 한결 가라앉은 듯했다. 초야가 지난 뒤, 그때 관가에 그녀의 신분을 명확히 묻지 않았던 것이 원통했다. 이미 자신의 사람이라 여겨 관가에서 알아서 정리해 두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이 돌아온 뒤 다시 안배하면 될 줄 알았다.그런데 그녀가 윤서원의 부인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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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는 바람에 신수빈은 한 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는 마치 정말로 화가 난 사람처럼 볼을 잔뜩 부풀린 채 그를 향해 말했다. “왕야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죄를 묻지 않겠다고요. 대장부의 말은 한 번 내뱉으면 네 필의 말로도 되돌릴 수 없는 법입니다.”신 씨는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단정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고 그의 앞에서는 부드럽고 요염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렇게 아이 같은 표정을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어린 딸 같은 귀여움이 여과 없이 드러난 순간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이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신 가의 손바닥 위에서 자란 보배라 아직은 아이에 불과한 나이였다.그 사실을 떠올리며 다시 눈앞의 앳되고 고운 얼굴을 바라보자 그의 마음속이 한순간 부드럽게 풀어졌다.그는 그녀가 살짝 내민 입술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낮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본왕은 너를 벌하지 않겠다. 다만…”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을 살짝 머금어 두 사람의 숨결이 섞인 뒤에야 몸을 바로 세워 그녀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공간의 주도권이 자연스레 그의 쪽으로 기울었다.신수빈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처음엔 그저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이내 아주 미세한 반응으로 변해갔다.그 변화에 이도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는 것을 신수빈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는 한층 격해졌고 격렬한 입맞춤이 오갔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목선을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신수빈은 고개를 살짝 젖힌 채 눈앞에 있는 남자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손끝에 그의 머리장식이 걸리자 그녀는 그것을 들어 빼냈다. 그가 풀어낸 머리칼은 그대로 그녀의 검은 머릿결과 뒤엉켜 하나가 되었다.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의 그는 분명 이성과 감정의 경계를 잃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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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왕야는 남의 부인을 안고 잠자리까지 했으면서 정작 그 침상은 못 견뎌 하는 모양이었다. 그 침상이 윤서원이 썼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장풍은 히죽 웃으며 괜스레 고소하다는 듯 속으로 즐거워했다.이튿날 아침, 신수빈은 이른 시각에 눈을 떴다.평소라면 조금 더 잤겠지만 오늘은 이도현이 곁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괜히 불편했다.그녀는 바깥쪽에 누워 있는 사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살금살금 침상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이도현이 그녀를 끌어안았다.“지금 몇 시냐?”막 잠에서 깬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거칠었으나 날 선 기운과 위압은 한결 옅어져 있었다.“잘 모르겠어요. 이미 날이 밝았으니 아마 진시는 되었을 겁니다.”그녀의 부드럽고 나른한 음성이 귀에 스며들자 그의 기색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젯밤부터 잠잠하지 않던 감각이 다시 또렷이 살아났다.신수빈은 그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져 속으로는 눈을 굴렸지만 겉으로는 수줍은 듯 조심스레 그를 밀었다.“왕야, 잠시 후면 관사 유모들이 올 겁니다. 방 안에 오래 계시면 곤란해요.”이도현은 아침부터 집안일에 매달릴 그녀가 못마땅해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세자 부인인 네가 나보다 더 바쁘구나.”그 말속에 실린 불쾌함을 신수빈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자는 제 성정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이기에, 기분이 상하면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왕야께서는 군국대사를 다루시는 분이잖아요. 제가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잠시 후 유모들만 얼른 돌려보내고 곧바로 와서 왕야 곁에 있을게요.”이도현은 마지못해 콧소리를 흘렸지만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신수빈은 침상에서 내려와 청하를 불렀다.그녀는 이미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수빈의 옷차림과 세안을 도왔다. 그러나 시선은 자꾸만 장막 안으로 흘러갔다. 그 안에는 분명 섭정왕의 실루엣이 어른거리고 있었다.청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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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이도현은 그녀가 이렇게 다정하고 조심스레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었지만 그녀가 내뱉은 그 말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내 환심을 산다고?”이도현의 눈매가 차분히 가라앉았다.“왜 하필 환심이라는 말을 쓴 것이냐?”신수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두 사람 사이의 신분과 위치는 너무도 분명했다. 그는 언제나 윗자리에 있었기에,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결국 맞추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환심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왕야 곁에는 다른 미인들도 계시잖아요. 혹여 왕야께서 어느 날 제게 싫증을 내시고 찾아오지 않으시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러니 자연히 왕야의 마음을 사려 애쓸 수밖에요.”그 말속에서 그녀가 타인을 몹시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도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행궁에 있던 그 진 씨 여인은 그저 네가 받게 될 의심과 화를 막기 위해 내 곁에 두었던 사람일 뿐이다. 충분한 대가를 약속했고 훗날 궁을 나가게 되면 그 이후의 삶도 제대로 마련해 주기로 했다. 그녀 역시 그 조건을 받아들였기에 남아 있었던 것이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이도현은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했다고 여겼다. 진 씨 여인은 항주 출신의 소문난 집안도 아닌 평범한 가문의 딸이었다. 이도현은 그런 그녀를 이용했고 그녀 역시 오라비의 장사를 돕는 조건을 내걸었을 뿐. 따지고 보면 그저 각자의 필요를 채운 관계였다.이도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태후가 신 씨를 곤란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런 번거로운 수를 둘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본래라면 신수빈에게 이 일을 굳이 설명할 생각도 없었으나 그녀가 이 문제를 유난히 마음에 담아두는 듯하여 괜한 의심을 남기고 싶지 않아 털어놓은 것이었다.그러나 신수빈은 이도현의 설명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의 뜰에 진 씨 여인이 있든, 왕 씨 여인이 있든, 지금으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꽃처럼 고운 처녀를 곁에 두고 그가 정말 아무 감정도 품지 않았을까? 그저 특별히 아끼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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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신수빈은 다른 여인들과는 달랐다. 장신구 하나에도 이처럼 은밀한 장치를 숨겨 두다니 말이다. 이도현은 화장대 위에 놓인 여러 상자들을 훑어보며 하나쯤 더 열어 보려 했다. 이 여인이 또 어떤 기이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마침 내무를 정리하고 급히 내실로 돌아온 신수빈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도현이 손에 들고 있는 팔찌를 보았다.윤수혁이 그녀에게 건넸던 바로 그 팔찌였다. 더구나 그의 손이 인피면구가 들어 있는 상자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순간 숨이 막혔다. 만약 그가 그 가면을 보게 된다면 자신이 아직도 그 자객들과 연이 닿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아야.”신수빈은 일부러 소리를 내며 병풍에 몸을 기대었다가 무심한 척 병풍을 밀어 넘어뜨렸다.그러자 이도현이 돌아서며 물었다.“왜 그러느냐?”“서둘러 걷다가 병풍에 옷자락이 걸렸어요.”그녀는 몸을 낮추며 치마를 한 번 털어냈다. 이도현이 다가오자 그제야 신수빈은 조용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고 그가 여전히 팔찌를 쥐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왕야, 그 팔찌가 마음에 드시나요?”이도현은 그 팔찌의 특이함을 모르는 척하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제법 정교하구나. 한데 네가 차고 있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신수빈은 그가 이미 눈치챘을 것이라 짐작했다. 관산왕의 막내아들이자 총애를 받던 후궁의 아들인 그가 무슨 귀한 물건을 보지 못했겠는가? 팔찌 하나에 시선을 빼앗길 리 없었다.“며칠 전, 큰 오라버니께서 보내주신 거예요. 왕야께서도 조심히 다루셔야 합니다. 이건 평범한 팔찌가 아니거든요.”그는 거짓을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차라리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래?”이도현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어떤 점이 다르다는 것이냐?”“안쪽에 다섯 개의 암실이 있어요. 그 안에는 각각 사람을 중독시키거나 혼절하게 만드는 약이 들어 있습니다. 예전에 윤서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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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어디로 말이냐?”“가보시면 아실 거예요.”신수빈은 이도현의 차림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는 지금 속옷만 걸친 상태였고 어제 입었던 기마복은 옆의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 다시 입기에는 영 마땅치 않아 보였다.그러자 신수빈은 곧바로 청하를 불렀다.“창고에 있는 혼수 중, 가장 안쪽에 있는 상자를 열어서 여름옷 한 벌 가져오거라.”청하가 옷을 들고 돌아왔을 때 이도현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그녀의 혼수 속에 사내의 옷이 들어 있다는 것은 애초에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이도현의 얼굴이 단숨에 어두워졌다.“그 폐물의 것이냐?”신수빈은 입술을 삐죽이며 그를 흘겨보았다.“새 옷입니다. 친정에서 가져온 거고 그분은 한 번도 입은 적 없어요.”그러나 이도현은 코웃음을 치며 음울하고 비꼬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신 씨 집안이야말로 재력이 대단하군. 딸을 시집보내며 사내 옷까지 챙기다니!”신수빈은 이런 질투가 전혀 필요 없다고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남의 아내를 강제로 차지해 놓고도 그 남편의 존재를 이토록 못 견뎌 하고 있는 것이니까.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신수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왕야, 한 번 입어 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녀는 그의 앞에 서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이도현은 그녀의 순종적인 태도를 보며 가슴에 맺혔던 말을 그냥 삼키기로 했다. 두 팔을 벌려 그녀가 옷을 입혀 주는 대로 내버려두었다.하지만 옷을 다 입고 나자 문제가 분명해졌다. 옷자락은 종아리께에서 멈췄고 어깨도 꽤나 조였다. 그 모습을 본 신수빈 역시 잠시 말이 없어졌다.이도현은 한 바퀴 돌아선 뒤 멈춰 서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네 눈에도 이게 보기 좋으냐?”신수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다가가 그 옷을 벗겼다. 그리고 청하에게 건네며 낮게 말했다.“다시 가져가거라.”이도현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왜 아직도 남겨 두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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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이도현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신수빈은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사람을 불러 가마를 준비하게 했다. 그와 동시에 윤서원의 옷이 들어 있는 상자 몇 개도 뒤쪽 문으로 옮겨 수레에 싣게 했다.“수레는 뒤문에 놓거라. 오늘은 좀 피곤하니 가마는 안뜰까지 들이게 하고. 나는 가마를 타고 나가겠다.”청하를 비롯해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이들은 모두 사정을 알고 있었다.상자들을 모두 내보낸 뒤에야 뜰 안의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 두 사람을 밖으로 안내했다.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신수빈은 이도현과 함께 가마에 타고 나가 출문한 뒤에 마차로 갈아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도현은 비좁은 가마를 힐끗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본왕은 올 때도 그랬듯, 떠날 때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갈 수 있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몸을 날려 담장을 넘었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신수빈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자기 뜰만 벗어나면 그가 어디서 발견되든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신수빈이 마차에 올랐을 때 이미 이도현은 안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밖에 서 있는 마부를 힐끗 본 순간, 그녀는 바로 알아차렸다. 자기 곁의 마부마저도 그의 사람이었다는 것을.이 남자의 눈과 손은 참으로 빈틈이 없었다.“마님, 어디로 갈까요?”“우선 평안가의 포목점으로 가거라.”이도현이 입은 기마복 차림은 거리를 다니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윤서원의 옷은 그가 입을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옷을 하나 사는 편이 나았다.평안가의 그 가게는 신 씨 집안의 상점이었다. 경성에서 천일각이 있는 거리의 점포를 제외하면 신 씨 가문의 다른 산업은 모두 그녀의 혼수로 넘어왔고 평소에는 큰 오라버니가 관리하고 있었다.이렇게 눈에 띄는 사람을 데리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했기에, 신수빈은 자신의 가게로 향한 것이다.장객은 그녀를 알고 있었지만 윤서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윤서원이 쓰러졌다는 일은 권귀들 사이에서나 도는 이야기라 일반 백성은 알 길이 없었다.그녀가 위풍당당하고 준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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