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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한다고 말해줘: Chapter 91 - Chapter 100

100 Chapters

제91화

창밖의 눈부신 햇빛 때문에 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얇은 흰색 커튼은 빛을 전혀 가려주지 못했다.어젯밤 진호영 등 사람들과 모임을 가진 하도진은 비록 흥이 나지 않았으나 친구들이 술을 억지로 먹이는 바람에 그만 취해버렸다. 그리고 취한 뒤의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하도진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리려고 했으나 왼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잠시 뒤 저린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하도진은 몸을 비틀며 고개를 살짝 돌렸고 그제야 자신의 품에 민하윤이 안겨 있다는 걸 발견했다. 민하윤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그의 팔을 벤 채 자고 있었다.하도진은 뒤늦게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왠지 익숙하다 싶었는데... 왜 이 방으로 온 거지?’긴 머리를 풀어 헤친 민하윤은 머리카락 때문에 작은 얼굴이 많이 가려졌고, 또 길게 뻗은 속눈썹은 아주 가지런했다. 깊이 잠든 그녀는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옷 단추 몇 개는 언제 풀린 건지 흰 피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긴 머리카락이 살결을 은근히 가리고 있어서 유혹적이었다.아까 민하윤이 그를 만져 잠이 깬 걸까?하도진은 천천히 정신을 차린 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자는 척하는 거 아니야?’민하윤을 제외하면 이 방 안에 그의 몸을 만질 사람이 없었다.하도진은 심지어 오른손을 들어 민하윤의 볼을 찔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떠오른 하도진은 능숙하게 민하윤의 잠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는데 다음 행동을 이어가기도 전에 다시금 익숙한 촉감이 느껴졌다.눈을 동그랗게 뜬 하도진은 이불 안에서 흰 새끼 고양이가 고개를 내미는 걸 발견했다. 새끼 고양이는 온몸이 말랑말랑했고 하도진의 가슴팍에 편하게 엎드려 있었다. 고양이는 하도진의 쇄골 위에 발을 모으고 있었다.하도진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잠깐 놀라서 얼어붙었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심지어 저린 왼팔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민하윤은 몸을 뒤척이면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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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하도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카드를 주웠고 본능적으로 그 위에 적힌 내용을 더듬대며 읽었다.“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임... 임형섭?”하도진은 그 순간 술이 확 깨서 카드를 이리저리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드레스와 카드 사이를 오갔다.하도진은 드레스를 한쪽에 던져두고 휘청이며 술 진열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술병 하나를 집어 들고 거칠게 오프너로 뚜껑을 땄다. 하도진은 비틀대며 드레스 위로 술을 쏟았다. 그런 짓을 저지른 뒤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병을 던져두고 난간을 붙잡고 익숙하게 민하윤의 방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잔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오늘처럼 단순히 이불만 덮고 얌전히 잔 적은 많지 않았다.“어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머리가 좀 아파...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아.”하도진은 자신이 망가뜨린 드레스를 떠올리자 민하윤을 강하게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그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아꼈다.민하윤은 다크써클이 심했고 곧 출근 시간이라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었다. 결국 민하윤이 침대에서 일어나 씻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그녀의 손 옆으로 기어 왔다.그 순간 방 안이 고요해졌다.민하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눈알을 굴리며 옆에 있는 하도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적당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나한테 설명할 생각 없어? 어디서 데려온 고양이야?”하도진은 취했을 때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술김에 데려온 고양이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고양이는 몸이 지저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심한 보살핌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금방 태어난 것인지 몸집이 굉장히 작았고 기운도 살짝 없어 보였다.민하윤은 감히 하도진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는 서랍 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낸 뒤 잠깐 고민하다가 글을 적었다.[고양이 키워도 돼요? 신경 쓰인다면 이 방 안에서만 지내게 할게요. 절대 도진 씨를 방해하지 않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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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민하윤은 침묵했다. 임형섭이 준 거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하도진은 차갑게 웃었다.“그 드레스는 흔치 않은 브랜드의 드레스라 적어도 수백만 원은 해. 네가 그렇게 비싼 드레스를 살 리는 없지. 그리고 너한테 이 드레스를 선물로 준 사람은 네 사이즈를 굉장히 잘 알고 있나 봐.”하도진은 싸늘한 얼굴로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민하윤이 씩씩대면서 쓰레기통 앞으로 달려가 쓰레기통을 뒤져 드레스를 찾아내려고 하자 나지혜가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나지혜는 하도진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드레스는 제가 따로 빼놨어요. 하지만 와인 자국은 지우기 힘들 것 같아요.”쓰레기통 안에는 와인병이 담겨 있었다. 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 브랜드는 민성현의 술 진열장에 있던 것과 똑같은 브랜드인 로마네 콩티였고 연도도 민성현의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민성현은 그것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진열장 꼭대기에 보관해 두었다. 그로써 그 술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민하윤은 충격을 받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하도진은 미친 것일까? 2억 원짜리 술을 낭비한 이유가 그녀의 드레스를 망가뜨리기 위해서라니.“드레스는 내가 배상할게.”하도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민하윤은 화가 나서 빠르게 타자를 했다.[열 벌 사주면 뭐가 달라져요? 돈이 많으면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그 고양이 키우게 해줄게.”하도진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그는 몰래 민하윤의 안색을 살펴보았다.민하윤은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매우 내키지 않는 얼굴로 줏대 없이 물었다.[정말요?]하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드레스 얘기는 그만해도 되지?”민하윤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하도진은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것은 그의 비장의 무기였다. 조금 전 위층에서 잠깐 마음이 약해져 고양이를 키워도 된다고 바로 승낙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민하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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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이남주는 웃으면서 두어 마디 더 하고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민하윤과 헤어졌다.민하윤은 지하 1층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유청원이 이틀 동안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준 덕에 이제는 운전할 때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 차가 있으니 편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직접 운전해서 가면 되기 때문에 삶이 훨씬 편리해졌다.민하윤은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세리 엔터에 도착했다. 눈앞의 수십 층 높이의 빌딩은 굉장히 화려했다. 햇빛 아래 세리 두 글자는 금빛으로 반짝였고 건물 앞 주차장에는 아티스트 전용 밴으로 가득 차 있었다.민하윤은 자신의 흰 차를 타고 두 바퀴쯤 돌고 나서야 겨우 구석 끝에 있는 자리를 찾아 주차할 수 있었다.민하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민하윤을 막아섰다. 민하윤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장에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고, 직원은 민하윤의 사원증을 확인한 뒤 그녀를 도와 카드를 찍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세리 엔터의 재무팀은 18층에 있었다. 민하윤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회사 곳곳에서 해당 기획사 소속 아티스트들의 영화 포스터, 패션 화보, 럭셔리 브랜드 광고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민하윤은 조금 놀랐다. 그녀는 특별한 곳 하나 없는 평범한 회사처럼 보이는 이곳에 이렇게 많은 톱스타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가장 놀라운 점은 민하윤이 좋아하는 가수도 이 회사 소속이었다는 점이다.민하윤은 문득 그동안 어렵게 티켓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많은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들 모두 선글라스를 쓴 남녀 두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두 남녀는 조금 전까지 손을 잡고 다정하게 있었으면서 엘리베이터 밖에 사람이 있는 걸 보더니 곧바로 표정을 굳히며 손을 놓고 서로 모르는 척했다.민하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은 회사 소속 아티스트끼리 비밀 연애를 하면서 주변 직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다니.민하윤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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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난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캐스팅 디렉터의 눈에 띄어서 연예인으로 데뷔했어. 그런데 데뷔한 뒤로 별로 인기가 없었지. 그래서 회사에서 작명소를 찾아가서 이름을 받아왔거든. 그래서 지금은 백누리라고 불려.”여자는 환하게 웃었지만 얼굴 근육이 살짝 굳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민하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백누리보다 백해리라는 이름이 훨씬 더 예쁘다고 생각했다.“정말 신기하다. 여기서 널 만날 줄은 몰랐는데. 일 때문에 나 예전 친구들이랑은 연락 다 끊었었거든. 너 지금은 무슨 일 해?”백누리는 민하윤이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또 질문을 던졌다.민하윤은 싱긋 웃으면서 일부러 수화를 했다.[은행에서 일해.]백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수화를 알아보지 못했음에도 계속하여 화제를 찾았다.“우리 연락처 주고받자. 졸업 후에 우리 연락한 적 없잖아. 그리고 학교에 다닐 때도 너는 꽤 차가운 편이어서 다가가기 어려웠어.”민하윤은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백누리의 연락처를 추가했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가 16층에 도착했다.백누리는 습관처럼 선글라스를 낀 뒤 더는 민하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민하윤도 백누리를 모른 척하면서 그녀에게서 등을 졌다.“선배, 여기서 만나네요. 선배 촬영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회사로 돌아온 거예요?”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민하윤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가 마침 고은율과 시선이 부딪쳤다. 고은율은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다.오늘은 운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평소라면 절대 만날 일 없는 사람을 이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민하윤이 먼저 시선을 돌리며 고은율과 인사 나누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숫자가 점점 커지는 걸 빤히 바라보면서 19층에 도착하면 바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백누리는 고은율을 싫어하는지 차가운 얼굴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고, 민하윤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은근한 기류가 느껴지는 걸 발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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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은율 씨, 유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옆에 있던 직원이 가볍게 고은율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눈치 빠르게 두 사람 사이에 섰다.고은율은 매니저에게 휴대전화를 달라고 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어머, 깜빡할 뻔했네요. 어제 유 대표님께서 저한테 회사 선배님들과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서 사람들 시선을 좀 끌어보라고 했었는데 말이죠.”백누리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까지는 빈정대다가 지금은 그녀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애원하다니. 백누리는 5년의 경력을 얕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은율은 카메라를 켜더니 빠르게 귀여운 표정을 지으면서 친한 척 백누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백누리는 사실 굉장히 불쾌했으나 프로 의식을 발휘하여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은율은 버튼을 바로 누르지 않았다.“선배, 코는 어디서 한 거예요? 좀 부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웃을 때 표정이 좀 굳어 있어요.”백누리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미소를 짓는 한편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래서 찍을 거야? 말 거야?”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린 채로 25층에 도착했다. 매니저는 몸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분위기는 점점 더 과열되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고은율은 백누리와 거리를 두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됐어요. 안 찍을래요.”코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백누리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CCTV가 없었다면 난폭한 성격의 그녀는 당장 고은율의 머리카락을 잡아챘을 것이다.“안 갈 거예요? 저는 마음이 꽤 급해서요. 회사에서 저를 위해 럭셔리 브랜드 가방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속모델 계약을 따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사인하러 가봐야 해요.”고은율이 마지막 한 방을 먹였다.백누리는 비서에게 끌려가다시피 했고, 백누리와 그녀를 담당한 직원들 모두 짐을 챙겨 부랴부랴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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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서명인은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실 밖에 도착했다. 응급실 밖 벤치에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서명인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을 새도 없이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하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수술 중이에요.”진호영은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에 익었다.“도진이 형 비서세요?”서명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비백산했다. 그는 보험 회사에서 연락받은 뒤 액셀을 힘껏 밟으며 병원에 도착했다. 하도진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다니.“대표님 아버님과 채 선생님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서명인은 머뭇거리며 앞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하도진과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구준오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그럴 필요 없어요. 일단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해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서명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손을 덜덜 떨며 주머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일단 어른들께서 놀라실 수 있으니까 연락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면 사모님께도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까요?”서명인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져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서명인이 설명하기도 전에 병원 복도 끝에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여자가 아주 높은 하이힐을 신고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있어서 처음엔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도진이는 어때? 많이 다쳤어? 왜 갑자기 교통사고가 난 거야? 도진이는?”고은율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이면서 말했다.“얘기 좀 해 봐. 도진이는 어디 있어?”구준오는 달래듯 고은율의 어깨를 토닥였다.“도진이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고은율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고은율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응급실 불빛이 푸른빛으로 바뀌면서 문이 열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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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다들 고은율의 신분을 묵인했다. 오직 서명인만이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교통사고 같은 큰 일을 집안 어른들에게 얘기하지 않는 것은 어른들을 괜히 걱정시키는 일이라서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하도진과 결혼하여 그의 아내가 된 민하윤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아내도 아닌 고은율까지 이 사실을 아는데 정작 하도진의 아내인 민하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 이상했다.서명인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 뒤 거듭 망설이다가 민하윤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세리 엔터에서 나오자마자 민하윤의 벨소리가 울렸다.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민하윤은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들은 늘 카톡이나 메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녀의 개인 연락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게다가 민하윤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간병인 서정아도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만 그녀에게 전화했다.보이스 피싱일까? 민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사모님, 저 대표님 비서 서명인입니다. 혹시 기억하고 계신가요?”서명인은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들을까 봐 일부로 목소리를 낮추었다.민하윤은 휴대전화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그것을 눈치챈 서명인은 바로 다급히 목청을 높였다.“당황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대표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차가 벼랑 아래로 떨어졌었대요. 지금은 병원으로 이송됐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쳐서 병실로 옮겨졌어요.”민하윤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눈앞이 아찔해졌으며 이명이 들렸다. 그녀는 황급히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민하윤은 서둘러 전화를 끊은 뒤 서명인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어느 병원이에요?]서명인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민하윤에게 주소를 보냈다.그는 부디 자신의 행동으로 나쁜 결과가 초래되지 않기를 바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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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고은율의 말이 민하윤의 모든 열정과 희망을 사그라들게 했다.민하윤은 다시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은율과 하도진 사이에 끼어든 걸까?고은율과 하도진은 7년 동안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다. 반대로 민하윤은 하도진과 하룻밤을 보내고 하도진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기에 하도진과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하도진과의 관계를 공개할 수가 없었다.고은율은 자신이 마치 도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행복을 빼앗아 가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자리를 차지하며 지금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남의 행복을 훔쳐보고 있으니 말이다.서명인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민하윤이 왜 아직도 오지 않는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고개를 드는 순간 병실 문 앞에서 가냘픈 실루엣이 보였다.서명인은 빠르게 밖으로 나간 뒤 조용히 민하윤의 뒤에 나타났다.“사모님,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시는 거죠?”민하윤은 슬픈 표정을 거두고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뒤 메모장에 글을 적어 서명인에게 하도진의 상태를 물었다.[도진 씨 괜찮은 거 맞아요?][많이 다쳤어요?][왜 갑자기 사고가 생긴 거예요?]서명인이 위로했다.“지금은 괜찮으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고 오른팔은 분쇄 골절을 입었대요. 비교적 심각한 부분은 이마의 외상인데 두개내출혈이 있을 수 있다면서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민하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그런데 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예요? 왜 차가 벼랑 아래로 떨어진 거예요?][집안 어른들은 알고 계세요?]민하윤의 얼굴에서 근심과 걱정이 보였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가녀린 어깨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서명인은 민하윤이 하도진을 이렇게 걱정하는 것을 하도진이 보게 된다면 기뻐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사고 원인은 아직 조사 중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고 하 대표님이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서 사고가 발생한 걸로 추정하고 있어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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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구준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도진아, 뭐 찾는 거야?”하도진은 자신이 보고 싶던 사람을 찾지 못해 조금 실망했으나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아 감정을 추스른 뒤 덤덤히 말했다.“서 비서는?”서명인은 조금 놀랐다. 그동안 수년간 묵묵히 고생하며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하도진의 비서가 된 보람이 있었다. 하도진은 비록 평소에는 차갑고 냉정하며 무자비해 보였지만 큰 고비를 넘긴 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서명인을 찾았다.서명인은 감동을 받고 코를 훌쩍이면서 횡설수설 말했다.“저 여기 있어요. 대표님, 무슨 지시 있으신가요?”하도진은 힘겹게 왼손을 들어 방 안을 쭉 가리키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있는 사람들 한 명도 빼놓지 말고 전부 다 내쫓아. 난 환자야. 조용한 환경이 필요해.”진호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형, 우리가 형 벼랑에서 건져 올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구조대가 오려면 최소한 30분은 걸린다고 하길래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서 진짜 목숨 걸고 형을 벼랑 아래서 끌어 올렸다고. 그런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우리를 내쫓는 거야? 진짜 너무하다. 어쩌면 이렇게 매정해?”진호영은 서운한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하도진은 그의 말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일단 돌아가.”“가자.”구준오가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고은율은 꿈쩍하지 않았다. 자기는 예외라는 듯이 말이다.“넌 안 가?”하도진이 고개를 돌려 고은율에게 물었다.“난 널 보살펴주고 싶어. 그러니까 여기 있게 해줘.”고은율이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하도진은 시선을 피하며 차갑게 거절했다.“필요 없어. 날 돌봐줄 사람들은 많으니까.”다들 하도진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알고 있었다. 하도진은 한 번 결정한 일은 절대 번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하도진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고은율은 눈시울이 붉히며 억울한 표정을 해 보였다.진호영은 상황을 보더니 바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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