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211 - 챕터 220

268 챕터

제211화

지설은 병원에서 나와 막 길을 건너려던 참이었다.그때 병원 입구 옆 밀크티 가게 앞에서 한 노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지설은 바로 달려갔다.“할머니, 괜찮으세요?”노인은 목을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설은 바닥에 떨어진 밀크티 컵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다.‘펄이 목에 걸렸구나.’지설은 노인의 몸을 앞으로 기울게 한 뒤, 왼손을 주먹 쥐어 복부에 대고, 오른손으로 빠르게 감싸 쥔 채 힘을 줘 올렸다.몇 차례 반복하자 노인의 입에서 타피오카 펄이 튀어나왔다.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더니, 서서히 숨을 고르며 안정을 찾았다. 혈색도 조금씩 돌아왔다.지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사실 홍영희는 잠깐 단것이 당겨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다.하지만 의사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들이 강하게 말렸고, 결국 몰래 빠져나와 혼자 사 마신 참이었다.설마 펄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줄은 상상도 못 했다.‘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홍영희는 지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아까 정말 고마웠어.”지설은 손을 내저었다.“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홍영희는 지설의 손을 붙잡았다. 정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이름이 뭐니? 할머니가 꼭 보답할게.”‘집 한 채를 줄까? 차를 한 대 사 줄까?’홍영희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생각이 오갔다.지설은 웃으며 말했다.“심지설이에요. 정말 괜찮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 한 거고요. 그리고 다음엔 밀크티 드실 때 조심하세요.”홍영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다음부턴 조심할게.”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연락처 좀 주렴.”지설은 난처하게 웃었다.“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돼서요.”정중히 인사한 뒤, 지설은 자리를 떠났다.홍영희는 지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참 괜찮은 아가씨네. 결혼은 했는지 모르겠네. 안 했으면 내가 좋은 신랑감이라도 소개해 주고 싶은데.”나이가 들수록 좋은 사람들을 엮어 주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레 커진다.홍영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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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방해라니.”예린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람 많으면 더 좋잖아. 게다가 심지설 씨도 같이 왔는데?”도진은 바로 정색했다.“지설 씨는 달라.”예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도진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설이 다른 사람들과 ‘다름’을 인정할 줄은 몰랐다.예린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다시 웃음을 입에 걸었다.“그럼 심지설 씨 혼자 로펌 팀에 섞이면 외롭잖아. 내가 심지설 씨 옆에 있어 줄게.”말하며 지설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심지설 씨, 설마 거절하진 않겠죠?”지설은 속으로 생각했다.‘참 뻔뻔하네.’그동안 예린이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이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친한 척할 이유는 없었다.지설은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로펌에 아는 변호사분들도 있고, 전혀 외롭지 않아요.”우란 덕분에 알게 된 여자 변호사들도 몇 명 있었다.취향이 비슷해, 평소에도 종종 같이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다.예린은 지설이 이렇게 대놓고 거절할 줄 몰랐다.이를 악물었지만, 겉으로는 웃음을 유지했다.도진은 예린을 없는 사람처럼 넘기고 말했다.“이동하죠. 먼저 체크인하고, 짐 풀고. 저녁에 다 같이 식사합시다.”사람들은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도진이 예린을 어떻게 대하는지 충분히 느꼈다.자연스럽게, 예린은 모임에서 완전히 배제됐다.예린의 속이 끓었지만,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이번 기회에 반드시 도진 오빠를 되찾을 거야.’...지설은 객실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마침 마무리할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룸서비스인가?’문을 열자, 서 있는 사람은 예린이었다.지설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무슨 일이세요?”예린은 지설의 차분한 태도가 더 거슬렸다.“심지설, 너무 우쭐대지 마. 도진 오빠가 너 좋아한다고, 네가 도진 오빠랑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지설은 도진과 결혼 이야기를 할 단계는 아니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얽히는 건 피곤했다.“이건 나와 기 변호사님 사이의 일이잖아. 구예린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어.”예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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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우란은 최근에 푹 빠져 시청 중인 드라마 이야기를 지설에게 꺼냈다.“요즘 진짜 핫한 드라마가 있는데요. 제목이 ‘작은 전화’예요. 남주가 완전 아빠 같은 연인인데, 잘생긴 건 기본이고요.”“근데 말이 너무 독해요. 혀 한 번만 잘못 놀려도 자기가 중독될 정도예요. 여주는 말도 잘 못 하는 불쌍한 캐릭터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완전 페이크예요.”“와, 진짜 전개가 미쳤다니까요.”지설은 아직 보지 못한 드라마라,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점점 드라마 내용에 빠져들었다.옆에 있던 여자 변호사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각자 최애 장면을 말하고, 남주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다.우란은 한숨을 쉬었다.“이런 거 보다가 뇌가 망가졌어요. 이 드라마 때문에 이번 생은 연애를 못 하겠어요.”다른 여자 변호사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현실 남자들과 비교하면 격차가 너무 커서요.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겠어요.”그 말에 근처에 있던 남자 변호사들이 발끈했다.“아니,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우리 로펌에 좋은 남자들 많잖아요.”우란은 웃지도 않았다.“좋은 남자요? 결혼한 분들 보세요. 일 바쁘다고 집에는 거의 못 들어가고, 집안일은 다 아내 몫이에요. 그게 좋은 남자예요?”남자 변호사가 반박했다.“그래도 돈 벌어야 가족 먹여 살리죠. 일하고 돈 버느라 자기를 희생하는 남편들도 좋은 남자 아닙니까?”우란은 단호했다.“벌어온 돈 다 아내한테 맡기고요. 아이 낳으라고 강요 안 하고, 둘째 셋째 얘기 안 하고요. 시댁 문제도 알아서 정리하고요.”“집에 못 들어와도, 정기적으로 아내 감정 챙겨 줄 수 있으면요. 그 정도면 결혼, 못 할 것도 없죠.”“근데 그게 안 되면요. 여자한테 결혼은 거의 고행이나 마찬가지예요.”아까 반박하던 남자 변호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결혼 후 수입을 전부 공개하고, 출산을 강요하지 않으며, 시댁과 아내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남자는 현실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우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이혼 사건을 그렇게 많이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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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상사도 결국 남자이다 보니, 우란은 당연히 도진의 체면을 세워줄 수밖에 없었다.우란은 도진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대표님, 오늘 옷차림이 평소와는 좀 다르신데요?”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도진에게 모였다.지설도 함께 도진을 바라봤다.평소 도진은 정장이나 셔츠 차림이 대부분이었고, 색감도 검정이나 흰색, 회색 위주였다.그런데 오늘 도진은 비교적 캐주얼한 후드티를 입었다.머리도 깔끔하게 넘기지 않아, 늘 풍기던 묵직한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져 보였다.잘 정돈된 인상 대신, 또래보다 조금 더 차분한 대학생 같은 느낌이 더해졌다.우란은 그제야 무언가를 알아챈 듯 지설을 바라봤다.그리고 일부러 웃으며 분위기를 띄웠다.“어머, 지설 씨도 오늘 후드티네요? 설마 두 분, 커플룩이에요?”지설은 그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아니에요.”당연히 커플룩일 리 없었다.도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직원에게 신호를 보내, 자신과 지설 앞에 놓인 술잔을 주스로 바꿔 달라고 했다.지설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다들 술 마시는데, 저희만 안 마셔도 괜찮을까요?”도진은 웃으며 답했다.“괜찮아요. 우리 로펌은 술자리 문화 안 해요. 제가 안 마시면, 아무도 지설 씨한테 술 권하지 않을 거예요.”지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사실 회식 자리에서 술잔을 받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도진은 업무에서는 엄격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상당히 편한 사람이었다.모두에게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하게 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지켜보며 가끔 농담도 받아줬다.어떤 회식 자리는 불필요한 농담이나 여직원에게 술을 강권하거나, 노래나 춤을 억지로 시키는 분위기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하지만 ‘법무법인 도진’에서는 분위기가 달랐다. 여자 변호사들의 존재감이 훨씬 강했고, 말솜씨도 날카로워 남자 변호사들이 함부로 굴기 어려웠다.도진이 술자리 문화를 싫어하고, 여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분명히 해 온 덕분에 남자 직원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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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지설은 도진이 지나치게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걸 보며 마음속에 호기심이 더 커졌다.‘대체 누가 오길래 저렇게 여유가 넘치지?’약 5분쯤 지났을까?룸 문이 다시 열렸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지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멈칫했다.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이국적 외모의 남자였다.지설은 낮은 목소리로 도진에게 물었다.“저 사람이에요?”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네.”그때, 지설에게 신경을 쓰며 계속 기회를 노리던 예린이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하고 시선을 들었다.눈이 크게 떠졌다.“방학진...?”방학진은 예린을 보자마자 표정이 확 밝아졌다.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팔을 벌렸다.“예린아! 자기야! 드디어 찾았네! 갑자기 귀국했다면서 왜 말도 안 했어? 나 진짜 한참 찾았다고.”예린은 학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학진은 예린의 유학 시절 동기였다.예린이 도진을 쫓아다닌 행동이 집착의 수준이었다면, 예린을 쫓아다닌 학진의 집착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학진은 자연스럽게 예린의 옆자리에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했다.눈빛은 지나치게 다정했다.“자기야, 나 보니까 기쁘지?”예린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기쁘긴 뭐가 기뻐.”그리고 급히 도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말이 꼬였다.“도진 오빠, 오해하지 마. 학진이랑은 그냥... 학교 동기야.”도진은 가볍게 웃었다.“오해 안 해. 애초에 신경도 안 쓰고 있으니까.”그 한마디에 예린의 기분은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겨우 이렇게 같이 있는 자리 마련했는데...’‘왜 하필 지금 저 인간이 나타났어.’지설은 학진이 등장한 뒤로 예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가는 걸 보며 도진에게 조용히 물었다.“어떻게 아는 사이에요?”도진은 담담하게 설명했다.“원래는 몰랐어요. 예린이 SNS를 통해서 알게 됐고요. 내 연락처를 알아내서 먼저 연락했어요. 자기랑 예린이가 커플이고, 제가 중간에 끼어든 제3자라는 뉘앙스의 말도 자주 했고요.”도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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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지설은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지혜롭다는 건 인정해요.”잔을 부딪친 뒤, 지설은 식사를 거의 마치고 한가롭게 사람들 노는 모습을 바라봤다.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웃음소리도 자연스러웠다.그때 우란이 옆에서 말을 꺼냈다.“지설 씨, 우리 오늘 밤에 바비큐 파티하기로 했잖아요.”“호텔 루프탑에 사람 많다던데, 지설 씨랑 대표님이 먼저 가서 자리 좀 잡아주실래요?”지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진을 바라봤다.도진은 우란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지설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해주려는 배려였다.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가요.”“겸사겸사 바람도 좀 쐬고요.”지설과 도진이 함께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도진이 갑자기 몸을 돌려 우란에게 말했다.“워크숍 끝나면, 오 대표 사건은 우란 씨가 맡아 주세요.”우란의 눈이 번쩍 빛났다.그 사건은 도진이 절반 이상 진행해 둔 상태라 남은 건 정리 작업뿐이었다.사실상 큰 수임료가 보장된 사건이었다.‘이게 바로 보답인가?’‘아까 잠깐 분위기만 만들어줬을 뿐인데, 우리 기 대표가 바로 이렇게 보상해 주다니.’‘이런 상사라면 진짜 평생 충성해도 되지.’우란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대표님.”“최선을 다할게요.”예린은 두 사람이 나가는 걸 보고 뒤따르려 했지만, 학진이 계속 말을 걸어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었다.예린은 그제야 깨달았다.‘싫은 사람에게 붙잡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도진과 지설은 루프탑으로 올라갔다.밤하늘엔 별이 가득했고, 지설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 고요한 풍경을 바라봤다.사방이 조용해지자 마음도 조금씩 풀어졌다.창업한 이후로 늘 새벽부터 밤까지 바쁘게 움직였고, 영민과 얽힌 일들 때문에 긴장을 풀지 못한 날이 많았다.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도진은 담요 하나를 가져와 지설의 어깨에 덮어주고, 보온병을 건네며 말했다.“물 자주 마셔요.”지설은 속으로 웃었다.‘생활 습관은 정말 어르신 스타일이네.’도진이 옆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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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어쩌다 호두를 키우게 됐어요?”지설은 자연스럽게 물었다.도진이 자주 야근하는 모습이 익숙했기에, 반려견을 돌볼 시간이 있을까 싶었다.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우연이었어요. 호두는 제가 데려온 아이예요. 호두가 개장수 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를 크게 다쳤어요. 제가 발견해서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했고요.”도진은 시선을 멀리 두고 말을 이었다.“처음부터 키울 생각은 없었어요. 시간도 부족했고, 책임질 자신도 없었거든요. 입양할 만한 집을 알아봤는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어요.”“호두가 어릴 때 이미 큰 상처를 겪어서 그런지, 경계심이 심했고, 불안감도 컸어요. 담당 수의사가 그러더라고요.”“이미 저를 신뢰하고 있으니, 제가 계속 키우는 게 좋겠다고요. 그래서 그냥...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어요.”지설은 턱을 괴고 도진을 바라봤다.‘이 사람, 강아지 얘기만 하면 분위기가 달라지네.’도진은 원래 차분한 사람이었지만, 호두 이야기를 할 때는 유독 말이 부드러워졌다.‘반려동물에게 친절한 사람이 마음이 나쁜 사람일 리 없지.’도진은 시선을 느끼고 웃었다.“왜 그렇게 봐요?”지설은 솔직하게 말했다.“갑자기 제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요.”도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무슨 말이에요?”지설은 웃으며 답했다.“도진 씨를 만난 게요.”도진을 알게 된 이후, 지설은 이 사람에게서 꾸준히 존중과 배려를 느껴왔다.부드러움, 절제, 그리고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태도.무엇보다도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도진은 지설을 바라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더 운이 좋은 쪽이에요.”‘평생 누군가에게 마음이 움직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제 알았어.’그날 밤, 지설은 로펌 사람들과 함께 열한 시가 넘어서야 객실로 돌아왔다.막 씻고 나오자마자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예연숙이었다.지설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엄마, 이렇게 늦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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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너랑 영민이 결혼이 딱 그 예야. 이혼했을 때 네가 그 사람 재산에서 얼마나 가지고 나왔니?][나중에 그 변호사랑도 살다 안 맞아서 헤어지면, 그 사람이 너한테 뭘 남겨줄 수 있겠어?]지설은 더는 듣기 힘들었다.“엄마, 나 아직 재혼도 안 했는데 벌써 이혼부터 걱정해?”예연숙은 물러서지 않았다.[엄마 말이 좀 거칠어도 틀린 말은 아니야. 엄마가 지금 악역을 맡는 게 낫지, 네가 불구덩이에 또 뛰어드는 건 못 보겠어.][예전에 네 이모 봐. 내가 옆에서 안 도와줬으면 진작에 못 버텼어.][지금은 그나마 남편이 돈 좀 벌게 돼서 숨통이 트였지만, 그래도 결국 이모는 남편 일 뒷바라지 계속하고 있잖아. 이게 돈 없는 남자랑 결혼한 결과야.]예연숙은 평생 자신이 잘한 선택 하나를 꼽으라면, 돈 있는 남자를 남편으로 고른 거라고 믿었다.다만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그 선택의 과실을 오래 누리지 못했을 뿐이었다.지설은 할 말을 잃었다.결국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인제 그만 쉬어.”예연숙은 딸이 흔들릴까 봐 마지막으로 못 박았다.[연애는 해도 돼. 몸 섞는 건 절대 안 돼. 그거 어기면, 엄마랑 너랑 끝이야.]지설은 더 대꾸하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좋은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왜인지 모르겠지만, 엄마와 통화만 하면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그래도 친엄마였다.마음대로 끊어낼 수도 없었다.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의 엄마는 이렇지 않았다.그땐 말투도 부드러웠고, 남을 쉽게 재단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이렇게 변하는 걸까?’지설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어머니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자기 인생은 결국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씻으러 가려고 할 때, 객실 전화가 울렸다.전화받자 호텔 프런트 직원의 안내가 들려왔다.[고객님, 분실하신 여권을 습득한 분이 계셔서요. 지금 내려오실 수 있을까요?]지설은 가방을 뒤적이다가 여권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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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영민은 문득 감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생각해 보니까, 우리 예전에 사귈 때는 제대로 놀러 나온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 너도 아쉽다고 느끼지 않아?”지설은 짧게 웃었다.“아쉽다고? 전혀.”이미 끝난 일을 왜 굳이 떠올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영민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밤에 기온 떨어지잖아. 네가 가져온 옷 얇을까 봐 외투 하나 샀어. 핑크색이야. 네가 좋아하는 색이잖아.”지설은 차갑게 그를 바라봤을 뿐, 손을 뻗지 않았다.영민은 포기하지 않았다.“지설아, 나도 알아. 너랑 도진이는 아직 사귀는 사이 아니잖아. 넌 도진이 마음은 받아들이면서, 내 마음은 왜 안 돼?”“나랑 도진이, 둘 다 네 앞에선 같은 입장이야. 같은 출발선인데, 네가 한쪽만 선택하는 건 공평하지 않잖아.”지설은 비웃듯 말했다.“같은 출발선? 도진 씨는 적어도 나에게 상처 준 적 없어.”영민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맞아, 예전의 나는 형편없었어. 그건 인정해. 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만난 타이밍이 잘못됐어. 내 상태도 엉망이었고, 이전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었고.”영민은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만약 우리가 지금 만났다면, 나는 도진이보다 너한테 천 배, 만 배는 더 잘할 수 있어. 한 번만 다시 기회 주면 안 될까?”그때 엘리베이터가 지설의 숙소가 있는 층에 도착했다.문이 열리자 지설은 곧바로 내려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영민이 뒤따라 나왔다.문이 닫히려는 순간, 영민이 손으로 문을 막았다.지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영민은 다시 쇼핑백을 내밀었다.“난 그냥 외투만 전해주고 싶었어.”지설은 고개를 저었다. 영민의 물건이라면,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영민은 물러서지 않았다.“안 받으면, 나 안 가.”지설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영민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문이 닫히자마자, 지설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혐오를 담은 채 쇼핑백을 복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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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도진이 휴가에 초대한 이상, 지설도 마냥 즐기기만 할 수는 없었다.마음에 걸려서 도진을 위한 작은 선물을 하나 사 두기로 했다.선물을 고르고 막 계산을 마쳤을 때,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심지설 씨 맞나요? 부영민 씨가 곧 수술에 들어갈 예정인데요. 비상 연락처가 심지설 씨로 되어 있어서, 잠시 병원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지설은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영민이 큰일 나는 걸 외면할 수는 없었다.‘잠깐만 보고, 바로 나오자.’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의사는 수술 동의서를 내밀었고, 지설은 아무 말 없이 서명했다.그 뒤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수술 끝나면 간병인만 붙여 주고 바로 나가면 돼.’‘괜히 오해 살 일은 만들지 말자.’두 시간이 훌쩍 지난 뒤, 영민이 침대에 누운 채로 병실 밖으로 나왔다.영민은 지설을 보자 창백한 얼굴에 미약한 웃음을 띠었다.“지설아... 그래도 나 걱정돼서 온 거잖아.”지설은 대꾸하지 않았다.의사에게 상태를 간단히 확인한 뒤, 말없이 병실로 따라 들어갔다.예약해 둔 간병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지설은 한쪽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영민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지설을 바라봤다.지설은 속으로 짜증이 치밀었다.‘눈으로 사람을 뚫어지게 보는 건 여전하네.’간병인이 도착하자마자 지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때 영민이 눈가를 붉히며 불렀다.“지설아... 가지 마.”지설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이런 식으로 감정에 호소해도 소용없어. 앞으로 아프든, 죽든, 제발 내 인생에서 멀리 떨어져 줘. 나 신경 쓰이게 하지 마.”영민은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지만, 입술만 떨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설은 뒤돌아보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그 시각, 도진은 직원들에게 붙잡혀 어린애 같은 단체 게임에 끌려다니고 있었다.사실 마음은 계속 지설을 향해 있었다.호텔로 돌아가 함께 쉬고 싶었다.하지만 모두가 도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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