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61 - Chapter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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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소예지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심유빈은 세련되면서도 은근한 관능이 묻어나는 투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등 뒤로 흘린 채 여유롭게 걸어왔다. 그 뒤를 하종호가 조용히 따랐다.심유빈도 무심결에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소예지를 보는 순간,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놀란 건지, 의도된 연출인지 알 수 없는 채 중심을 잃고 이내 고이한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고이한은 망설임 없이, 긴 팔을 자연스럽게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어깨를 부드럽게 받쳐주었다하종호는 재빨리 옆자리에 앉았고 고이한의 부축을 받은 심유빈도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긴 뒤, 고이한을 향해 은근한 눈웃음을 건넸다.그리고 곧 무대 위의 소예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에는 오직 소예지만이 읽어낼 수 있는, 은밀한 우월감이 담겨 있었다.방금 막 도착한 심유빈은 소예지가 왜 무대 위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이 행사 팀의 직원으로 참여해 개회 인사 정도를 하고 있는 거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그러나 바로 그다음 순간, 소예지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이제, 마법 같지만 마법이 아닌 장면을 먼저 보시겠습니다.”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가로지르자, 그녀의 손목에 찬 스마트 밴드가 반응했고 회장의 조명이 순식간에 바뀌었다.짙고 깊은 심해 같은 블루 톤이 회장 전체를 감싸며 그녀의 등 뒤에서 수만 개의 형광 입자들이 모여 회전하는 세포 모델을 만들어냈다.“지금 보시는 장면은 T 림프구를 위한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의 작동 방식입니다.”고요한 회장에 울려 퍼진 소예지의 목소리는 낮고 청아했으며 차분하면서도 자신감에 찬 어조로 모든 시선을 사로잡았다.홀로그램 속에서는 세포막이 열리며 그 안을 유영하던 나노 로봇 하나가 금빛 탐침을 뻗어 병든 미토콘드리아 DNA를 정밀하게 찔러 들어갔다.그 모든 과정에서 소예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완벽한 설명을 이어갔다.과학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그녀 자신이 증명하는 듯한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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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소예지는 포인터 펜 손에 들고 본격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스크린을 향해 몸을 돌리며 발표 내용을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도 관중을 향한 예의 바른 시선을 잃지 않았다.그녀의 움직임에는 여유와 절제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과학 이론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올 때면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청아하면서도 단정한 음성에는 은근한 카리스마가 배어 있었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설득력이 있었다.앞줄에 앉아 있던 외국인 방문단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집중했고 몇몇은 아예 노트북을 꺼내 발표 내용을 실시간으로 정리하기까지 했다.비록 뒷줄에 앉은 학생들 중 상당수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화면에 함께 제공된 한글 자막 덕분에 흐름을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이한의 눈빛은 여전히 깊었고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그에 비해 윤하준과 하종호는 발표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며 소예지의 과학적 역량에 완전히 매료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반면, 안채린의 손톱은 그녀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솔직히 말해, 소예지의 발표는 듣는 것조차 벅찼고 그녀처럼 유창하고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어느덧 발표는 중반을 넘기고 있었고 스태프 한 명이 조용히 연단 위로 올라와 찻잔을 올려두었다.소예지는 그 틈을 타 차를 들어 몇 모금 마셨다.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부드러운 흑발이 곡선을 이루며 아름답게 얼굴선을 감쌌고 안경 너머로도 감춰지지 않는 맑고 지적인 눈빛이 반짝였다.특히 그녀가 등을 돌릴 때마다 셔츠와 H라인 치마가 그려내는 실루엣은 군더더기 없이 매끈했고, 하얗고 가느다란 종아리는 예술품처럼 우아하게 빛났다.오늘 그녀의 스타일은 우아하면서도 단정했고, 기품과 단아함이라는 두 가지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모습이었다.그녀의 의상은 품위 있으면서도 단정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고급스럽게 끌어올렸다.윤하준은 옆에 놓인 생수를 집어 들어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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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강준석 역시 두 사람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지금 소예지를 은근히 독차지하고 있는 남자가 하필이면 자신의 선배, 노아였으니 말이다.물론 노아는 어디까지나 격식을 갖춘 인사로 소예지를 가볍게 안았을 뿐이고 소예지 역시 예의상 받은 포옹이었다.노아는 소예지를 바라보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상상 속에서도 당신은 멋진 분일 거라 짐작했지만 실제로 뵈니 훨씬 더 아름다우시군요.”소예지는 의연한 미소로 답했다.“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우리가 오히려 영광이죠.”그때 소예지의 시선이 무대 아래에 있던 윤하준을 향했다.소예지는 발표를 마친 뒤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그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발견하곤 환한 미소를 지었고 윤하준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화답했다.그 장면을 심유빈이 놓칠 리 없었다. 두 사람의 눈빛 속 교감을 포착한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이제 누군가는 질투 좀 하겠는걸?’곧 고이한과 심유빈 일행이 자리를 떴고 그 틈을 타 이서연은 소예지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안채린이 노려보는 바람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학교 측 인사들이 차례로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고 소예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양 교수님?”발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로 시청했던 양정화는 벅찬 감정을 누르며 목소리를 낮췄다.“역시 소 교수가 널 아주 잘 키웠구나. 네 발표, 내 것보다도 훨씬 좋았어.”그녀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칭찬과 자부심이 함께 묻어 있었다.한편, 안채린은 이서연을 데리고 고이한과 심유빈의 뒤를 따라잡았다.“고 대표님,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업무상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정중한 요청에 먼저 반응한 건 심유빈이었다.“여기서 말해도 괜찮아.”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채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 순간, 이서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고이한을 바라볼 수 있다니, 마치 꿈만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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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비록 이혼 합의서에는 이미 서명했지만 재산 분할 문제로 인해 아직 정식 이혼 신고조차 못 한 상태였다.상대측에서 제시한 처리 기간은 최소 반년이었고 그 탓에 지금 소예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이한과의 별거뿐이었다.30분 후.익숙한 차 한 대가 그녀의 집 앞에 당당히 멈춰 섰다. 고이한의 차였다.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며 원래 소예지가 사용하던 주차 자리에 차지하고 있었고 소예지는 결국 근처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현관문을 열자, 안에서부터 딸아이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거실로 들어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이한과 바닥에 주저앉아 새 장난감을 열어보는 고하슬의 모습이었다.“사모님, 오셨어요.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은 여기서 드시고 가신대요. 전 시장에 좀 다녀올게요.”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낸 양희순이 그렇게 말하자, 소예지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재료로 아무거나 하세요.”굳이 그 남자를 위해 정성스레 저녁을 준비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초대한 적도 없고 그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소예지는 고이한이 이 집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나 오늘 카레 먹고 싶어요!”고하슬이 깡충깡충 뛰며 외치자, 양희순이 웃으며 대답했다.“마침 집에 채소가 떨어졌네요. 금방 사 올게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핑계를 삼아 집을 나섰다.소예지는 그녀의 속내를 뻔히 알 수 있었다.분명, 자신과 고이한에게 단둘만의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주려는 의도였다.“엄마, 아빠가 새 장난감 사줬어요!”고하슬이 자랑스럽게 장난감을 흔들어 보이며 말하자 소예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기분이 좋겠네, 우리 하슬. 우선 장난감 가지고 놀고 있어. 엄마는 잠깐 올라가서 세수 좀 할게.”오늘은 가볍게 화장만 했지만 소예지는 화장을 오래 얼굴에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무엇보다 고이한과는 나눌 대화조차 떠오르지 않았기에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세수를 마친 그녀가 2층 거실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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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양희순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사모님, 그래도 대표님은 정말 좋은 아버지세요.”부정할 수 없었다.적어도 딸이 태어난 이후, ‘아버지’로서의 역할만큼은 완벽하게 해낸 사람이었다.“아주머니, 저녁 준비해 주세요.”소예지는 짧게 말한 뒤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요즘 그녀는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고 딸과 함께하는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엄마의 따스한 사랑이 담긴 하루하루 속에서, 그리고 종종 찾아오는 강준석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고하슬은 해맑게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날 아침 여덟 시, 소예지는 고이한의 별장에 들러 피아노를 가져가기로 했다.딸과 함께 피아노를 연습하려면 집에 피아노가 필요했다.그녀는 먼저 고이한에게 집에 있는지, 피아노를 옮기러 가도 괜찮은지 문자를 보냈고 그의 답장은 짧고 간단했다.[괜찮아.]잠시 후, 이삿짐 기사들과 함께 별장 앞에 도착한 소예지는 마당에 주차된 붉은 페라리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분명 심유빈의 차였다.‘아직 이혼 서류도 정리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 여자를 들여 살게 한 거야?’그때, 2층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고이한이 계단을 내려왔다.편한 홈웨어 차림에 눈빛은 여전히 나른했다.소예지는 감정을 억누르며 담담히 말했다.“우린 피아노만 옮기고 바로 나갈 거야.”고이한은 말없이 정수기 쪽으로 걸어가더니 소예지가 늘 사용하던 컵을 꺼내 물을 따라 내밀었다.“물 한 잔 마셔.”“됐어.”바로 그때, 이삿짐 기사 중 한 중년 남성이 갑자기 허리를 움켜쥐며 신음했다.“아이고, 허리야! 천천히 좀 해. 허리가 삐끗했네.”사실 소예지도 처음부터 그가 연세에 비해 무리를 하는 건 아닐지 걱정하고 있었다.그가 괜찮을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고이한이 물컵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갔다.“제가 할게요. 어르신은 쉬세요.”노인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고이한은 다른 직원 둘과 함께 무거운 피아노를 조심스레 나르기 시작했다.그의 뒷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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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소예지의 눈가가 순간 촉촉해졌다. 전화를 붙든 채 최현숙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할머니, 죄송해요. 저희... 정말로 이혼 절차를 진행 중이에요.”“예지야,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있으면 얼른 말해. 할미가 대신 혼내줄게. 제발 이혼은 하지 마라, 얘야...”최현숙의 간곡한 목소리에 소예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할머니, 저희 사이... 이제 어쩔 수 없어요. 할머니도 건강 잘 챙기시고요. 저, 자주 찾아뵐게요.”“걱정 마라. 이혼을 해도 내가 절대 그 애가 너를 홀대하게 두진 않을 거야.”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이젠 저희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할머니.”한편, 심주원은 여전히 이혼 재산 분할 문제를 확인하고 있었다. 협의서에 두 사람 모두 서명은 했지만 재산 문제 정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전화를 끊은 소예지는 지난번 최현숙이 건네준 그 카드 한 장을 떠올렸다.“조만간 돌려드려야 할 텐데...”며칠 뒤, 박시온이 밥을 사겠다며 연락을 해왔고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문이 열렸고 낯익은 두 여자가 들어섰다.바로 심유빈과 안채린이었다.그들은 이복자매였지만 닮은 얼굴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유빈 이모!”가장 먼저 그들을 알아본 건 고하슬이었다.심유빈은 고하슬에게 늘 불만이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다정한 척 연기를 했다.“하슬아, 오랜만이다! 훨씬 예뻐졌네.”한편, 안채린은 소예지를 힐끗 바라보더니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휴대폰만 들여다봤다.소예지는 심유빈을 바라보며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심유빈 역시 안채린을 향해 말했다.“우리는 저쪽에 가자.”박시온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참, 어디를 가든 꼭 마주친다니까...”하지만 고하슬이 함께 있는 상황이었기에 소예지는 분위기를 바꿔 즐거운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딸에게 새우를 까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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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저희는 지금 이혼 절차를 진행 중이에요. 앞으로 하슬이도 저와 함께 지낼 거예요.”소예지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지만 윤하준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수경한테서 들었어요. 고 대표 쪽에서는 아직 재산 평가 중이라고 하던데요.”“네, 저희는 이미 별거 중이에요.”“하슬이는 어느 학교에 다니나요?”뜻밖의 질문에 소예지는 잠시 멈칫하다 조심스럽게 되물었다.“혹시 이안을 전학시키실 생각이세요?”“상황을 봐야죠. 만약 이안이가 정서적으로 너무 힘들어하면 하슬이랑 같은 유치원으로 전학시키는 것도 고려해야죠.”소예지는 적잖이 놀랐다. 윤하준이 조카인 이안을 아끼는 마음은 거의 아버지에 가까웠다.소예지는 조심스레 고하슬이 다니는 유치원을 알려주었고 두 사람의 대화는 그쯤에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그 후 소예지는 딸에게 새 학기를 앞두고 여러모로 심리적인 준비를 시켜주었다.고하슬은 새 유치원에 대해 기대에 찬 눈빛을 보였고 소예지는 이안이 전학 올 가능성에 대해 딸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윤하준은 아직 단지 ‘고려 중’일 뿐이었기에 소예지는 그가 실제로 전학시킬지 확신할 수 없었다.개학 전날 밤, 10시 무렵.소예지의 휴대폰으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이한이었다.「내일 하슬이 새 유치원에 같이 가지.」그의 방문을 원치 않던 소예지는 답장하지 않았다.아침 7시쯤, 2층으로 올라온 양희순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사모님, 고 대표님 오셨어요.”하지만 이내 굳어진 소예지의 얼굴을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고하슬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신이 나서 달려가며 외쳤다.“아빠! 아빠!”고이한은 무릎을 굽혀 아이의 어깨를 감싸안고 교복 차림을 눈여겨보았다.그리곤 손끝으로 딸의 콧등을 가볍게 톡 건드리며 웃었다.“새 학교에 가게 돼서 좋아?”“네! 너무 좋아요!”고하슬은 동그란 턱을 치켜들며 환하게 대답했다.“아빠가 같이 가줄게.”고이한이 웃으며 딸의 손을 잡자,“네! 엄마도 빨리 와요!”아이는 엄마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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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고이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도대체 이 남자는 또 무슨 꿍꿍이야?’그러자 고이한의 입가에 억울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정말로 할머니 생각이야. 믿기지 않으면 직접 전화해서 여쭤봐도 좋아.”하지만 소예지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가 어떤 속셈을 품고 있든,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입학식이 끝나자 두 꼬마 여자아이가 함께 점심을 먹자며 졸랐다. 결국 세 명의 어른은 두 아이를 데리고 근처의 레트로풍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따뜻한 감성이 넘치는 작은 테라스가 외부에 마련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테라스에서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소예지는 테라스 옆에서 이메일을 읽다가 어느새 그 내용에 몰입해 있었다.“엄마!”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예지는 흩어져 있던 생각을 거두고 현실로 돌아왔다.고이한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린 얘기 다 끝났어. 이제 돌아가자.”소예지는 딸의 손을 잡고 나와 이안에게 인사를 건넨 뒤, 각자의 차에 올랐다.소예지의 집은 학교에서 차로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이한은 모녀를 집에 데려다준 뒤, 차창을 내리며 말했다.“내일 MD 본사 고위층이랑 저녁 자리가 잡혔어.”소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국내 최고 수준의 AI 기술과 협업을 원한다면 결국 고이한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MD의 AI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으니까.다음 날 아침딸을 학교에 데려다준 후, 소예지는 곧장 실험실로 향했다. 그동안 여름 방학 기간에는 딸을 돌보기 위해 재택근무를 허락받았지만 개학한 지금 더 이상 나태할 수는 없었다.오전 10시, 강준석이 실험실 앞에서 차를 몰고 와 대기하고 있었다. 소예지와 이서연은 뒷좌석에, 안채린은 조수석에 탔다.“이번에 MD 고위층이 오신다던데, 저번에 MD에서 발표한 AI 논문도 엄청 화제였잖아.”안채린이 흥분한 듯 말하자 이서연도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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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안쪽 테이블에는 이미 고이한과 두 명의 중년 남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이한과 눈이 마주친 순간, 소예지는 망설임 없이 그와 가장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그 옆으로 안채린과 이서연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잠시 후, 주현우가 일어나 일행을 소개하기 시작했다.“이분은 고 대표님입니다. 우리 회사 최대 투자자이자 경영 책임자시고요. 옆에 계신 분들은 유 이사님과 양 이사님으로, 모두 회사의 핵심 인력입니다.”이어 그는 소예지를 비롯한 네 사람도 간략히 소개했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마자 고이한은 찻잔을 들고 맞은편의 소예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무언가 복잡한 생각이 흐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알 수 없었다.그제야 주현우는 잠시 전의 대화를 떠올리며 소예지 쪽을 바라봤다.“우리가 조금 전 DNA 오리가미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요. 이어서 선생님의 고견을 들을 수 있을까요?”고이한은 옆 사람과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도, 테이블 위 모든 시선도 일제히 소예지에게 향했고 몇몇은 놀라움이 섞인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주현우는 회사 내에서 MDAI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고 그런 그가 갓 사회에 나온 듯한 젊은 여성에게 진지하게 의견을 묻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뜻밖이었다.사실 소예지는 연예인도, 유명 학자도 아니었다. 논문에 간간이 이름이 오를 뿐이었고 눈에 띄는 외모는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아직 대학생일 거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고이한의 시선 역시 소예지에게 고정되었고, 그 안에는 호기심과 탐색이 서려 있었다.소예지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고 머릿속 자료를 재정리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안채린의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졌다.‘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아까 괜히 나서더니...’이 자리에서 변변한 말 한마디 못 한다면 그녀는 결국 무식함만 드러내게 될 것이다.그리고 마침내, 소예지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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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이서연과 안채린도 고이한을 향해 잔을 들며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소예지에게 순서가 돌아오자, 그녀는 그저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 애초에 잔을 들 생각조차 없는 눈치였다.순간 식탁 위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그때 고이한이 슬며시 웃으며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그의 제안에 소예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죄송해요, 전 술을 못해서요.”뜻밖의 거절에 잠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고이한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잔을 내려놓았다.“그럼 차라도 한잔하시죠.”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고이한은 이내 얼굴이 굳더니 급히 전화를 받았다.“넘어져서 병원에 갔다고? 지금 어느 병원이야?”그의 말에 자연스레 소예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고이한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집에 어르신이 넘어져 병원에 가셨다네요. 실례지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그 말에 모두 자리를 함께 일어나 배웅했다.소예지 옆을 지나가던 고이한의 손등이 무심히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그 순간이 우연이었는지, 혹은 의도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소예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덤덤히 말했다.“저도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로비를 빠져나와 복도를 걷던 소예지는 끝자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이한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는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가자. 할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하실 거야.”잠시 망설이던 소예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많은 최현숙이 넘어졌다면 당연히 심각한 상황일 수 있었다.두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안채린과 이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병원에 도착하니 병실 안에는 이미 진가영과 고수경이 와 있었다.문을 열고 나란히 들어선 소예지와 고이한을 보자, 두 사람 모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혼한다더니, 둘이 같이 온 거야?’“할머니,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셨어요?”소예지는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냥 다리가 좀 부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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