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111 - Chapter 120

136 Chapters

제111화

“알겠습니다.”성일은 긴장한 듯 표정이 굳은 채로 재빨리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온채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기에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심서정은 주먹을 불끈 쥐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대표님, 그냥 잠깐 연락이 안 되는 것뿐이에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준의 날카로운 눈빛이 심서정을 스치고 지나갔다.독수리처럼 예리한 그 눈빛은 살기를 가득 품고 있어 순간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주율천 역시 그가 과잉 대응을 하는 것 같아 말했다.“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야?”“오바? 난 끝까지 조사할 거야.”성유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이를 악문 채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대체 누가 감히 내 눈앞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밝혀내야지.”같은 시각 21층.온채아는 온몸을 덜덜 떨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마음속 깊은 두려움은 억누를 수 없었다.사실 그녀는 성윤혁이 무서웠다.한창 예민한 10대에 온채아는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었다. 솔직히 샤워 중 문을 부수고 들어온 남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성윤혁이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려 약물을 썼다.아직 몸에 약기운이 남아있었던 온채아는 혀를 깨물어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대표님이 찾아오면 어떡하려고? 안 무서워? 어떤 성격인지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 할머니가 당신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온채아는 성유준과 소원희의 사이가 언제 틀어진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그녀가 다시 할머니 댁으로 보내진 이후부터였다.분명 두 사람은 혈육 사이인데 그 흔한 정은커녕 서로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특히 최근 2년 동안은 거의 만나지도 않았고 만나면 언제나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소원희는 성유준은 배려하지 않았고 성유준은 소원희를 존중하지 않았다. 이 또한 성씨 가문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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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성윤혁은 바로 대답했다.“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말하면서 두 손을 온채아의 등 뒤로 뻗어 그녀의 드레스를 풀려고 안달이 났다.‘얼굴이 이렇게 부드러우면 가슴은 더 대단하겠지?'온채아는 팔을 성윤혁의 어깨에 얹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지퍼는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옆에 있어.”말투는 부드러웠고 몸도 말랑했다.온채아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성윤혁은 고개를 숙여 옆 지퍼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지퍼에 손이 닿았을 때 갑자기 머리에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성윤혁은 거칠게 온채아를 밀어내며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었다.“X발. 너 미쳤어?”그 힘을 버티지 못한 온채아는 벽에 세게 부딪혔고 힘없이 휘청이며 다시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한참을 버텨 겨우 몸을 가눴지만 성윤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불안함이 엄습해 와 주먹을 불끈 쥐었다.온몸에 힘이 풀렸던 탓에 은침을 놓았지만 효과가 기대만큼 세지 않았다.성윤혁은 머리를 짚은 채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온채아에게 다가갔다.“X 같네. 꼭 내가 이렇게까지...”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윤혁을 쿵 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같은 시각 호텔 문 쪽에서도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하지만 온채아는 고개를 돌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고 단지 성윤혁이 당분간은 절대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만 확신했다.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며 털썩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룸으로 들이닥친 성유준이 마주한 장면은 가관이었다.식은땀에 흠뻑 젖은 온채아의 머리카락은 목에 붙어 잔뜩 흐트러졌고 창백한 얼굴과 초점 잃은 눈동자를 한 채 조용히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성유준은 그 모습을 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당장이라도 성윤혁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온채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흩어진 드레스를 정리해 주며 자신의 재킷으로 온채아의 몸을 감싼 후 무릎을 꿇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채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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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심서정은 성유준이 온채아의 생사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방금 전 성유준은 단호하게 지시를 내리며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호텔 건물을 수색했다.몸과 마음이 온통 온채아 하나만을 향하고 있는 듯 압도적인 기세로 뿜어냈다.‘정말 완벽하네. 율천이도 이렇게 날 아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성유준은 문밖의 소란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온채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채아야, 이제 무서워하지 마. 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도 돼.”그 말을 끝내는 순간 성유준의 시선은 온채아의 팔에 드리운 넓은 멍 자국에 닿았고 이내 곧 목소리가 무거워졌다.“성윤혁이 널 다치게 했어?”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든 온채아는 성유준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팔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목소리는 겨우 나올 정도로 쉰 상태였다.“이건... 제가 한 거예요.”보통 몸속 깊이 찔러넣은 은침은 핀셋으로 천천히 빼내야 하는 게 맞다.하지만 온채아는 핀셋도, 침을 천천히 빼낼 시간도 없었기에 팔에 멍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그래도 은침으로 혈을 찌른 덕분에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성유준은 묵묵히 곁에 앉아 그녀가 실컷 울도록 기다렸다.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몸을 숙여 온채아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무릎 뒤를 받쳐 안아 올렸다.“일단 다른 룸으로 가자. 의사 불렀어.”“네.”침을 빼낸 이후로 약효가 심해지며 힘이 점점 더 빠져나간 탓에 온채아는 저항하지 않았다.성유준은 그녀를 품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걸아 나갔고 얼굴에는 다시 먹구름이 드리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비록 정장 재킷이 온채아의 상반신을 완전히 가렸지만 주율천은 단번에 이상함을 알아채고 걸음을 재촉해 다가갔다.“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짓을 했어?”주율천도 두려움이 밀려왔다.성유준이 재빨리 눈치챘길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떤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지 모른다.그 자리에서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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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심서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그저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대표님,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으니 저희 먼저 가도 될까요?”“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은 가도 돼.”성유준은 한 손을 소파 옆에 얹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하지만 심서정 씨는 안되지.”그 목소리에 담긴 싸늘함에 심서정은 등골이 오싹해져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오늘 성유준이 행사에 참석할 줄 알았더라면 온채아에게 손을 댔을 리가 없다.‘무서워... 표정이 살벌하네...'주율천은 성유준의 적대적인 태도를 눈치채고 심서정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를 바라봤다.“무슨 뜻이야?”“네가 직접 말했잖아. 온채아를 대신해서 나설 거라며?”성유준은 무심하게 담뱃재를 털며 성일에게 눈빛을 보냈다.단번에 그 뜻을 알아챈 성일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호텔 직원 두 명을 끌고 들어와 심서정 앞에 던졌다.“심서정 씨, 저희 아가씨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해치려 하신 겁니까?”호텔 직원의 얼굴은 확인한 심서정은 또다시 몸을 덜덜 떨었다.‘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히 CCTV를 없앴는데?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걸 알아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성유준의 등장으로 인해 심서정의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그럼에도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무슨 말씀이신지 전 잘 모르겠네요.”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그들의 의도를 알아챈 주율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성 비서,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증인까지 데려왔는데 묻지도 않고 심서정 씨 편부터 드시는 겁니까?”성유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주율천을 바라봤다.“채아랑 결혼하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주율천은 순간 멈칫했다. 사실 성유준은 두 사람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하지만 그때의 주율천은 아내가 절실히 필요했고 온채아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더 나은 선택지를 찾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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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솔직히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도 없잖아.”성유준은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태연하게 되물었다.“잘못이 없다고? 그럼 용서 안 해도 되겠네?”세상 사람들은 성유준을 산 채로 사람을 죽이는 악귀라 불렀다.그걸 주율천은 오늘에야 몸소 깨달았고 성유준이 이토록 단호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예전의 의형제 정은 이제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분위기는 순식간에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주율천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침실 쪽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차라리 채아 의견을 들어보는 게 어때?”마침 의식을 되찾은 온채아가 침실 안에서 문고리를 잡은 채 그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고선 싸늘하게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온채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성유준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담배를 끈 후 온채아를 향해 손짓하려던 찰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일은... 그냥 없던 일로 하죠.”그 말에 성유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뭐라고?”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온채아는 그 속에 담긴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창백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없던 일로 하겠다고요.”“생각은 확실히 한 거야?”온채아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네.”성유준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짙고 깊은 눈동자로 한참 동안 온채아를 꿰뚫듯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온채아는 몸 둘 바를 몰랐다.“앞으로는 누구도 너한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 모든 결과는 네가 자초한 거니까.”성유준은 그 말을 던지듯 내뱉고선 사람들을 이끌고 단호히 떠났다.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하지훈은 부랴부랴 작은 약병을 온채아에게 건넸다.“채아 씨, 오늘 잠들기 전에 이 약 한 번 더 복용하세요. 그럼 내일쯤이면 상태가 많이 회복될 겁니다.”온채아는 약병을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하지훈은 온채아가 예전에도 본 적 있는 사람이다.하여 자연스레 성유준의 수많은 형제 중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하지훈이라는 것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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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민은하의 협박을 들은 온채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사실 그녀는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들을 매우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강아지를 가장 좋아했다.하지만 성유준이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어릴 적 강아지를 키울 수 없었다.그러다가 열여섯 번째 생일이 되던 날, 성유준은 작은 보더콜리 한 마리를 선물했고 이름을 코코라고 지어줬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온채아는 코코와 함께 잔인하게 버려졌다.그때부터 코코는 늘 온채아의 곁을 지켜주며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코코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성씨 가문의 집사가 말하길 코코는 죽었다고 한다.이유는 온채아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 유독 계란을 먹기 싫었던 그녀는 흰자를 버리고 노른자만 코코에게 먹였다.하필이면 버린 흰자를 코코가 먹게 되었고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코코가 세상을 떠난 후 온채아는 며칠 동안 악몽을 꾸며 꿈속에서 울면서 코코에게 사과했다.편식하지 않았더라면 코코가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수없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원망했다.심지어 그 이후로 집사는 매일 아침 온채아에게 삶은 계란 다섯 개를 준비해 줬다. 오직 삶은 계란뿐이었다.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삶은 계란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매일 억지로 다 먹고 학교에 가자마자 몰래 토해냈다.온채아는 알고 있었다. 소원희가 신경 쓰는 건 삶은 계란을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말을 잘 듣는 아이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온채아는 그저 주인의 뜻대로 감정도 취향도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일 뿐이었다.어릴 적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잠깐 생각을 하다가 눈을 뜬 온채아는 텅 빈 호텔 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성유준은 단호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호텔을 나섰다.하지훈이 그 뒤를 바짝 따르며 물었다.“방금 그렇게 태연한 척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닥쳐.”성유준이 예민하게 반응하자 하지훈은 한숨을 쉬며 일부러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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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형,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발 좀 놔줘요...”성유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말 안 하면 내가 직접 알아볼 거야.”결국 성윤혁은 눈을 질끈 감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중학교 때부터...”멱살을 움켜잡은 성유준의 손가락 마디에는 딱딱 소리가 났고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며 막 폭발하려는 순간 성윤혁이 다급하게 울부짖었다.“하지만 맹세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때는 형이 온채아 옆에 있었잖아요. 마음은 있었는데 손을 댄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성유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뭔가 떠오른 듯 날카롭게 성윤혁을 내려다봤다.“6년 전에 해외로 나간 게 이것 때문이야?”성윤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마도 성유준이 이렇게 빨리 눈치챌 줄은 예상 못 했던 모양이다.그해 사건이 터졌을 당시 성유준의 권력은 아직 절대적이 아니었고 성씨 가문은 여전히 소원희가 좌지우지하던 때라 조용히 모든 걸 덮어버렸다.성유준은 목덜미 잡힌 오리처럼 버둥거리는 성윤혁을 본 순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부 파악했다. 6년 전, 온채아는 겨우 열여덟이었다.그때와 비슷한 일이 온채아에게 또 한 번 일어났다는 사실에 성유준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그는 성윤혁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일으키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로 걷어찼다.“아! 아악...”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성윤혁은 바닥을 몇 번 구르다 결국 몸을 움켜쥔 채 신음했다.곧이어 성유준은 고개를 돌려 성일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장소 알아봐서 처리해.”성일이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하지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섰다.“그 말 듣지 마.”머뭇거리는 성일의 모습이 언짢은 듯 성유준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언제부터 하지훈의 말을 듣게 됐지?”“유준아.”하지훈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중간에서 말릴 수밖에 없었다.“성윤혁은 죽어도 싸.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할머니가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채아 씨가 무사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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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정다슬은 온채아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돈 많이 모을 테니까 정 안되면 같이 경성을 떠나자. 다른 도시에 정착하면 이런 일 안 겪을 거야.”온채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그래. 난 널 믿어. 우리 다른 곳으로 떠나자.”정다슬은 일을 시작한 뒤로 줄곧 열정이 넘쳤고 최근에는 승진과 급여 인상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그래서 점점 더 잘될 거라고 믿고 있었기에 온채아는 차마 소용없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어차피 소용없다. 정다슬이 로펌의 파트너가 되든 사장이 되든 그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사실 아주 오래전에 다른 도시에 정착하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대학 진학 원서를 쓸 때 타지에 있는 학교를 적었음에도 결국에는 경성대에 합격했다.성씨 가문 소원희는 온채아의 인생 전체를 경성에 묶어버렸기에 도망치는 건 꿈도 못 꾼다.아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소원희가 죽고 나면 가능할지도...온채아는 소원희가 처음부터 그녀를 미워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게 없었다.새벽 네 시,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 성씨 가문 본가에서 걸려 온 전화가 마치 죽음을 재촉하듯 온채아를 깨웠다.이 시간에 성씨 가문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그 자체로 온채아는 잠이 달아났고 가슴이 조여왔다.“여보세요?”“채아 씨.”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소원희가 아닌 성탁수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차가 이미 경원 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내려오시죠.”온채아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져 식은땀이 흘러내렸다.본가에서는 그녀가 이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호텔에서 생긴 일 때문에 성씨 가문에서 호출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성윤혁은 소원희가 가장 아끼는 손자다.‘난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알겠습니다.”온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층으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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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알겠습니다.”다시 두 걸음 내디딘 온채아는 제대로 서 있기도 전에 소원희가 세차게 후려친 뺨을 맞게 되었다.그럼에도 분노가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듣기 거북한 말을 퍼부었다.“윤혁이가 심하게 다쳤는데 네가 모른다고? 온채아, 넌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하니?”침이 사방으로 튀었다.소화가 제대로 안 됐는지 고약한 입냄새가 풍겨왔고 몸에 쌓인 화가 많은 걸 보면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하다.온채아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할머니, 저 정말로 무슨 일인지 몰라요.”소원희의 분노 어린 시선을 마주한 온채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걱정하는 척했다.“윤혁 오빠가 얼마나 다쳤는데요?”소원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직접 올라가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알겠습니다.”온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또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방 안에는 여러 명의 의료진이 모여 성윤혁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온채아의 시선을 자연스레 그의 하반신을 향했고 피범벅이 된 하체를 목격한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필 그 웃음은 성윤혁의 눈에 딱 걸렸다.성윤혁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고함을 질렀다.“당장 꺼져. 누가 너 같은 X 보고 들어오래?”“할머니가 오빠 상태를 한번 확인해 보라고 하네?”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온채아는 다시 얌전한 태도로 돌아가더니 침대 옆으로 다가가 컵에 빨대를 꽂고 몸을 숙여 성윤혁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오빠, 설마 고자가 된 거야? 축하해. 어차피 대를 잇지 못하니까 이참에 집사로 전향하는 게 어때?”방 안에 가득한 의료진들은 모두 성윤혁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온순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잔인한 말을 내뱉는 온채아의 모습에 다들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온채아는 허리를 숙인 채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성윤혁은 그 말 하나하나를 또렷이 들었다.“미친 X이. 죽고 싶어?”성윤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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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이곳은 자연 호수와 연결된 곳이라 본가 정원에 아주 조금 면적이 뻗어 있을 뿐이었다.경성의 기온이 낮긴 했어도 호수 전체가 꽁꽁 얼어붙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니 설사 운이 좋아 가장 두꺼운 곳에 무릎을 꿇었다 해도 체온이 있으니 얼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을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온채아는 살을 에는 호수 물에 빠지게 된다.소원희가 원하기만 하면 온채아는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온채아는 추위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막 무릎을 꿇었을 때 옆에 있던 성탁수가 입을 열었다.“어르신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고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온채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탁수는 이어 말했다.“누군가가 와서 사당으로 모셔갈 겁니다. 그곳에서는 가문의 법규대로 벌을 받게 될 겁니다.”온채아는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그래도 바로 죽일 생각은 아닌가 보네.'하지만 이 한겨울에 물에 홀딱 젖은 채로 사당에 끌려가 매를 수십 대 맞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다.온채아는 알고 있었다. 성윤혁의 상처가 그녀 때문인지,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사실 별로 상관없다는 것을.소원희는 단지 분풀이를 떠맡아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턱이 달달 떨릴 정도의 추위가 엄습했고 무릎 아래의 얼음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소원희의 고문 솜씨는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 되는 게 틀림없다.뾰족한 자갈길 위에 무릎 꿇고 있을 때는 비록 아팠지만 별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이곳에서는 매 순간 불안에 떨며 언제 툭 하고 빠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있어야 했다. 역시나 사람은 불확실한 상황을 가장 두려워한다.그 시각 성탁수는 거실로 돌아와 소원희 옆으로 다가갔다.“어르신, 온채아 씨는 지금 무릎 꿇고 있습니다.”“아무 말 없더냐?”소원희는 찻잔을 들어 위에 드리운 거품을 한쪽으로 밀어냈다.성탁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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