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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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소예지는 강준석에게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겠다고 간단히 문자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휴대폰에 ‘새로운 친구 추가’ 알림이 떴다.MD 부대표, 주현우였다.그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앞으로 연구 방향에 대해 직접 소통하자며 뜻을 전했고 소예지 역시 정중하게 응대하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오후 네 시 무렵, 소예지는 가벼운 산책 삼아 딸의 학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만개한 벚꽃나무 아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맞은편 주차장에 은빛 벤틀리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차에서 내리려던 윤하준은 고개를 들던 찰나, 벚꽃 아래에 홀로 서 있는 소예지를 발견했다.문손잡이에 얹어두었던 손이 멈칫했고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창문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치 우아한 관찰자처럼, 눈빛엔 아무 잡념도 없었고 오직 순수한 감상만 담겨 있었다.그때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소예지의 긴 머릿결이 흩날렸다.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고 생기 넘치는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스쳤다.강당 위에서의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늘의 그녀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처럼 보였고 동시에 쉽게 꿰뚫을 수 없는 깊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그런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유 모를 동경을 품게 만들었다.그 순간, 소예지의 손등에 벚꽃잎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았다.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어 만개한 벚꽃나무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그 미소를 바라보던 윤하준의 입가에도 문득 같은 웃음이 피어올랐다.그러다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문득 멍해졌다.도무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그를 차 밖으로 이끌었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그는 소예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기척을 느낀 소예지는 누군가 가까이 오는 줄 알고 길을 막았나 싶어 급히 옆으로 비켰다.그때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고개를 돌린 소예지는 윤하준을 보고 놀란 듯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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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차가 막 소예지의 집 앞에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윤하준은 말없이 우산을 챙겨 들고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한 손엔 우산을, 다른 한 손으론 두 아이를 자연스레 감싸안았다. 하지만 우산 하나로는 네 사람을 온전히 가릴 수 없었다. 그는 주저함 없이 우산을 아이들 쪽으로 기울였고 소예지의 쪽에는 팔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그렇게 비를 헤치고 간신히 대문을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예지가 고개를 돌리자 윤하준은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두 아이는 신이 나 거실로 달려가며 장난을 시작했고 소예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윤하준에게 시선을 옮겼다.그의 젖은 어깨와 머리칼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옷이 다 젖으셨어요.”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괜찮아요. 집에 가서 샤워하면 되죠.”윤하준은 가볍게 웃으며 우산을 다시 펼쳤고 조용히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소예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그가 빗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마음 한편이 조용히 일렁였다.윤하준이 보내온 그 진심 어린 배려와 온기를 그녀는 사실 모르는 게 아니었다.‘하지만...’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문을 닫고 돌아섰다.그 무렵, 윤하준의 차가 빗속을 뚫고 사라지자, 길가엔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은은한 불빛 속에 실루엣을 드러냈다. 차 안, 운전대를 움켜쥔 남자는 다름 아닌 고이한이었다.그는 이미 유치원 앞에서부터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소예지가 딸의 손을 잡고 윤하준의 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말없이 그 뒤를 따라 이 집 앞까지 온 것이다.폭우 속, 윤하준은 두 아이를 품고 팔로 소예지를 팔로 감쌌고 그렇게 네 사람은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쓴 채 마치 가족처럼 함께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좋아하는 마음은 말보다 먼저, 시선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법이었다.고이한의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조였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몇 분 뒤, 롤스로이스는 소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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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제 남편 친구예요.][아, 그렇군요. 그럼 유치원에서 봬요.]소예지의 짧은 설명에 안심한 듯 박수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그녀는 이미 윤하준을 점찍은 듯했고 굳이 ‘싱글’이라는 단어를 상태 메시지에 써놓고 있었다.소예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윤 대표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할지는 모르겠네...’다음 날 아침 8시.초인종이 울렸고 문을 연 건 양희순이었다.“오셨어요?”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 그녀가 묻자 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슬이는 일어났나요?”“네, 아버지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쪽에 앉으세요. 고 대표님, 차 한 잔 드릴게요.”양희순은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지만 그 속엔 미묘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소예지는 예전부터 당부한 바 있었다. 이 집에서 고이한을 부를 땐 반드시 ‘성’을 붙여 불러야 한다고.고이한은 양희순의 달라진 말투에서 많은 걸 알아챘고 이제 이 집은 더 이상 자신의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다.“하슬아, 빨리 내려와.”“가요, 엄마!”소예지가 부르자 위층에서 고하슬의 명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소예지는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꾸밈이 전혀 없는 깨끗하고 맑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겼다.“아빠!”고하슬이 폴짝폴짝 뛰며 고이한에게 달려왔다.고이한은 무릎을 꿇고 앉아 딸의 머리칼과 옷깃을 정성스레 다듬어주었다.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갓 태어났을 땐 자신을 쏙 빼닮았던 딸이, 이젠 점점 소예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엄마, 안녕!”“가방 잊지 말고!”소예지가 작은 가방을 건네려 하자 고하슬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들어줘요!”어쩔 수 없이 소예지는 가방끈을 들어 고이한에게 건넸다.그런데 그 순간, 고이한의 손이 그녀의 손과 가방끈을 함께 움켜쥐었다.소예지는 놀란 듯 순간적으로 손을 뺐고 불쾌한 기색이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고이한은 그 모습에 잠시 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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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음, 요약 잘했어. 오후에 시간 되는 사람들은 새 연구실 한 번씩 둘러봐. 다음 달부터는 그쪽에서 본격적으로 근무하게 될 거니까.”회의가 끝나자마자 안채린은 지체 없이 양정화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교수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양정화가 시선을 들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소예지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신고하려고 왔습니다. 결혼한 상태에서 외도하는 걸 직접 목격했어요.”순간 양정화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런 말은 쉽게 할 게 아니야.”“전 증거도 있습니다. 상대는 다름 아닌 강 선배예요! 이런 사람이 실험실에 있는 것도, 과학자가 되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안채린은 미리 준비해 온 영상을 꺼내 들며, 화면을 양 교수에게 내밀었다.“이거 보세요. 이런 사람이 연구소에 남아도 되는 겁니까?”양정화는 영상이 끝난 후에도 잠시 말이 없었다. 몇 초간 침묵을 유지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 일, 다른 사람한테도 말한 적 있어?”안채린은 이를 악물며 단호히 말했다.“만약 교수님께서 이 일을 묵인하신다면 저는 학교에 공식적으로 신고할 겁니다. 소예지의 학적은 박탈되어야 해요.”양정화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채린아, 내가 보기엔 네가 오해한 것 같아. 소예지와 강 팀장은 그저 정상적인 동료 관계야.”그 말에 안채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양정화까지 소예지를 감쌀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실망감이 얼굴 위로 그대로 드러났다.양정화는 실험에 더 집중하라는 당부를 덧붙였지만 안채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을 뿐,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이대로 끝낼 수 없어. 교수도, 학교도 믿을 수 없다면 소예지 남편을 찾아내야 해!’그 순간, 문득 떠오른 사실 하나, 소예지에게는 딸이 있었다.‘딸이 있다면 학교에 다니고 있을 테지. SNS나 단체 채팅방만 잘 보면 학교 이름은 쉽게 알아낼 수 있어. 단 한 번만 알아내면, 학교 앞에서 남편을 몰래 지켜볼 수 있어.’계획은 생각보다 간단했고 이 일을 도와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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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소예지는 이 문제를 곧장 떠벌리지는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실험실의 다른 장비들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했고 그러던 중, 추가로 몇 대의 중고 리퍼 장비가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장비의 새것과 헌것은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금세 티가 나는 법이었다.실험실을 나서던 소예지의 시야에 강준석이 들어왔다. 그는 안채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나 소예지를 보자마자 급히 말을 마무리했다.“채린아, 이건 다음에 얘기하자.”“어? 강 선배, 내가 제안한 거 뭐 문제 있어?”당황한 안채린이 되물었고 그녀도 곧 소예지를 발견했다.입술을 앙다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예지가 등장하는 순간, 세상의 중심은 또 그녀가 되어버렸다.“강 선배, 혹시 윤 선배 못 봤어?”“윤 선배? 저기 큰 사무실에 있어. 무슨 일 있어?”“응, 할 얘기가 좀 있어서.”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바로 그때, 안채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본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아빠?”“오늘 너희 실험실 장비 점검했다며? 문제없었지?”안영수의 다정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채린은 자신이 사용하는 실험실을 직접 확인했기에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했다.“그럼요! 당연히 문제없었죠.”“아빠가 전부 최신형으로 넣어줬잖아. 절대 문제없을 거야.”자신만만한 그의 말에 안채린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소예지는 곧장 큰 사무실로 향했다.그곳에서는 윤혁이 서류를 검토하다가 마지막 장에 서명을 하는 중이었다.그녀는 조용히 그가 업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섰다.“윤 선배, 잠깐 단둘이 얘기할 수 있을까요?”윤혁은 곧 강준석과 함께 그녀를 따라 옆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문이 닫히는 순간, 소예지의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워졌다.“선배, 혹시 이 장비들, 다 전문가한테 검수받은 게 맞나요?”예상치 못한 질문에 윤혁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일 있어? 뭔가 이상한 거라도 발견한 거야?”소예지는 고개를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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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분노가 가라앉고 다시금 냉정을 되찾은 윤혁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모두 내 불찰이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이런 문제를 미리 알아채지 못한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야.”“이번엔 네가 제때 잡아줘서 다행이야, 예지야,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실험실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그 책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을 거야.”“이건 윤 선배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에요.”그의 고백에 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감독을 소홀히 한 건 내 잘못이야.”윤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뭔가를 떠올린 듯,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안영수의 장비 업체 말인데... 고 대표가 직접 추천했던 곳이야. 어쩌면 이 일, 고 대표까지 얽혀 있을 수도 있어.”“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고 대표한테 말씀드리세요.”소예지의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단호했다.“그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위로 보고해야죠. 이건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예요.”고이한이 이런 일에 안영수를 두둔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다만, 안영수에게 직접 따져본들 그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 없었다. 결국 밑에 직원 몇 명을 희생양 삼아 사건을 덮으려 들 것이 뻔했다.“정식 가동까지 열흘밖에 안 남았어. 안 대표에게 새 장비를 다시 구매하라고 요구할 생각이야.”윤혁은 단호히 말하고는 다시 소예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너도 한 번 더 전체적으로 장비 점검해 줘. 문제 있는 건 전부 사진으로 남기고.”“알겠어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이후, 그녀와 강준석은 나머지 장비들까지 샅샅이 점검하기 시작했다.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기계만도 십여 대에 달했고 두 사람은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실험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그날 저녁.소예지가 집에 도착한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예지야, 시간 괜찮아? 잠깐 와줄 수 있을까?”“어디세요, 윤 선배?”“오늘 밤, 안 대표와 직접 만나기로 했어. 넌 이 문제를 처음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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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하지만 그 순간, 회의실의 모든 시선은 오직 고이한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소예지의 말이나 행동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안영수 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안영수의 얼굴 역시 긴장으로 굳어졌다.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고이한은 막대한 자본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의 서늘하고 위압적인 분위기에는 자연스럽게 상위자의 위엄이 배어 있었다.윤혁은 오는 내내 분노를 억누르며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안 대표님, 오후에 제가 언급했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이신지 듣고 싶습니다.”안영수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이번 일로 심려 끼쳐 드려 정말 송구합니다. 평소에도 직원들에게 검수는 철저히 하라고 누차 강조했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이런 실수가 생긴 것 같습니다. 실험실에 누를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소예지는 속으로 냉소를 삼켰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이 사태가 그의 묵인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 직원들이 감히 독단적으로 그렇게 했을 리 없었다.잠시 후, 안영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소예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다행히도 소예지 씨께서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주신 덕분에 우리가 신속히 대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소예지는 아이패드를 들어 가볍게 설명을 시작했다.“현재 문제가 발견된 장비들을 촬영해 두었습니다. 함께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러곤 미리 정리해 둔 USB를 비서에게 건네며 말했다.“여기 있는 파일을 재생해 주시겠어요?”비서는 다소 당황한 듯했지만 윤영수가 가볍게 눈짓을 주자 마지못해 USB를 받아 컴퓨터에 꽂았다.소예지는 자신의 노트북을 연결해 화면을 띄웠다.그리고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이 하나하나 발견한 문제들을 설명했다. 연이어 십여 대에 달하는 기기들의 문제를 지적하자 안영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의 부하 직원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소예지의 발언은 날카롭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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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람?’소예지는 고개를 들던 중, 문득 옆에 놓인 빈 생수병에 시선이 꽂혔다. 아까 자신이 마셨던 바로 그 물을 어느새 고이한이 전부 마셔버린 것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시 물을 마시려는 줄 알았는지, 그는 새 물병을 집어 뚜껑까지 열어 건네고 있었다.하지만 소예지는 물병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시선을 돌려버렸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대체 이 둘, 무슨 사이야?’모두가 숨죽이고 조심하는 고이한 앞에서 소예지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그 상황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영수와 윤혁을 비롯한 몇몇은 여전히 실험실 문제를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회의는 저녁 7시 반까지 이어졌고 현실적인 해결책이 도출된 끝에 마침내 끝을 맺었다.“다들 배고프시죠? 제가 미리 식당 예약해 뒀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하시죠.”안영수의 제안에 윤혁이 옆자리의 소예지를 향해 물었다.“같이 갈래?”“전 괜찮아요. 집에 가봐야 해서요.”소예지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 원래부터 이런 식사 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그럼 고 대표님은요?”고이한은 짧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답했다.“저도 사양할게요.”그 순간 안영수가 급히 다가왔다.“고 대표님, 오늘처럼 바쁜 와중에 손수 발걸음까지 해주셨는데 한 끼만 함께해 주시죠.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그러나 고이한은 예의 바르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거절했다.“안 대표님, 식사는 다음에 하죠.”안영수는 더는 붙잡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살펴 가세요.”소예지는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와 입구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막 운전석에 올라타려는 순간, 고이한이 조용히 다가왔다.“데려다줄 수 있어?”“택시 타. 같은 방향 아니야.”소예지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고이한은 물러서지 않았다.“이 시간대엔 택시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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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고이한의 운전 실력은 여전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차 안에는 말 한마디 없는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만이 흐를 뿐이었다.그러던 중, 차가 멈춘 곳은 병원이 아니라 한 레스토랑 앞이었다.“여긴 왜?”레스토랑 간판을 본 순간, 소예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생각해 보니까, 우리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수경한테 연락해서 하슬이도 이쪽으로 오라고 했어. 일단 밥부터 좀 먹자.”말을 마친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소예지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미 고수경이 딸을 데리고 오고 있다니 돌아설 수도 없었다. 게다가 속이 허하고 울렁거릴 만큼 배가 고팠기에 마지못해 그를 따라 내렸다.레스토랑 안, 창가 자리에 앉은 고이한은 메뉴판을 넘기며 물었다.“먹고 싶은 거 있어?”“딱히.”그녀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그는 익숙한 손길로 메뉴를 몇 가지 주문하고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레스토랑은 병원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고 십여 분쯤 지났을 무렵 고수경이 고하슬을 데리고 들어섰다.그리고 그 뒤로, 소예지의 시야에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심유빈.소예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녀는 임신 중이었으니 더 이상 아이의 비위를 맞춰야 할 이유도 없었고 이제는 그 집안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어른이 아이를 괴롭히는 건 꼭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욕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단지 하나의 시선만으로도 아이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길 수 있었다.소예지는 갑자기 입맛이 사라졌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엄마!”밝은 목소리로 뛰어온 고하슬이 그녀에게 안겼다.소예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고이한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당신들끼리 들어. 우리는 먼저 갈게.”그때, 심유빈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예지 씨, 그렇게 급하게 가시게요?”고수경이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유빈 언니, 아까 저녁도 못 먹었다면서? 빨리 들어가자!”심유빈은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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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유빈아, 아빠 쪽에 일이 좀 생겼어. 너라도 나서서 고 대표한테 좋게 좀 얘기해줄 수 있겠니?”전화를 받던 심유빈의 표정이 굳어졌다.“아빠,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 생긴 건데요?”“그냥... 아빠가 투자한 실험실 쪽 장비에서 문제가 좀 있었어. 큰일은 아니야.”말을 아끼는 안영수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아빠, 무슨 문제인데요? 정확히 말해줘요.”심유빈이 목소리를 높이자 안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꺼냈다.“우리가 납품한 장비 중 일부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어. 실험실 쪽에서 우리가 중고 장비를 납품했다고 의심하고 있어.”“그걸 어떻게 알아챘대요?”심유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글쎄, 그쪽에 ‘소예지’라는 여자가 있는데 자꾸 장비 쪽을 꼬투리 잡으면서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은 또 오지게 해대고, 진짜 골칫덩이야.”안영수는 분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내뱉었다.‘소예지?’심유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아빠, 일단 실험실 쪽 요구에는 최대한 협조해요. 지금은 상황부터 안정시키는 게 중요해요. 고 대표 쪽은... 제가 기회 봐서 잘 얘기해 볼게요.”“그래, 그래... 우리 유빈이가 살짝 말만 꺼내줘도 달라질 거야.”전화를 끊은 심유빈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소예지... 또 너야? 동생 앞길 막은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아빠 회사 일까지 방해해?”그녀의 눈빛엔 분노보다 더 매서운 의지가 번뜩였다.한편, 소예지는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각, 부엌에선 양희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국수를 끓이고 있었다.“아이고, 이 시간까지 아무것도 못 드셨죠? 속이라도 좀 채우세요.”소예지는 고맙게 국수를 받은 뒤 방으로 들어가 이메일을 정리했고 곧 윤혁과 강준석과의 온라인 회의가 이어졌다.이번 회의에서 윤혁은 안영수의 회사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회의를 마친 뒤, 소예지는 받은 편지함을 열었다.MD 본사에서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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