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121 - Chapter 130

136 Chapters

제121화

성탁수는 소원희의 지시를 따라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선 스피커 폰을 켰다.수차례 전화를 걸고서야 통화가 연결됐는데 성유준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사님, 안녕하세요. 저 성일입니다. 대표님이 지금 바쁘셔서 제가 대신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참, 한밤중에 전화하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대표님께서 전해달라 하십니다.”소원희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고 당장이라도 탁자를 뒤엎을 기세였다.당황한 건 성탁수도 마찬가지였기에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방금 부동산 프로젝트 담당자 쪽에서 전화가 왔는데...”성일은 성유준 옆에 너무 오래 붙어 있었는지 말투까지 닮아있었고 여유롭게 상대의 말을 끊는 모습은 똑같았다.“저희 대표님이 하신 게 맞습니다.”성탁수와 소원희는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보통 아니라고 발뺌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뻔뻔하게 인정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게다가 부하직원 주제에 말투가 건방진 성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소원희의 날카로운 눈빛에 기세가 꺾인 성탁수는 곧바로 다시 물었다.“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을...”“별 뜻 없습니다.”성일의 말투는 여전했다.“대표님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아시잖습니까. 당한 건 꼭 그대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시거든요. 아참, 다른 건물에도 폭탄을 설치했으니 참고해 두세요. 타이머가 작동되었을 겁니다.”성일은 배려심 깊은 척 연기하며 말했다.“차라리 다 폭파시키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 게 어때요? 괜히 인명 피해 나면 일이 귀찮아지잖아요.”“뭐라고?”더는 참다못한 소원희가 버럭 소리쳤다.“당장 성유준한테 물어봐.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 프로젝트는 완전히 끝이다.그동안의 계획이 물거품 되는 건 물론이고 수천억의 손해까지 발생할 수 있다.“아까도 말했듯이 대표님이 지금 바쁘셔서 통화가 불가능합니다.”휴대폰 저편에서 희미하게 카드 치는 소리가 들렸고 성일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대표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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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꿈속의 성탁수는 서당에서 한치의 자비도 없이 온채아에게 벌을 주었다.정말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아빠가 그리웠고 엄마도 그리웠다. 그리고 성유준도...온채아는 꿈속에서도 성유준에게 애원했는데 제발 버리지 말라고 간절히 빌었다.성유준은 해줄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기도 전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잠에서 번쩍 깼다.온채아는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휴대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멍한 상태로 전화받았다.“여보세요?”말을 꺼내는 순간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고 목에 칼을 머금은 듯 고통스러웠다.“아가씨.”휴대폰 너머로 상냥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목소리 기억하겠어? 이미숙. 예전에 아가씨한테 진료 본 적이 있는데.” “당연히 기억하죠. 무슨 일로 연락하셨어요?”“아이고, 그런데 아가씨 목소리가 왜 이래? 감기 걸렸어?”이미숙은 그녀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아채고선 걱정스럽게 물었다.코까지 꽉 막힌 온채아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감기에 걸렸네요. 할머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이미숙은 재빨리 손사래 치며 말했다.“만두 빚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어떤 소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며칠 뒤에 진료받으러 한의원 가거든. 그때 아가씨한테 주려고.”상냥하고 부드러운 이미숙의 목소리에 온채아의 마음에는 온기가 스며들었다.“전 괜찮아요. 할머니 드세요.”이미숙은 따뜻하게 말했다.“집에 혼자 있어?”“네.”“그럼 내가 야채랑 고기 좀 사서 찾아갈 테니까 같이 만두 빚을까?”이미숙은 정이 넘쳤다.“아가씨 지금 아파서 밥도 제대로 못 해 먹잖아. 내가 만두 빚어서 냉동실에 넣어줄게. 배고플 때마다 꺼내서 끓여 먹어.”뭔가에 홀린 듯 온채아는 어느새 얼떨결에 집 주소를 불러줬다.그렇게 경계심이 많은 온채아가 망설임 없이 주소를 알려주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아마도 배려 넘치는 이미숙의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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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온채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같이 지낸 여자아이가 있었다고 하니 꼭 그녀와 성유준을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온채아는 아직도 성유준이 그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온채아는 이미숙이 한 말 중에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의아함을 드러냈다.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건지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손자의 부모라는 표현을 쓰나? 할머니의 아들이랑 며느리 아닌가?’이미숙은 그녀의 의아함을 눈치채고 말했다.“내 아들은 나랑 같은 호적에 없어. 그래서 우리 손자 호적상 할머니도 내가 아닌 셈이지.”“그럼...”온채아는 어렴풋이 뭔가를 짐작했지만 더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그러나 이미숙은 오히려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가씨는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바람을 피웠잖아. 난 결혼하기도 전에 그걸 겪었어.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아주 잘나가던 사람이었지. 내 뱃속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바로 빼앗더라고.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 여자랑 혼인신고를 하고 내 아이를 호적에 넣었다네?”온채아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그들의 관계를 되뇌었다.간단히 말해 이미숙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상간녀 피해자’가 되었다.그 시절엔 지금보다도 훨씬 수치스럽고 손가락질받던 일이었다.손자의 할아버지는 지금의 주율천보다 더 쓰레기 같은 사람인 게 틀림없다.온채아가 말이 없자 이미숙은 급히 덧붙였다.“걱정 마. 우리 손자는 그런 못된 유전자를 안 물려받았어. 성격이 좀 무뚝뚝할 뿐이지 그 외엔 정말 괜찮은 아이야.”그러자 온채아는 웃음을 터뜨렸다.“아직도 손자를 소개해 줄 생각을 하고 계세요?”“그럼.”보면 볼수록 온채아가 마음에 들었던 이미숙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며칠 후 진료 끝나고 오후에 잠깐 시간 될까? 우리 손자 한번 만나보게 할까 해서.”“할머니...”“그냥 얼굴이라도 한번 봐.”이미숙은 담담하게 말했다.“아가씨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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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성유준은 늘 그렇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일을 째려봤다. 막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고 소원희가 팔을 확 붙잡더니 성유준을 끌어내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점심시간 비지? 상의할 게 있어.”성유준은 짜증 하나 없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무슨 일이에요?”말하면서 거실로 들어서자 음식 냄새가 코끝을 강타했고 자연스레 식탁 쪽으로 시선을 돌린 성유준은 고개를 갸웃했다.“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 그동안 손자한테 잘 못 해준게 양심에 찔려서 대접하려고요?”이미숙은 원래 사치스럽거나 음식을 낭비하는 성격이 아니다.아무리 형편이 좋아도 한 끼 식사는 늘 반찬 두 개에 국 하나면 충분했고 성유준에게는 대개 국수 한 그릇 내줄 정도로 더 조촐했다.“팔자 좋은 생각 하네. 아가씨 한 명 오기로 했어.”이미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진지한 눈빛으로 성유준을 바라봤다.“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 비우지 마. 태도 단정히 하고. 알았지?”손자의 혼사에 이미숙은 정말 속이 타들어 갔다. 이렇게 성유준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성씨 가문 그 많은 식구들 중 누구 하나 성유준이 편안하게 사는 걸 바라지 않는듯했다.성유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아가씨라뇨? 누가 오기로 했어요?”이미숙은 그를 째려보듯 말했다.“전에 말했던 한의원 아가씨 있잖아. 내가 점심 약속 잡아놨어. 그러니까 이따가 제발 그 무뚝뚝한 표정 좀 숨겨.”성유준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맞선이면 미리 한마디라도 해주셨어야죠.”“오바하지 마. 선은 무슨.”이미숙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냥 일방적으로 네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보여주는 거야. 선은 아가씨가 너 마음에 들어 한다면 다시 잡을게.”성유준은 미간을 찌푸렸고 곁에 있던 성일은 입꼬리를 씰룩였다.‘한의원에서 한약을 처방한 게 아니라 세뇌를 시킨 건가? 효과가 아주 제대로네.’성유준은 무언가 떠오른 듯 불쑥 물었다.“지난번에 그분 이혼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문득 온채아와 주율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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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아가씨가 온다고 하니까 신이 났더라고. 특별히 맛있는 거 많이 해놓으라며 신신당부했어.”이미숙의 즐거운 목소리는 텅 빈 집을 본 순간 뚝 끊겼다.고개를 돌려 바깥을 보고서야 차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이 망할 놈의 자식.’이미숙이 마중 나간 사이를 틈타 성유준은 잽싸게 도망쳤다.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던 이미숙은 민망한 얼굴로 온채아를 바라봤다.“우리 손자가...”“할머니, 오늘 평일이잖아요. 급한 일이 생긴 거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너무 화내지 마세요.”오히려 온채아는 한숨을 내쉬며 안도한 표정이었다.곧이어 시선은 식탁으로 향했고 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며 감탄했다.“할머니, 만두만 잘 빚는 줄 알았는데 요리 실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갈비찜, 삼계탕, 전복 구이 등등 하나같이 완벽한 음식을 보니 온채아는 절로 입맛이 당겼다.이미숙은 그녀가 일부러 체면 세워준 것을 알고 속으론 손자를 욕했지만 그래도 활짝 웃으며 주스를 따라줬다.“얼른 먹어봐. 입에 맞는지 모르겠네.”“네.”셋이 아닌 둘이 있는 자리라서 그런지 온채아는 훨씬 편해 보였다.혹시나 이미숙이 실망할까 싶어 그녀는 배부른 줄도 모르고 먹고 또 먹었다.워낙 맛도 있었고 마침 전부 온채아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커다란 식탁 위에 차려졌던 음식이 다 비워지자 이미숙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가 해준 음식이 입에 잘 맞는 모양이네. 앞으로 자주와. 난 어차피 혼자 사니까 언제든지 환영이야.”“혼자 사세요?”온채아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이미숙은 한숨을 푹 쉬었다.“우리 손자는 자기 일 바쁘다고 시간 날 때만 잠깐 한번 얼굴 비추는 정도지 뭐.”온채아는 웃으며 답했다.“그럼 저라도 자주 찾아뵐게요.”마침 그녀도 혼자였다.비록 여승운과 손정원은 온채아가 오길 기다렸지만 두 부부의 알콩달콩한 시간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 조금 조심스러웠다.그래서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존중하는 마음에 시간이 난들 무작정 여승운의 집에 들이닥치지는 않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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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돌려받고 싶다는데? 아가씨한테 연락하라고 하셨어.”성일은 바보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성이를 바라봤다.“그것도 지금 당장 연락하래.”[아가씨, 대표님 시간 되신대요. 바로 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저희는 지금 월강 레지던스에 있습니다.]메시지를 연달아 두 개 받은 온채아는 화면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진짜 가야 하나?’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날 밤의 일에 대해선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도리였다.‘차라리 인사한다고 생각하고 그냥 가자.’온채아는 재킷을 정리해 놓고 운전해 월강 레지던스로 향했다.어찌 된 일인지 원래라면 삼엄했어야 할 경비가 한껏 느슨해졌고 아무런 질문도 없이 온채아를 들여보냈다.호숫가를 따라 쭉 뻗은 도로를 질주하던 온채아는 저 멀리에 있는 저택을 보고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심스러워졌다.되돌아봤을 때 그날 밤 온채아의 행동은 그에게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게다가 주율천에게 환장한 사람으로 비칠 게 뻔했기에 오늘도 조롱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아가씨, 오셨어요?”성일은 온채아의 차를 보자마자 뛰쳐나와 차 문을 열어줬다.“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주스? 드시고 싶은 디저트는 있으세요? 제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성일은 온채아가 예전에 성유준 곁에 있을 때부터 변함없이 그녀를 대했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생처럼 챙기면서도 예의와 존중은 잃지 않는 태도였다.그 덕분에 온예전처럼 집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한편으론 이 집에 쭉 같이 살았던 것 같았다.온채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장 재킷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주스면 돼요. 고마워요, 성 비서님.”“고맙긴요.”성일은 그녀가 거리감을 두는 걸 싫어하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가씨가 어릴 때부터 우리가 얼마나 챙겼는데요.”지금 성유준이 곁에 두고 있는 사람들 모두 그가 직접 고아원에서 데려온 이들이었다.경쟁은커녕 성유준을 향한 충성심만 가득했기에 온채아가 처음 저택에 왔을 때 모두가 신기해하며 작고 가녀린 어린 소녀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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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성유준의 그 말에 온채아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매장 직원에게 키랑 몸무게를 말해주면 대충 사이즈를 알 거예요. 다들 전문가라서...”“그래?”성유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온채아에게 다가오더니 바로 앞에 서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 키랑 몸무게를 알아?”“그건...”낯설고 어색한 감정이 다시금 온채아의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무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남처럼 지내온 그들은 인생의 3분의 1을 서로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성유준에게 선물을 준 것도, 옷을 사준 것도 아주 오래전 일이라 키와 몸무게를 알 리가 없다.8년, 코코가 살아있었다면 성견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다.그러니 성유준도 8년 전보다 어깨와 등이 많이 넓어졌다.온채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을 꺼냈다.“그건 대표님이 알려주면 알게 되겠죠.”“싫어.”성유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정장은 직접 입어봐야지. 키랑 몸무게에 맞춰서 산 옷이 사이즈가 나한테 딱 맞을까?”그렇긴 했다.오늘 날의 성유준은 권세를 손에 쥔 사람이기에 맞춤 정장을 입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솔직히 백화점에서 새로 사 오라고 지시한 건 이미 대단한 배려였다.온채아는 도무지 그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만약 맞춤 정장을 사 오라는 뜻이라면 예산을 훌쩍 초과한 일이다.성유준이 평소 입는 정장은 기본이 여덟 자리 이상이었기에 그날 밤 온채아가 잠깐 걸쳤던 재킷의 값은 더 말할 것도 없다.값비싼 옷을 온채아 때문에 버린 셈이니 반드시 돌려줘야 했다.“그럼 어떡하죠?”온채아는 괜히 지기 싫어 이를 악물고 말했다.“평소 정장은 어떤 곳에서 맞춤 제작하세요? 제가 그쪽으로...”성유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백화점에는 언제 갈 건데?”“네?”큰돈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온채아는 눈을 반짝이며 급히 대답했다.“아직 모르겠어요. 일단 한의원 진료 일정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그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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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홧김에 복수한 거라고 누가 그랬어?”온채아는 흠칫 당황했으나 금세 성유준이 어떤 의도로 그 말을 했는지 알아챘다.사실 그녀가 순순히 꼬리를 낮추고 애교를 부린다면 성유준은 언제든지 다시 여동생으로 맞이할 의향이 있었다.그러면 함께 보냈던 그 9년처럼 온채아를 보호해 줄지도 모른다.하지만 곧 다시 버려질지는 시간문제다. 성유준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온채아는 오늘 밤부터 편안하게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며 말했다.“농담이에요.”아마 경성에서 연달아 성유준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온채아가 유일할 수도 있다.서재 안은 바늘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고 긴장된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성유준은 온채아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고집스러운 줄은 몰랐다.예전에도 화가 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성유준이 꼬리를 낮춰도 전혀 의사를 굽힐 생각이 없었기에 매번 상냥하게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재벌가 도련님이 누굴 달랜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가 달래지 않으면 온채아는 곧장 울음을 터뜨렸고 귀를 찌르는 그 울음소리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다행히 지금은 눈물이 사라졌으나 꺾이지 않는 고집은 여전했다.성유준이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예상해 괜히 의기소침해진 찰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말로만 고맙다고 할 거야?”순간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빡인 온채아는 성유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다음에 시간이 되면... 밥이라도 한 끼 살게요.”“다음?”성유준은 별장 한 채에 버금가는 명분 시계를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난 지금 당장 시간이 되는데?”그저 예의상 겉치레식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성유준은 그걸 온전히 받아들였다.‘이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데...’온채아가 시간 없다고 거절하려던 순간 성유준은 단번에 그 의도를 꿰뚫고 말을 이었다.“설마 형식적인 말이었어? 밥 사줄 생각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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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온채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지금은 일 때문에 못 갈 것 같아요.”그러자 주율천은 별생각 없이 웃으며 물었다.“그럼 그냥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온채아가 집을 나가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아내인 건 변함이 없기에 심서정만 잘 정리하면 화를 가라앉히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러니 온채아가 사는 집에 들어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의상 먼저 의견을 물었다.온채아는 그제야 이사한 뒤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괜히 짜증이 치밀었고 무의식적으로 제지했다.“아니요. 지금 바로 갈게요.”청연원을 나온 이후도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예 주율천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집은 정말 가까운 사람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여겼던 온채아는 주율천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서는 게 매우 불쾌했다.어떤 방어선이 무너진 듯한 느낌이랄까?통화를 마친 후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자 여유로운 태도로 바라보고 있던 성유준과 두 눈이 마주쳤다.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그 얼굴엔 또 약속 안 지킬 거냐는 말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듯했다. 온채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경원 아파트에 잠깐 들렀다가 가도 될까요? 수령해야 하는 물건이 도착해서요.”성이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비꼬듯이 말했다.“그 물건이 주율천 씨는 아니겠죠?”“그럴 리가요.”주율천을 집에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수령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성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시큰둥하게 말했다.“그럼 일단 아가씨를 연애하러 보내드려야겠네요.” 온채아는 그 말을 들었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성이는 그녀가 주율천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라고 믿고 있었다.그 편견을 깨려면 이혼 증명서를 주율천에게 던지는 수밖에 없지만 정작 이혼 증명서를 손에 쥘 수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온채아는 억울하면서도 수치스러웠지만 차마 반박할 수가 없어 가만히 시트에 기대었다. 그리고 그 모습엔 마치 공격을 준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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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온채아는 조금 의외였다.예전 같았으면 겁먹은 채 감지덕지하면서 바로 물러섰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주율천을 마주한 그녀는 가식조차 피곤했다.“이제 그만하라는 뜻인가요? 밥 한 끼 차려줄 테니 심서정 씨가 날 해치려고 했던 일을 잊으라는 건가요?”주율천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그토록 고귀한 몸을 굽혀가며 밥까지 했으니 이제 좀 눈치껏 굴어야 한다고 여기는 게 틀림없다.주율천은 흠칫했다. 본능적으로 부정하려고 했지만 문득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주율천은 눈을 내리깔고 온채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날 네가 정말 다쳤다면 당연히 네 편에 섰을 거야. 하지만 다친 건 아니잖아? 너도 알다시피, 서정이는 그냥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졌을 뿐이야.”“이게 다친 게 아니라고요?”옷을 걷어 올리자 팔에 선명하게 남은 시퍼런 멍 자국이 드러났다.온채아는 싸늘하게 말했다.“정말 성폭행이라도 당해야 다쳤다고 인정할 거예요?”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조용히 주율천을 응시했고 그 시선에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드는지 주율천은 멍이 든 팔을 보며 중얼거렸다.“그날 호텔에서는 왜 말 안 했어?”“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온채아는 짜증이 가득한 냉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물어보긴 했어요?”“미안...”“됐어요.”온채아는 더 이상 말 섞기 싫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할 일 있으니까 이제 그만 가세요.”그 말을 끝으로 온채아는 집에 그림만 내려놓고 바로 나갈 생각이었다.그런데, 그녀의 등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주율천이 뒤에서 허리를 안으며 부드럽게 달랬다.“채아야, 화내지 마. 서정이 이사 준비하고 있어. 서정이 나가면 다시 들어와야지.”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온채아는 주율천을 확 밀어내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요. 당신이 심서정 씨랑 어떻게 되든 이제 나랑 상관없다고요. 필요하면 부부인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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