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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첫사랑만 구한 남자: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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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고미애의 말에 방금까지 싱긋 웃던 이나은의 표정은 살짝 굳어버렸고 신지아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언뜻 들으면 자신을 변씨 가문의 며느리로 인정하는 것 같지만 고미애가 정말 자신 편을 들어주는 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칼’처럼 이용할 뿐이었다.아니나 다를까, 변하늘이 바로 못마땅한 듯 끼어들었다.“엄마, 나은 언니는 손님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제 친언니보다 훨씬 잘 챙겨줘요.”변하늘은 그런 말을 내뱉으며 신지아를 노골적으로 노려봤다.분명 아직 아까 선물 건으로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신지아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이제 와서 돈을 안 받았다고 변명하면 변하늘은 기어이 파고들 것이다.“그럼 그동안 선물 살 돈은 어디서 났어?”“일도 안 하면서 무슨 돈으로?”어떤 대답을 해도 고미애의 감정은 더 격해질 게 뻔했기에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어차피 이 결혼은 끝나가고 있었으니까.그녀는 묵묵히 고미애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변하늘은 신지아가 들고 온 작은 선물 봉투에 시선을 고정했다.그게 자기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어머니 것일 거라 생각했다.“저거 우리 엄마 거예요? 뭐 샀는지 제가 먼저 볼게요.”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신지아가 가볍게 막아섰다.“그건 할머니 드릴 거예요.”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하자 변하늘의 눈이 동그래졌다.“뭐라고요? 저한텐 선물 안 사온 것도 모자라서 우리 엄마 것도 없다는 말인가요?”“엄마도, 할머니도 신지아 씨 시댁 어른이에요. 어떻게 할머니만 챙기고 엄마는 빼먹을 수가 있어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쾌감이 들끓었다.‘잘됐네. 이대로 엄마까지 기분 상하면 나은 언니가 더 빛날 테니까.’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고미애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다만 단 한 번의 선물로 며느리와 정면충돌할 만큼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저 싸늘하게 말했다.“그래도 어르신 생각은 했네. 그건 그거대로 효심이 있는 거겠지.”하지만 변하늘은 기회를 놓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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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사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감정을 풀 방법이 없었다.변하늘은 그런 신지아를 보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신지아는 그 시선을 알 리 없었다.그녀의 눈은 방금 막 뜬 긴급 알림에 고정돼 있었다.고우빈의 항공편이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그럼 빨리 할머니를 뵙고 최대한 일찍 여기서 나가야겠다.’...그 시각, 2층 서재.변도영은 의자에 느슨하게 기댄 채,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눈앞에는 묵묵히 자료를 훑고 있는 아버지 변승주.“아버지, 절 불러놓고 같이 근무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변승주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신씨 가문이랑 또 손잡았다면서?”“소식이 빠르시네요.”변도영이 살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애초에 신씨 가문과 협력하라는 건 아버지랑 할머니 뜻이었잖아요.”말끝에 섞인 불만을 변승주가 못 알아챌 리 없었기에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신씨 가문의 상황은 예전 같지 않다. 굳이 그들에게 계속 힘을 쏟을 필요 없어. 신지아 문제도 마찬가지다.”그는 단어를 신중히 고르며 이어갔다.“처음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많은 집안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약속을 어기면 변씨 가문 신뢰가 무너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영아, 네가 정말 지아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혼해도 좋다.”“이혼이요?”변도영은 잠시 멈칫했다.잠깐의 침묵 뒤, 변도영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그땐 신씨 가문 무시하면 체면 구긴다고 난리 치더니 지금은 이혼해도 체면 안 구겨진다는 말씀이신가요? 언제부터 아버지가 그렇게 융통성 있으셨어요?”그러자 변승주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상황이 다르다. 네가 그 결혼을 버틴 게 벌써 5년이다. 하지만 지금 이 모양이지 않니.”“이 모양이라뇨?”변도영의 말에 변승주는 말없이 아들을 바라봤다.‘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연성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닌가.’부부라면서 각방은 기본이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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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지아 왔니?”“아이고, 내 새끼. 이게 얼마 만이야? 보고 싶었어.”아직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부축을 받고 있지만 환하게 웃는 박수미가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신지아는 급히 일어나 다가가려 했지만 옆에서 스치듯 지나간 변하늘이 일부러 세게 부딪쳤다.몸이 휘청거리며 거의 넘어질 뻔했으나 겨우 중심을 잡았다.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변하늘은 벌써 이나은과 함께 박수미 곁에 가 있었다.“할머니, 저는요? 하늘이는 안 보고 싶었어요?”입술을 삐죽이며 애교를 부리는 변하늘을 본 박수미는 손뼉을 칠 듯 즐겁게 웃었다.“당연히 보고 싶었지. 지아도 내 보물이지만 하늘이 너도 내 귀한 손주야.”변하늘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할머니 품에 안겼다.영악한 아이답게 늘 그렇게 달콤한 말로 박수미의 마음을 녹여왔다.하지만 그 순간, 고미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방금 박수미의 말은 곧, 신지아와 변하늘을 같은 선상에 둔 것.게다가 들어오며 처음 부른 이름도 변하늘이 아닌 신지아였다.이 작은 차이가 괜히 신경에 거슬렸다.물론 변하늘은 그런 건 알 리 없었다.할머니를 웃게 한 기세를 몰아 이번엔 이나은을 앞으로 끌어당겼다.“할머니, 이분이 누군지 기억하세요?”이나은은 단아한 미소를 띠며 먼저 인사했다.“할머니, 오랜만입니다. 예전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예전에 변도영과 함께 이 집에 드나들 때, 일부러 양로원 봉사까지 하며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말을 배워두곤 했었다.이번에도 당연히 통할 거라 생각했지만 박수미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얘는 누구지?”이나은의 표정이 살짝 굳어버리자 변하늘이 재빨리 끼어들었다.“할머니, 이분이 도영 오빠 여자 친구인 나은 언니예요. 예전에 자주 같이 왔었잖아요.”“아.”마침내 그녀의 정체를 떠올린 듯 했으나 박수미의 표정은 곱지 않았다.“도영이 전 여자 친구? 그런데 왜 왔지?”그녀는 ‘전’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또렷하게 짚었다.목소리는 딱딱하고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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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아쉬운 건, 박수미는 도영의 친할머니라는 사실이었다.곧 이혼할 사이니 이혼 후에는 더 이상 변씨 가문에 발걸음할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신지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하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고쳐 잡았다.적어도 지금만큼은 박수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변도영은 당분간 가문 사람들에게 이혼 이야기를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모든 게 정리되면 그때 말하자고 하면서.신지아가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위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변승주와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은 바로 변도영이었다.그는 할머니를 보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가끔은 헷갈립니다. 지아가 진짜 손녀인지, 제가 손자인지.”박수미는 곁눈질만 하고는 담담히 받아쳤다.“넌 내 친손자 맞다. 하지만 지아도 내 친손녀다.”변도영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또 이렇게 신지아만 감싸네.’변도영의 눈에는 이제 신지아가 완전히 할머니 머리 위에 앉아 노는 것처럼 보였다.이나은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겨우 긴장을 풀었다.곁에 있던 변하늘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더니 자리를 뜨려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도영아, 난 먼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은 가족끼리 모임이잖아. 내가 있으면 방해될까 봐...”“아니에요, 나은 언니.”변하늘이 다급히 붙잡았고 변도영 역시 곧장 나섰다.“밥은 먹고 가. 괜히 서운하게 굴지 말고.”이나은은 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정말 괜찮아. 난 어디까지나 외부인인데 여기 앉아 있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그 말에 변도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누가 그래? 누가 널 외부인이라 했는데?”이나은은 고개를 숙인 채 곁눈질을 했고 시선은 잠깐 신지아와 할머니 쪽을 스쳤다.하지만 곧바로 눈길을 거두고는 스스로 말을 고쳤다.“아무도 말한 적은 없어.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그 순간, 변도영의 시선은 곧장 신지아에게 꽂혔다.아까 시선이 머문 곳.결국, 신지아가 할머니 뒤에 숨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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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작별 인사? 어디로 간다는 거니?”박수미가 손을 꼭 쥐며 다급히 물었다.순식간에 거실의 시선이 신지아에게로 쏠렸고 모두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중에서도 변도영은 묘한 감정을 억누르듯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그러자 이나은이 곧장 그녀 옆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다정하게 걱정해 주는 척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야, 부부끼리 다투는 건 흔한 일이야. 무슨 말이든 차분히 하면 돼. 여기 변씨 가문에서 이렇게 토라지는 건 좋지 않지?”목소리는 분명 낮췄는데 묘하게도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했다.신지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번엔 도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도영아, 넌 남자잖아. 무슨 일이 있든 네가 먼저 사과하는 게 맞지 않겠어?”변도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역시 예상대로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그 순간, 이나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두 사람 중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이 말한 게 ‘사실’로 굳어진다.집안 모임 자리에서 사적인 문제를 드러내면 비난은 고스란히 신지아에게 쏟아질 게 뻔했다.변씨 가문은 변도영의 집이었다.결국 손해를 보는 건, 그의 아내인 신지아일 수밖에 없다.이나은은 흡족하게 신지아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도영이 성격이 좀 날카로워. 그러니 내가 대신 사과할게. 지아야, 이 일은 여기서 그만 넘어가자. 괜히 할머니까지 속상하시잖아.”하지만 신지아는 억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오히려 여유 있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혹시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저희는 다툰 적 없는데.”짧은 말에 분위기는 얼어붙었다.“그리고...”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또렷하게 이어갔다.“설령 다툼이 있다고 해도 지금 아내는 저예요. 이나은 씨는 무슨 자격으로 대신 사과하겠다는 거죠?”예상치 못한 반박에 이나은의 표정은 굳어버렸다.“나... 나는 그저...”그러나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신지아가 곧장 말을 잘라냈기 때문이다.“괜히 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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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지금 이 자리에서 이혼하겠다고 말해봤자 아직 이혼 서류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니 겉으로는 체면 때문에 다들 말릴 뿐, 속으로는 오히려 자신과 변도영의 결별을 기대하고 있을 게 뻔했다.그러니 차라리 꺼내지 않는 게 나았다.신지아의 손을 꼭 잡아주는 박수미의 눈빛이 흔들렸다.걱정인지, 안타까움인지, 아니면 실망인지는 몰라도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오랫동안 침묵하던 변승주가 분위기를 수습하듯 입을 열었다.“시간은 아직 넉넉하잖니, 지아야. 내가 바로 부엌에 얘기해서 저녁 준비하게 할 테니 편히 여기서 식사하고 가렴. 친구도 그 뒤에 충분히 마중 나갈 수 있을 거야.”그러고는 시선을 이나은에게 돌렸다.“나은이는 도영이이 친구니까 당연히 우리 변씨 가문의 손님이지. 온 김에 같이 저녁 먹고 가.”그 말은 단순히 초대 이상의 의미였다.이나은은 변도영의 친구이니 손님 대접하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체면도 세워주고 아까의 어색한 상황도 매끈하게 봉합한 것이다.가문의 실질적 주인이 그렇게 못 박아 말하니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혼’이라는 말이 변하늘의 입에서 흘러나온 뒤라 식탁 분위기는 어쩐지 어긋나 있었다.그렇게 억지로 이어진 저녁 식사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신지아는 박수미와 변도영 사이에 앉았고 변도영의 반대편에는 이나은이 앉아 있었다.식사 내내, 이나은은 여러 번 웃으며 변도영에게 반찬을 집어 주었고 놀랍게도 변도영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신지아는 그 장면을 보며 가슴이 저릿해졌다.그에게는 결벽증이 있었다.결혼 초,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인터넷 글을 보고 밥 먹을 때 반찬 챙겨주기라는 조언을 그대로 따라 했다.그래서 공용 젓가락으로 반찬을 덜어 그의 접시에 놓자 변도영은 바로 딱 잘라 말했다.“앞으로 그러지 마. 난 결벽증 있어. 남이 집어준 음식은 못 먹어.”그땐 공용 젓가락이었는데도 신지아가 집어 준 음식은 거절했다.그런데 지금, 이나은은 자기 젓가락으로 집어 준 음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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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신지아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자 변도영이 아무렇지 않게 귤의 흰 막을 뜯어내더니 태연하게 입에 넣는 모습이 보였다.이나은과 변하늘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정작 변도영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신지아는 조금 놀랐을 뿐, 곧 담담하게 표정을 가라앉혔다.예전 같았으면 혹시나 그가 자신에게 아직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하면서 작은 행동 하나에도 흔들렸을지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수년간 변도영이 보여준 ‘증거’들이 쌓여 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로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었다.신지아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시계를 흘끗 보았다.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박수미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박수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아야, 날 좀 데려다주겠니?”신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눈치챘다.박수미 역시 자신과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걸.식당을 벗어나 복도를 걷는 사이, 신지아가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자 박수미가 먼저 물었다.“지아야, 정말 마음을 정한 거니?”신지아가 잠시 멈칫하자 박수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라면 내가 붙잡아야겠지. 아직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은 결국 너만 더 힘들게 만들 뿐일 거야.”박수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그동안 네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다 지켜봤다. 그런데도 미안하다, 지아야. 이 늙은이가 해줄 수 있는 게 참 없더구나.”신지아는 그제야 깨달았다.박수미는 이미 자신이 이혼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을.사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신지아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조금만 어긋나면 제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박수미였으니까.그녀의 기억은 문득 몇 해 전으로 흘러갔다.당시 변씨 가문은 급성장 중이었고 변도영의 이름은 업계에서 날이 갈수록 유명해졌다.그러니 자연히 시기와 견제도 거세졌다.어느 날, 집에 혼자 있던 신지아 앞에 낯선 남자 넷, 다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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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신지아가 떠난 뒤, 박수미는 그녀가 남기고 간 선물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안에는 미리 주문해 둔 쑥 허리 베개가 들어 있었다.요즘 들어 허리가 자주 아파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두드리곤 했는데 신지아가 그것까지 눈여겨본 모양이었다.사실 그녀가 본가에 찾아온 건 꽤 오래전 일이기에 그나마 얼마 전 영상통화에서 자신을 보고 기척을 알아챈 듯했다.그러자 곁에 있던 도우미가 감탄하듯 말했다.“정말 신지아 씨는 여전히 세심하시네요.”“그래. 지아는 원래 그런 아이다.”박수미가 나직이 한숨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처음에 신지아를 좋아했던 건,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구해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직접 지내보니 점점 더 그 아이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남들은 알아채지 못해도 그녀는 보였다.신지아는 늘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기며 모든 걸 흐트러짐 없이 다스리는 아이였다.하지만 그런 배려는 옆에 있을 땐 잘 드러나지 않는다.떠나고 나서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빈자리가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마치 매일 떠오르는 태양 같다.늘 곁에 있으니 그 존재의 소중함을 잊어버리지만 어느 날 태양이 더는 떠오르지 않는다면 세상은 곧바로 어둠 속에 잠기고 그제야 잃어버린 빛의 귀중함을 깨닫게 된다.그런 따스한 태양 같은 아이가 손자 곁에 있었는데 정작 손자는 눈이 멀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박수미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리자 도우미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바람이 셉니다, 어르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그러나 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멀어져 가는 신지아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난 이 아이가 떠나는 걸 보고 싶구나. 나도 나이를 먹었지... 지아는 이미 결심했어. 앞으로는 만날 날이 점점 줄어들겠지.”끝내는 목소리마저 떨렸다.도우미는 눈치가 빨라 방금 신지아와 나눈 대화로 대충은 짐작했다.“혹시 신지아 씨가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잖아요.”“아니, 그럴 리 없어.”박수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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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신지아, 가려는 거야?”이나은의 목소리에 신지아가 뒤돌았다.변씨 가문 사람들이 없는 지금, 이나은은 전처럼 꾸미지 않았다.그리고 승리를 거둔 장군처럼 당당하고 얼굴에는 자만과 오만함이 가득한 채로 천천히 신지아에게 다가왔다.신지아는 그녀 눈빛 속의 적대감과 도발을 느꼈다.원래라면 자신도 적대적으로 맞섰겠지만 의외로 마음은 오히려 담담했다.사실 그녀와 이나은 사이의 갈등은 변도영 때문이다.변도영과 이혼을 앞둔 지금, 더 이상 날카롭게 맞설 필요가 없었다.신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 이제 가야겠어요.”이나은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설마 내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뜻밖의 말에 신지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전...”“그렇다 해도 괜찮아.”이나은은 신지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몇 년 동안 해외에 있었지만 너와 도영이 사이 일은 다 들었어. 도영이는 널 좋아하지 않았고 결혼생활에도 불만이 많았지.”“그래서 내가 이번에 돌아와서 도영이랑 함께한 거야. 너와의 관계를 깨트리려는 게 아니라 우리 관계를 원래 자리로 돌리는 거지.”이나은은 신지아 곁으로 다가가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신지아는 말없이 서 있었고 이나은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변도영과 이미 이혼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아직 이나은 씨한테 말하지 않은 건가?’신지아는 속으로 궁금했지만 지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 가보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에 이나은은 당황했는지 눈치 보기 시작했다.신지아의 침착함과 단호함이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면하게 한 것이다.사실 변도영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신지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몇 번 떠보려고 했을 때, 변도영은 건성으로 손을 내저으며 두세 마디로 화제를 끝내곤 했다.이나은은 변도영 마음속의 신지아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다만 변하늘과 자주 얘기하며 그녀의 입에서 신지아에 대한 불만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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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방금 이나은의 행동 때문에 신지아가 마치 그녀를 밀었다는 착각을 일으킬 뻔했다.뒤돌아보니 컴컴한 밤하늘 속 변도영이 서 있었다.그의 표정은 냉혹했고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게다가 눈빛에는 분노와 불만이 뒤섞여 있었다.신지아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이나은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영아, 지아 잘못이 아니야. 오늘은 내 잘못이었어. 내가 여기 오면 안 됐어.”변도영은 말없이 앞으로 걸어가며 냉정하게 말했다.“내가 널 데려온 거니 너를 울린 건 결국 내 잘못이겠지.”그는 곧바로 다가가 이나은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신지아는 변도영이 자기 옆을 지나갈 때, 어깨가 세게 부딪히는 걸 느꼈다.그는 단순히 이나은에게 다가가는 길을 막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신지아에게 복수한 것이었다.신지아는 설명할 기회조차 없었다.단지 이나은의 몇 마디 말만으로 변도영은 신지아에게 죄를 단정 지었다.익숙한 일이었지만 신지아는 가슴이 막히는 듯 답답함을 느꼈다.“나은 언니, 괜찮아요?”변하늘이 급히 달려왔다.이나은은 신지아를 보고 씩 미소 짓더니 변하늘에게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괜찮아, 그냥 살짝 넘어졌을 뿐이야.”“언니, 그만 해요. 방금 신지아 씨가 언니를 밀었잖아요.”변하늘은 신지아를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남매 둘 다 그녀를 믿지 않는 눈치였다.신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변하늘은 자신이 현장에서 들킨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사실 오늘 신지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변하늘은 그녀가 할머니의 사랑을 믿고 이나은이 혼자라서 자신만만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오해했다.든든한 오빠, 변도영이 여기 있지 않은가.그러니 변하늘은 이나은을 당당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변하늘은 신지아 옆을 지나가다가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더 화가 나 발로 신지아를 밟았다.순간, 이미 다친 발가락에 날카로운 통증이 퍼졌다.신지아는 고통에 쪼그려 앉았고 이마에는 식은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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