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애걸복걸! 도련님의 고백: Chapter 331 - Chapter 340

362 Chapters

제331화 기괴한 균형

서지혁은 먼저 서인준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자책하지 마. 네 잘못 아니야.”그러고는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대나무숲에 묻혀 있던 사람은 나도 모르는 분이야. 아주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라는데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잖아.”잠시 침묵하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자.”서인준은 짧게 대답하더니 처치실 앞에 서 있는 성문영을 슬쩍 살피고는 망설이며 입을 뗐다.“그리고 형, 하나 더...”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성문영이 몸을 돌려 다가왔다. 그녀는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한효진이 들어간 지 얼마나 됐는지 물었다.서인준은 말이 끊기자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러고는 성문영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성문영은 그저 아들이 너무 놀라 넋이 나간 줄로만 알고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였다.하지만 서인준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아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그렇게 몇 분간 불편한 정적이 흐른 뒤, 성문영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물을 좀 사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러고는 두 형제에게 마실 것이라도 필요한지 물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싫으면 관두든가.”말을 마친 그녀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응급의료센터 건물 안에 자판기가 뻔히 있는데도 그녀의 발걸음은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서지혁은 그 뒷모습을 한 번 훑고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서인준에게 물었다.“심태진 만나고 왔어?”“어, 갔었어.”서인준이 대답했다.“상태는 멀쩡해 보이더라. 원래 가벼운 타박상이라 진작 퇴원했어야 했는데 어제 또 자빠졌다는군.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며 뇌진탕 운운하길래 이틀 정도 더 지켜보기로 했대.”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또 넘어졌다고?”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 동정표라도 얻어보려는 뻔하디뻔한 수작이 분명했다.잠시 후 서경민이 웬 남자와 함께 나타났다. 서지혁도 잘 아는 병원의 부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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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2화 나 사랑해?

한효진은 목숨이 질긴 편이었다. 의사들이 또다시 저승 문턱에서 끌어내 왔다.하지만 숨만 겨우 붙어있을 뿐,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응급실에서 실려 나온 그녀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이동식 침대에 누워 있었다. 요란하게 울려 대는 기계음이 아니었다면 죽은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의사는 환자를 살려냈다는 기쁨보다 무거운 기색으로 서경민에게 말을 전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며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라고 말이다.본래 심부전이 심각했던 터에 심정지까지 겪었으니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회생이었다.서경민은 아무 말 없이 멍한 표정으로 이동식 침대를 따라 병실로 향했다.그는 한효진이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성문영이 그의 곁에 서서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위로를 건넸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인준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할머니께서 오늘 밤 안에는 깨어나지 못하실 것 같아요.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시끄러울 테니 다들 내일 다시 오시는 게 어때요?”그가 덧붙였다.“오늘 밤은 제가 여기 남을게요.”그 말을 들은 성문영이 허리를 숙여 서경민에게 물었다.“당신은 들어갈 거야?”그제야 서경민이 마지못해 대꾸했다.“먼저들 돌아가. 난 오늘 여기 있을게.”성문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나도 같이 있을게.”서인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 내일 아침에 교대하러 오겠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을 나섰던 그가 다시 멈춰 서서 안을 돌아보았다.서경민은 아직 나가지 않은 서지혁을 발견하고 말했다.“너도 가봐.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회사 일도 산더미잖아.”서지혁이 대답했다.“여기서 밤을 새우실 거면 아줌마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여기 있어 봐야 쉴 곳도 마땅치 않으니까요.”서경민이 손을 휘저어 허락하자 서지혁은 가정부에게 눈짓을 보냈다.가정부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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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3화 그새 매 맞은 걸 잊었나 봐요?

서지혁은 알지 못했고,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옆으로 비켜나 굵직한 대나무에 몸을 기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고개를 숙인 채 불을 붙였다.그가 입을 다물자 연재윤이 혼자 말을 이어갔다.“보통 이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흐르면 살점은 다 썩어 없어지고 뼈마디도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잖아.”그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그런데 말이야. 그 유골은 형체가 고스란히 이어져 있었어.”뼈마디 사이사이를 얇은 철사로 고정해 둔 탓이었다. 유골은 무릎을 꿇은 기괴한 자세로 진흙과 썩은 잎 더미 속에 처박혀 있었다.서지혁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그는 화제를 돌렸다.“연성 그룹에 조만간 복직하게 될 테니 미리 준비해 둬.”그가 덧붙였다.“다음에는 성깔 좀 죽여. 네가 돌아온 목적을 잊지 마. 사사건건 그 영감이랑 대립해 봤자 계획에 차질만 생기니까.”그 말에 연재윤도 유골 이야기는 접어두고 거대한 구덩이 주변을 서성이며 대답했다.“그 영감탱이, 분명 나를 한동안 방치해서 애 좀 태우려는 속셈이겠지. 난 그냥 그 장단에 맞춰주면서 영감탱이 인내심이나 갉아먹는 중이야. 너무 고분고분하게 굴면 나중에 일이 성사되어도 짜릿한 맛이 없잖아.”서지혁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결국 네 어머니를 모셔 오고 그 인간들을 발밑에 짓밟은 채 네가 상전 노릇을 하게 될 텐데. 그게 어떻게 안 짜릿하겠어?”“그래. 알았어.”연재윤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밀봉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빨간색 종이돈과 몇 장의 노란 부적이 들어 있었다.그는 부적에 불을 붙여 종이돈과 함께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바닥의 썩은 잎들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기에 종이돈이 다 타버리자 불꽃은 금세 사그라들었다.연재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지혁 쪽으로 걸어왔다.“됐다. 이제 가자.”두 사람이 대나무숲을 빠져나와 밖에서 잠시 바람을 쐬고 있자 연재윤을 데리러 온 차가 도착했다.차에 올라타기 전, 연재윤이 서지혁을 돌아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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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4화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걸까?

하시윤은 원래 심태진과 몇 마디만 나누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심태진이 먼저 자리를 떴다.그는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실은 울화통이 터져 나가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뻔뻔한 사람에게도 아직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하시윤은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곁에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방금 그분, 심 회장님 아니세요?”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덧붙였다.“어쩌다 입원을 하신 거래요? 어디 다치기라도 하셨나?”하시윤이 무심하게 대답했다.“글쎄요. 누구 심기를 건드렸는지 몰라도 머리에 봉지를 뒤집어쓰고 죽도록 맞았대요.”“세상에!”가정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신고는 안 하셨대요?”“신고 못 하죠.”하시윤이 비죽 웃음을 흘렸다.“본인이 지은 죄가 있으니 맞아도 그저 꾹 참는 수밖에요.”가정부는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말을 얹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심 회장님 말이에요, 예전에도 가끔 사모님을 따라서 집에 오곤 하셨거든요. 말수도 적고 꽤 진중해 보이셨는데 말이죠.”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그분이 처음부터 싫더라고요. 위층에 도련님을 보러 두어 번 올라온 적도 있는데 예의 바르게 행동하시는데도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어요.”그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꼭 점잖은 척 뒤로 호박씨 까는 위선자 같았달까요.”그녀의 촉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시윤은 웃음을 터뜨렸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잠시 후, 그들은 다시 입원 병동으로 돌아갔다.병실 안에는 서경민이 여전히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한효진은 잠든 모양이었는데 그는 의자에 기댄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밤을 꼬박 새운 탓인지 서경민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눈가가 푹 꺼진 탓에 누군가를 바라볼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그의 눈빛은 아무런 표정이 없음에도 서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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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5화 임해광

차는 주차장에 멈춰 섰다. 집사가 먼저 내려 하시윤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고 일행을 본관까지 안내하려 했다.하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대나무숲 쪽에 또 무슨 일 생겼어요?”집사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글쎄요. 그런가 보죠.”그가 덧붙였다.“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하시윤은 그의 얼굴을 잠시 동안 빤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정원 쪽이 아닌 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서 좀 보고 올게요.”집사가 다급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하시윤 씨.”그가 타일렀다.“대표님께서 이런 일은 불길한 기운이 서려 있으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가지 마시죠.”그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채 본관 쪽을 향해 정중히 길을 비켰다.“가시죠. 임신 중이신데 이런 일은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하시윤은 제 배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이내 수긍했다.“하긴, 그렇네요.”본관 3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서정우의 방으로 향했다.마침 지금이 약을 먹을 시간이었다. 억지로 먹일 필요도 없이 아이는 스스로 물에 약을 타서 꿀꺽 삼키더니 얌전하게 침대에 누웠다.약기운에 취해 괴로워하던 시기는 지났지만 아이는 여전히 약을 먹고 나면 몸을 가만히 뉘었다.하시윤은 몸을 숙여 아이의 등을 살포시 토닥였다.“우리 강아지, 이제 자야지.”시간상으로도 아이가 낮잠을 잘 때였다. 오전 내내 밖에서 놀았으니 기운이 다 빠졌을 터였다.서정우는 눈을 감으며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누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엄마.”“응, 엄마 여기 있어.”하시윤이 아이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그러더니 서정우가 배시시 웃었다.“계속 여기 있어야 해요.”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을 오물거리며 쌕쌕거리는 고운 숨소리가 들려왔다.하시윤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밖으로 향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옆에 있는 쪽문으로 나갈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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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6화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구 형사가 휴대폰을 조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임해광 씨, 태그에 적힌 이름을 똑똑히 확인하고 말씀하시죠.”하시윤은 그 말에 한 걸음 다가가 사진을 유심히 살폈다.구 형사는 다른 손으로 사진을 쓱 잡아당겨 확대했다.임해광이 사진을 제대로 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시윤의 눈에는 아주 선명하게 들어왔다. 태그에는 ‘임해광’ 세 글자가 아주 또박또박 박혀 있었다.사진을 확대하니 옆에 적힌 전화번호 한 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아마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주운 사람이 함부로 버리지 말고 돌려달라는 의미로 연락처를 남겨둔 모양이었다. 운 좋게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되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임해광은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입을 뗐다.“이게 어떻게...”구 형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이 번호, 예전에 당신이 사용하던 번호 맞죠? 이미 확인 끝났습니다.”임해광은 흠칫하더니 눈을 몇 번 깜빡였는데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이게... 제 이름이 적힌 걸 보니 제 물건이 맞긴 한 것 같은데요.”그가 말을 이었다.“제 것이라고 해도 벌써 수년 전 일입니다. 이런 열쇠는 안 들고 다닌 지 한참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그러고는 뻔뻔하게 되물었다.“그런데 이 열쇠고리가 왜요? 설마 이걸 주웠으니 주인 찾아주려고 오신 건 아닐 테고.”그는 비죽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이제는 무슨 열쇠인지도 몰라서 저한테 주셔 봤자 소용없습니다.”“본인 물건이라는 것만 인정하시면 됩니다.”구 형사가 휴대폰을 내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저희와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협조가 필요한 사건이 있어서요.”임해광은 흠칫하더니 구 형사에게 되물었다.“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열쇠고리 하나 때문에 저를 잡아가겠다는 거예요?”서경민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구 형사님.”구 형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네, 회장님.”그가 말을 이었다.“오늘 강력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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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7화 사랑하지 않는다

성문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집사님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그것도 남의 눈에 띄기 쉬운 대나무숲에 시신을 묻다니.”그녀가 덧붙였다.“아까 유골이 발견됐을 때 경찰이 그랬잖아. 범인이 아버님과 관련 있는 인물일 거라고. 설마 아버님이 시킨 일은 아니겠지?”“함부로 넘겨짚지 마세요.”서지혁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경찰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죠.”그러고는 하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끌었다.“들어가서 얘기하죠.”서인준이 마당으로 차를 몰고 들어왔지만 성문영은 따라 들어오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네 아빠는?”그녀가 물었다.“네 아빠 어디 갔어? 집에 없는 거야?”서지혁이 걸음을 옮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집사 아저씨 변호사 선임해 준다고 하셨어요. 변호사를 만나러 가셨는지, 아니면 병원에 계신 할머니 보러 가셨는지 저도 몰라요.”그는 성문영을 힐끗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직접 전화를 해보시든가요.”성문영은 전화를 거는 대신 곧장 차에 올라탔다. 자신이 전화를 해봤자 서경민이 받지 않을 게 뻔했기에 차라리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는 게 빠르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그녀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져나갈 때, 주차를 마친 서인준이 차에서 내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그는 성문영과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오늘 회사에서도 업무상 대면할 일이 있었지만 서인준은 그녀의 지시를 묵묵히 듣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 사적인 말은 일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성문영을 마주하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깊은 실망감 때문이었다.어제 비상구 계단에서 성문영과 심태진의 추잡한 대화를 엿들었을 때, 처음에는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오히려 묘한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그동안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의문들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분이었으니까.어린 시절부터 성문영은 그에게 무심했다. 그건 서지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에게 공평하게 무심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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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8화 충동

서지혁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성문영은 이미 한효진의 병실에 와 있었다. 그녀는 창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서지혁이 다가가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문영이 몸을 일으켰다.“왔니?”그녀가 덧붙였다.“네 아빠는 여기 안 오셨다.”“안 계시면 아마 변호사 만나러 가셨을 거예요.”서지혁이 무심하게 대답했다.“집사 아저씨가 우리 집에서 보낸 세월이 수십 년인데 이런 일이 터졌으니 가만히 계실 분은 아니죠.”그 말에 성문영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구나. 어쩌다 집사님이 그런 일에 엮인 거야?”그녀가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정말로 그 사람 짓이라면 우리 집안도 의심을 피하기는 글렀어.”죽은 이가 서무열과 관련이 있고 임해광이 그 뒤처리를 했다면 누가 봐도 서씨 가문의 치부를 덮으려 한 짓이라 짐작할 터였다.성문영은 괴로운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됐을까. 요 반년 사이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구나. 끊임없이 사건이 터지니.”서지혁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냉정하게 대답했다.“원래 곪아 터질 일들이 이제야 터진 것뿐이에요.”그가 덧붙였다.“자꾸 다른 데서 원인을 찾지 마세요. 서씨 가문이 어떤 곳인지 엄마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성문영은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반응했다. 아들이 제가 하시윤을 탓한다고 생각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아, 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그녀는 멈칫하다가 말을 덧붙였다.“당연히 하시윤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걔가 무슨 수로 이런 큰일을 벌이겠니. 그럴 사람도 아니고.”모자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정적을 깬 것은 병실 문을 두드리는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틈 사이로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르신?”두 사람 모두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동시에 굳어버렸다.나타난 사람은 꽃다발과 보온병을 든 유민숙이었다. 그녀는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쭈뼛거리며 들어왔다.한효진의 응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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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9화 끝장을 보다

조경순이 들이닥쳤을 때, 거실에 있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가 순식간에 거실 한복판까지 치고 들어오자 세 사람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조경순은 눈을 부릅뜬 채 표독스러운 비명을 질렀다.“하병우, 이 나쁜 인간아!”하병우는 이미 술을 반 병 넘게 비운 상태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그는 조경순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내 안색을 싹 바꾸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당신이 여길 왜 왔어?”죄지은 사람 특유의 비굴함이나 미안함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남의 집에 왜 함부로 들어와? 당장 나가!”그 태도에 조경순은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있던 술잔을 낚아채더니 하병우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 그러고는 달려들어 그를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하병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혼할 때 우리 뭐라고 했어!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도장만 찍는 거라고, 이 고비만 넘기면 다시 합치기로 했잖아!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벌써 다 잊었어? 다 잊었냐고!”그녀의 주먹이 하병우의 머리와 얼굴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대답해 봐! 다른 여자를 집에 들인 것도 모자라 하시윤까지 불러서 가족 식사를 해? 당장 설명해! 어서 설명하라고!”갑작스러운 매질에 멍하니 당하던 하병우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섭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조경순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옆으로 거칠게 내팽개쳤다.“꺼져! 이 미친 여자가 어디서 행패야?”옆에 서 있던 젊은 여자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하병우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어머, 어떡해. 어디 다친 데 없어요?”여자를 향한 하병우의 눈빛은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했다.“괜찮아. 무서워하지 마.”다시 조경순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다.“어디서 미친 짓이야? 우리 이미 남남이야! 내가 누굴 만나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여길 와서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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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0화 좀 배워

하시윤은 서지혁과 통화를 끝낸 후 3층으로 올라갔다.서정우와 놀아주다 보니 하민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화면을 슬쩍 확인하고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한참 뒤 아이를 겨우 재우고 나니 밤이 깊어 있었고 서지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제 방으로 돌아온 하시윤은 그제야 하민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은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더니 다짜고짜 욕설부터 내뱉었다.“하시윤, 이 독한 년아! 감히 너희가 합세해서 우리 엄마를 괴롭혀?”하시윤은 기가 차서 웃음이 터졌다.“직접 손을 댄 사람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옆에서 구경만 한 나한테는 입만 열면 욕설을 뿜어대는구나?”하민지는 분노에 차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하시윤이 태연하게 물었다.“네 엄마 얼굴은 무사하니?”하민지가 목소리를 높였다.“웃기지 마! 네가 일부러 꾸민 짓인 거 모를 줄 알아?”하민지는 그래도 머리 굴리는 속도가 제법 빠른 모양이었다.“그 여자, 네가 붙인 거지? 일부러 우리 아빠 꼬시라고 보내서 엄마랑 사이 이간질한 거잖아. 맞지?”하시윤이 혀를 찼다.“네 아빠는 바지춤을 본인이 직접 풀었어. 여자랑 침대로 기어 들어간 것도 본인인데 참 신박한 논리네. 일이 터지자마자 아빠 잘못부터 쏙 빼놓는 꼴이라니. 내가 전부터 네 머리에 문제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이지 한 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전화 너머로 조경순의 악에 받친 비명이 새어 나왔다.“이혼할 거야! 그 인간이랑 당장 갈라설 거라고!”조경순은 어찌나 화가 났는지 이미 법적으로 남남이 된 사실조차 잊은 채 예전 이혼이 무효인 것처럼 소리를 질러댔다.하민지가 바로 옆에 있는지 조경순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선명하게 전해졌다.이어서 그녀는 또다시 말을 내뱉었다.“나를 위로할 필요 없어. 네가 몰라서 그래. 그 인간은 원래 그런 쓰레기야. 평생을 그렇게 비열하게 살았다고!”하지만 조경순을 위로하고 있는 사람은 하민지가 아니었다. 하민지는 여전히 하시윤과 통화 중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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