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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장 가까운 배신: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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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빨리, 서둘러!”주희영은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준비해 둔 음식을 가져오라는 신호였다.오정화는 뜨거운 국과 반찬을 허둥지둥 들고 들어왔고 정지욱은 고영훈을 부축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웠다....보름쯤 지난 오후, 고영훈은 고씨 가문 별장 정원 앞에 서 있었다.그의 시선은 절벽 아래 어둠으로 향해 있었다. 주먹을 말아쥔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도드라졌다.‘그날, 서윤이가 여기서 등을 돌렸지...’그는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여기... 바로 이 자리에서.’그날 밤, 송서윤이 고영훈과 주희영의 대화를 엿듣고 놀라 쓰러졌던 장소였다.믿고 싶지 않은 듯 흔들렸던 눈빛과 서러움에 젖은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그날,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하준이를 엄마한테 맡기지 않았더라면 서윤이는 그 대화를 듣지 못했을 텐데. 그랬다면 쓰러지지도, 상처받지도, 떠나지도 않았을 텐데.’심장이 묘하게 쑤셨다.그는 경호원들과 함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이 쓸모없는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또 기어들어 와!”고훈의 호통이 거실을 울렸다. 순식간에 별장 경비들이 몰려와 고영훈과 경호원들을 막아섰다.뒤뜰에서 엔진 소리가 울렸다. 땅을 파헤치는 굴착기의 무거운 진동이 온몸에 전해졌다.송서윤이 직접 가꿨던 튤립 화단 위로 굴착기 버킷이 내려앉았다. 흙이 뒤집히고 꽃대가 부러지고, 그녀의 손끝을 닮았던 잎사귀들이 흩날렸다.그 순간, 고영훈은 살이 베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굴착기 쪽으로 걸어갔다.경비들이 막아섰지만, 그는 힘으로 밀쳐내고 운전자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직접 운전석에 올라 이미 뒤덮인 흙을 조심스레 되돌리기 시작했다.마치 부서진 것을 다시 되살릴 수 있기라도 한 듯, 섬세하고 완강한 손길이었다.굴착기에서 내려 무릎을 꿇은 그는 맨손으로 진흙을 다듬었다.햇살 아래 웃으며 꽃을 손질하던 송서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얼굴에 흙이 묻어도 개의치 않던 그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했다.“감히 내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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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강이안은 고훈이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내, 내가 정리할게! 내가 꽃밭 다 되돌려놓으면 될 거 아니야! 제발, 우리 남편 좀 놔줘! 네 아버지잖아...”강이안은 허겁지겁 꽃밭으로 달려가 튤립을 부여잡았다.하지만 긴 손톱이 꽃잎을 할퀴며 찢어지는 순간, 고영훈의 눈빛이 번쩍였다.그는 마치 쓰레기를 내던지듯 고훈의 몸을 강이안 쪽으로 던져버렸다.곧장 무릎을 꿇은 그는 망가진 꽃을 손에 주워 담기 시작했다.손에 진흙이 묻고 흙먼지가 얼굴에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그저 부서진 꽃잎을 모아 꺾인 줄기를 세워 송서윤이 아끼던 그 모습 그대로 되돌리고 싶을 뿐이었다.강이안은 땅에 넘어진 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축 늘어진 고훈을 끌어안았다.“여보, 그만해요. 고영훈은 그냥 미친놈이에요. 그 꽃들, 그냥 다 줘버려요. 제발요...”하지만 고훈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두 번이나 맞은 수치와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그는 강이안을 밀쳐내고 비틀거리는 몸으로 굴착기에 올라탔다.손이 떨렸지만, 시동을 걸어 조종간을 움켜쥐었다.“이 미친놈!”고훈이 이를 악물며 굴착기의 팔을 내리꽂았다.거대한 쇳덩이가 고영훈을 향해 돌진했다.순간,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쾅!’ 하는 굉음이 터졌다.튤립 한 다발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붉은 핏방울을 머금고 흙 위로 떨어졌다.한 송이, 또 한 송이, 진흙탕 위로 피가 붉게 번져갔다....“부장님, 배가 너무 나오셨어요. 물은 제가 부을게요.”조수 진도연이 송서윤의 손에서 분수기를 받아 들고 활짝 핀 튤립밭에 물을 흩뿌렸다.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이 햇살을 머금은 채 반짝였다.송서윤은 허리를 짚으며 미소를 지었다.“부장님, 얼마 전 출장 다녀온 동료가 그러더라고요. 아진시에 어떤 부자가 튤립 정원 때문에 싸우다가 파출소까지 갔다고요. 꽃밭 하나 지키겠다고 싸우다가 머리까지 다쳤다네요.”진도연이 농담 섞인 말투로 웃었지만, 송서윤은 배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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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소주원은 조용히 핸들을 잡았다.차창 너머로 석양이 기지 쪽 활주로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도윤아, 너는 여동생이 좋아, 남동생이 좋아?”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웠다.머릿속에는 송서윤이 배를 쓸어내리며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가 공항 문 앞에서 자신을 맞아주는 상상만으로도, 마치 곧 아버지가 되는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여동생이요.”소도윤이 귀엽게 대답하며 인형을 꺼내 보였다.“그래, 여동생이면 엄마처럼 예쁘고 착하겠지?”‘엄마’라는 단어가 입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소주원의 가슴이 미묘하게 떨렸다.그 단어는 금기이자 유혹 같았다.“아빠!”소도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뭐야?”그가 고개를 들자, 대형 트럭이 풀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본능적으로 핸들을 꺾고 브레이크를 밟았다.‘쾅!’ 차가 가드레일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에어백이 터지고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정신을 차렸을 때 소주원은 낯선 방 안에 누워 있었다.머리가 무겁게 울렸고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엄마는 어디 있어?”“엄마는 아주 예쁜 큰 집에 계세요.”“그 집엔 누가 있어?”“삼촌도 있고, 이모들도 많아요.”“그럼 이 장난감이랑 옷은 누구 거야?”“엄마한테 줄 건데요...”“도윤아!”소주원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나가 아이의 말을 끊었다.“아빠 깼어요!”소도윤이 달려와 품에 안겼지만, 소주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아이 손에서 사탕을 낚아채 쓰레기통에 던졌다.“아빠가 뭐라 그랬어?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지 말랬지! 낯선 사람이 묻는 말에도 대답하지 말라고 했잖아!”“아빠...”소도윤의 눈가가 금세 젖었다.“삼촌은 하준이 아빠래요. 사고 났을 때 삼촌이 저 구해줬어요.”그때, 문가에 서 있던 고영훈이 모습을 드러냈다.“좀 괜찮아졌어요, 소 교수님?”소주원은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단 한 줄기의 따뜻함도 없었다.“덕분에요. 고맙습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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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고영훈의 몸이 벽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머릿속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더니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그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전부 서윤이를 위해서야!”그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누굴 설득하려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에게 이유라는 건 언제나 송서윤 하나였다.그녀를 제외한 어떤 누구도, 어떤 감정도, 그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소주원도 벽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트럭과의 충돌 여파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서윤이를 위해서라고?”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서윤이가 시켰어? 자기 친동생이랑 바람피우라고? 게다가 임신까지 시키라고? 멍청하게 그걸 서윤이 눈앞에서 들킨 건 또 뭐야! 고영훈, 넌 인간도 아니야. 그냥 쓰레기야.”고영훈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는 주저 없이 주먹을 휘둘렀고 소주원의 얼굴을 스치는 순간 묵직한 충격이 파고들었다.소주원은 한 발 뒤로 물러섰지만, 뺨 위로 금세 붉은 자국이 번졌다.그 역시 지지 않았다. 고영훈의 옷깃을 움켜쥔 채, 그대로 주먹을 치켜올려 그의 상처 난 복부에 꽂아 넣었다.‘한 번쯤 손봐주고 싶었어!’순간, 숨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고영훈의 몸을 휘감았다.고영훈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짐승이 목을 찢는 듯한 낮은 울음이 새어 나왔다.그는 손아귀가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그는 단 하나의 생각만 반복하고 있었다.“서윤이... 어디 숨겼어!”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체면도,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서늘한 침묵이 찢기듯 무너지는 순간 두 사람은 한 치 물러섬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근사한 체면과 품위 따윈 이미 내던진 싸움이었다.결국 소주원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하지만 그는 끝까지 이를 악물고 외쳤다.“고영훈! 죽어도 안 가르쳐줘! 너, 서윤이가 떠나기 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별장에서 네가 연수랑 파티 벌이던 그날 밤... 서윤이는 심장 수술 받은 지 며칠 안 됐다고! 근데 네가 창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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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곧이어 공기를 가르는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심건모가 본능적으로 분만실 쪽을 바라보았다.진도연은 미리 준비해 둔 아기용품을 들고 서둘러 달려갔다.간호사가 품에 안겨 있던 작은 여자아기를 내어주자, 그녀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았다.“산모는 괜찮나요?”심건모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진도연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국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심장내과 전문의가 이미 수술을 이어받았습니다.”간호사의 말에 심건모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진도연은 품 안의 아기를 내려다봤다. 작은 생명이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국, 국장님... 저, 이런 작은 아기는 안아본 적이 없어서요...”거의 울먹이며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심건모는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팔을 내밀었다.진도연은 안도하듯 아기를 그의 품으로 넘겼다. 그리고 긴장이 풀려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심건모는 놀라울 만큼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그의 품에 안기자, 아기는 금세 잠이 들었다.진도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국장님 같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10시간 후, 송서윤이 수술실에서 나왔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집도의가 웃으며 말했다.심건모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료진과 악수를 나눴다. 그의 침착한 태도에 모두가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송서윤은 병실로 옮겨졌고 갓난아이는 옆의 작은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진도연은 육아 도우미가 아기에게 미온수를 부어 씻기고 부드러운 옷으로 갈아입히는 모습을 지켜보다 향긋한 아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심건모는 잠시 송서윤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 시각, 소주원과 고영훈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각각 풀려났다.밖으로 나온 직후 소주원은 송서윤이 출산했다는 전화를 받았다.“도윤아, 네 여동생이 태어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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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고영훈의 전용기가 외해 상공에 진입했다.기지의 화력 통제 레이더가 이미 목표를 정조준하고 있었다.심건모의 한마디면 그 비행기와 탑승자들은 단 몇 초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국장님, 격퇴 명령입니까?”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우선 소주원 교수의 비행기를 돌려보내.”심건모는 화면 속 점점 다가오는 붉은 점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지시에 따라 통신팀이 즉시 무선 채널을 열었다.곧 소주원의 비행기는 기지 상공을 가로질러 멀어져 갔다.“대표님, 소주원 교수가 탄 비행기는 이미 벗어났습니다.”조종실로 다가온 경호원이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저희는 어떻게 할까요?”“계속 해담도로 향해.”고영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 그 어떤 국가의 영해도 아니었다.‘소주원의 비행 항로가 이곳을 지날 이유는 단 하나, 송서윤을 만나러 오는 것!’그리고 그 증거는 소도윤이 손목에 찬 블루 스타였다.“예!”경호원은 즉시 조종석으로 돌아가 지시를 내렸다.비행기는 해담도를 향해 고도를 낮췄다....기지 내부에 갑자기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붉은 경고등이 일제히 점멸했다.심건모가 조종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직원이 긴박하게 보고했다.“국장님! 그 비행기가 진입했습니다!”“격추합시다, 국장님!”기지의 보안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단 한 번의 망설임도 허용되지 않았다.심건모가 짧게 눈짓하자, 직원이 곧바로 레이더 발사 스위치를 눌렀다.순간, 굉음과 함께 미사일이 기지에서 솟구쳤다.섬광이 하늘을 가르며 고영훈의 비행기를 포위했고 기지의 거대한 방호막이 진동했다.비행기가 급격히 흔들리며, 제어를 잃은 채 자유 낙하로 떨어졌다.미사일은 기체 상단을 스친 뒤, 곡선을 그리며 다시 추격했다.곧이어 ‘콰앙!’ 폭발음이 태평양을 뒤흔들었고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다.잠수정이 잔해 수색을 마치고 돌아왔다.“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잔해도, 기체도 전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심건모는 송서윤의 창백한 얼굴을 흘깃 보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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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이리안의 통통한 손바닥이 소도윤의 볼을 ‘찰칵찰칵’ 두드리며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내뱉었다.“빙글... 빙글...”육아 도우미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들 곁을 돌았다.“그렇게 세게 돌리면 안 돼요. 살살, 천천히요.”소도윤은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이리안을 안았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이리안은 축축해진 볼을 소도윤의 옷에 문질러 닦더니, 새초롬하게 웃었다.그 모습에 주위를 둘러싼 모두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더는 참지 못했다.송서윤과 소주원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금빛 모래 위로 석양이 내려앉았고 가로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게 늘어졌다.그때, 소주원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려 있었다.“서윤아, 나랑 결혼해 줘. 리안이의 아빠가 되고 싶어. 평생 너희 둘을 지켜줄게. 우리 이제는... 절대 헤어지지 말자.”바람이 불었다. 모래가 부서진 별빛처럼 흩날렸고 그 바람이 송서윤의 치맛자락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멀지 않은 곳 기지의 최고층 유리창 앞에서 심건모는 조용히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무표정한 얼굴, 정제된 손끝 그의 시선은 어느 한 줄의 보고서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밤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 송서윤은 심건모의 사무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망설인 끝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녀의 손에는 혼인신고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국장님... 저랑 결혼해 주세요.”심건모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그 위에는 ‘이리안’의 출생신고서가 놓여 있었고 부모란은 비어 있었다.어떤 이름도, 어떤 관계도 적히지 않은 채, 하얀 공란만이 남아 있었다.송서윤은 기지에서 ‘케이시’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그녀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이었다.기지 내부에서도 극소수의 고위층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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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성당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뭐 하는 짓이야!”신랑이 주먹을 치켜들고 고영훈에게 달려들었으나, 경호원이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신부는 고영훈의 품에서 격렬히 몸을 비틀며 손바닥을 힘껏 내리쳤다.“미친놈! 남의 결혼식에 난입해서 이게 무슨 짓이야!”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치는 순간, 고영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부를 바라봤다.오래 병상에 누워 있었던 탓인지 얼굴에는 피기 하나 없고 눈동자엔 붉은 핏줄이 얽혀 있었다. 그 창백한 몰골은 마치 흡혈귀 같았다.신부는 겁에 질려 신랑 품으로 주저앉았다.“당신 누구야? 처음 보는 사람이잖아! 왜 우리 결혼식을 망쳐!”신랑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고영훈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고 낮게 물었다.“내 아내는... 어디 있어?”“아내? 당신 미쳤어? 당신 아내를 왜 우리 결혼식장에서 찾아!”신랑의 비아냥에 성당 안이 웃음으로 덮였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고영훈은 순식간에 손을 뻗어 신랑의 목을 움켜쥐었고 그의 눈빛에는 한기 서린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내 아내의 이름이 이 결혼식 명단에 있었어. 대답해, 내 아내가 어디 있는지!”차갑고 또렷한 목소리가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하객들은 겁에 질려도 감히 다가서지 못했고 신부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팔을 붙잡는 사이 경호원들은 이미 교회 출입문을 막아섰다.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그의 손아귀는 점점 조여들었고 지금 당장 답을 듣지 못하면 정말로 신랑을 죽일 기세였다.그때 경호팀장이 태블릿을 내밀었다.“여기 보세요! 이분이 저희 사모님입니다. 혹시 이런 얼굴 보신 적 있습니까? 단서 제공자에게는 대표님께서 큰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어서 좀 도와주세요!”남편의 숨이 끊어질 듯 약해지는 걸 느낀 신부가 다급히 외쳤고 사람들은 태블릿을 받아 서로에게 돌려보았다.잠시 후 하객석에서 누군가 외쳤다.“마주친 적 있습니다! 오늘 낮에 애 둘을 데리고 성당에 왔었어요. 같이 온 남자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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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하지만 송서윤이 움직이는 곳에 감히 감시 카메라가 작동될 리 없었다.그녀의 흔적은 언제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고 그 모습을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없었다.고영훈의 시선이 멈췄다.멀리서 하얀색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자,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묘비 앞에 놓인 튤립이 눈에 들어왔고 그는 몸을 낮춰 잎사귀를 만졌다.촉촉한 물기가 아직 그대로였다.“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어!”그의 손이 떨렸다.순간, 그는 경호팀장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서윤이가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고. 빨리 찾아내!”“예!”명령이 떨어지자, 경호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그때 등 뒤에서 미세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짧고 여린 울음이었다.송서윤은 이리안의 입을 조심스럽게 막았다. 숨소리마저 들킬까 두려워, 몸을 웅크린 채 고영훈의 움직임을 지켜봤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보지 못했다. 대신 시선은 어느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그곳에서 흰 옷자락이 스친 뒤의 그림자 하나, 그리고 그 뒤로 빠르게 닫히는 묘지의 뒷문이 보였다.그 순간 고영훈은 몸이 무너질 듯 휘청이며 뛰었다.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이미 늦었다.검은 세단 한 대가 숲을 가르며 교차로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손끝에 닿을 듯, 그러나 닿지 못한 거리, 그는 멈춰 선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이 가슴을 갈랐다.“서윤아... 가지 마...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그의 목소리는 찢겨 나가듯 절박했다.반 시간쯤 뒤, 경호원들이 돌아왔다.“대표님... 운전기사가 이 근처 지리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잠시 머뭇거리던 경호원이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사모님을... 놓쳤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고영훈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얼굴에는 후회와 절망이 교차했고 손끝이 허공을 더듬다 힘없이 떨어졌다.“대표님! 대표님!”경호원들이 외치며 달려왔고 고영훈은 들것에 실려 의료 차량으로 옮겨졌다.그 틈에도 낮은 대화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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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고영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그러나 눈앞에 보인 것은 송서윤이 아니라 서지원의 얼굴이었다.‘엄마가 아니야.’“이모가 하준이 안아줄게. 많이 아픈 것 같네? 병원에 데려가야겠어.”주희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지원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하지만 고하준은 냅다 뿌리쳤다.“나쁜 이모, 만지지 마세요!”고하준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할머니의 옷자락을 꽉 붙잡으며 울먹였다.“엄마... 나 엄마한테 갈래...”고하준은 이제 고작 일곱 살이었다.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를 나이를 이미 지났고, 그 어린 마음은 이미 상처로 얼룩졌다.서지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찰나의 침묵 끝에 억눌러왔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송서윤은... 떠나고 나서도 여전히 나한테서 영훈이를 빼앗아 가는구나.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영훈이도 하준이도 둘 다 송서윤밖에 모르는 거야?’서씨 가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서지원은 고영훈을 증오하기보다 광기와 상실 속에서 무너져가는 고영훈 부자를 찾아왔다.그 진심만큼은 주희영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손자의 가까이에 둘 수는 없었다.아들이 여전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기에 손자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주희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경호원에게 고하준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서지원은 그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정민지를 찾아가 언제나처럼 아이 곁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민지야, 넌 네 아빠의 친딸이야. 아빠는 널 버릴 리 없어. 조금만 기다리면 아빠가 데리러 올 거야.”정민지는 천진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그때 말할래요. 아빠한테 지원 이모가 민지 엄마 됐으면 좋겠다고요.”정민지는 본능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줄 아는 아이였다. 따뜻하게 다가와 준 사람이 서지원뿐이었기에 의지할 곳도 그뿐이었다.정민지는 2년 전, 아빠가 엄마와 헤어지던 날 이후 단 한 번도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지원 이모... 우리 엄마 어디 있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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