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40 챕터

제21화

청하는 감히 소리를 내지 못 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휘장을 내렸다. 안쪽을 힐끗 들여다보니, 침상 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남자는 키가 크고 건장하여 침상 위에 누워 있으니, 신수빈이 더욱 작고 여려 보였다. 섭정왕의 조복은 위엄 있고 근엄했으며, 아씨의 옷차림은 수수했다.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은 묘하게 잘 어울리고 조화로워 보였다. 청하는 얼른 그런 생각을 접었다.아씨는 지금 평양 후부의 작은 마님인데, 어떻게 섭정왕과 엮일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정말로 윤서원과 이혼을 한다 해도, 섭정왕 같은 분에게는 측실 자리조차 이혼한 아씨에게 돌아올 리 없다. 이렇게 이름도 신분도 없이 섭정왕을 따르느니 차라리 평양 후부에 있는 편이 낫다. 청하는 온갖 생각을 안고 밖으로 나가, 문 앞 계단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신수빈은 깊은 잠에 빠져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잔 것 같았다. 처음엔 불가마 속을 걷는 듯 더위에 시달리다가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시원한 곳에 도착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 또 하나의 불가마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그 불가마에서 멀어지고 싶었으나, 막상 멀어지려 하자 그 불가마가 손발이라도 달린 듯 그녀를 한 공간에 가둬버렸다. 신수빈은 어릴 때부터 더위를 몹시 탔기에, 꿈속에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그저 그 불가마를 밀어내고 싶었다. 마침내 정신이 들었을 때, 그 불가마가 다름 아닌 이도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이마를 맞댄 채 잠들어 있었다. 잠에서 깨어 이런 얼굴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수빈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이도현이 자신의 몸에 걸친 팔을 밀쳐내며 멀리 떨어지려 했다.이도현도 신수빈의 저항에 잠에서 깼다.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잠이 덜 깬 듯 낮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이 몇 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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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이도현의 말투와 눈빛은 경박하고 방탕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강인함 속에 살짝 불경한 기색이 엿보였다. 어젯밤 갑옷을 두르고 냉철하고 위엄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안엔 삼분의 압박감과 삼분의 소유욕이 담겨 있어 남자의 양면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한때 가장 가까웠던 남녀 사이에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이 있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신수빈은 자연히 알고 있었다.그녀는 이도현을 미워한 적이 있다. 특히, 그가 바로 연우의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더욱 그랬다. 전생에서 연우를 외면했던 그로 인해 결국 비극이 닥쳤으니 말이다.만약 윤서원에 대한 원망이 열이라면 이도현에 대한 원망은 칠 정도였다.그러나 어젯밤, 그가 자신을 구해주러 와준 것만으로도 신수빈의 원망은 조금 누그러졌다. 약에 중독된 상황에서도 그는 기회를 노리지 않고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어 뱃속의 아이를 지켜주었다. 그 점만으로도 신수빈의 마음속 증오는 한결 옅어졌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의 노리개가 될 생각은 없었다."소인 다음에 꼭 큰 예를 갖추어 왕야께 은혜를 갚겠습니다."신수빈은 한마디 한마디마다 ‘소인’이라 칭하며 말했다. 그 말이 이도현의 귀에는 몹시 거슬렸다."이 지경까지 와서도 평양 후부로 돌아가 윤서원 곁에 있으려는 것이냐?"신수빈은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도현은 그녀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이어졌다."소인은 어차피 윤가의 정실부인입니다. 평양 후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그녀의 조용하고 담담한 태도에 이도현은 어젯밤 신수빈이 금비녀를 쥐고 마용을 미친 듯이 찔렀던 장면이 떠올랐다. 예순일곱 군데의 상처, 그때 그녀는 얼마나 절망했기에 그런 증오가 터져 나왔던 것일까.그는 무의식중에 허리춤의 용문 옥패를 매만졌다. 한참을 그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너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고 곁에 두겠다면 어떻겠느냐?"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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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이도현이 나가고 나서야 청하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신수빈이 홀로 침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청하는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아씨, 혹시 왕야께서 화가 나서 나가신 겁니까?"신수빈은 문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신경 쓸 것 없다."무슨 신분을 바꿔주겠다는 말, 결국 그녀가 이미 시집을 한 번 간 몸이니 첩으로 삼기에도 부족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름을 바꿔 새로운 신분을 내어준 뒤 왕부의 첩으로 들여보내려는 속셈이겠지.그녀의 몸은 탐내면서 체면도 챙기려 하다니... 좋은 건 다 자기 몫으로 하겠다는 심산이었다.청하는 아씨의 태도를 보고 섭정왕에게 그다지 마음이 없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다 아씨가 섭정왕과 이런 관계가 된 것일까?"아씨, 혹시 섭정왕과..."신수빈은 잠시 침묵했다. 청하는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사람으로 하인이라기보다는 함께 자라온 벗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신수빈이 말했다."그냥 내가 가끔 바람나서 밖에 두고 기르는 정부라고 생각해."마침 되돌아오던 이도현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바로 그 말을 듣고 말았다.면수, 외실, 정부!도대체 그녀가 못할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의녀는 약을 들고 섭정왕 뒤를 따르며 자신의 머리를 약그릇에 박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대단한 집안의 비밀이란 말인가! 의녀는 이 귀인이 또 무슨 엄청난 말로 섭정왕을 분노케 할까 두려웠다. "귀인, 약 드실 시간입니다."그러고는 약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다시 돌아온 이도현을 보았다. 그의 청력이면 자신이 방금 한 말을 반드시 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신수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그를 면수라 부른 적도 있으니, 정부쯤이야 상관없었다. 게다가, 그를 억울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청하는 의녀에게서 약을 받아 신수빈에게 내밀었다. 신수빈은 냄새를 맡아보고 평소에 먹던 안태약과 비슷한 것을 확인하곤 안심하고 마셨다."다들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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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신수빈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왕야께서는 참으로 계책이 뛰어나시군요. 그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이도현은 그녀의 비꼬는 말을 신경 쓰지 않고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몸이 괜찮아졌으면 네 사내나 데리고 당장 나가거라. 더는 내 눈앞에서 거슬리지 말고.""왕야께서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옷 한 벌 마련해 주시지요. 이 꼴로는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어젯밤 의녀가 갈아입혀 준 것으로 침 치료에 편하도록 얇고 투명한 옷이라 속옷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다.이도현이 밖으로 나가자 곧바로 하녀가 옷을 가져왔다. 청하가 신수빈을 도와 옷을 입혀 주고 나서 누군가 신수빈을 뒤쪽의 형방으로 안내했다.윤서원은 이미 하루 밤낮을 어두운 방에 묶인 채 버려져 있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싶던 그때 문이 열렸다.어린 하인이 등불을 들고 신수빈에게 길을 안내했고 윤서원은 필사적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입이 막혀 있어 웅얼거리며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신수빈은 그를 혐오스럽게 한 번 쳐다보고 담담하게 말했다."풀어주어라.""예."하인이 윤서원을 풀어주자 그는 입을 막고 있던 것을 빼내고는 신수빈의 발치에 엎드리며 다급히 말했다."네가 날 구하러 온 거지? 내가 알았어… 내가 알았어, 섭정왕께서 네 체면을 봐서 날 풀어줄 거라고…"신수빈은 눈앞의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열하고 비겁한 그 얼굴은 마치 하수구의 쥐나 구더기, 파리 똥과도 같은 존재였다."집으로 가시지요."신수빈은 냉담하게 말하고는 형방을 떠났다.윤서원은 더 머물 엄두도 못 내고 허겁지겁 일어나 신수빈을 따라갔다.왕부가 준비한 마차가 뒷문에 대기하고 있었고 윤서원은 왕부의 집사가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조정을 쥐락펴락하는 권신의 집사라면 성 안의 삼사품 관원보다도 더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집사가 지금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한 걸음 한 걸음 신수빈 곁을 따라가며 아첨하듯 말했다."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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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신수빈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차갑게 바라볼 뿐이었다. 윤서원은 그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려 어디에 손을 두어야 할지 몰랐다. 더는 그녀를 안으려 손을 내밀 엄두도 내지 못했다.신수빈은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윤서원이 이를 꽉 깨물자 턱선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분명 상인 집안의 딸에 불과한데 어디서 저런 기세가 나오는 건지? 다 이도현을 믿고 저러는 거잖아!이도현이 너한테 싫증 나면 너를 어떻게든 손봐줄 테니까 두고 봐!'윤서원은 속으로 이를 갈며 생각했다.대주 왕조에는 통행금지가 없었고 이때는 이미 곧 해시(밤 9~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거리엔 장사를 마친 소상인 몇을 빼곤 인적이 드물었다. 마차는 한참을 달렸고 윤서원은 점점 집과는 다른 방향임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디로 가는 것이냐?"신수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차는 향 하나 탈 시간쯤 더 달리다가 멈춰 섰다.마차 밖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남녀노소의 울음소리, 칼과 창이 부딪히는 쇳소리까지 들려왔다."마님, 도착했습니다."마부가 밖에서 공손히 말했다.신수빈이 마차 발을 걷어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윤서원도 창문 너머로 바라보다가 이곳이 마가임을 알아차렸다.이때 금군이 질서 정연하게 마가를 포위하고 있었고 마가 사람들은 병사들에게 가축처럼 끌려나오고 있었다. 평소 귀하게 자란 마가의 도련님들은 이런 수모를 처음 겪는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누가 너희더러 마가를 수색하랬느냐! 우리 할아버지가 누구신지 아느냐?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마가 도련님은 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목이 뻣뻣하게 굳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고꾸라졌다.여인들은 통곡하고, 남정네들은 웅크려 더 이상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윤서원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평소 오만하던 마가의 도련님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다니... 마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만 같았다.그가 섭정왕 저택에 갇혀 있던 하루 밤낮 사이, 세상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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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아이고, 하늘이 도우셨구나. 우리 아들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서씨 부인은 상을 차리게 하고 윤서원에게 계속 반찬을 집어주며 놀란 마음을 달래주려 했다. 그러면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신수빈에게 짜증 섞인 눈길을 주며 말했다. "평소엔 우리 아들이 밖에 나가도 아무 일 없더니 어찌 너만 따라가면 이런 화를 당하느냐? 혹시 팔자가 사나운 게 아니냐? 나중에 꼭 큰 스님을 모셔서 제대로 점을 봐야겠다. 괜히 우리 아들까지 해치지 말고."서씨 부인은 신수빈이 상인 집안 출신인 것이 못마땅해 전생이든 현생이든 하인들 앞에서도 결코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 전생의 신수빈은 이런 말에 늘 마음이 상했지만 이제의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모두 제 잘못입니다." 윤서원은 이제 신수빈이 이도현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기에 혹여 서씨 부인이 신수빈을 함부로 대했다가 이도현을 노하게 할까 두려워 급히 말했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건 제가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지, 부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서씨 부인은 아들이 신수빈을 두둔하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신수빈은 식사를 챙기며 청하가 가져온 약선 한 그릇을 받아 윤서원 앞에 내밀었다. "서방님, 며칠 동안 놀라셨을 텐데 어머님께서 꼭 몸을 보하라 하셨습니다. 이 약선을 드시고 기운을 차리세요."서씨 부인은 신수빈이 제법 살뜰히 챙기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화가 좀 풀렸다. 주서화가 들어온 뒤로, 신수빈은 제법 살림을 잘하고 매일 부엌에 당부해 아들의 몸을 챙기게 했고 그 비용도 직접 부담했다. 또 서씨 부인 앞에서 일부러 좋은 며느리인 척하며 이 모든 게 다 어머님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서씨 부인은 무척 만족스러웠다.윤서원은 아무 의심 없이 약선을 받아 먹었다.방으로 돌아갈 쉴 때, 윤서원은 평소와 달리 다른 처소로 가지 않고 신수빈과 함께 창란원으로 향했다. 예전의 신수빈은 온통 자신만 바라보았는데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치는 미묘한 거리감과 알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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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솔직히 말해, 윤서원은 정말 연기를 잘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 어린 듯했고 죄책감과 아픔, 슬픔과 분노가 얼굴에 가득했다. 전생에 뼈저리게 겪었던 일이 아니었다면 정말 그가 권세에 짓눌려 집안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인이 모욕당하는 걸 참아야 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그런데도 정절을 잃은 부인을 끝까지 진심으로 대하려 하다니.신수빈은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꾹 참고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고 오늘 밤 이곳에 머물러 진짜 부부가 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를 통제할 수단이 없으니 몸이라도 차지하려는 걸까? 같은 침상에 눕기는커녕 그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신수빈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혼인할 때, 일생일대 오직 저 하나뿐이라 맹세했지요. 그런데 제가 이 집에 들어온 지 넉 달도 안 되어 먼저 귀첩을 들였고 나중엔 또 유씨 아가씨까지 들였더랬죠. 저도 서방님과 잘 지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서방님의 그 맹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썩어 들어가는 듯 아픕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마음이 풀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윤서원은 자신이 그녀를 받아주었건만 오히려 자신을 거부하는 신수빈의 태도에 당황했다. 그러나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 답답한 듯이 물었다."그럼 언제까지?"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뜰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신수빈은 귀를 기울여보니 소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주서화의 몸종 시녀 연이였다."네가 뭔데 감히 내가 나리를 뵙는 걸 막아? 우리 군주마마께서는 아이를 가진 몸이야. 지금 몸이 불편하셔서 나리를 모셔오라고 했는데 만에 하나 군주마마 뱃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희 같은 하찮은 것들이 그 책임을 질 수 있겠어?"신수빈은 눈앞의 이 비열한 남자를 상대하기 싫던 참이었다.그가 언제까지냐고 묻기에 신수빈은 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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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서씨 부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청하를 반쯤 죽도록 때린 뒤 가장 천한 기생집에 팔아넘겼다.서씨 부인은 청하가 한 모든 짓이 신수빈의 사주라고 여기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신수빈의 생활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결국 신수빈이 방법을 써서 신씨 집안에 몰래 편지를 보내 청하를 구해달라고 부탁한 덕분에 겨우 그 어둡고 비참한 곳에서 청하를 건져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늦었다.청하는 온몸에 더러운 병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곁에 있던 사람이 파멸적인 재앙을 겪게 된 것에 신수빈은 다시 태어났다 한들 사지 백골이 떨릴 만큼 원망스러웠다."내가 왜 그날 밤 너를 섭정왕 저택으로 보내 도움을 청하게 했는지 아느냐?"청하가 고개를 저으니 신수빈은 쓴웃음을 지었다."윤서원이 나를 진심으로 원해서 청혼한 게 아니야. 세상 사람 모두가 섭정왕이 늘 궁에 계신 그분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알고 있지. 나는 몰랐는데 궁에 들어가던 날 알게 됐어. 내가 태후마마와 얼굴이 너무 닮았다는 걸. 윤서원도 분명 그걸 알고 세자라는 신분으로 상인의 딸인 나를 택한 거야. 그리고 신혼 첫날밤, 나를 권세 높은 섭정왕에게 바쳤지. 나란 존재는 그의 눈에 그저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어. 마가에 보냈던 그날도 마찬가지였지."청하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분노에 찬 표정을 짓자 신수빈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도현이 내 정절을 빼앗았지만 동시에 나를 마가에서 구해줬어. 뱃속의 아이도 그의 아이야. 이 몸이 누구 것이든 나는 이제 상관없어. 하지만 이 아이는 반드시 낳아서 떳떳한 신분을 주고 싶어. 이도현이 그날 밤 나에게 약간의 연정과 호감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었어. 나는 결국 대체품일 뿐이고 그는 내 신분으로는 첩이 되기도 부족하다고 했지. 하물며 그의 아이를 낳는다는 건 더더욱 용납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 일은 윤씨 집안에도 이도현에게도 절대 들키면 안 돼!"청하는 머리가 복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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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신수빈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서씨 부인의 간사함 때문이었다.서씨 부인은 평양 후부의 살림을 신수빈에게 맡긴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수입이 나오는 장원과 가게들은 전부 자기 손에 쥐고 신수빈에게는 내주지 않았다.이렇게 큰 평양 후부에서 매일 이어지는 인사치레, 의식주, 각 처소의 월례비, 하인들의 월은 등등, 모두 만만치 않은 지출이었다.그런데 신수빈 손에 들어온 것은 겨우 생계만 유지할 수 있는 가게들뿐이었고 이걸로는 후부의 살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서씨 부인이 이렇게 한 건, 결국 신수빈이 가져온 혼수를 후부 살림에 보태 쓰게 하려는 속셈이었다.체면 때문에라도 신수빈은 억지로 후부에서 버텨야 했다. 정 안되면 친정에 손을 벌려 서라도 참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신수빈은 이제 그런 체면 따위 필요 없었다. 지금은 그저 아이를 잘 지키고 연우가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예상대로 주서화는 집안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상가집 딸 따위가, 정실부인 자리에 앉았다고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을 줄 알았나? 정말 우습기 그지없네!"이렇게 말하며 주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끝으로 살며시 귀밑머리를 쓸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자."평소 주서화는 태교를 핑계로 서씨 부인께 인사를 자주 가지 않았다.그 시각, 서씨 부인 방에서는 신수빈을 가차 없이 꾸짖고 있었다.서씨 부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제는 서씨 부인 친정 조카의 혼례날이었고 후부에서는 관례에 따라 예물을 준비해야 했다. 서씨 부인은 며칠 전 신수빈에게 예물을 값비싼 걸로 준비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야 서씨 집안의 중시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였다.그런데 어제 집에 돌아왔을 때, 올케가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오늘이 되어 보니 친정 올케가 후부에서 보낸 예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되돌려보낸 데다 하인에게 이런 말까지 전하게 했다."작은댁께서 친정이 천하다 여기신다면 앞으로는 왕래를 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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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서씨 부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신수빈에게서 딱히 흠을 잡을 데가 없어 괜한 트집만 잡을 수밖에 없었다."내 아들이 너를 부인으로 들인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집안 살림을 겨우 며칠 맡겼을 뿐인데 이런 난리가 나다니 종부의 체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구나. 내가 앞으로 어찌 마음 놓고 이 후부를 네게 맡기겠느냐!""어머님께서 나무라신 것이 맞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 큽니다. 서가를 제대로 받들지 못해 마음이 매우 무겁습니다."이때 마침 주서화가 들어왔다.그녀는 서씨 부인이 신수빈의 혼수를 노리고 있다는 건 듣지 못하고 그저 신수빈이 살림을 제대로 못한다는 말만 들었다.주서화는 허리를 짚고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어머님께 문안드립니다. 오늘은 몸이 좀 어떠십니까?"주서화가 들어오자 서씨 부인은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주서화 역시 황실 종친이라 그녀 앞에서 윤가의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넌 왜 온 것이냐? 방에서 태교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벌써 석 달이 되었고 태의께서 오셔서 태가 안정됐으니 가끔은 바깥 공기도 쐬라고 하셨어요."주서화는 허리를 짚고 앉으면서 신수빈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방금 들어올 때 보니, 어머님께서 크게 화를 내시던데 언니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어머님을 이렇게 화나게 한 것입니까?"신수빈은 주서화가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어머님’이라 부르는 것을 들으며, 그녀가 한번도 자신을 첩실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속으로는 비웃었지만, 겉으론 두렵고 자책하는 표정으로 패찰을 내놓았다."제가 무능하여 살림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이 패찰은 어머님께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다시 어머님 곁에서 좀 더 배운 뒤에 맡는 것이 좋겠습니다."서씨 부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애초에 신수빈에게서 살림권을 완전히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있을 때, 예물 준비 같은 중요한 일은 본인이 직접 챙기고 신수빈이 혼수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내놓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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