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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1화

황태민의 약혼식은 규모가 상당하고 화려했다. 따스하고 은은한 노란색 조명이 홀을 감싸고 있었고 붉은 장미와 백장미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우아함을 더했다. 식장 입구에는 장미꽃으로 장식된 아치형 꽃길이 하객들을 맞이했고 그 옆으로 황태민과 남아현의 이름이 새겨진 웰컴 보드가 세워져 있었다.안으로 들어서자 수십 층 높이로 쌓아 올린 샴페인 타워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사방에 식전과 식후에 즐길 수 있는 달콤한 디저트들이 뷔페 형식으로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서현주가 도착했을 때 연회장은 이미 각계각층에서 온 하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두 격식을 갖춘 차림이었고 서현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그녀가 등장하자 연회장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에게 쏠렸다. 실크 소재의 우아한 오프숄더 롱 드레스가 발목까지 매끄럽게 떨어졌고 허리 라인을 강조한 디자인 덕분에 서현주의 가녀리고 늘씬한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 큰 키와 굴곡 있는 실루엣, 여기에 연한 화장을 한 아름다운 얼굴이 더해지니 많은 남자가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번 약혼식에 서현주는 비서나 강혜인을 동행하지 않고 오롯이 혼자 참석했다. 그녀는 식장 안으로 들어가 디저트 테이블 옆에 서서 조각 케이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서현주의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해 있었는데 화면 속에 경찰서 여경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창이 띄워져 있었다. 여경이 언제 진입하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서현주는 잠시 시간을 가늠해 보더니 [30분 뒤에 오세요]라고 답장을 보냈고 곧이어 알겠다는 확인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아침 일찍 서현주는 경찰서를 찾아가 유이영과 남아현에 관한 내용을 공유했다. 서현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경찰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사건이 발생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고 사건 자체도 종결된 상태라 다들 잊어가고 있었는데 서현주의 제보를 듣고는 처음에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이미 사망 판정까지 내려진 유이영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 해외로 도피하고, 얼굴까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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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연지훈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검은 눈동자로 서현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많이 놀랐어?”서현주는 시선을 거두고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황태민이 유이영의 손을 겹쳐 잡고 샴페인 타워에 술을 붓고 있었고 샴페인은 폭포처럼 매끄럽게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서현주가 무심하게 대꾸했다.“잠시 잊고 있었네요. 연 대표님과 황 대표님이 친척 사이라는 걸요.”연지훈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황 대표는 잊어도 괜찮지만 나는 잊지 말아 줘."서현주는 황태민과 유이영이 다시 샴페인을 한 병 집어 들어 거침없이 비워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타워 맨 아래층에 놓인 넓은 잔들이 어느덧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서현주는 평온한 어조로 응수했다.“불과 며칠 전에 뵀는데 잊고 싶어도 쉽지 않겠네요.”“그건 그래.”연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서현주는 다시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확인했고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잠시 후 직원들이 샴페인 타워의 잔들을 하객들에게 하나둘씩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서현주가 앉은 줄까지 다가온 직원이 서현주와 연지훈에게 각각 잔을 건넸다.서현주는 잔을 살짝 흔들며 그 안에서 일렁이는 액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때 연지훈이 잔을 든 손을 뻗어 서현주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챙’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고 서현주는 고개를 들어 단상 위의 두 사람을 보았다. 황태민과 유이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은 채 하객들을 향해 잔을 치켜들고 있었다.곁에서 연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봐서 기분이 별로야?”황태민과 유이영이 술을 마시는 것을 확인한 서현주 역시 잔을 들어 입술에 천천히 가져다 대며 말했다.“그럴 리가요.”말을 마친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도수가 높지 않고 맛이 깔끔해 서현주는 몇 모금을 더 마셨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지훈 역시 술을 들이켜며 덧붙였다.“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길래, 나 때문인가 싶었지.”서현주는 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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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경찰들이 유이영을 체포하기 위해 다가가자 황태민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감싸안으며 쉽게 내주지 않았다. 수많은 하객이 지켜보는 약혼식장 안이었기에 두 사람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애썼다.황태민이 경찰들과 대치하며 논리적으로 따져 묻는 사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유이영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서현주와 연지훈에게 향했다.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약혼식의 좌석 배치는 그녀와 황태민이 직접 확인하며 짠 것이었기에 그녀는 서현주와 연지훈이 결코 합석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두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붙어 앉아 있었던 것일까.이 소란스러운 광경을 지켜보는 장내의 사람들은 저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거나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등 표정이 제각각이었지만 오직 서현주와 연지훈만큼은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 지나치게 침착했다.유이영은 며칠 전 연지훈과 통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숨겨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을 때 연지훈은 단칼에 거절하며 서현주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었다.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서늘하고 끔찍한 생각 하나가 유이영의 온몸을 휘감았다.‘설마 지훈 씨가 현주 씨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한 걸까?’한 번 피어오른 의구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마치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한기가 유이영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그제야 모든 상황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서현주가 오늘 이 약혼식에 나타난 것도, 그녀의 뒤를 이어 경찰들이 들이닥친 것도, 그리고 경찰이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 서현주의 얼굴에 그 어떤 놀란 기색도 없었던 이유도 말이다.만약 서현주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다른 하객들처럼 경악하거나 혐오감을 드러냈을 것이고 과거의 악연을 생각하면 누구보다 격한 반응을 보였어야 정상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지나칠 만큼 담담했다.유이영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서현주 역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제삼자 같은 태도로 담담히 응시했다.유이영의 심장은 바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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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약혼식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모두 사라진 이상, 서현주 역시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한참 머뭇거리며 서현주의 눈치를 살폈지만 차마 다가와 말을 걸지는 못하고 수군거리며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서현주가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드는 찰나, 갑자기 머릿속이 핑 도는 극심한 현기증과 함께 이상하게 온몸에서 열기가 확 끼쳐 올랐다.그녀는 바닥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다급히 테이블을 붙잡았다. 몸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반응을 느끼자 서현주의 눈빛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빈 술잔을 쏘아보았다. 술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던 게 확실했다.그때 갑자기 그녀의 허리춤에 단단한 팔 하나가 감겨오더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고 연지훈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왜 그래?”약효가 퍼지기 시작하자 서현주는 체내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을 억누르기가 점점 더 힘겨워졌다. 연지훈에게서 풍기는 그 특유의 청량한 향이 코끝을 맴돌자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매달려 몸을 비비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서현주는 눈을 질끈 감고 뜨거운 열기를 참으며 연지훈을 확 밀어냈다.“건드리지 마요...”그녀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억눌린 목소리로 경고했다.그때 식장 어디선가 대기하고 있었던 직원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나타나 서현주의 주변을 에워싸며 그녀를 부축하려 들었다. 그러나 서현주는 흐릿해지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결단력 있게 연지훈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그녀는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려 애쓰며 고개를 들었다. 연지훈 역시 즉각 팔을 뻗어 그들이 서현주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앞을 가로막았다.남자들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온화하고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서 대표님 몸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저희를 믿으세요. 곧장 병원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서투른 수작에 어설픈 연기였다. 그럴듯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눈에 서린 탐욕과 음란함조차 감추지 못하는 자들이었다.이 상황에 서현주는 실소가 터질 뻔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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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서현주는 심장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와 연지훈은 단둘뿐인데 상대는 건장한 사내 여섯 명이었으니 객관적으로 봐도 전력 차이가 너무나 확연했다.서현주는 턱을 치켜들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황태민 씨가 도대체 얼마를 줬길래 이렇게까지 목숨을 거는 거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감옥에 가는 게 두렵지도 않나 보군요.”그 말에 우두머리인 얼굴에 칼자국 있는 남자는 배를 잡고 박장대소했고 주변의 남자들도 그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우린 방금 막 출소한 몸들이라 무서운 게 없거든요.”칼자국 있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서현주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었고 입가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걸렸다.“돈도 챙기고 이런 여자랑 하룻밤 보낼 수 있다면 감방에서 몇 년 더 사는 것쯤이야 남는 장사죠. 어차피 강간 정도로는 그렇게 오래 있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에요.”약효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면서 서현주는 점점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녀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이미 발갛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짐승처럼 먹잇감을 노리는 남자들의 끈적한 시선이 서현주의 얼굴에 달라붙었다.“서 대표님, 어때요? 말만 잘 들으면 우리가 기분 좋게 해줄 텐데.”서현주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갔다.얼굴에 칼자국 있는 남자는 다시 연지훈을 보며 비아냥거렸다.“연 대표님, 정말 여기 계속 있을 생각입니까? 연 대표님 혼자서는 서 대표님을 지키기 역부족일 텐데 괜히 피 보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몸 사리고 나가시는 게 어때요? 우린 못 본 척해줄 용의가 있거든요.”그때 연지훈이 갑자기 몸을 돌려 서현주를 품에 와락 안았다. 남자들의 추잡한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완전히 격리시킨 것이다.서현주는 코끝에 닿는 연지훈의 청량한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뻔했지만 혀끝을 꽉 깨물며 이성을 붙잡고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연지훈은 서현주의 머리를 감싸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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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얼굴에 칼자국 있는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지훈은 옆에 있던 의자를 낚아채 그에게 사정없이 내던졌다. 남자가 피할 틈도 없이 의자는 그의 머리를 정면으로 강타했고 그는 큰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나머지 남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연지훈을 향해 살기등등한 눈빛을 쏘아댔다.“이 새끼가 진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연지훈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풀며 비릿하게 웃었다.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만져본 얼굴에 칼자국 있는 남자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뭐 해? 당장 달려들어! 다 죽여버려!”그 명령에 나머지 다섯 명의 남자가 동시에 연지훈을 향해 돌진했다. 연지훈은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어 던지고는 거침없이 그들의 공격을 맞받아쳤다.그는 서현주를 안전하게 뒤편으로 밀어둔 채 절대로 그들이 그녀의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끔 그 경계선을 철저히 사수했다.서현주는 연지훈이 혼자서 여섯 명을 상대하는 것이 도저히 승산 없는 싸움이라 여겨 가슴을 졸였으나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줄곧 사무실에만 앉아 있었을 것 같던 연지훈의 실력은 예상을 뛰어넘어 압도적이었다. 그의 몸놀림은 전광석화처럼 빨랐고 주먹을 내지르는 속도나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타이밍 또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날카롭고 매서운 연지훈의 타격은 급소만을 정확히 파고들었으며 그 무자비한 공세는 마치 실전 경험이 풍부한 프로 격투기 선수를 방불케 했다. 그의 주먹을 제대로 허용한 남자들은 한참 동안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닥을 굴러야 했다.어느새 연지훈의 주먹과 하얀 셔츠는 상대방의 핏자국으로 얼룩졌고 그 역시 몇 차례 타격을 입었지만 눈빛이 더욱 형형하게 빛나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은 연지훈 한 사람을 상대로 단 한 번의 우위도 점하지 못한 채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연지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자국 있는 남자의 안면에 묵직한 한 방을 꽂아 넣었고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처박혔다.전세가 역전되자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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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얼굴에 칼자국 있는 남자가 칼날에 선연한 피가 묻은 칼을 든 채 서 있자 곁에 있는 부하들은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형님, 지금 뭐 하신 거예요? 이거 사람 잡게 생겼잖아요!”하얀 셔츠를 붉게 물들인 피는 너무나 선명했고 그럴수록 연지훈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져만 갔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남자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고 자신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싶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당장 튀어!”서현주는 고개를 숙인 채 연지훈을 부축하면서도 곁눈질로 남자들이 뒷문으로 도망치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을 쫓을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연지훈의 정장 재킷을 끌어와 피가 솟구치는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두 사람의 손이 온통 피범벅이 된 것을 보자 서현주의 심장이 겉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연지훈에게 물었다.“일어날 수 있겠어요? 제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재킷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녀가 울먹이듯 덧붙였다.“피가 너무 많이 나요...”그때 피범벅이 된 연지훈의 손이 서현주의 손등을 덮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겁먹지 마... 나 안 죽으니까...”서현주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말하지 말고 일어나요.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고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지훈의 다른 한 손이 서현주의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서현주는 멈칫했지만 그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연지훈의 손은 차마 그녀의 얼굴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섰다.“너 울어?”서현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안 울어요.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이대로 있으면 안 돼요. 당장 응급실에 가야 한다고요.”그녀는 똑똑히 기억했다. 조금 전에 칼자국 있는 남자가 칼로 연지훈의 배를 한 번 찔렀다가 다시 그의 왼쪽 가슴 근처를 찔렀다는 사실을 말이다. 왼쪽 가슴이라면 심장이 있는 곳인데 만약 심장이라도 건드렸다면...서현주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공포를 느꼈고 손의 떨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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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서현주는 머릿속이 이미 엉망진창이 된 데다가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직원들이 자신을 업고 이동하는 것을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하지만 호텔 1층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뿐이었고 연지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서현주는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술 안쪽 살을 짓씹으며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쉰 목소리로 직원들에게 물었다.“연지훈 씨는요? 어디 있어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의 소란스럽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서현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녀가 나름대로 억누른다고는 했지만 목소리에 섞여 나오는 떨림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직원들은 그녀가 찾는 연지훈이 누구인지 정확히는 몰랐으나 정황상 몸의 절반이 피로 물든 채 실려 간 그 남자를 말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구급차가 와서 벌써 그분을 싣고 병원으로 출발했습니다.”그제야 서현주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이제 내려줘요, 저 혼자 갈 수 있으니까.”하지만 직원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호텔 지배인은 오늘 저녁 펜트하우스의 하객들이 하나같이 귀한 분들이니 특히 모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래서 다들 조심조심 살피고 있었는데 먼저는 경찰이 들이닥쳐 유이영을 잡아가는 소동이 벌어지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가짜 직원들이 호텔 사람들을 모두 따돌렸고 결국 칼부림 사건까지 터지고 만 것이다.호텔 측으로서는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직원들도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구급차가 도착하자 직원은 서현주를 들것에 눕히며 안심시켰다.“경찰에 신고도 했어요. 경찰이 직원을 사칭해서 몹쓸 짓을 벌인 놈들을 반드시 잡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서현주는 몽롱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구급차에 몸을 실었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 처치를 받았다. 연지훈이 수술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서현주는 수액을 맞으며 서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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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사실 연유준보다도 유이영의 신원을 더 확실하고 빠르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홍인수였지만 서현주는 홍서윤이 홍인수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서현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은 자리를 떴고 그녀는 곁에 있는 강혜인에게 물었다.“연지훈 씨는 어떻게 됐어?”강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지금 중환자실에 있어. 아직 고비를 넘기지는 못했는데 의사 말로는 정말 천운이라더라. 칼날이 아주 미세하게 심장을 비껴가서 살 가망이 생긴 거래. 조금만 더 옆으로 들어갔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거라니까 진짜 천당과 지옥을 오간 거지.”서현주는 눈을 내리깐 채 침대 머리에 기댔다.“연지훈 씨의 비서한테는 연락했어?”강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응, 진작 와 있었어. 물어보니까 아직 연지훈 씨의 가족들한테는 알리지 않았대.”그 말에 서현주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힘없는 모습을 보며 강혜인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유이영의 정체를 밝히러 간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너랑 연지훈 씨가 이렇게 다쳐서 돌아온 거야.”서현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나도 함정을 팠지만 그 사람들도 함정을 파뒀더라고. 내가 조심하지 못했어.”강혜인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아직 아줌마한테는 말씀 안 드렸으니까 알릴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서현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강혜인은 침대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조심스레 물었다.“나한테만 슬쩍 말해봐. 오늘 밤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말 연지훈 씨가 널 구한 거야?”서현주가 짧게 상황을 설명하자 이야기를 다 들은 강혜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연지훈 씨가 너 대신 앞장서서 칼을 두 번이나 맞았다니, 정말 의외네.”강혜인은 서현주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해? 정말 황태민이랑 유이영이 꾸민 짓일까?”서현주의 마음속도 실타래처럼 엉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아마도 그렇겠지...”서현주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수액을 다 맞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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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증오와 은혜가 뒤섞여 버린 탓에 서현주의 머릿속은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이유가 무엇이든 서현주는 자기 때문에 연지훈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곁에 서 있는 강혜인은 그런 서현주를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서현주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런 상황이면 그 누구라도 쉽게 생각을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서현주가 마지막으로 연지훈을 몇 번 더 눈에 담고 시선을 거두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서 대표님?”서현주가 뒤를 돌아보자 깔끔한 슈트 차림에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서현주는 그 남자를 기억했다. 그는 연지훈의 전담 비서였다. 다만 그녀가 아직 하경시에 머물던 시절에는 못 봤던 얼굴이었으니 아마 그녀가 하경시를 떠났을 때 새로 부임한 모양이었다.연지훈이 그녀를 구하려다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상황이었기에 서현주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업무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았나요?”비서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대표님께서 이곳에 오신 뒤 처리해야 할 업무가 그리 많지 않았고 이미 다 마무리된 상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며칠 전에 하경시로 돌아가셨어야 했습니다.”서현주는 멈칫했다. 비서의 눈빛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색을 읽어냈지만 그녀는 애써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비서는 서현주가 먼저 물어봐 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서 대표님, 대표님께서 몇 년 전에 비서들을 전부 새로 교체하셨습니다.”서현주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자 비서는 머뭇거리다가 유리창 너머의 연지훈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을 내뱉었다.“듣기로는 예전의 비서들 중에 서 대표님께 무례하게 굴었던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맞습니까?”서현주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지금 그 사람을 대신해 무슨 변명을 하려는 거죠?”비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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