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51 - Chapter 160

338 Chapters

제151화

“심 변호사님, 앉으시죠.”고이한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긴말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10분 뒤에 일정이 있어서요.”심주원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응수했다.“고 대표님, 오해하신 듯하네요. 저는 귀사에 지원하러 온 게 아닙니다.”고신 그룹 법무팀은 법조계에서 ‘꿈의 직장’이라 불릴 만큼 매력적인 자리였지만 심주원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누구의 울타리 안에도 갇히고 싶지 않았다.고이한은 불필요한 말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그럼 용건만 말씀하시죠.”심주원은 서류 가방에서 조용히 이혼 협의서 한 장을 꺼내 들고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저는 고 대표님의 아내, 소예지 씨의 법적 대리인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혼과 관련해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그 말에 고이한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그는 책상 위의 협의서를 깊이 들여다보았지만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정말 내 아내가 이혼을 원한다고 했습니까?”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심주원을 응시했다.“소예지 씨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셨고 이 협의서는 그분의 요청에 따라 제가 초안한 것입니다. 이미 본인 서명도 완료된 상태이고요. 한 번 검토해 보시죠.”심주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협의서를 두 손으로 정중히 내밀었다.고이한은 침묵 끝에 손을 뻗어 협의서를 받아 들었다. 몇 줄을 읽는 듯하더니 이내 서류를 무심히 테이블 위로 툭 떨어뜨렸다.“그 일은 아내와 직접 얘기해 본 후에 결정하겠습니다.”그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그 말은 곧 이 자리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고 대표님 측 변호사님과의 협의에 대비해 준비해 두겠습니다.”마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측이라도 한 듯, 심주원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고이한처럼 거대한 자산을 쥔 재벌과의 이혼 소송은 결코 간단한 부부 갈등이 아니었다. 이건 단순한 싸움이 아닌 전략과 시간,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는 치열한 법적 전쟁
Read more

제152화

소예지는 이미 그가 쉽게 이혼에 응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그럼 법정에서 보는 수밖에.”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뜨려 하자, 고이한이 따라 일어났다. 그는 단숨에 걸음을 옮겨 소예지의 손목을 붙잡았고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이혼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줄게.”소예지는 그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한 발짝 물러섰다. “아니, 이 이혼 반드시 해야겠어.”고이한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조금만 더 시간을 줘.”그 말과 함께 그는 차 키를 집어 들고 급히 집을 나섰다.소예지의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또 무슨 꿍꿍인 거지? 이혼을 질질 끌겠다는 건가?”잠시 후, 소예지도 집을 나섰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오래된 주택이 밀집한 동네였다. 이 집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이었다.외벽은 바람과 비에 닳아 제법 낡았지만 정기적으로 사람을 불러 관리했기에 집 내부는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대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조용히 거실 조명을 켰다.따뜻한 불빛 아래, 이곳이 앞으로 자신과 딸이 살아갈 새 보금자리가 되리라는 걸 실감했다.그녀는 곧바로 심주원에게 연락했고 그는 고이한의 태도를 분석하더니, 차분히 조언을 건넸다.“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고이한 씨가 먼저 자산 정리를 끝내야 이혼 조건도 구체적으로 협의할 수 있어요.”그리고 며칠 뒤, 목요일 오후.소예지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딸을 데리러 시댁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거실 한편에는 큼직한 여행용 트렁크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진가영은 이미 출국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하슬아, 이제 엄마랑 같이 집에 가야지. 나중에 할머니가 금방 돌아와서 같이 놀아줄게.”진가영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이내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고하슬도 할머니를 꼭 껴안으며 애틋하게 말했다.“할머니, 꼭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그래,
Read more

제153화

소예지의 마음은 한층 더 가라앉았다.‘이한 씨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상대가 바로 그들 둘이라니...’사진 속 심유빈은 달콤한 미소를 띤 채 나들이에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 어디에도 며칠 전 실신했던 그 연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 며칠 동안 정성껏 간호라도 했나 보네.’그렇다면 더더욱 결단을 내려야 했다.“하루빨리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심유빈을 고씨 집안의 며느리로 들이면 될거아냐... 가족이란 이름으로 잘들 살아보라지.”다만 고이한이 해외에 나가 있는 상태라면 적어도 열흘에서 보름은 국내에 없을 테니 이혼은 자연스럽게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그때, 고이한한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나 요즘 해외에 나와 있어. 이혼 얘기는 귀국하고 나서 다시 해.]그 문자를 본 순간, 소예지의 입꼬리가 냉소적으로 올라갔다.[그래.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처리해 줬으면 좋겠어.]그렇게 답장을 보낸 다음 날, 양희순까지 강아지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그렇게 세 사람은 소박한 집에서 평화롭고도 다정한 한 주를 보냈다.일주일이 지나던 어느 날, 강준석이 집에 들렀고 고하슬에게 선물까지 사 들고 온 걸 보니 마음을 써준 것이 분명했다.소예지가 이혼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그가 조용히 물었다.“이혼 절차는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잘 모르겠어. 고 대표가 지금 해외에 있어서 그이가 돌아오고 나서야 정식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강준석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아이 돌보는 건 내 전문이니까.”그 말에 소예지가 슬며시 웃었다.“그래. 아이 맡길 사람이 필요할 땐 기꺼이 선배한테 부탁할게.”“언제든지 말만 해.”강준석의 눈빛은 맑고 단단했으며 마치 그녀를 향한 어떤 결심이 담겨 있는 듯했지만 소예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그 무렵, 고이한의 별장 앞에 흰색 페라리가 조용히 멈췄다.고수경이 손에 선물을 든 채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Read more

제154화

어느덧 보름이 훌쩍 지나 있었다.D 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조용히 활주로에 내려앉았고 공항에는 이미 차량 행렬이 도착해 있었다.가장 먼저 차에 오른 이는 진가영이었다. 그녀는 차량에 오르자마자 조용히 눈을 감고 휴식에 들어갔다.그 뒤를 따라 고이한이 가장 앞 차량에 탑승하는 모습을 지켜본 심유빈은 말없이 매니저가 대기하고 있던 밴에 몸을 실었다.이번 여행은 세 사람 모두에게 깊은 피로를 남긴 듯했다. 각자의 얼굴에는 무거운 기색이 짙게 깔려 있었고 말수도 현저히 줄어든 채 조용한 귀국길이 이어졌다.고이한은 진가영을 자택까지 배웅한 뒤, 곧장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한산한 거실에 앉아 몇 통의 전화를 돌린 그는 관자놀이를 꾹 눌러가며 위층으로 향했다.샤워를 마친 고이한이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말린 채 방으로 나오자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고 대표님, 이혼 계약서를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알겠습니다.”잠옷 가운을 걸친 채 서재로 향한 그는 노트북을 켜고 메일함을 확인했고 변호사가 보낸 파일을 클릭하자, 계약서가 화면 위로 펼쳐졌다.가늘게 눈을 뜬 그는 조항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더니 이내 전화를 걸었다.“문제없습니다. 내일 출력해 주세요.”“대표님, 제가 직접 처리해 드릴 수 있...”변호사가 말을 잇기도 전에 고이한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내 말대로 하세요.”“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그는 시계를 흘끗 확인한 뒤, 소예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내일 회사에 와. 이혼 관련해서 이야기하자.]그 시각, 딸을 재우고 막 침대에 눕던 참이던 소예지는 메시지를 보고 한순간 긴장이 풀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알았어.]짧게 답장을 보낸 그녀는 곧장 심주원에게 연락을 넣어 내일 함께 동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그러나 그날 밤, 소예지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토록 질질 끌기만 하던 고이한이 이렇게 순순히 이혼을 받아들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혹시 심유빈이 압박을 준 걸까?’뭐가 되었
Read more

제155화

이어서 나온 조항은 양육비에 관한 것이었다.‘남편 측이 매달 지급해야 하는 양육비는 6억원으로...’이 문장을 본 순간, 소예지의 가슴에서는 안도의 숨과 함께 날카로운 숨소리가 동시에 새어 나왔다.‘이 남자, 이렇게 큰 액수의 양육비를 지급한다고?'그런데 그다음 페이지에 또 다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소예지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고 계속해서 조항을 넘기고 있던 심주원도 갑자기 고이한을 향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그녀는 분명히 빈손으로 나갈 테니 재산분할 없이 깔끔히 정리하자고 요구했었다.‘그런데 왜 이 남자는 이렇게 많은 재산을 넘기겠다는 거지?’서류는 무려 스무 페이지에 달했고 각 페이지마다 기재된 회사명, 지분, 보유 비율 등의 정보는 소예지가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방대했다.심주원 역시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단순히 눈앞의 수치만으로 대충 계산해도 이번 이혼으로 소예지는 A 시 여성 자산가 순위 ‘상위 10위’ 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운이 좋다면 3위 안에도 들 수 있을 정도의 재산 분할이었다.“고 대표님, 이 계약서 내용에 변동이 없으시다면 정식 처리까지 시간이 조금 소요될 듯합니다.”심주원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사실 고이한의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그의 재력은 이미 바깥세상에서 추정조차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고이한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소예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소예지 역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대체 무슨 속심이야?’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는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애절하게 흔들렸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마치 이혼이라는 일이 그에게는 아무런 원망도, 집착도 남기지 않는 일인 듯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얼굴이었다.소예지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그녀는 단 한 번도 고이한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그는 분노마저도, 우아하게 감추는
Read more

제156화

며칠째 양정화의 실험실에서 강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소예지 역시 자취를 감췄다.보름 가까이 두 사람 모두 실험실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으니 아무리 의연해지려 해도 안채린의 마음은 자꾸만 뒤숭숭해졌다.마침 오후에는 중요한 회의가 하나 예정되어 있었고 회의 명단에 강준서과 소예지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와 있었기에 안채린은 조심스레 기대했다.‘오늘은 오겠지?’오후 두 시 반, 안채린은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내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섰다.마치 집에서 같이 출발이라도 한 듯 나란히 들어오는 모습에 안채린의 눈동자가 움찔거렸다.‘설마... 동거라도 시작한 건가?’샘이 솟구쳤고 알 수 없는 질투가 쓰디쓴 열기로 가슴을 적셨다.바로 그때, 자료를 든 양정화가 회의실로 들어섰다.“다 모였네. 그럼 회의 시작하지.”오늘의 회의 주제는 유전자 편집, 재생 의학, 그리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미래형 치료 기술에 대한 공동 논의였다. 그중에서도 강준석이 제안한 AI 기반 약물 개발과 세포 시뮬레이션 프로젝트는 큰 주목을 받았다.“아주 흥미로운 계획이야.”양정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자 강준석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교수님, 사실 이 계획은 제가 처음 제안한 게 아닙니다. 소예지가 먼저 이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저는 그저 함께 보완시켰을 뿐입니다.”안채린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아주 소예지를 천재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아니면 가짜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을까 봐 불안한 건가?’양정화는 흥미로운 듯 소예지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래? 예지 씨가 그럼 앞으로 이 프로젝트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지 한번 이야기해 봐.”소예지는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이 계획은 강 선배님과 함께 토론하면서 정리한 내용이에요.”겸손한 한마디를 덧붙이고는 곧장 명확한 어조로 발표를 이어갔다.AI를 활용한 신약 후보 물질의 선별 단축과 가상세포를 이용한 종양세포 시뮬레이션 기술, 그리고 이를
Read more

제157화

“설마, 저 둘 미행하려는 거야?”이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그러자 안채린은 이를 악물고 눈빛을 번뜩였다.“정말로 동거하는 건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거야.”구경을 좋아하는 이서연은 오히려 들뜬 얼굴이었다.“나도 찬성이야! 소예지 걔 사생활도 지저분하잖아? 근데도 강 선배까지 꼬드기다니 진짜 선 넘었지. 같이 가자!”안채린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강준석의 차를 조심스레 뒤쫓았다.그들이 도착한 곳은 오래된 주택가 골목 끝에 위치한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풍스러운 한옥이었다.강준석의 차가 멈춰 서고 이윽고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근처 과일 가게로 들어갔다.잠시 뒤, 커피 두 잔을 들고나온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문을 열고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헉... 진짜 같이 사는 거였네? 과일까지 사고 커피도 같이 사서 들어가? 이건 누가 봐도 한집에서 사는 사이잖아!”이서연은 입을 틀어막고 경악했다.안채린의 눈빛에는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이 어렸다.‘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네. 유부녀 주제에 대놓고 동료랑 동거를 한다고?’이서연은 주변을 휙 둘러보며 중얼거렸다.“이 동네 한옥들, 은근히 고급스러우면서 조용하고 접근성도 좋잖아. 둘이 진짜 제대로 골랐다.”그녀는 슬쩍 안채린의 표정을 살폈다.‘하필 채린이 짝사랑하는 사람을 꼬셔? 소예지 진짜 못 말려.’“서연아, 너 볼 일 있으면 먼저 가. 난 끝까지 여기 남아서 확인할 거야.”안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헐, 진짜 밤새우려고?”이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안채린은 핸들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반드시 소예지가 바람피우는 증거를 잡아낼 거야. 세상 사람들이 똑똑히 알게 해줘야지.”조금 전, 두 사람이 커피숍에서 웃으며 나오는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고 그 장면은 안채린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남편도 있는 여자가 왜 강 선배한테 들러붙는 건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뭐, 나도 딱히 급한 일은 없으니까. 같이 있어 줄게.”이서연은 상황이 재미있기만
Read more

제158화

두 사람은 발코니에서 약 20분 남짓 이야기를 나눈 뒤, 조용히 실내로 들어갔다.밤 11시가 되자, 졸음에 겨운 이서연이 하품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우리도 이제 그만 돌아가자. 벌써 11시야. 걔네 지금쯤이면 불 끄고 자고 있을걸?”그 말에 안채린의 머릿속엔 서로에게 살포시 기대어 다정하게 웃고 있던 소예지와 강준석의 모습이 떠올랐고 단지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가 갈릴 정도로 질투심이 끓어올랐다.결국, 안채린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시동을 걸었다. 차는 서서히 골목을 빠져나갔고 두 사람의 그림자는 밤거리 속으로 사라졌다.그리고 약 10분 후, 소예지는 현관 앞까지 강준석을 배웅하며 미안한 듯 말했다.“오늘 정말 미안해. 하슬이가 웬일인지 엄청 떼를 쓰더라고. 이 시간까지 붙잡고 안 놔줄 줄은 몰랐어.”그러자 강준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도 오랜만에 하슬이랑 놀아서 좋았어.”“요즘 학교도 안 가니까 애가 더 산만해졌나 봐.”난감한 듯한 소예지의 말에 강준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슬이 기다리겠다. 얼른 들어가.”소예지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강준석을 배웅했다. 그러다 문득 시야 끝에 들어온 것은 도로 건너편, 어두운 골목 어귀에 조용히 주차된 검은 세단 한 대였다.희미한 가로등 아래, 비상등 하나 없이 웅크리고 있던 그 차는 마치 그림자 속에 웅크린 맹수 같았다.굳이 번호판을 확인하지 않아도 소예지는 단번에 그 차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바로, 고이한의 차였다.차창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고 그 시선은 분명히 이쪽을 향해 있었다.소예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쪽을 쓱 훑어보고는 조용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그리고 십여 분 뒤, 그 검은 세단은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그날 새벽.실험실 단체 채팅방에 공지 하나가 올라왔다.[내일 예정되었던 양정화 교수님의 강연은 소예지 씨가 대신 발표합니다.]사실 양정화는 이미 전날 밤, 조용히 소예지에게 연락을 취
Read more

제159화

소예지는 전날 밤부터 양정화가 준비한 자료를 꼼꼼히 정독했다.세포 분야는 그녀가 실험실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전문 영역이었기에 설령 대본 없이 발표에 나선다 해도 충분히 여유 있게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다만 이번 발표는 양정화가 직접 준비한 흐름에 맞춰야 했기에 소예지는 자신의 스타일을 조율하며 내용을 숙지해 나갔다.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며 안채린과 이서연이 안으로 들어섰다.소예지는 흰 셔츠에 H라인 치마를 차려입고 긴 머리를 말끔히 묶어 올린 채, 은은한 메이크업만으로도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서는 학문적 품위와 성숙한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안채린은 순간 멍해졌다.뭔가 이상했다.‘지금쯤이면 긴장해서 진땀이라도 흘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처음 단상에 오르는 자리, 그것도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이 대거 참석한 공식 석상임에도 불구하고 소예지는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지금 많이 떨리진 않아?”이서연이 일부러 걱정하는 척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소예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생각보다 괜찮네.”안채린은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겉으론 침착해 보여도 속은 바짝 조여 있을걸?”그 순간, 한 스태프가 급히 휴게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소 선배! 외국 연구팀이 방금 도착했는데요. 학교 측에서 오늘 발표를 영어로 진행해달라고 하시는데 괜찮으시겠어요?”그 말이 떨어지자, 휴게실에 있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소예지에게 향했다.예정에 없던 영어 발표라니, 갑작스레 발표 난이도가 급상승한 상황이었다.안채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이제야 좀 재밌어지겠는데.’“그냥 강 선배한테 발표 넘기는 건 어때? 그 선배면 문제없을 텐데.”이서연이 슬쩍 운을 띄우자 안채린도 바로 거들었다.“맞아. 강 선배가 발표하는 게 훨씬 나아. 외국 손님들 앞에서 우리 학교가 망신당하는 일은 없어야지.”하지만 소예지는 망설임 없이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그렇게 해요
Read more

제160화

연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분 남짓이었다.화장실을 나와 연설장 입구로 향하던 소예지는 마침 바깥에서 전화를 받던 고이한과 눈이 마주쳤다.잠깐 얽힌 시선 사이로 고이한이 통화를 마치며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소예지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이한은 걸음을 멈춘 채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연설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예지야, 이제 슬슬 올라가야 해.”옆에 서 있던 강준석이 다정한 목소리로 일러오자 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조금 전 화장실에서 덧바른 립스틱 덕분에 그녀의 입술은 윤기 있게 빛났고 젊고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과학자의 연설이 아니라 곧 레드카펫 위에 오를 여배우를 떠올리게 했다.“괜찮아 보여?”소예지가 살며시 웃으며 묻자 강준석은 망설임 없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아주 멋져. 오늘 연설, 분명 완벽할 거야.”“걱정 마. 절대 양 교수님께 실망 안 드릴 거니까.”그녀는 장난스레 윙크하듯 말하며 미리 준비해 둔 무도수 은테 안경을 꺼내 착용했다.소예지는 연단에 오를 때마다 안경을 쓰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야 시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발표에 몰입하기에도 훨씬 수월했다.연설장 안은 어느새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대략 100명은 훌쩍 넘는 듯했고 앞 세 줄은 전국에서 모인 유명 인사들로 가득했다. 그 뒤로는 각 대학에서 온 청중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그 틈을 헤치듯 시선을 돌리던 소예지는 고이한을 발견했고 뜻밖에도 윤하준 역시 와 있는 걸 알아차렸다.연설장에 함께 들어선 강준석의 존재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오늘의 발표자라고 여겼다.고이한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다.하지만 무대 위로 소예지가 조용히 올라서고 강준석이 무대 한쪽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자 고이한의 미간이 불편하게 일그러졌다.무대 중앙, 은테 안경을 쓴 채 진줏빛 블라우스를 입고 선 소예지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Read more
PREV
1
...
1415161718
...
3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