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Chapter 81 - Chapter 90

104 Chapters

제81화

맑고 투명한 보석이 오색찬란한 광채를 뿜어냈다.주영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마음에 들어?”“응. 마음에 들어.”문득 주영도가 반짝이는 보석을 선물하길 즐긴다는 걸 깨달았다. 강루인에게 처음 준 선물도 이런 보석이었다.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의 선물 공세에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젠 좋아하게 되었다.주영도가 말했다.“오늘 밤 그거하고 나와.”...저녁 약속 생각에 강루인은 세미나에 온 하루 집중하지 못했다. 원효정이 그녀를 심판하듯 말해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설령 알아차려도 그냥 무시했다.약속 시간 직전 노윤환이 갑자기 국내의 전화를 받고 주영도를 찾아갔다.“대표님, 국내에서 연락이 왔는데 구아정 씨가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화해도 받질 않네요.”노윤환이 속으로 투덜거렸다.‘정말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아. 몸이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지, 참.’그 말에 주영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장 구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화는 꺼져 있고 연락이 닿지 않았다.그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노윤환이 물었다.“귀국하시는 겁니까?”주영도가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아니. 날 레스토랑으로 데려다줘. 그리고 사람 시켜서 계속 찾아. 찾으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서 검사받게 하고.”노윤환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연락이 끊긴 구아정이 이미 프하국의 땅을 밟았다는 사실을.강루인은 주영도보다 늦게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웨이터가 그녀를 안내했다.레스토랑에 로맨틱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웨이터가 장미 한 송이를 건넸는데 총 아홉 송이였다.복도 끝에서 강루인은 흰 정장을 입은 주영도가 큰 장미 꽃다발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강루인은 순간 멍해졌다. 지금의 그는 기억 속의 모습과 조금 겹쳐졌다. 마치 밝게 빛나는 백마 탄 왕자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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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강루인이 옆에 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 달콤하게 느껴졌던 와인이었는데 이젠 쓴맛만 느껴졌다.장미꽃은 여전히 물방울을 머금고 있어 싱그럽고 탐스러웠지만 감상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직 시들어버린 분위기만 남았다.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표정은 비슷했다.부러움과 호기심 어린 시선이 구아정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비웃음으로 바뀌었다.강루인은 와인 잔을 내려놓고 침울한 기분으로 레스토랑을 떠났다.맑았던 하늘에 어느새 먹구름이 끼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하늘도 그녀의 마음을 아는 걸까?강루인은 비를 맞으며 걸었다. 곧 얼굴이 젖었고 빗물과 눈물이 섞여 그녀가 우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그만하고 돌아가.”강루인은 그들이 이미 떠났을 거라 생각했지만 주영도와 구아정은 여전히 멜로드라마를 찍고 있었다.주영도가 구아정을 잡고 차에 태우려 하자 구아정이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안 가. 전에 나랑 약속했잖아. 같이 있어 주겠다고...”구아정이 눈물로 젖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출장 간다고 나한테 거짓말했어...”주영도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달랬다.“거짓말 아니야. 흥분하지 말고 감정 좀 추슬러.”“오빠는 거짓말쟁이야...”구아정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로 맞은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바로 그때 차 한 대가 구아정 쪽으로 돌진해왔다.주영도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구아정을 잡으려 했다.그 광경에 강루인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는데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갔다.“조심해. 가지 마.”하지만 그의 손목을 잡자마자 세게 뿌리쳐졌다. 강루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주영도가 구아정에게로 달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그때 차량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이번엔 강루인 쪽으로 돌진해왔다. 차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머리가 정지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조금 전 그녀의 남편은 다른 여자를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지금 아내가 위험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돌진하기 직전 강루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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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누군가 걱정해주자 강루인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적어도 그녀가 완전히 실패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오히려 강루인이 차성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내 명이 질겨서 죽지 않아요.”차성열이 그녀를 놓아줬다.“의사 선생님이 뭐래? 괜찮대?”강루인이 솔직하게 답했다.“발이 부러진 것 말고는 다 찰과상뿐이에요.”그렇게 심한 교통사고에서도 살아난 걸 보면 염라대왕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 살려줬나 보다.주영도가 왔을 때 강루인이 마침 화장실에서 나왔다. 처음으로 목발을 사용하는 터라 불편했고 차성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조심해.”차성열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부축했다. 강루인이 아직 제대로 눕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갑작스레 나타난 주영도를 보며 강루인은 감정이 격앙될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음이 식어버리면 오히려 더 화를 내지 않는 법이다.강루인은 주영도를 쳐다보다가 다시 차분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주영도의 눈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침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차성열이 그를 막아섰다.걱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움으로 바뀌었다. 주영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말했다.“비켜요.”차성열은 물러서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대표님은 가서 사랑하는 여자나 돌보세요. 루인이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주영도가 불쾌한 기색을 내뿜으며 압박했다.“차성열 씨가 뭔데 우리 부부 일에 끼어드는 거죠?”차성열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조롱하듯 말했다.“부부? 자기 아내가 교통사고 당하는 걸 뻔히 보면서도 구하지 않고 애인만 챙기는 남편은 살다 살다 처음 봤어요.”이건 주영도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었다. 어제 강루인도 사고 현장에 있었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주영도가 말했다.“나랑 아정이 차성열 씨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니에요.”그 한마디는 차성열보다 강루인에게 하는 설명에 가까웠다.강루인은 이제 이런 변명에 진저리가 났고 듣기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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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강루인은 마침내 겉으로는 해를 가하지 않지만 존재 자체가 역겹다는 게 뭔지 깨달았다.분명 다친 건 그녀인데 구아정은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굴었다.강루인이 드디어 주영도를 똑바로 쳐다봤다.“영도 씨도 같은 생각이야?”주영도가 답했다.“다 내 잘못이야.”그 말에 강루인이 조롱 섞인 표정을 지었다. 책임을 떠안는 척하면서 여전히 구아정을 감쌌다.한때 그녀를 매혹했던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니 갑자기 역겨움이 치밀었다. 이젠 정말 지쳤다.“꺼져.”강루인이 싸늘하게 말했다.“구아정 데리고 당장 꺼져!”주영도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구아정이 말했다.“언니, 난 진심으로 사과하려고...”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루인이 침대 옆의 목발을 짚더니 구아정에게 던졌다. 깜짝 놀란 구아정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목발은 그녀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주영도가 대신 막아섰기 때문이었다.“강루인, 지금 뭐 하는 거야?”주영도가 굳은 얼굴로 따져 묻자 강루인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이런데도 아무 사이 아니라고? 위험한 순간에 목숨까지 걸고 지켜주는 평범한 관계가 어디 있어?’그녀는 깨달았다. 주영도에게 부부 관계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영도 오빠.”구아정이 그의 팔을 붙잡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꺼져! 당장 꺼지라고!”강루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쥐었다. 하도 꽉 쥐어서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얘졌다.차성열은 그녀가 지나치게 흥분한 걸 보고 나서서 말했다.“루인이를 아내라고 생각한다면 저 여자 데리고 먼저 나가세요.”주영도는 차성열의 간섭이 달갑지 않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은 구아정을 내보내는 게 우선이었다.병실을 나선 주영도는 구아정을 직접 데려다주지 않고 노윤환에게 맡겼다.구아정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오빠, 내가 잘못한 거 맞지?”주영도가 손을 뿌리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에 피로가 가득했다.그 모습에 구아정이 급히 변명했다.“난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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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알아.”노윤환이 전부 말해줘서 주영도는 알고 있었다.강루인이 무사한 걸 보고 그는 처음엔 안도했고 큰 부상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고 당시 겪은 일을 알게 된 후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을 줄은 몰랐다.강루인의 표정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주영도가 보여주는 연민은 그녀에게 조롱처럼 느껴졌다.뒤늦은 애정은 주지 않는 것보다 못했다.주영도가 말했다.“이건 사고였어.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야.”“우연이 너무 많으면 우연이 아니야. 사고도 마찬가지고.”강루인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나랑 구아정 씨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지 영도 씨는 이미 결정했잖아.”지금 이러는 건 뒤늦게나마 자존심을 세우려는 행동에 불과했다.강루인은 생기 없는 눈빛으로 약간 애원하듯 말했다.“우리 부부로 5년이나 함께 살았어. 그동안 내가 해준 걸 봐서 귀국하면 바로 이혼해줘.”그들의 감정 속에 더 이상 끼고 싶지 않았다. 물러서겠다는데 왜 놓아주지 않는 걸까?달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창문으로 스며들어 강루인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보기 드문 허약한 모습이었다.연민을 느낀 주영도는 강루인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다정하게 말했다.“푹 쉬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강루인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이번 사고로 세미나가 일찍 끝났다. 그녀는 이홍섭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홍섭은 그리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전화를 끊기 전 한마디 했다.“귀국하면 절에 가서 기도해. 혹시 귀신이라도 붙은 거 아닌지.”강루인은 그 말이 주영도를 빗대어 하는 말처럼 들렸다.입원한 동안 주영도는 남편의 역할을 다하려 했다. 일이 없을 땐 병원에 와서 그녀를 돌봤다.하지만 강루인은 그를 무시했다. 그의 존재를 완전히 외면했고 차성열이 올 때만 대화를 나눌 뿐 그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차성열이 말했다.“오늘 밤 귀국해.”강루인이 흠칫 놀랐다.‘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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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언니, 내가 휠체어 밀어줄게요. 안이 엄청 호화로워요. 없는 게 없다니까요? 불편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다 해결해줄게요...”구아정은 이곳의 안주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강루인이 손을 들어 막으면서 차갑게 말했다.“혹시 눈에 문제 있어요?”그 말에 구아정이 멈칫하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강루인이 말했다.“내가 아정 씨 싫어하는 거 안 보여요?”‘내가 이렇게 귀찮아하는데 모른다고?’“언니...”구아정이 입을 삐죽거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처럼.그때 주영도가 구아정을 두둔했다.“아정이는 다른 뜻이 없고 그냥 널 돌봐주려고 그러는 거야.”그의 편애에 강루인이 코웃음을 쳤다.‘구아정의 속셈을 정말 못 본 거야?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거야? 내가 쟤 도움을 받을 것 같아?’죽어서 황량한 들판에 버려진다고 해도 내연녀가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너무 쉽게 죽었다고 여겨 끝까지 괴롭히려는 게 아니면 모를까.그들의 의도가 뭐든 강루인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강루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주영도를 빤히 쳐다봤다.“이 비행기 나 타도 돼?”이 비행기를 꼭 타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주영도의 전용기에 방이 따로 있었는데 그녀는 그곳에 머물렀다. 눈에 안 띄면 마음도 편하기에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열 몇 시간의 비행 동안 강루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있었다.비행기가 안북에 도착했다.주영도가 그녀를 차에 태우려 하자 강루인이 거절했다.“괜찮아.”구아정이 선심 쓰는 척 말했다.“언니, 나한테 화가 나도 오빠의 호의까진 거절하지 말아요. 다리가 불편하잖아요. 우리랑 같이 안 가면 어떻게 가려고요? 제발 어린애처럼 떼쓰지 말아요.”그녀의 ‘교양 있는’ 태도에 비하면 강루인은 억지를 부리는 사람처럼 보였다.“루인아.”그때 함지율이 나타났다.“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내연녀 주제에 조강지처 행세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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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강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성인이니까 뭐.’그녀는 캐리어에서 함지율에게 줄 선물을 꺼냈다.한정판 가방을 든 함지율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방을 멨다.“왜 몇 개 더 안 샀어? 이참에 주영도를 확 파산시켜버릴 거지. 네가 안 쓰면 결국 다 구아정 그년한테 돌아갈 거란 말이야.”함지율은 그녀의 구매력을 과대평가했고 주영도의 자산을 과소평가했다. 가방 몇 개로 그가 파산할 리는 절대 없었다.“배고파.”편안한 환경에 있으니 나른함과 함께 온갖 욕구가 생겨났다. 식욕도 그중 하나였다.외국에 있을 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거기에 부상과 물갈이로 인해 몇 킬로나 빠졌다.함지율은 훌륭한 요리 솜씨로 강루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다. 그런데 밥을 먹기도 전에 주영도가 찾아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강루인은 거절하지 않고 밥을 먹고 가겠다고 했다.함지율은 강루인처럼 상냥하게 굴지 않았다. 그녀 집인데 싫은 사람 쫓아내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대단하신 대표님께서 이 누추한 곳에 계속 계실 수 있겠어요?”함지율은 문 앞에 서서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주영도도 눈치 있는 사람이라 상대의 불쾌감을 알아챘다. 더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아래층에서 강루인을 기다렸다.식탁에서 함지율이 갈비를 뜯었다. 마치 그게 주영도라도 되는 것처럼 사납게 씹었다.“왜 그렇게 순순히 따라가?”가자는 말에 바로 돌아가다니.강루인이 매콤한 닭고기를 먹으며 말했다.“영도 씨가 널 방해할까 봐 그랬지.”함지율이 말했다.“내가 진공 속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소란도 못 참을까 봐?”강루인은 천천히 밥을 먹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시간이나 넘게 걸렸다.그녀는 주영도가 짜증 낼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인내심이 있었지?’함지율은 그녀를 아래층까지 데려다준 후 주영도를 보고 싶지 않아 바로 올라갔다.차가 출발했고 주영도가 운전하며 말했다.“할머니가 너 보고 싶으시대.”강루인은 그제야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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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다리를 절며 들어온 강루인을 본 김옥순은 몹시 마음 아파하면서 주영도를 나무랐다.“루인이 다친 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알았더라면 오라고 했겠어? 대체 루인이를 어떻게 돌본 거야?”주영도가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다 제 잘못이에요.”강루인이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저 괜찮아요. 영도 씨 저한테 잘해줘요.”이혼한다면 주씨 가문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김옥순이었다.김옥순이 손자며느리인 강루인을 진심으로 아껴줬기에 김옥순을 기쁘게 해주려고 주영도와 연기하고 있는 것이었다.옆에 있던 박정금이 휠체어에 앉은 강루인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또 다쳤어? 몸이 왜 이렇게 약해? 괜찮긴 한 게 맞아?’강루인의 수척한 모습에 김옥순은 주방에 보양식을 잔뜩 준비하라고 시켰다. 저녁에 떠날 때도 몸에 좋은 음식을 한가득 실어줬다.김옥순이 말했다.“다 먹으면 할머니한테 말해. 그때 또 보내줄게.”강루인은 마음이 따뜻해졌다.“고마워요, 할머니.”...선샤인 빌리지.주영도가 갑자기 안고 내리자 강루인은 당황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 쳤다.“내려줘. 나 혼자서도 휠체어 탈 수 있어.”‘관객도 없는데 연기를 해서 누구한테 보여주려고?’주영도가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쳤다.“가만히 있어. 떨어지면 어쩌려고.”강루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밤이 하도 고요해서 타격 소리가 선명하고 크게 울렸다. 짐을 옮기러 온 도우미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였지만 몰래 킥킥거리며 웃는 건 결국 강루인에게 들키고 말았다.강루인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침실까지 들어갔다.조명 아래 그녀의 표정이 더 두드러졌다. 주영도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나타났다.침대 밖에서 그녀가 이렇게 수줍어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주영도가 말했다.“목욕물 받아줄게.”비행기에서 쉬었다 해도 열 몇 시간에 달하는 장거리 이동의 피로는 피할 수 없었다.그가 무료 노동력을 자처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주영도는 물을 받고 잠옷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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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한밤중에 고요한 침실에 갑작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주영도가 상태가 좋지 않은 강루인을 흔들어 깨웠다.강루인이 눈을 번쩍 떴다. 눈빛에 혼란과 공포가 가득했고 악몽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졌다.주영도가 물었다.“악몽 꿨어?”그렇다. 악몽을 꾼 것이었다. 그것도 교통사고 현장을 말이다.무시하고 잊으려 했지만 모든 것들이 유령처럼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사고 이후 같은 악몽을 몇 번이나 꿨는지 모른다.강루인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다 지나갔으니 이제 아무 일 없다고. 하지만 악몽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숨을 깊게 들이쉬고 눈을 감은 다음 침을 꿀꺽 삼켰다. 피비린내가 코끝에 맴도는 듯 후각을 자극하며 감각을 무너뜨렸다.그녀의 잠꼬대를 통해 주영도는 그녀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알았다. 그의 눈에 연민이 스쳤다.“심리 상담사를 알아봐 줄까?”필요 없었다. 주영도의 배려는 오히려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경고이기도 했다.그가 세심할수록 강루인은 그녀가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순간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고통은 모두 그로 인해 시작됐다.강루인은 아무 말 없이 이불을 끌어당겨 침대에 누웠다.그녀의 말 없는 저항에 주영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품에 가뒀다.강루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벗어나려 했으나 주영도가 너무 꽉 안고 있어 결국 포기했다.다시 잠들었을 때 다행히 악몽은 꾸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컨디션은 여전히 별로였다.일어나보니 주영도는 이미 회사로 출근했다.귀국 사실을 차성열에게 알렸다. 차성열은 강루인에게 당분간 출근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다.머리와 손이 멀쩡했기에 집에서 도면 작업을 했다.서재에서 작업 중이던 그때 진경자가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상담사가 오셨어요.”강루인은 잠깐 멈칫했다가 주영도가 부른 심리 상담사라는 걸 알았다.어디서 구한 상담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고집스럽게 ‘치료’를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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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강규덕과 강혜미가 무슨 속셈인지 강루인은 관심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강루인은 손을 흔들어 도우미들에게 강혜미의 짐을 옮기라고 했다. 강혜미는 고개를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방으로 들어갔다.주영도가 저녁 식사 시간에 들어왔는데 오자마자 강혜미를 봤다.“형부.”강혜미가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왔어요? 마침 언니랑 저녁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언니한테 형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니까 밖에서 먹을 거라면서 안 기다려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봐, 언니 잘못 짚었어. 언니는 너무 등한시해서 문제야. 전화해서 확인하지도 않고.”말하면서 주영도가 벗은 외투를 받으려 다가갔다.“제가 할게요.”그러고는 진경자의 손에서 외투를 낚아챘다.진경자는 어이가 없었다.일을 빼앗아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강혜미가 말했다.“아주머니, 형부 수저 좀 가져다줘요. 얼른 앉아요, 형부.”식탁 앞, 강혜미는 주영도가 앉을 의자까지 빼줬다. 강루인의 맞은편 자리였고 강혜미는 곧장 주영도의 왼쪽에 앉았다.그사이 강루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집 식구가 아닌 것처럼.자리에 앉은 주영도가 강루인을 대화에 끌어들였다.“네 동생이 왜 여기에 있어?”강루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혜미가 먼저 끼어들었다.“언니가 다리를 다쳤잖아요. 아빠랑 나 언니가 걱정돼서 직접 돌보러 왔어요. 언니도 흔쾌히 동의했고요.”강혜미와 주영도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강혜미의 눈빛은 경고였고 주영도의 눈빛은 질문이었다.강루인이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동의했어.”이에 주영도도 뭐라 하지 않았다.저녁 식사 후 주영도는 서재로 가서 일을 처리했다. 강루인은 정원에서 바람을 쐬었고 강혜미도 따라나섰다.“이러니까 형부가 너 안 좋아하지. 한마디도 안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형부가 하루 종일 밖에서 힘들게 일했는데 걱정해주지도 않고.”‘내가 언제 걱정 안 해줬어?’예전에 강루인은 주영도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주영도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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