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211 - Chapter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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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1화

안채린은 운전대를 잡은 채 백미러 너머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심유빈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그 여자가 온 가족을 속이고 결국 성양 그룹까지 파산 직전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처음부터 고이한을 믿으면 안 된다고 누군가 말해줬더라면 어땠을까.’그랬다면 적어도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장에 실패했더라도 모든 걸 잃는 결말까지는 가지 않았을 테니까. 최소한 지금보다 훨씬 사람답게는 살 수 있었을 터였다.문득 심유빈이 자신 앞에서 들뜬 얼굴로 떠들어대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고이한이 진짜 자기 남자라도 되는 것처럼, 미래의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복한 얼굴로 자랑하던 모습에 안채린은 헛웃음이 나왔다.하지만 실상은 얼마나 우스운가.고이한은 그저 그녀의 피를 이용해 가족을 살렸을 뿐이었다. 애초에 사랑 같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심유빈은 그걸 진심이라고 믿은 채 완벽하게 빠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속은 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안채린은 문득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그런데 왜 결국 고이한은 소예지와도 이혼한 걸까.’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천천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심유빈이 그렇게까지 고이한을 사랑했다면 두 사람 사이를 가만히 놔뒀을 리 없었다. 분명 끊임없이 흔들고 망치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이한이 이혼 당시 소예지에게 넘긴 돈만 무려 800억이었다. 그 정도 액수라면 누가 먼저 이혼을 원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결국 소예지가 먼저 떠나려 했던 것이다.고이한은 어쩔 수 없이 그 선택을 받아들였고 아이도 돈도 자원도 아낌없이 넘겨줬다. 아직까지 소예지를 놓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소예지가 실험실에 들어간 이후 고이한이 연구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안채린의 가슴이 다시 답답하게 조여들었다.그때 뒷좌석에 기대 있던 안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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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2화

고이한이 원한 건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안영수 같은 인간을 재계에서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뜻이었다. 더러운 수단으로 돈을 굴리고 사람을 짓밟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인간이 다시는 같은 판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성양 그룹의 파산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본보기였고 누군가에게는 경고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이후 정리는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하겠습니다.”“응.”짧은 대답이었지만 김경환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사장이 원하는 건 이미 끝났다. 성양 그룹에 남은 자잘한 찌꺼기까지 굳이 뒤집어엎을 필요는 없었다. 고이한 정도 되는 위치의 사람은 이미 무너진 상대를 끝까지 물어뜯는 데 관심이 없었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재경 뉴스 헤드라인 첫 줄에 성양 그룹 파산 청산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걸렸다.기사에서는 성양 그룹이 무너진 과정과 내부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지만 표현 하나하나에는 묘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재계에서 오래 굴러온 사람들은 굳이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도 누구의 손이 움직였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업계 전체에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퍼져나갔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향했다. 새롭게 상공회 회장 자리에 오른 고이한이었다.더구나 성양 그룹은 원래부터 깨끗한 집안이 아니었다. 상장 전부터 온갖 편법과 불법을 밟으며 몸집을 키워온 곳이었다. 그런 집안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는 건 단순한 기업 파산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이건 명백한 메시지였다.앞으로 고이한이 상공회를 이끄는 동안에는 규칙을 어기고 뒤에서 수작질을 벌이는 인간들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감히 그를 건드리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이번 일을 통해 재계 전체에 확실하게 각인시켜 버린 셈이었다.그 일 이후 몇몇 구세대 실력자들조차 고이한이라는 젊은 회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아직 젊다고 얕봤던 시선은 어느새 조심스러운 경계로 바뀌어 있었고 앞으로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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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3화

이번 회의에는 노바스페이스 산하 뇌-컴퓨터 연구팀까지 초청돼 있었다. 단순한 내부 회의라기보다는 양측이 연구 데이터를 공유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조율하는 성격이 강한 자리였다.소예지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핵심 연구원 여덟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상석 옆에는 고이한이 조용히 자료를 넘겨보고 있었다. 짙은 회색 수트 위로 정리된 은발이 조명 아래에서 서늘하게 빛났고 긴 손가락 끝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괜히 시선이 머물렀다.곧 발소리를 들은 듯 고이한이 고개를 들었다.소예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노바스페이스 엔지니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끝까지 고이한과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고이한은 소예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자료로 내렸다.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읽히지 않았다.소예지는 곧장 노트북을 연결한 뒤 발표를 시작했다. 회의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고 스크린 위로 복잡한 구조 모델과 데이터가 빠르게 넘어가는 사이 또렷하게 이어지는 소예지 목소리만 공간을 채웠다.고이한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듣고만 있는 눈빛은 아니었다. 낯선 분야를 억지로 따라가는 사람 특유의 막힘이 없었고 소예지가 설명하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 따로 공부해왔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보였다.질문은 대부분 노바스페이스 엔지니어들 쪽에서 쏟아졌다. 소예지는 막힘없이 답을 이어갔고 고이한은 그런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어느 순간에는 정말 저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건지 직접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놀라울 만큼 똑똑했다.문득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품에 안겨 괜히 투정 부리던 얼굴도, 키스해달라며 졸라대던 목소리도, 일하는 도중 일부러 방해해 놓고 혼자 웃던 모습도 전부 선명했다. 안경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몰래 사 와 억지로 씌워놓고는 혼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장난기 어린 얼굴까지도.분명 같은 침대에서 6년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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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4화

방기성은 3년 전에 아내를 떠나보냈다.해외에 아들이 하나 있긴 했지만 관계는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고 재혼 역시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 사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여자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그리고 지금 심유빈은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데리고 다니기만 해도 체면이 섰고 남들 앞에 내놓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 기분을 맞춰주는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방기성이 왜 자신에게 빠졌는지 심유빈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아주 능숙하게 이용하고 있었다.지금 심유빈이 방기성에게 바라는 건 단 하나, 고이한과 맺은 계약을 끊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고씨 가문 내부 사정은 워낙 철저하게 감춰져 있어서 방기성 역시 고이한 어머니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상공회 회장 자리를 고이한에게 빼앗겼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직 속이 뒤틀리고 있었고 심유빈의 부탁은 그 불쾌한 감정을 제대로 건드렸다.그날 저녁 만찬 자리에서 심유빈은 샴페인 빛 롱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드레스 라인 아래로 늘씬한 몸매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공들인 메이크업 위로는 단정하면서도 은근히 사람을 홀리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심유빈이 등장하자 자리에 있던 다른 여자들은 한순간에 빛이 죽어버렸다.방기성 입장에서는 데리고 다니기 딱 좋은 여자였다.“방 대표님,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상공회 회장 자리는 원래 대표님 거 아니었습니까?”“그러니까요. 연륜이나 경험이나 뭘 봐도 고이한보다 대표님이 훨씬 위인데 대체 어떻게 그 자리를 가져간 건지.”주변에서 한마디씩 거들 때마다 방기성 손에 들린 술잔이 조금씩 세게 쥐어졌다.안 그래도 속이 뒤집히는데 저런 말들이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그때 심유빈이 타이밍 좋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부드러운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감겼다.“자기야,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방기성은 심유빈 손을 잡은 채 그대로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바깥 밤공기가 얼굴을 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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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5화

심유빈은 잠시 망설이는 척 시선을 내리더니 억울함이 섞인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근데 계약서에 관련 조항이 있어요, 자기야. 만약 아이가 생겼는데도 고이한이 계속 헌혈을 강요하면 어떡해요? 그러다 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요? 난 우리 아이 잃고 싶지 않아요.”말끝은 가늘게 떨렸고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듯한 기색이 어렸다.방기성은 심유빈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방기성이 심유빈에게 아이를 원한 건 단순히 젊고 예쁜 여자여서가 아니었다. 심유빈은 영리했고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자기 욕망을 감추지 않을 만큼 솔직했다. 하지만 방기성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한 야심은 사람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으니까.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방기성이 심유빈을 품으로 끌어당겼다.“걱정하지 마. 이건 내가 해결할게.”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고이한이 아무리 힘이 세도 법 위에 있을 수는 없어. 최고 변호사들 붙여서 계약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들여다보게 할 거야. 어떻게든 끊어내 줄 테니까.”심유빈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계약서에 적혀 있던 추가 조항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심유빈은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방기성은 자신과 고이한이 진짜 관계였다고 믿고 있었고 그렇다면 자신의 과거 같은 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방기성 정도 되는 사람이 움직인다면 고이한 쪽 변호사팀과 한번 제대로 맞붙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빨리 아이를 가지는 일이었다. 그래야 방기성이 끝까지 자기편에 서줄 테니까.심유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심유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당신 아이 낳아줄게요.”그러고는 감정이 북받친 얼굴로 그의 품에 조금 더 기대며 말을 이었다.“당신은 정말 나한테 너무 잘해줘요. 앞으로는 뭐든 당신 말 잘 들을게요.”방기성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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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6화

남은 건 데이터 정리 작업뿐이었다. 당장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급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주경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진행 상황을 물어오며 조급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런 연구는 애초에 단기간에 결론이 나는 분야가 아니었다.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었고 어쩌면 몇 년을 붙잡아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소예지 머릿속에는 연구 따위가 들어오지 않았다.소예지는 가방과 겉옷을 거의 낚아채듯 챙긴 뒤 빠른 걸음으로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차에 올라탄 소예지는 곧바로 집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뒤에서는 검은색 SUV 두 대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고이한과 임현욱 쪽에서 각각 붙여준 경호 차량이었다.젤리는 원래 겁이 많은 아이였다. 특히 자기보다 덩치 큰 개를 만나면 금세 놀라 꼬리를 말아버리곤 했다. 하지만 동네 산책은 늘 다니던 길이었고 단지 주변 지리 역시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길 자체를 잃어버릴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문제는 다른 사고였다.‘혹시 차 사고라도 난건 아닐까.’‘아니면 누가 데려가 버린 건 아닐까.’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소예지는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괜한 상상에 휘말릴 때가 아니었다.일단 찾아야 했다.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멀리서부터 양희순이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예지 차를 발견한 순간 거의 뛰다시피 달려왔다.“사모님, 아직 못 찾았어요. 근처 다 돌아봤는데 안 보여요...”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소예지는 급히 양희순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아요. 우리 같이 더 찾아봐요.”그 말을 하던 중 소예지는 무심코 뒤쪽을 돌아봤다.바로 뒤에 멈춰 선 검은 SUV 두 대.잠시 후 차량 문이 열리며 경호원들이 하나둘 내렸다. 하나같이 체격 좋은 남자들이었고 두 팀은 이미 여러 번 함께 움직인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맞췄다.그들이 받은 지시는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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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7화

전화기 너머로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곧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당신 먼저 올라가 있어. 내가 내려가서 찾을게.”소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양희순을 바라봤다. 얼굴에는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젤리가 사라진 뒤로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맺혀 있었다.거의 한 시간을 넘게 돌아다닌 셈이었다.소예지는 더 이상 양희순을 붙잡을 수 없었다.“아주머니는 먼저 올라가서 하슬이 좀 봐주세요.”“네, 사모님...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양희순은 연신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다가 천천히 단지 안쪽으로 걸어갔다.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멀리서 빠르게 걸어오는 고이한 모습이 보였다.검은 코트 자락이 밤바람에 흔들렸고 고이한은 단지 입구를 지나 곧장 공원 쪽으로 향해왔다. 마침 이문혁과 소예지도 주변을 한 바퀴 더 돌고 다시 돌아오던 참이었다.고이한은 소예지 앞에 멈춰 섰다.걱정과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을 잠시 훑어본 뒤 낮게 물었다.“어디서 놓쳤어?”소예지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아주머니 말로는 저쪽으로 뛰어갔대.”옆에 있던 이문혁이 바로 상황을 설명했다.“대표님, 저희 인원들이 차량으로 주변 계속 수색 중입니다. 소식 들어오는 대로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고이한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인원 더 불러. 관할 반려동물 구조센터에도 바로 연락하고 주변 상가 CCTV 확인할 수 있게 협조 요청해. 방법 가리지 말고 무조건 찾아.”“알겠습니다.”이문혁은 곧바로 움직였다.젤리가 고이한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아이였다.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도로 쪽을 바라봤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공원 안쪽은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아 군데군데 새까맣게 잠겨 있었다.시간이 갈수록 불안이 점점 더 커졌다.젤리라면 아무리 놀랐어도 집 방향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흔적도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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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8화

소예지 얼굴에서 순간 기대감이 무너져 내렸다.하얀 그림자를 봤을 때만 해도 정말 젤리라고 생각했는데 골목 안으로 뛰쳐나온 건 낯선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허탈함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가슴 안쪽이 싸하게 식었다.뒤에서 고이한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앞쪽 조금만 더 돌아보자.”소예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다시 주변 골목과 화단 사이를 샅샅이 훑으며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두운 골목 안쪽까지 직접 들어가 이름을 불러봤지만 끝내 아무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한 바퀴를 더 돌고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밤 10시 반이 넘어 있었다.고이한은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한 뒤 소예지를 바라봤다.밤공기 때문인지 소예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먼저 올라가. 하슬이도 기다릴 거고 나머지는 내가 계속 찾을게.”이 시간이면 고하슬이 슬슬 졸릴 시간이었다. 내일은 평일이라 어린이집도 가야 했다.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소예지는 천천히 차로 걸어가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하슬이 소파 위에 앉은 채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엄마! 아빠는 왜 같이 안 왔어요?”고하슬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옆에 있던 양희순은 긴장한 얼굴로 소예지를 바라봤다.소예지는 아주 작게 고개를 저어 보인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딸에게 다가갔다.“엄마랑 먼저 씻자. 씻고 나면 엄마가 책 읽어줄게.”그 말을 듣던 고하슬이 갑자기 눈을 깜빡였다.“근데 엄마... 나 젤리 못 봤는데요? 젤리 어디 갔어요?”소예지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오늘은 아빠 집에서 잔대.”“그렇구나!”고하슬은 별다른 의심 없이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젤리가 아빠랑 같이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는 눈치였다.그 모습을 본 소예지는 괜히 가슴 한쪽이 더 답답해졌다.밤이 깊어졌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고이한에게서 아무 연락도 없다는 건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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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9화

고하슬은 작은 책가방을 멘 채 아빠를 한번 바라봤다가 엄마를 한번 올려다봤다. 아직 어린데도 눈치는 유난히 빠른 아이였다.“엄마, 아까 아빠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어?”고하슬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소예지는 딸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엄마 오늘 경주에 회의하러 가야 해. 그동안 아빠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그러자 고하슬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좋아요! 대신 경주 갔다 오면서 선물 사와야 돼요!”잔뜩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소예지는 피식 웃고 말았다.“알았어. 엄마가 예쁜 거 사올게.”고하슬은 원래 낯가림이 아주 심한 아이였다. 돌 지나고부터는 낯선 사람만 보면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고 엄마 아빠 말고는 품에 안기는 것조차 싫어했다.처음에는 가사도우미를 셋이나 바꿔가며 붙여봤지만 결국 소예지가 모두 돌려보냈고 심지어 예민한 날에는 양희순조차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딸의 모든 걸 직접 챙기게 됐고 소예지에게는 고이한 말고는 고하슬을 온전히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이미 습관처럼 굳어 있었다.잠시 뒤 고이한이 고하슬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소예지도 급하게 노트북과 자료들을 챙긴 뒤 뒤따라 내려왔다.주차장에는 이미 김경환이 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공항까지 모셔다드리라는 지시 받았습니다.”소예지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김경환을 바라봤다.“김 비서님까지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려도 괜찮아요?”“괜찮습니다. 고 대표님께서 이동하는 동안 최대한 쉬시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회의 컨디션 중요하다고요.”그 말에 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 보면 어젯밤 거의 한숨도 못 잔 상태였다. 오후에 예정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세미나는 집중력을 조금만 놓쳐도 따라가기 어려운 자리였고 참석하는 연구진 역시 전부 세계 최상위권 엔지니어들이었다.결국 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서 자료라도 다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하지만 차에 올라탔어도 머릿속에서는 자꾸 젤리 생각이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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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0화

차가 도시 외곽 방향으로 빠르게 달리는 동안에도 고이한은 계속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시청 쪽 고위 관계자에게 직접 연락해 어젯밤 포획된 유기견들에 대한 처분 절차를 당장 중단시키라고 지시했고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 한마디에도 거절할 수 없는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A시 최고 재벌이 개 한 마리를 찾겠다고 이렇게까지 움직일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외곽에 자리한 낡은 건물 앞에 급하게 멈춰 섰다. 오래된 철문과 허름한 담장이 보이는 임시 유기견 포획 처리소였다.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고이한은 직접 문을 밀고 내려 빠른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갔다.안에서는 직원 몇 명이 종이컵에 담긴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부터 다른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자 전부 순간 굳어버렸다.정돈된 고급 수트 차림에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까지, 누가 봐도 이런 낡은 처리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남자였다.처리소 책임자는 조금 전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어떤 큰 인물이 잃어버린 개를 찾으러 올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설마 그 사람이 직접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책임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어... 어떤 견종 찾으십니까?”고이한 시선이 곧장 남자에게 향했다.“비글.”짧고 단호한 목소리였다.“어젯밤 9시쯤 포획된 개들 어디 있습니까.”그 한마디에 책임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뒤쪽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그는 급히 앞장섰다.좁고 눅눅한 복도를 지나 뒤뜰 쪽 창고 문이 열리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넓은 창고 안에는 차가운 철장 수십 개가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고 안에는 크기도 품종도 제각각인 유기견들이 웅크린 채 불안하게 짖어대고 있었다.바로 그 때었다.한쪽 철장에서 유난히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좁은 철장 안을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며 낑낑대는 소리에 고이한의 눈빛이 흔들렸다.젤리였다.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쪽 철장 앞으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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