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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1화

소예지는 밤새 실험실에 머물렀다.모든 데이터를 정리해 기록을 마쳤을 즈음, 창밖엔 이미 희미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갑작스레 눈앞이 핑 돌더니 다리가 휘청였고 그녀는 간신히 옆 의자에 몸을 기댔다.‘잠깐만 눈 좀 붙이자...’그렇게 생각한 소예지는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그 무렵, 주말임에도 평소처럼 출근한 양정화는 실험실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안을 들여다보자, 실험대 위에 그대로 엎드린 채 잠든 소예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설마 밤새 실험한 건가...”양정화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다가는 정말 언젠가 쓰러질 거야...’소예지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오전 8시 30분이었다.몸을 간신히 일으킨 그녀는 사무실로 향하던 중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가볍게 노크하며 인사를 건넸다.“교수님, 벌써 오셨어요?”양정화는 그녀를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혹시 밤새 실험했어?”소예지는 피곤함 속에서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상하게 밤이 되면 영감이 잘 떠올라서요.”“이런, 다음부터는 밤새는 거 금지야.”양정화가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당장 집에 가서 푹 쉬어.”하지만 소예지는 고개를 저으며 해맑게 웃었다.“교수님, 다행히 어젯밤 실험에서 성과가 있었어요.”그러곤 곧바로 화면에 어젯밤 정리해 둔 실험 데이터를 띄웠다.양정화는 안경을 고쳐 쓰며 데이터를 꼼꼼히 살폈고 이내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로 외쳤다.“이거 정말 대단한데? 소예지, 해냈네!”그 말에 소예지도 순간 기운이 나는 듯했지만 이제 정말 한계에 가까운 피로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오전 9시 무렵, 양정화는 직접 고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교수님.”고이한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하고 침착했다.“고 대표, 좋은 소식이 있어. 소예지가 어젯밤 밤새 실험했는데 드디어 돌파구를 찾았어. 13번 유전자 배열의 암호를 해독했거든.”“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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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2화

소예지는 윤하준의 팔에 이끌려 간신히 몸을 지탱했고 이마를 짚은 채 끓어오르던 어지럼증을 억지로 누르고 숨을 고르려 애썼다.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을 때, 마주친 건 고이한의 깊고 침착한 시선이었다.그 순간, 병원 복도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심유빈은 어딘가 의도적인 놀람을 섞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소예지 씨, 이게 대체...”그녀의 시선은 소예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윤하준의 팔에 고정돼 있었다. 놀란 듯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윤하준의 품에서 몸을 살짝 빼내며 담담히 말했다.“저혈당이 조금 와서요. 괜찮아요.”고이한의 시선이 평소보다 확연히 창백해진 소예지의 얼굴에 닿았다.그 시선을 감지한 윤하준도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방금 급하게 오느라 무리를 했나 봐.”고이한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얼굴이 너무 안 좋아. 그냥 돌아가서 쉬는 게 어때?”그 말에 심유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지금 소예지를 걱정하는 거야?’하지만 소예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괜찮아. 윤하준 씨, 지 여사님 상태는요?”윤하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의사 말로는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답니다.”소예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정신을 다잡았다.“그럼, 들어가 뵈죠.”그들이 병실로 향하려는 찰나, 심유빈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이한 오빠, 우리도 지 여사님 뵈러 온 거잖아. 같이 들어가자.”고이한은 짧게 대답했다.“우린 먼저 밖에서 기다리자.”그 말에 심유빈의 얼굴이 굳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옆에 있던 하종호가 조용히 말했다.“유빈 씨, 지금은 소예지 씨가 먼저 들어가는 게 맞아요.”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인기척을 느낀 지유선은 희미하게 눈을 떴고 소예지의 얼굴을 보자 혼탁했던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스쳤다.“소예지 씨...”숨이 바람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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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3화

곁에서 이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하종호가 먼저 나섰다.“이한아, 내가 소예지 씨를 데려다줄게.”그 말에 심유빈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소예지를 향해 말을 걸었다.“소예지 씨, 당신이 날 싫어하는 거 알아요. 그래도...”소예지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그걸 알면서도 굳이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건 또 뭐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이러는 건지...’억지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상황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태도는 불쾌하고 그 의도는 역겨웠다.그때 하종호가 조심스레 다가와 설득했다.“소예지 씨, 지금 상태로는 운전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사실 소예지에게도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운 듯 미소 지었다.“감사해요, 하 대표님.”“내가 데려다주지.”그 순간, 낮고 단호한 고이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한 오빠!”심유빈이 날카롭게 외쳤지만 고이한은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성큼 다가오더니 단숨에 소예지를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고이한!”소예지는 억눌린 분노로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단단한 팔에 껴안긴 채, 그녀의 저항은 무력했다.“내려놔! 지금 당장!”“이한 오빠!”심유빈의 분노 어린 외침이 뒤따랐다.하종호가 조용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그냥... 이한이 데려다주게 둬요.”심유빈은 억눌렀던 감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뒤돌아 하종호를 노려보았다. 눈빛엔 불만과 질투가 가득했고 결국 복도 끝까지 달려가 그들을 따라붙었다.소예지는 여전히 몸부림쳤지만 고이한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하게 그녀의 귀를 때렸다.“가만히 있어.”“당신 도움 필요 없다고!”소예지의 목소리는 화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고이한은 냉정하게 받아쳤다.“그럼 이 복도 한가운데서 쓰러지고 싶어?”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조용히 닫히며 심유빈의 일그러진 표정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밀폐된 공간 안, 소예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희미한 전등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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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4화

심유빈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소예지 씨가 제 홍보대사 자격을 망쳐놨어요. 그래서 요 며칠 기분이 영 안 좋았던 거고요.”그녀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자 하종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요즘 보니까 소예지 씨랑 윤 대표 꽤 가까워진 것 같던데요. 나중에 두 사람 사이가...”“내가 그 여자를 무서워할 줄 알아요?”심유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하종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하준이랑 이한이 사이도 예전 같지 않아 보이더라고요. 원래는 정말 끈끈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미묘하게 틈이 생긴 느낌이에요.”“그것도 전부 소예지 씨 때문이에요. 하 대표님 윤씨 가문에서 과연 소예지 씨 같은 사람을 받아줄까요?”심유빈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하종호를 바라봤다.갑작스러운 질문에 하종호는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그는 신중히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그건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예요.”“설마 정말로 윤씨 가문에서 이혼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심유빈은 다소 격앙된 말투로 되물었다.그녀는 비록 윤씨 가문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A 시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인 그들이 굳이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를 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하종호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소예지 씨는 지금 과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에요.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고 대표가 남긴 재산만으로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고요.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윤씨 가문에서 받아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소예지 씨가 결혼할 의향이 있느냐는 문제겠죠.”소예지를 높이 평가하는 듯한 그 말투에 심유빈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하 대표님도... 소예지 씨를 좋게 보시는 거네요.”하종호는 살짝 당황한 듯 웃었다.“그냥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뿐이에요.”심유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더 이상 말을 잇고 싶지 않은 듯했다.하종호는 조용히 차를 몰아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뭔가 말을 더 꺼내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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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5화

소예지는 다시 서재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고 실험 데이터를 확인했다.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연구에 몰두하는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뒤엉키던 복잡한 감정들이 잠시나마 잦아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시온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인터넷에 올라온 부고 기사를 보고 지유선에 관해 물어온 것이다.[응 정말이야. 지 여사님 돌아가셨어.][정말 안타깝다. 좋은 분이었는데...]박시온의 짧은 답장에도 안타까움이 묻어났다.소예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그 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잠시 후 윤하준에게서 연락이 왔다.지유선의 장례식은 삼 일 뒤에 치러질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일요일 오후 진가영은 고하슬을 데리고 소예지의 집을 찾았다.문을 열자 딸을 반갑게 끌어안은 소예지는 어딘가 말을 망설이는 듯한 진가영의 표정을 단번에 알아챘다.“무슨 일 있으세요?”“요 며칠 내내 어머님께서 너를 찾으시더라. 그게...”하지만 진가영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소예지에게 시어머니를 찾아가 달라고 직접 부탁하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그러나 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내서 찾아뵐게요.”그 말에 진가영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사흘 후 지유선의 장례식이 치러졌다.소예지는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조용히 조문길에 나섰다.멀리서 보니 윤하준이 영정 앞에 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자식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난 지유선은 생전에 가장 아꼈던 윤하준을 사실상 후계자처럼 여겼고 그는 그녀를 위해 성대하면서도 품위 있는 장례식을 준비했다.윤하준은 검은 정장을 입은 채 여느 때보다 수척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윤 대표님.”소예지가 다가와 조용히 인사했다.윤하준이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바라봤다.지친 얼굴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이내 반가움이 담긴 미소가 번졌다.“오셨어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소예지가 진심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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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6화

“하지만 이번에 소예지가 진짜 성공한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되겠어. 어쩌면...”이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채린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너 설마 걔가 다음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 하려는 거야?”이서연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가능성 크다고 봐.”안채린은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걔 아버지도 결국 그 상 못 받았잖아. 그런데 도대체 소예지가 뭘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가겠다는 건데?”이서연은 볼을 부풀리며 반박했다.“그래도 우리가 실험실에서 노벨상 수상자 한 명쯤 나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잖아!”“설령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 쳐도 그건 강 선배일 거야. 소예지한테는 그럴 자격 없어.”안채린은 단언하듯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이서연은 굴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그래도 이번 소예지 연구 프로젝트는 진짜로 노벨상 가능성 있어 보여.”그 말에 안채린은 짜증 섞인 시선을 보내며 그녀를 노려봤다.“도대체 왜 그래? 왜 그렇게까지 걔를 띄워줘? 소예지가 너한테 뭐라도 해줬어? 네가 누구 덕분에 지금 실험팀에 들어왔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그 말에 이서연은 머쓱한 듯 웃으며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일주일 후 소예지의 실험팀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녀가 막 실험실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 조수가 급히 달려와 외쳤다.“예지 선배! 세 번째 그룹 실험 데이터 나왔어요! 예상보다 훨씬 좋아요!”피곤함에 짓눌렸던 정신이 번쩍 들며 소예지는 곧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모니터에 뜬 곡선 그래프는 그녀의 이론적 예측을 거의 완벽하게 뒷받침하고 있었고 그것은 곧 신약 개발에서 중요한 돌파구가 열렸다는 의미였다.이제 다음 단계 실험에 착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그 소식을 들은 양정화는 바로 다음 주에 전문가 평가회를 준비하자고 나섰다.이번 평가회는 지금까지의 실험 성과를 공식적으로 검토받는 자리였다.며칠 동안 소예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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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7화

“네?”잠시 멍하니 있던 소예지가 되묻자 양정화는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고 대표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지.”그 순간 소예지의 미소가 몇 초간 굳어졌다.고이한, 그는 늘 철두철미한 사업가였다.그의 모든 결정에는 정확한 계산이 깔려 있었고 이익 없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이번 투자 역시 결국 그의 셈법 끝에서 나온 수치적인 판단일 뿐이었다.잠시 후 강준석이 다가와 발표를 축하해주었다.소예지는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직접 발표장을 찾아준 그가 고마웠다.그런데 그때 강준석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기 위해 조용히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롭고 불쾌한 목소리가 날아왔다.“소예지, 이번에도 네 아버지 노트에서 아이디어 따온 거야?”안채린이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잠시 바라봤지만 마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러자 안채린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또다시 그녀의 등을 향해 쏘아붙였다.“뭐 그렇게 잘난 척이야? 고 대표한테 투자 안 받았으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 같아?”소예지의 손이 조용히 주먹을 쥐며 떨려왔다.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그녀의 등을 뚫고 들어오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안채린의 말을 끊었다.“소예지 씨의 성과는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이뤄낸 겁니다.”안채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윤하준이 도착해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당황한 안채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예의를 차렸다.“윤 대표님...”윤하준은 그녀가 심유빈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단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소예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축하해요. 발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어요. 정말 인상 깊었어요.”그는 진심이 담긴 미소와 함께 꽃다발을 내밀었다.안채린은 얼굴이 굳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났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소예지와 윤하준이 함께 있는 모습을 힐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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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8화

양정화는 소예지와 함께 실험실로 돌아왔지만 고이한이 실험 속도를 재촉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연구 속도를 조금만 더 올려보자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권했다.소예지는 본래 감이 빠른 사람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흘간 휴가를 주겠다던 양정화가 하루 만에 말을 바꿔 속도를 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누군가 그 뒤에서 압박을 넣고 있다는 건 뻔했다.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고이한이 굳이 오늘 이곳까지 찾아왔던 것도 결국은 연구 진도를 독촉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소예지는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더 이상 그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고이한은 애초부터 철저한 워커홀릭이었다.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계획대로 움직이며 계산 밖의 변수는 철저히 배제해 버리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감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래서 소예지는 별다른 말 없이 실험을 조금 더 서두르겠다고만 약속했고 양정화는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토닥이며 말했다.“너무 부담 갖지 마. 실험이라는 건 원래 서두르면 엉킬 수도 있는 거니까. 조급해할 필요 없어.”“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흘 뒤, 이른 아침.소예지는 윤하준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점심을 함께하자며 식사를 제안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기꺼이 수락했다.이제 그녀는 지유선이 남긴 마지막 연구 기금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고 그 소중한 자금은 반드시 가치 있는 곳에 쓰이도록 해야겠다는 각오가 선 상태였다.곧 윤하준이 주소를 메시지로 보내왔고 소예지는 실험실에서 조금 일찍 나와 사무실에 들러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밖으로 향했다.“어디 나가?”자료를 안고 들어오던 이서연이 먼저 물었다.“응, 약속이 있어서.”소예지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이서연은 어딘지 부러운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잠시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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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9화

심유빈의 붉게 칠한 입술이 비웃듯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방금 찍은 사진을 고이한에게 전송했다.「이한 오빠, 나 아까 소예지랑 윤 대표 만났어.」고이한에게서 아무런 답장은 오지 않았다.하지만 심유빈은 애초부터 그의 답장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그저 ‘소예지와 윤하준이 단둘이 데이트 중이다'라는 사실 하나만 전달되면 충분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겠지만 내심 불쾌할 거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자기 전처가 절친한 친구와 얽히고 있다는 걸 편안하게 받아들일 남자가 과연 있을까?’잠시 후, 소예지가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로 향했고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간 심유빈도 거울 앞에 섰다.화장을 고치는 척하며 거울 속으로 그녀를 곁눈질하던 심유빈은 기어이 입을 열었다.“참, 세상엔 별사람이 다 있죠. 남자 힘으로 올라선 주제에선 자수성가한 척 굴고. 그런 연기는 대체 누구 보라고 하는 걸까요?”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고 심유빈은 그런 그녀를 여유롭게 올려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아, 맞다. 소예지 씨 또다시 대단한 성과를 냈다면서요? 축하해요.”그러나 소예지는 반응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고 심유빈은 오히려 그 무반응이 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비죽 말아 올렸다.“근데 말이에요,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성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혹시 누군가 새로운 ‘후원자’가 생긴 덕분은 아니에요?”그녀는 팔짱을 낀 채 비웃는 눈빛으로 몸을 틀었다.“정말 대단해요. 이혼한 지 겨우 반년밖에 안 됐는데 윤 대표랑 그렇게 가까워질 수 있다니.”소예지는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씻고 조용히 휴지로 물기를 닦은 뒤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심유빈은 다시 악의 가득한 목소리로 던졌다.“뭐, 그렇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죠. 고 대표가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뭔가 수확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소예지는 그런 유치한 자극에는 반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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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0화

소예지가 조용한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오빠는요?”고수경이었다.“아직 회사에 안 오셨습니다.”비서가 조심스레 대답하며 덧붙였다.“김 비서님께 연락해 볼까요?”“됐어요. 오빠랑 제 미래 새언니의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마세요.”그 말에 소예지의 뇌리에 잠깐 예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고이한은 시간에 관해서만큼은 지나치게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약속에 늦는 건 딱 한 가지 경우, 전날 밤 심하게 지쳤을 때뿐이었다.“그럼 대표님을 기다리실 건가요?”“아뇨, 나중에 다시 올게요.”비서는 소예지가 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굳이 고수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만약 알았다면 고수경은 틀림없이 안으로 들어와 시비부터 걸었을 것이다.그렇게 소예지는 꼼짝없이 40분을 더 기다렸다. 손끝으로 책상 위를 조용히 두드리다 이따금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아홉 시 오십 분. 그러나 고이한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차 한 잔 더 드릴까요?”비서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소예지는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 고마워요.”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전해주세요. 저도...”그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비서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곧 도착하실 겁니다. 조금만 더...”“제 시간도 충분히 소중하거든요.”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서늘한 기운과 함께 고이한이 들어섰다. 완벽하게 정돈된 수트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무새 하나 흐트러짐 없었지만 눈가엔 피로가 옅게 드리워져 있었다.“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그는 소예지를 힐끗 바라본 뒤, 곧장 책상 앞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시작하지.”소예지 역시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심유빈이 자주 뿌리던 향수였다.‘그래서, 어젯밤 그 여자와 같이 있었던 건가. 그게 오늘 아침 지각한 이유란 말이야?’소예지는 말없이 보고서를 챙겨 반대편 자리에 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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