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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1화

문 위에는 방금 생긴 듯한 선명한 새 칼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누가 이 썩어 빠진 상왕부를 탐낸다고 그래! 오늘부터 상왕부와 맹국공부는 완전히 연을 끊을 것이다.”맹은영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돌아섰다.이 소동에 놀란 행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맹은영이 상왕부와 결별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경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맹은영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안에서 한참을 울며 서인경이 은혜를 저버렸다느니, 예전의 우정은 전부 연기였느니 악을 쓰며 욕을 했다는 말까지 돌았다.맹경운이 그녀를 보러 왔을 때는 문 안에서 날아온 화병 하나가 머리를 스칠 뻔했다.“그만하거라. 연기가 과하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맹은영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놓았다.문밖에 다른 사람이 없는걸 확인한 뒤 맹경운을 끌어당겨 방 안으로 들이고는 문을 쾅 하고 닫았다.“역시 셋째 오라버니가 최고입니다. 저를 제일 잘 알아요!”맹경운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렸다.“네 그 정도 잔머리로 남은 속일 수 있어도 셋째 오라버니는 못 속인다. 네가 정말 누군가랑 연을 끊을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요란 떨지도 않았겠지.”그는 바닥에 널린 파편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또 새로 바꾸고 싶어졌구나?”맹은영은 슬쩍 웃었다.“어차피 다 싸게 산 거라 괜찮습니다. 외삼촌께서 보내준 귀한 것들이면 저도 깨지 못했을 겁니다.”맹경운은 동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말하거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맹은영은 오늘 상왕부에서 벌어진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했다.“셋째 오라버니, 왕비 마마께서 이상합니다. 분명히 위험을 감지한 것 같아요. 연풍이랑 모든 암위를 전부 빼돌린 건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예전부터 저한테 거리를 두라고 했고 오늘 일부러 그렇게 독하게 말한 것도 제가 화나서 스스로 떠나게 만들려는 거였습니다. 상왕께서 경성에 없는 지금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맹경운의 표정도 차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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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2화

“왕비 마마께서 입궁하시는 순간, 소인은 곧바로 사람을 풀어 소문을 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폐하의 부름을 받아 병을 살피러 궁에 들어오셨다고 말입니다. 이거야말로 왕비 마마께서 가장 익숙하신 방식 아니겠습니까? 경성 백성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더는 사양하신다면 도리가 아니지요. 설마 폐하께서 친히 궁을 나서 왕비 마마를 모셔 오게 하시겠습니까?”이쯤 말이 나왔으니 서인경이 더 거절한다면 그건 황은을 업신여기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속으로는 황제가 제 손으로 써 준 성지를 휴지처럼 뒤집는 꼴을 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 또한 체면이 있었다. 군자의 말이 희롱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연기준이 떠난 뒤 이토록 오래 기다리다 마침내 그녀를 단독으로 궁에 부를 기회를 잡은 것이다.이전에는 늘 다른 이들과 함께 입궁했기에 황제가 손을 쓸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은설의 침전이었다. 그 안에서라면 무슨 일이든 벌이기 쉬웠다.이쯤에서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느냐였다.서인경은 그 생각을 곱씹으며 걸었다. 단은설의 침전에 들어서기 전까지 줄곧 그랬다.문을 넘자 그 안에 신 황귀비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서인경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황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 황귀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설 황귀비께서 요즘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아파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네. 특히 폐하께서 다른 후궁의 처소에 계실 때면 증상이 심해져 거의 죽을 것 같다고까지 하셨지. 태의들이 살폈으나 원인을 찾지 못해 부득이 왕비 마마를 모셔 온 것이네.”서인경은 속으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었다. 궁중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후궁들의 애정 다툼용 수법이었다.몸이 아니라 머리가 아픈 병이었다.황제가 단은설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태연하게 서인경에게 말했다.“상왕비는 마음 편히 살펴보거라. 고칠 수 있다면 짐이 후하게 상을 내릴 것이다. 고치지 못해도 결코 책망하지 않겠다.”서인경은 단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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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3화

서인경은 경계하듯 한 걸음 물러섰다. 막 입을 열어 병이 다 나았다며 치료를 거절하려는 순간, 황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상왕비,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분명히 설명해 보거라.”서인경이 담담하게 답했다.“설 황귀비께서는 근심과 걱정이 지나쳐 기혈이 막힌 증상입니다. 은침으로 양쪽 손목의 혈맥을 완전히 뚫은 뒤 한 시각 동안 유지하고 제가 처방한 약을 함께 복용하면 즉시 호전됩니다. 다만 경맥을 소통하는 과정이 극히 고통스럽습니다. 황귀비께서 과연 견디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단은설은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폐하, 신첩은 이런 치료법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분명 상왕비가 신첩에게 사적인 보복을 하려는 계략입니다.”서인경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았다.“보복이라니요. 저는 황귀비 마마와 어떤 원한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무엇 때문에 보복을 해야 합니까?”단은설은 말문이 막혔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연기준에게 마음을 품었고 그 때문에 서인경의 미움을 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신첩은 치료를 받지 않겠습니다. 폐하, 신첩은 이미 나았습니다. 더는 치료할 필요가 없습니다.”황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랑하는 황귀비는 말을 들어야 한다. 병이 있으면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짐이 마음 놓고 너를 아낄 수 있다.”단은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황제는 이미 오랫동안 그녀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그녀가 소란을 피울 때에만 잠시 들렀다가 곧 떠났을 뿐 단 한 번도 밤을 보내지 않았다.그리고 그 불안이 그녀를 짓눌렀다. 황제의 말은 곧 선택의 여지를 지워버린 셈이다.“황귀비를 붙잡거라. 상왕비가 침을 놓아 치료하도록 말이다.”그날, 후궁에는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후궁 사람들 중 절반은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서인경이 처방한 약은 지독하게 썼다. 단은설은 울부짖으며 억지로 약을 들이켰고 서인경을 저주하며 악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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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4화

단은설은 은침이 꽂혀 있는 내내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두 시진 끝에 이르러서는 온몸의 기력이 빠져나가 버렸고 울부짖느라 목소리마저 쉬어버렸다.황제가 묻자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대답했다.“이제는... 다시는 아프지 않겠습니다!”그제야 이 일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그러나 서인경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황제가 자신을 궁으로 불러들인 진짜 목적일 리 없다는 것을.예상대로였다. 단은설의 치료가 막 끝나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상왕비의 의술은 과연 뛰어나구나. 태의원 태의들이 마땅히 배워야 할 정도다.”태의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옳다며 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누구 하나 납득하지 못했다.누가 봐도 설 황귀비는 총애를 얻기 위해 일부러 병을 꾸며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사람은 없었고 서인경처럼 저토록 가차 없는 수법을 쓸 배짱은 더더욱 없었다.후궁의 부침은 알 수 없는 법이다.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모른다.혹여 훗날 설 황귀비가 다시 득세해 오늘의 일을 원한으로 삼는다면 그들은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상왕비만한 배경과 담력이 있었다면 과연 오늘의 공은 누구의 차지가 되었을까?분을 삼킨 태의들이 마룻바닥을 가득 메우고 엎드려 있었다.그러자 황제는 다시 말을 이었다.“마침 후궁에 설 황귀비와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빈첩들이 몇 있다. 상왕비가 수고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거라.”서인경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마땅한 거절의 명분을 찾지 못했다. 결국 황제와 신 황귀비를 따라 같은 증상을 핑계로 한 빈첩들의 처소를 차례로 돌 수밖에 없었다.그날 오후 내내 후궁에서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울음소리는 더 처절해졌다.이후로 후궁에서 총애를 다투는 허약 연기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사람들은 황제가 한 수로 두 마리를 잡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서인경은 황제의 속셈을 너무 얕잡아보고 있었다.세 명의 빈첩을 연달아 치료한 덕분에 서인경은 이미 후궁의 원망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그동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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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5화

줄을 잘못 서면 아무리 아첨하고 비위를 맞춰도 그 은총은 유성처럼 스쳐 지나가고 총애는 도화처럼 잠깐 피었다가 사라질 뿐이다.“신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궁의 주인 마마들께서 겪는 근심을 덜어드리는 일은 상왕비의 영광이자 폐하를 대신해 짐을 나누는 일입니다. 지금 상왕부가 누리는 위세와 지위가 어디서 비롯되었겠습니까? 모두 폐하께서 내려주신 은덕입니다. 상왕께서는 전조에서 황제를 위해 일하고 상왕비께서는 후궁에서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니, 온 조정을 통틀어 이런 복을 누리는 집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상왕부가 이토록 각별한 은총을 받았는데도 상왕비께서 계속 사양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분수를 모르는 처사요, 황은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단은설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서자 신 황귀비 또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안색이 굳었다.“설 황귀비, 그럴 필요까지는…”“괜찮습니다.”서인경은 황제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을 보고 서둘러 말을 끊어냈다.“설 황귀비께서 변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저희는 모두 어미가 된 사람들이니, 어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법이지요. 설 황귀비께서는 아직 자식이 없으시니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단은설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말 한마디가 가슴을 깊이 찔러 들어온 듯, 노골적인 불쾌함이 드러났다.서인경은 곧장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신첩은 명을 받들어 후궁 주인 마마들의 옥체를 정성껏 보살피겠습니다.”더 이상 거절하지 않자 황제의 표정은 마침내 누그러졌고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상왕비가 대국을 아는구나. 과인이 참으로 기쁘다. 이 일은 이대로 정하도록 하겠다. 그대가 어미 된 마음에 어린 세자를 떼어놓기 어려워한다면 원할 때마다 아이를 궁으로 데려와도 좋다. 황조모께서도 그 아이를 무척 아끼시니 자주 뵙게 하는 것이 곧 상왕을 대신한 효도가 될 것이다.”“명 받들겠습니다.”서인경은 입으로는 공손히 응했으나 속으로는 단호히 다짐했다. 꼬막이를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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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6화

서인경은 한낱 궁녀 하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없어 그녀를 지나쳐 그대로 자리를 떴다.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금수 대장공주는 가산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린 채 웃음에는 짙은 농담이 배어 있었다.“이 진국의 후궁, 이제부터 제법 볼만해지겠구나.”말을 마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누군가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그녀는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 모를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반쪽짜리 과자를 쥐고 더러워진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옷을 붙잡은 채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황고모할머니, 예쁩니다!”뒤늦게 따라온 유모가 혼비백산하여 곧바로 엎드렸다.“대장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이 아이는 신 황귀비 마마의 열여덟 째 공주입니다. 경솔하게 굴어 실례를 범하였으니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금수 대장공주는 아이의 웃음에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다. 작고 더러운 손조차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허리를 굽혀 아이를 품에 안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는 품에 안자마자 묵직한 감촉이 전해졌고 마치 작은 살덩이를 안은 듯했다.열여덟 째 공주는 성정도 넉넉했다. 손에 들고 있던 반쪽 과자를 금수 대장공주의 입가로 내밀었다.유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급히 말렸다.“안 됩니다, 안 됩니다. 자기가 먹다 남긴 것을 다른 분께 드리면 안 됩니다.”열여덟 째 공주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랑 열다섯 째 오라버니, 그리고 열일곱 째 오라버니는 다 받아먹었는데 왜 황고모할머니는 안 됩니까?”그녀는 부황과 황조모에게조차 자기 음식을 내어주기 원치 않았다.유모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 사이에는 분별이 있는 법이었고 대장공주가 이 아이를 그렇게까지 아낄 리 없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것이다.금수 대장공주는 아이가 분을 참지 못해 부루퉁해진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손짓으로 유모를 물리고 다시 반쪽 과자를 받아 들었다.“이 황고모할머니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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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7화

봉한설은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한바탕 벌일 기세였다.“개같은 폐하 같으니. 멀쩡한 사람을 붙잡고 괜히 일을 키우지 않습니까? 왕비 마마, 차라리 우리 설산으로 돌아갑시다. 결계를 닫아걸고 세상과 완전히 끊어버리면 그 누구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겁니다.”서인경 역시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처신을 그르쳐 일불락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아직 밖에서 떠돌고 있는 동족들이 오히려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서인경은 봉한설을 단호히 제지했다.“이 일은 밖에서는 절대 입에 올리지 말거라. 때가 오면 설산은 우리의 마지막 퇴로가 될 것이다. 한데 시기가 오기 전에 발각된다면 그건 재앙이야.”봉한설은 조심스레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꼬막이도 어미의 기색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느릿느릿 서인경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몸을 비비적거렸다.어느새 몇 달이 훌쩍 지나 꼬막이는 제법 기어다닐 줄 알게 되었다. 봉한설과 평이는 매일 아이를 담요 위에 내려놓고 온갖 먹을거리를 미끼로 삼아 기어다니게 했고 때로는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누가 들고 있는 음식이 꼬막이의 마음을 더 사로잡는지 겨루는 식이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꼬막이의 기세도 대단해졌다. 이쪽으로 달려가 하나를 집어 들고는 곧바로 저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른 것까지 노렸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집념이었다.서인경이 손을 내밀어 아이를 안으려던 순간, 문밖에서 부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왕비 마마, 안포가 돌아왔습니다.”이전에 연풍은 안포를 외곽 별채로 보내 서 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게 했기에 떠날 때 안포를 데려가지 않았다.서인경은 꼬막이를 다시 침상 위에 내려놓으며 봉한설과 평이에게 당부했다.“금방 다녀오마. 너희는 먼저 보조식을 먹이거라.”그녀가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안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서인경을 보자마자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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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8화

서인경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을 부축했다.“동 백부, 어서 일어나세요. 무슨 말씀이든 앉아서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안포가 다가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동 백부는 자리에 앉아 깊은 세월이 켜켜이 밴 눈으로 서인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친혈육을 보는 듯했다.“저는 이미 죽음을 앞둔 몸입니다. 이 한평생을 장군부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왔지요. 거리로 내몰려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를 면한 것도 모두 장군부와 노장군 덕분입니다. 그 은혜는 다시 태어난 것과도 같습니다.”“말씀드리자면, 제 기억으로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는 노장군께서 세상을 뜨신 뒤, 제 뱃속에 묻어 두려 했던 일입니다. 하나 요즈음 장군부가 잇달아 화를 입고 상왕부마저 호시탐탐 노려보는 형국이 되니 더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저희들이 알고 있는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아가씨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늙은 부관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병환만 아니었어도 반드시 함께 오셨을 것입니다.”동 백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안포를 바라보았다. 안포는 사안이 중대함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섰다.“소인은 문밖에서 지키겠습니다.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안포가 나간 뒤 서인경은 동 백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동 백부는 흐릿해진 눈으로 떨리는 두 손을 들어 검은 비단 상자를 내밀었다.“이것은 장군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물건입니다. 노장군께서 여러 해 동안 간직해 오셨고 막북으로 떠나시기 전, 부관에게 맡기셨습니다. 노장군께서는 만약 자신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다면 부관이 죽기 전에 반드시 왕비 마마께 전하라 하셨습니다.”서인경은 듣는 순간부터 상자 안의 물건이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상자를 받아 들고 살펴보니 겉에는 작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이 자물쇠는 희태비가 남긴 상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특별한 장치가 없었다.서인경이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를 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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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9화

그러나 꼬막이 이야기가 나오자 늙은 부관은 곧바로 기운을 차렸다. 그는 서인경의 손을 붙잡고 반드시 몸을 잘 추슬러 훗날 세자를 쫓아다닐 수 있을 만큼은 건강해지겠다고 굳게 약속했다.모든 사람을 다독인 뒤에야 서인경은 별채를 떠났다. 그 무렵에는 이미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평소보다 훨씬 신중하게 마차를 몰던 안포의 마음 한편에는 후회가 남아 있었다.“왕비 마마,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오후에 마마를 외출하게 해서는 안 됐습니다.”서인경은 발을 들어 올려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겹겹이 포개진 산의 윤곽을 바라보았다.“괜찮다. 오늘 그들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내일부터는 궁 안에 묶여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복이면 피할 이유가 없고 화라면 피해도 소용없지. 길만 조심히 가면 된다.”“예.”안포는 짧게 대답하고 온 정신을 주변의 기척에 집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덜컹거리며 나아가는 소리 사이로 급하게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섞여 들렸다. 안포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즉시 고삐를 잡아챘다.“왕비 마마, 조심하십시오.”서인경이 차렴을 걷어 들고 앞을 보니 한 기병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안포는 곧장 칼을 뽑았다.“잠깐. 적인지 아군인지부터 확인하거라.”안포는 칼을 거두지 않은 채, 그 인영이 마차 앞에 멈출 때까지 지켜보았다.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말에서 몸을 던지듯 내려와 그대로 땅에 무릎을 꿇었다. 정확히는 내려왔다기보다 떨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았다. 다리가 성하지 않은 듯, 착지하는 순간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왕비 마마,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대황자께서 보낸 추격자들이 곧 도착합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 속에서 불안한 바람 소리와 풀숲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들어보니 하나둘이 아닌 것 같았다.서인경은 고개를 숙여 땅에 엎드린 사내를 살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몇 달 전, 막북에서 돌아온 직후 맹은영을 도와 축국 대회에서 맞붙었던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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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0화

상왕비의 시위들만큼 대우가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안포만 보아도 그렇다. 상왕부 안에서는 일급 시위라 부르기도 애매한 위치인데 입고 있는 옷차림만 해도 대황자의 밀착 시위였던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서인경은 그의 눈빛에 드리운 음울함을 읽어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다리를 가볍게 눌렀다. 소민은 숨을 삼키듯 낮은 신음을 흘렸고 이내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확실히 치료 시기를 많이 놓치긴 했다. 그래도 고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고생은 좀 해야 할 거다.”그 말을 듣자마자 소민은 이마를 땅에 붙였다.“이 다리만 고칠 수 있다면 어떤 고생이든 감내하겠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저를 소나 말처럼 부리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만 번 죽으라 하셔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서인경이 웃었다.“소나 말은 충분하다. 대신, 이따가 묻는 것에 아는 대로 모두 답하거라.”소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명 받들겠습니다. 앞으로는 왕비 마마만을 섬기겠습니다.”의도치 않게 스스로 굴러온 인재 하나를 포섭한 셈이니 서인경의 기분은 제법 좋았다.뒤쪽에서 들리던 말발굽과 바람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추격을 확실히 따돌린 모양이었다.마차는 험한 산길을 넘어 관도를 피해 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아래에 도착했다. 야금 전, 마차는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왔다.서인경이 무사히 귀환한 모습을 본 누군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 안으로 뛰어갔다. 안포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서인경이 고개를 저었다.“조만간 알게 될 일이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자꾸나. 소민이를 이렇게 빨리 팔아넘길 필요는 없다.”마차 안에 있던 소민은 감격해 울음을 삼켰다. 대황자 밑에서 그렇게 오래 일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사람 취급해 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상왕비는 생각보다 훨씬 사람을 귀하게 대했다. 상왕부의 시위들이 왜 그토록 충성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물론 서인경의 속마음은 달랐다. 소민의 행적이 드러나 상왕부가 엮이는 일을 원치 않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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