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91 - 챕터 1200

1444 챕터

제1191화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인수인계를 마치고 소예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그런데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소파 위에 옷을 그대로 걸친 채 잠든 고이한이 있었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발소리를 죽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작성해야 할 문서가 남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소파 위 남자에게 아침 햇살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빛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은은한 후광을 만들어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상업계를 종횡무진하는 날카로운 엘리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이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소예지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문서를 작성하던 중, 소파 위 남자가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예지야... 가지 마.”손이 순간 멈췄다. 소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고이한은 여전히 잠든 상태였다. 이마가 가늘게 찌푸려진 채, 무언가 좋지 않은 꿈속에 빠져 있는 듯했다.소예지는 잠시 생각이 끊겼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문서 작업을 모두 끝낸 뒤에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오후 두 시, 고이한이 눈을 떴다.텅 빈 책상을 바라보니 소예지가 이미 뇌-컴퓨터 연구실로 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걸어가 옆에 놓인 일회용 물컵을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은은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책상 한켠에 놓인 만년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짙은 남색의 특별한 만년필로 평소 소예지가 흰 실험복 주머니에 꽂고 다니던 바로 그것이었다.고이한은 손으로 가볍게 만년필을 쓸어보다 조용히 자신의 옷 주머니에 넣었다.소예지가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주경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중증 혼수 환자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치료 방안을 담은 환자 분석 자료를 전송했고 자료는 마치 이미 한 명의 환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리 만큼 정밀하게 작성되어 있었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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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2화

소예지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상석에 앉은 고이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안경을 쓴 그에게서는 여전히 날카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눈빛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한 이사가 불만을 터뜨렸다.“10조 원이라고요? 고 대표님 뇌-컴퓨터 프로젝트에 이미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는데 지금까지 상업적 성과는 전무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또 10조 원을 추가하다니 이건 완전히 돈을 불태우는 겁니다!”회의실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절반 이상의 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뇌-컴퓨터 프로젝트의 민간용 부분만 유지하고 의료 방향 연구 투자는 포기하자고 제안합니다.”또 다른 이사가 말을 보탰다.“이렇게라도 해야 초기 투자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상석에 앉은 고이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반대 의견들을 들었다. 금테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칼날 같았다.“다른 의견 있는 사람은 모두 말씀해 주세요.”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흥분했던 주주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고 대표님 이건 감정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연배 이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룹은 주주들의 이익을 책임져야 합니다.”소예지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천천히 더 꽉 쥐었다. 예상대로였다. 뇌-컴퓨터 프로젝트가 정체되면서 쌓여온 주주들의 불만이 마침내 터진 것이었다.하지만 상석의 고이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여유롭고 침착하며 타고난 위엄이 회의실 전체를 조용히 장악하고 있었다. 흥분한 주주들조차 그 앞에서는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그럼에도 몇몇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도 투자가 너무 많은 건...”“바로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프로젝트를 고집하는 겁니다.”고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회의실 전체로 천천히 돌렸다.“소예지 박사가 이끄는 프로젝트는 반드시 훌륭한 성과를 낼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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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3화

이사회에서 뇌-컴퓨터 프로젝트 추가 투자안이 통과되자 소예지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강준석과 이야기를 나누며 민간용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이 매우 순조롭다는 것을 확인했다. 덕분에 고이한 그룹의 주가도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실험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주경호의 이름이 떠 있었다.“주 총장님.”소예지가 전화를 받았다.“소 박사님, 오늘 오후 세 시에 실험실로 갈 테니 연구 세부 사항을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요.”소예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주 총장이 직접 A시까지 찾아와 대화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마음속으로 품어왔던 추측을 더욱 확신으로 굳혀주었다.“주 총장님 혹시 뇌-컴퓨터 프로젝트를 가동해야 하는 대상이 따로 있나요?”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만나서 이야기해요.”오후 세 시 주 총장이 정확히 실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보다 한층 엄숙한 표정이었고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최근 수면 부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소예지의 추측은 점점 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정말로 신분이 특별한 환자가 뇌-컴퓨터 연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소 박사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나중에 해외 일정도 있어서요.”주 총장이 휴대용 노트북을 열었다.“이건 최신 뇌 스캔 데이터예요.”소예지는 화면에 펼쳐진 복잡한 뇌 이미지들을 꼼꼼히 살폈다.“이 환자의 손상 패턴은 어떻게 발생한 건가요?”“폭발 충격파 때문이에요.”주 총장이 짧게 답했다.소예지는 잠시 말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주 총장의 표정이 한층 더 엄중해졌다.“소 박사님, 이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이 기술은 앞으로 많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거예요.”그가 말을 이어갔다.“수많은 국경 분쟁에서 군인들이 유사한 뇌 손상을 입었어요. 뇌-컴퓨터 기술이 발전한다면 그 젊은 생명들을 구할 수 있어요.”소예지는 순간 놀랐다.‘원래 이 연구가 국경 근무 군인들을 위한 것이었나.’생각해 보면 납득이 갔다. 이런 종류의 외상은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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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4화

소예지는 실험복을 벗었다. 이지원은 데이터 기록을 위해 남겠다며 먼저 가라고 했고 소예지도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그때 한 인물이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소 박사님, 퇴근하시나요?”“김 비서님, 여기서 뵙다니요?”소예지가 놀라 물었다.“오늘 고 대표님께서 박사님이 늦게까지 일하신다는 걸 아시고 제게 안전하게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어요.”김경환이 말했다.소예지는 몸에 쌓인 피로를 느끼며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길, 김경환의 운전은 안정적이었다. 뒷좌석에 기댄 채 소예지는 말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그녀는 김경환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김 비서님, 수고 많으셨어요. 집에 가서 푹 쉬세요.”“감사 인사는 저보다 고 대표님께 하시면 됩니다. 저는 그냥 명령을 따른 것뿐이에요.”김경환은 이 마음을 자신의 공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말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 10분이었다.소예지는 부드럽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거실에는 따뜻한 황색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공간은 고요하고 안락했다. 양희순이 딸을 이미 침실로 데려갔겠거니 생각하며 현관에서 조심스럽게 거실로 발을 옮겼다.그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소파 위에서 고이한이 잠든 딸을 품에 안은 채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스포츠 중계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소예지가 살며시 다가가자 고이한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왔어.”“미안해. 내가 시간을 뺏었네.”소예지가 조용히 말했다.“신경 쓰지 마. 딸은 우리 둘 책임이니까.”고이한이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업고 위층에 재우고 올게. 쉬어.”소예지가 딸에게 손을 뻗으려 하자 고이한이 먼저 말했다.“내가 올려줄게.”여섯 살 꼬마지만 몸무게가 적잖았다.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들고 먼저 위층으로 향했다. 고이한이 딸을 안고 뒤따라왔다.소예지가 침실 문을 열자 고이한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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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5화

스미스 측에서 진행하던 약물 연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고이한의 다음 행동은 이미 예측 가능한 수순이었다.고이한은 오래전부터 심유빈을 위한 함정을 파두고 있었다. 실험 협조의 대가로 심유빈은 성양 그룹 지분 13%를 손에 넣었다. 심유빈의 욕심은 컸고 그 지분은 그녀의 야망을 채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고이한은 성양 그룹의 상장을 지원하며 바로 이 순간을 차근차근 준비해 온 것이었다.이제 실험이 끝나고 10년 동안 고이한을 조종해 온 심유빈에게 돌아온 결과물은 성양 그룹의 파산이었고 그녀 명의의 13% 지분은 순식간에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성양 그룹 내부의 위기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다만 주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안영수는 최대한 외부에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폭락의 후폭풍은 감출 수 없었다.심유빈의 별장 안에서 유리잔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울렸다. 붉은 와인이 사방으로 튀었다. 떨리는 손으로 주식 앱을 연 심유빈은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성양 주식 하한가.'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는 책상에 두 손을 짚은 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 명의의 13% 지분은 이미 사라진 것이었다. 이 지분은 수년에 걸쳐 치밀하게 계획하고 고이한에게서 끌어낸 최대의 자산이자 미래를 위한 안착의 기반이었다.아버지가 경영을 잘못했다고 해도 주가가 이렇게 곤두박질칠 이유는 없었다. 명백히 보이지 않는 손이 성양 그룹을 압박한 것이었다.심유빈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분노가 번졌다. 이윽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고이한... 정말 잔인하군.”지난 10년 동안 그녀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혈액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고이한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다. 그 과정에서 쌓아 올린 자원과 인맥으로 성양 그룹의 13% 지분까지 손에 넣었다. 그때는 이것이 함정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이한이 이렇게 빠르게 발을 빼고 성양 그룹을 몰락으로 이끌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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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6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이미 고이한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겉으로는 성양 그룹의 상장을 도와주는 척했지만 그 속에는 오늘의 파산으로 이어질 복선이 처음부터 숨겨져 있었다.“유빈아, 듣고 있니?”전화기 너머 안영수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빨리 와라. 오늘 반드시 고 대표를 만나야 한다. 그 사람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어.”심유빈의 마음은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고이한이라는 단두대의 집행자가 성양을 도와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과거 자신의 한 선택이 결국 성양 그룹의 몰락으로 이어질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아빠, 제 말을 들어봐요.”심유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고이한은 더 이상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부탁해도 소용없어요.”“무슨 소리야? 고 대교가 늘 우리를 잘 챙겨주지 않았나?”안영수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섞여 있었다. 그동안 성양이 누려온 혜택은 분명 실재했고 은행 대출 문제, 자원 승인 문제 등 고이한의 손길로 해결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아빠, 솔직히 말씀드릴게요.”심유빈은 결심했다. 이제는 수년 동안 연기해 온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서 드러낼 때였다.“제게 고이한과의 관계는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과 달라요. 지난 수년간 그저 그의 어머니가 제 피로 생명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겉으로만 사이좋게 지냈을 뿐이에요.”전화기 너머 잠시 정적이 흘렀다.몇 초 후, 안영수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유빈아,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혹시 그 사람과 뒤에서 사태를 키운 거냐? 이번 성양 위기, 네가 일으킨 거 아니냐?”심유빈은 차갑게 웃었다. 아버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마치 보물처럼 섬기더니 막상 성양 그룹이 파산 직전에 몰리자 모든 잘못을 그녀에게 덮어씌우려 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자신과 어머니를 빈민굴에 내버려두었던 아버지의 냉정함과 무정함을 알고 있었다.“아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성양 그룹 위기는 제 잘못이 아니에요.”“너도 지분을 갖고 있잖아. 유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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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7화

“이제부터 그 여자의 전화는 일절 받지 마.”고이한의 목소리는 냉혹했다.“예, 알겠습니다.”김경환이 전화를 끊고 업무 보고를 이어갔다.심유빈은 끊긴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고이한은 이제 정말로 나를 외면하겠다는 건가...’굴욕과 분노가 뒤섞인 눈물이 눈가를 적셨지만 표정에는 끝까지 지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심유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마지막 희망을 찾아 방기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바쁘세요?”목소리에 울먹임이 배어 있었다.“무슨 일이야, 유빈아, 누가 괴롭힌 거야?”방기성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안쓰러움이 묻어났다.“아무도 안 괴롭혔어요. 단지 아빠 회사가 어려워졌어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어요?”“성양 그룹 말하는 거야?”방기성은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맞아요. 주가에 문제가 생겼어요. 혹시...”방기성이 먼저 말을 끊었다.“유빈아, 안 도와주는 게 아니라 지금 성양 상황에 손댔다가는 누구든 피를 보는 일이라고.”“그냥 투자만 조금 해 주시면...”“유빈아, 내가 너희 아버지 회사 상황을 알아봤어.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거야. 빨리 파산 신청하고 빚이라도 조금 줄여.”심유빈의 마음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쓴웃음이 입가에 번졌다.“방 대표님, 저를 좀 생각해서라도 도와줄 수 없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방기성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유빈아, 난 여자가 부족한 적도, 피아노 칠 줄 아는 여자도 부족한 적 없어. 알겠어?”그 말은 귀를 직격하는 뺨과 같았다.심유빈은 그제야 깨달았다. 방기성에게 그녀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했다.“유빈아, 걱정하지 마. 네 집이 망하면 내가 너 먹여 살려줄게.”방기성이 가볍게 덧붙였다.전화가 끊기는 순간 심유빈의 몸이 굳어버렸다. 고이한의 냉혹함과는 결이 달랐다. 방기성은 교활하고 무정한 독사 같은 존재였다. 처음부터 믿어선 안 될 인간이었다.성양 그룹의 위기는 가족 전체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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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8화

“윤재야. 다... 다 지난 일인데 왜 굳이 그걸 꺼내?”“지난 일이라고?”도윤재가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알고 있어? 나한테는 원래 밝은 미래가 있었어. 하지만 너 때문에 과학자가 될 기회를 포기했고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내 이력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았어. 그런데 너 오히려 나를 멀리하기만 급급했잖아.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라면서.”안채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물 한 모금을 들이켜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도윤재, 나도 고마워했잖아. 나중에 아빠 회사에 자리 마련해 줬고 부사장까지 됐잖아...”“그 부사장이 어떻게 만들어진 줄 알아?”도윤재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술 마시다 위출혈로 병원에 실려 가고, 아버지 회사에서 개처럼 일했어. 그런데 지금 성양은 망했고 나는 그저 ‘부사장’이라는 껍데기만 남았어. 아무것도 아니라고!”그 순간 안채린은 몸이 움찔했다. 도윤재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어딘가 무서웠다.“도윤재, 나 아직 할 일 있어. 먼저 갈게.”안채린은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막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리가 아찔하게 흔들렸다.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솟구쳤다.“도윤재, 너... 내게 뭘 먹인 거야?”“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말 잘 듣게 하는 거지.”도윤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회사 상황 알고 싶다며? 알려줄게. 구제는 없어. 성양은 완전히 끝났어. 이제 너도 더 이상 귀한 재벌가 아가씨가 아니야. 곧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그리고 예전에 너 대신 책임지게 한 일,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지.”“도윤재, 감히... 감히 손대기만 해봐!”안채린은 발버둥 치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몸이 힘없이 소파로 무너져 내렸다.“네가 그런 말 할 자격 있어? 네 아버지도 누굴 건드렸는지 모르는 것 같더라. 성양 그룹이 망하면 넌 평범한 사람이 될 거야. 심지어 나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겠지.”도윤재는 안채린의 턱을 잡으며 눈빛에 복수의 쾌감을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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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9화

안채린은 도윤재를 천 번이고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감옥에 갈 위기이고 자신의 명성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마음이 급격히 조여왔다.그녀는 냉정하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도윤재가 성양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일을 막아야만 했다.도윤재의 눈에는 광기와 함께 옅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완전히 잔혹한 인간은 아니었다. 높은 학력과 꿈 많던 청년이었지만 현실에 치이고 몰려 이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안영수의 약점을 손에 쥔 채, 마음 한편에서 안채린에 대한 왜곡된 감정을 키워온 것이다. 순진하게도 그는 지금 6년간 마음속으로 사랑해 온 소녀가 굴복하여 자신의 여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안채린은 이를 악물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곧 감정을 가라앉혔다. 지금 도윤재를 자극해서는 안 됐다. 최소한 지금은. 그녀는 아버지와 자신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쌓인 분노와 혐오를 억누르며 무릎을 끌어안고 도윤재를 바라봤다.“좋아... 네가 말대로 할게.”도윤재의 눈동자가 순간 격렬한 광기로 가득 찼다.그는 무릎을 꿇고 다가와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그래, 채린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대학 4년 내내 넌 날 투명 인간 취급했지만 난 항상 거기 있었고 내 마음속에서 넌 언제나 여신 같았어.”안채린은 살짝 얼굴을 돌렸다.도윤재의 웃음이 순간 굳어졌다가,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괜찮아. 이제 안채린은 내 여자야.’“그럼 우리 아빠와 나는 살려줄 거지?”“물론이지. 네가 내 여자친구라면 네 아빠는 내 장인이 될 텐데 내가 어찌 너희를 해치겠어?”“아빠 회사가 엉망이야. 네가 도와야 해.”도윤재가 한숨을 내쉬었다.“성양 그룹의 현재 상황이 파산 후 재편인지, 누가 인수하는 건지, 아직 명확하지 않아.”“윤재야. 한 가지 조건 있어. 앞으로 6개월 동안 우리 관계를 공개하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강요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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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0화

집에 돌아왔지만 부모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안채린은 욕실로 들어가 온몸을 힘껏 문질렀다. 마치 자신에게 남아 있는 더럽고 불쾌한 모든 것을 씻어내려는 듯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완전히 절망으로 몰리지 않는 한, 지금은 도윤재와 맞서 싸울 수 없었다.성양 그룹의 위기는 계속 확산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또 한 차례 불리한 소식이 들려왔다.한편 소예지는 딸과 함께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하슬은 신나게 앞서 달리며 물건을 구경했다. 작은 포니테일 머리가 흔들리며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었다. 소예지 뒤에는 이문혁이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손님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소예지는 온화한 눈빛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딸을 바라봤다.작은 아이가 초콜릿 진열대 앞에 멈춰 서더니 커다란 눈에 간절함을 가득 담은 채 뒤를 돌아봤다.“엄마, 나 초콜릿 하나 사도 돼요?”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덧붙였다.“한 개만.”소예지는 딸의 귀여운 표정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좋아, 하나 고르자.”“고마워요, 엄마!”고하슬은 행복한 얼굴로 진열대를 훑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그때 소예지는 여유롭게 주변을 살피다 진열대 너머에서 걸어오는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 고이한이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그가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이 마치 중요한 회의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모습이었다.“아빠!”고하슬은 초콜릿도 잠시 잊고 그의 다리에 달려가 안기더니 재빨리 손을 낚아챘다.“아빠, 엄마가 초콜릿 사준대요. 같이 고르러 가요!”고이한은 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차갑던 눈빛이 딸 앞에서는 눈 녹듯 부드러워졌다.소예지 옆을 지나치며 그의 시선이 잠깐 그녀를 스쳤다. 두 사람의 눈길이 공중에서 교차했다.“방금 회의 끝났지? 두 사람 보러 왔어.”낮고 온화한 목소리였다.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고이한이 딸과 함께 초콜릿을 고르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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