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가면을 쓴 남편: Bab 21 - Bab 30

100 Bab

제21화

최미경은 윤해진의 눈빛에 잠시 얼이 빠졌다.“송씨 집안이 요즘 아무리 기울었다 한들 그렇다고 어찌 딸을 팔아 가문의 영광을 세우려는 겁니까!”최미경은 윤해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세상에서 가장 귀한 딸을 아껴주고 감싸주기에도 모자라는데 어떻게 팔아넘길 수 있단 말인가.만약 정말 돈과 명예만 바랐다면 처음부터 딸을 윤씨 집안에 시집보내지 않고 죽기 살기로 하씨 집안에 매달렸을 것이다.송남지는 최미경의 손을 꼭 붙잡으며 표정을 굳혔다.“아주버님,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윤해진은 문가에 서서 비웃음을 흘렸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희도 다 알잖아. 남편 잃고 다시 결혼에다 아이도 못 낳는 네 신세를 누가 반기겠어? 돈 좀 있는 늙은 졸부나 그런 여자를 데려다 체면 세우려는 거지. 멀쩡한 여자들도 다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그 늙은이들은 네 젊음을 탐하는 것뿐이야. 이걸 굳이 내가 말해야 알겠어?”말끝을 삼킨 윤해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매섭게 내뱉었다.“솔직히 말해봐. 그 늙은 자식이 송씨 가문에 얼마를 줬지? 너희 집이 돈이 필요한 건 나도 알고 있어. 액수만 말해. 내가 줄게. 그러니 제발 시집가지 마.”최미경은 결국 빗자루를 집어 들었고 윤해진을 마당 끝까지 몰아내며 이를 갈았다.순찰차가 이미 멀리 사라졌지만, 최미경의 가슴은 여전히 거칠게 오르내렸다.“참으로 윤씨 집안은 한 사람같이 미쳐 돌아가네.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지. 비록 혼인으로 맺어졌던 사이라 해도 두 집안 체면이라는 게 있잖아.”최미경은 눈가가 젖어 들었다.몇 해 전 송지환이 불의의 일을 당했을 때, 송씨 가문은 위기에 몰려 잠시나마 윤씨 집안에 손을 벌린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 빚은 이미 다 갚았다.단 한 번의 일이었을 뿐인데 윤씨 집안은 그것을 평생 주홍 글씨처럼 새겨두고 그걸 핑계 삼아 송남지를 함부로 대했다.최미경은 흐느끼며 자책했다.“남지야, 다 엄마 아빠 잘못이야. 그때 우리가 윤씨 집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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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비가 그치고 난 뒤의 서경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을 드러냈다.도심 한가운데, 가장 큰 쇼핑몰 주차장에서 기사가 조심스레 차 문을 열며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었다.손윤영은 더 서둘러 내려 허상미를 부축했다.허상미의 배는 이미 티가 나기 시작했다.보통 사람이라면 헐렁한 임부복을 입을 텐데 허상미는 오히려 배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옷만 골라 입었다.겨우 석 달 조금 넘은 배가 네댓 달은 된 듯 불러 있었다.허상미는 활짝 웃으며 시어머니를 바라봤다.“어머니, 절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면 제가 더 부담스러워요. 이렇게 비싼 쇼핑몰까지 안 오셔도 되는데요. 가격만 비싸고 가성비도 없잖아요.”입으로는 사양했지만 허상미는 마음속으로는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윤씨 가문의 돈줄은 손윤영이 쥐고 있었다.두 아들도 가문 사업을 돕고 있었지만 특히 윤해진은 원래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허상미는 본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동안 억지로 욕심 없는 척을 했고 오래 그런 연기를 하다 보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이제는 다른 부인들처럼 한정판 명품 가방을 들고 모임에 나가고 싶었다.손윤영은 시선을 허상미의 배에서 떼지 않은 채 흐뭇하게 웃었다.“어리광을 부리기는... 네가 내 귀한 손주를 품고 있는데 내가 누구보다 더 아껴야지. 오늘은 기분 좋게 쇼핑이나 하자. 의사 말도 들었잖니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건강하게 자란다고. 난 네가 매일매일 웃고 지내는 게 제일 좋아.”손윤영과 허상미는 손을 맞잡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했고 뒤에는 건장한 경호원 둘이 뒤따랐다.윤씨 가문이 이 아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지하 주차장에서 1층으로 올라오자 허상미는 곧장 H사 매장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 손윤영에게 팔이 붙잡혔다.“상미야, 좀 천천히 걸어. 네가 저렇게 서두르면 내가 다 가슴이 덜컥하네.”허상미는 다시 발을 늦추며 미소로 답했다.“어머니, 제가 기분이 좋아서 그래요. 기분 좋으면 저절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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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최미경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돈 쓸 일이 뭐가 있겠니. 어차피 이건 다 써야 할 돈이야. 쓸 땐 쓰는 게 맞지.”송남지는 엄마의 팔을 끼고 따뜻하게 웃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자마자 눈앞에 낯익은 얼굴 두 쌍이 마주쳤다.송남지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최미경의 팔을 붙잡았다.“엄마, 우리 다른 데부터 둘러봐요.”최미경 역시 손윤영과 허상미를 알아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돌아서려던 순간, 손윤영의 목소리가 먼저 날아왔다.“아니, 이게 누가 오셨나. 내 사돈 아니신가?”최미경은 예의를 지키려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사돈어른, 안녕하세요. 참 우연이네요. 쇼핑하러 오셨어요?”손윤영의 표정에는 오만이 가득했다. 마치 목을 쭉 빼고 날개를 펼친 공작새 같았다.“사돈 소리는 제가 감히 못 듣겠네요. 강현의 말로는 송남지가 곧 재혼한다던데요?”허상미는 눈길을 흘리며 모녀를 훑었다. 송남지는 순백의 원피스를 입었고 최미경은 연둣빛 치마 차림이었다. 두 사람 다 수수하기만 해 허상미 눈에는 한껏 초라해 보였다.더군다나 얼마 전 윤해진이 경찰서에 불려 간 일까지 겹쳐 송씨 집안은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웠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윤강현의 유품을 가져다주며 송남지를 위로하려 했는데 정작 송남지는 뻔뻔하게도 재혼을 준비한다니. 게다가 송씨 가문은 그걸 빌미로 출셋길을 찾는 것처럼 보였고 더 나아가 윤강현을 한밤중 괴롭혔다고 고소까지 했다.허상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씨 가문의 노인네한테서 받은 혼수 덕에 이렇게 쇼핑이나 하러 온 거겠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의외로 욕심이 많으시네요. 해진 씨가 떠나고 나니까 이제는 가식도 안 부리시네요?”송남지와 최미경이 말을 잇기도 전에 손윤영이 맞장구쳤다.“남지야, 예전에도 우리 집이 널 허투루 대한 적 없잖니.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아이는 눈앞의 푼돈에 쉽게 눈이 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참, 그동안 우리 집에서 연기하느라 고생 많았겠다.”송남지는 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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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허상미는 송남지의 말에 제대로 되받아쳐져 얼굴이 벌게지고 숨이 가빠졌다.송남지가 이미 벼랑 끝에서 체면 따위는 던져버린 사람이라 더는 주눅이 들 게 없다는 걸 허상미도 알았다. 맨발로 나선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지금 맞붙어봤자 자신이 더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허상미는 이 모욕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허상미는 곧장 눈치를 바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손윤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어머니, 송남지가 저한테 헛소리하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어머니한테까지 저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어요. 저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말하면서 일부러 배를 감싸 쥐어 아픈 듯 몸을 움츠렸다.손윤영은 원래도 강한 성격이라 사소한 일도 쉽게 넘기지 않았다. 게다가 허상미가 이렇게 기름을 부어대니 화가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그 눈빛은 과거 윤씨 가문에 있을 때 송남지가 수도 없이 마주했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 이유가 있든 없든 늘 훈계를 들어야 했고 반박은 상상도 못 했다.그때 윤해진은 늘 말했다.“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집안 살림하고 회사까지 떠맡으셨으니 강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작에 굶어 죽었어.”그 말을 믿고 송남지는 오히려 시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겼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것은 단지 성격일 뿐이었다. 강인함은 장점일지 몰라도 강압은 그저 성격일 뿐이었다.이제 송남지는 눈빛 하나조차 굽히지 않고 손윤영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손윤영은 잠시 멍해졌다.‘언제부터 이 남지가 자신을 이런 눈빛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걸까. 예전에는 나무라기만 해도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하던 아이였는데.’“집에 돌아온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본성이 드러난 거냐? 그 꼴로 어느 남자가 너를 좋아하겠니. 시어머니한테 예의도 없는 주제에... 사돈댁에서는 딸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 만하네.”그 말에 송남지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굳이 어머니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그래도 체면은 남겨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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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손윤영은 송남지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까맣게 굳어졌고 믿기지 않는 듯 눈빛으로 송남지를 살폈다. 마치 윤해진과 윤강현의 일을 송남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하려는 듯했다.송남지는 태연히 맞은편에 서서 무심한 눈으로 손윤영을 바라봤다.최미경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고 손윤영은 원래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처럼 체면이 구겨지면 분명 뒤집어엎을 기세로 나올 터였다. 그런데 의외로 손윤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허상미의 팔을 붙잡으며 억지로 너그러운 척 웃었지만 눈빛은 자꾸 흔들렸다.“그만하자. 상미야, 저런 사람들하고는 괜히 말 섞을 필요 없어. 네 뱃속 아기가 제일 소중하잖아. 이런 일로 기분 상하게 해선 안 되지.”허상미는 본래 손윤영의 화를 등에 업고 송남지를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늘 강했던 시어머니가 오늘따라 물러서는 모습에 순간 멍해졌다.‘정말 나와 뱃속의 아이를 그만큼 소중히 여겨서일까? 아니면 다른 속사정이 있는 걸까?’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손윤영은 허상미를 이끌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남겨진 최미경은 멍하니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저렇게 강한 사람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영 딴판이네.”송남지는 태연한 얼굴로 장신구 진열대를 둘러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그러게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네요.”하지만 송남지는 그 원인을 사실 다 알고 있었다. 지금 손윤영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뱃속의 손주였다. 만약 허상미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남편이 아니라 시동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터였다.계산대 앞에서 최미경은 송남지가 고른 소박한 귀걸이를 보고 마음이 짠해졌다.“남지야, 이런 건 그냥 어린애들이 아무렇게나 끼는 거잖니. 제대로 된 걸 골라야지.”송남지는 귀걸이를 들고 거울에 비춰 보며 웃었다.“엄마, 저는 이게 좋아요. 더 어려 보이잖아요.”최미경은 속으로 다 알았다. 송남지가 일부러 싼 걸 고른 건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였다.‘참... 우리 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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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송남지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최미경을 등 뒤로 감쌌다. 그러고는 매섭게 매장 직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직원분은 이 귀걸이를 살 수 있어요?”C사의 주얼리는 이름만으로도 사치품이었다. 비록 귀걸이 한 쌍일 뿐이라도 시작 가격은 수백만 원대였다.송남지의 한마디에 직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원래부터 성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오히려 더 뻔뻔스러워졌다.“저는 비록 못 사도 여기 와서 남의 시간을 뺏지는 않잖아요? 살 능력도 없으면서 왜 굳이 이런 데 들어와서 사람 귀찮게 해요? 못 살 거면 그냥 당신들 형편에 맞는 브랜드나 가서 보시지... 왜 여기서 우리 시간을 낭비하는 거죠?”최미경은 조용히 송남지의 팔을 끌어내리며 굳이 이런 사람과 엮이지 말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송남지는 엄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늘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말자는 태도였다.그러나 그런 태도로 지내다 보면 주변 사람들은 언제든 만만하게 보기 마련이었다.송남지는 물러서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또박또박 말했다.“우리가 당신 시간을 낭비했나요? 원래 당신 일이 고객을 모시는 거잖아요. 제가 뭘 사든 안 사든 가게 안에 들어온 순간 저는 고객이에요.”직원은 대놓고 눈을 굴리며 콧방귀를 뀌었다.“그만 좀 떠드세요. 고객이 왕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요. 여기서는 매출이 왕이에요. 안 살 거면 나가세요.”순간 최미경은 난처해졌다. 당장 사야 할지 그냥 돌아서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러나 송남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내가 산다고 하지 않았나요? 설령 안 산다고 해도 당신한테 우리를 쫓아낼 권리는 없어요.”직원은 입술을 삐죽이며 하늘을 향해 흰자만 잔뜩 굴렸다.팽팽한 공기가 매장 안을 짓누르고 있을 때,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불쑥 흘러나왔다.“살게요.”단 한 마디였지만, 순간 매장 안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송남지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강직함 속에 고급스러움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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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최미경은 믿기지 않는 듯 입술을 달달 떨었다.“하... 하정훈?”하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어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하지만 오랜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엔 어쩐지 부족했다.최미경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본 게 아마 20년 전이었다.그때 하정훈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나이를 뛰어넘는 성숙함이 풍겨 있었다.어린 하정훈은 잘 다려진 양복을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 음식에도 술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한눈으로만 송남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하정훈은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이름이 뭐야? 올해 몇 살이야?”그 모습이 마치 호적 조사하는 듯해 식탁에 모인 어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귀여운 송남지는 또렷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제 이름은 남지예요. 올해 여섯 살이에요!”말을 마치자마자 송남지는 손바닥을 펴 보였지만 오동통한 손가락은 다섯 개뿐이었다.하정훈은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 아래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건 다섯이야. 여섯이 아니지. 바보 같긴.”그 말을 들은 송남지는 한동안 속상해하며 입술을 삐죽였다.“남지는 바보 아니에요. 그냥 손가락 내미는 게 조금 늦었을 뿐이에요...”작은 송남지는 서러워도 울지 않고 최미경 품에 파묻혀 엉엉대며 버텼다.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20년이 흘렀다.그때 품에 안겨 칭얼대던 아이가 지금은 눈부시게 자란 것이다.그 시절을 떠올리며 최미경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더 웃긴 건 식사 자리가 끝난 뒤 하정훈이 진지한 얼굴로 송지환에게 했던 말이었다.“아버님, 저는 커서 꼭 남지랑 결혼할 거예요.”그때는 다들 어린아이의 철없는 말로만 여기고 웃어넘겼다.그런데 세월이 흘러 보니 농담 같은 말이 사실이 되어 버렸다.최미경은 하정훈의 손을 덥석 잡으며 연신 기뻐했다.“좋구나. 정훈아... 남지의 남편이라니...”그러자 송남지는 얼른 팔꿈치로 엄마를 쿡 찌르며 작은 소리로 일깨웠다.“엄마, 저랑 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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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하정훈은 곁눈질로 아까 그 무례한 직원 쪽을 스치듯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멍하니 서 있지 말고 메모지 가져와.”직원은 머리가 하얘진 채로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몸이 먼저 움직여 무의식적으로 메모지를 내밀었다.하정훈은 진열대 위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고 힘 있는 손으로 또박또박 주소를 적었다.매니저는 메모지를 받아 들고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선... 선생님, 그럼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정훈은 곧바로 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카드를 꺼내 보였다.“카드로.”그제야 매니저는 현실을 실감했다.이번 주문만으로도 매장 한 달 매출이 채워지고도 남을 규모였다.가장 얼떨떨한 건 아까 그 직원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못 살 것처럼 보였던 손님이 단숨에 매장을 통째로 사들이다니 직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송남지는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매장은 전부 여성용 보석과 장신구뿐인데 하정훈이 왜 이렇게 많이 사들인다는 건지였다.그러다 우연히 메모지에 적힌 주소가 눈에 들어왔다.너무나도 익숙한 주소였고 그곳은 바로 송씨 저택이었다.송남지는 놀란 듯 하정훈을 올려다봤다.“정훈 씨, 혹시 주소를 잘못 쓰신 거 아니에요?”하정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물었다.“송씨 가문이 이사라도 했어? 내가 몰랐군. 그럼 매니저에게 알려주시고 새 주소를 적어 줘.”송남지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이사한 건 아닌데... 이걸 전부 저한테 주시려는 건가요?”하정훈은 담담하게 눈썹을 풀며 대답했다.“그럼 내가 이걸 사서 직접 쓰겠어?”온통 반짝이는 보석이 하정훈과 어울리지 않는 건 분명했다.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큰 선물을 받을 수는 없었다.최미경은 급히 매니저에게 다가가 손사래를 쳤다.“이 주소로 보내면 절대 안 됩니다.”송남지는 하정훈에게 직접 말했다.“정훈 씨, 이건 제가 받을 수 없어요.”그러나 하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매니저에게 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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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송남지는 최미경의 팔을 붙잡고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갔다.아까 매장 매니저의 목소리가 꽤 커서 했던 말이 고스란히 귀에 들어왔다.‘사모님이라고...’그 호칭이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다.송남지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남지야,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니?”최미경이 이상하다는 듯 딸을 바라봤다.송남지는 문이 열리는 걸 보고는 서둘러 웃음을 지어 보였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최미경은 하정훈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정작 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송남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혼담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남지야, 네가 정훈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엄마가 나서서 혼약을 깨도 돼.”사실 서로 교류도 거의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최미경의 마음 한구석에는 다른 근심이 남아 있었다.송남지와 윤해진 사이에 깊은 정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윤씨 저택에서 그토록 많은 모욕을 당하고도 끝내 참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최미경은 딸이 하루빨리 과부의 슬픔에서 벗어나길 바랐지만 억지로 속도를 내는 건 언제든 화근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송남지는 생각이 멀리까지 흘러가다가 차에 올라서야 갑자기 물었다.“엄마, 그 하정훈 씨가 정말 예전 그대로예요? 저는 왜 기억이 하나도 없을까요?”최미경은 웃으며 딸을 바라봤다.“우리 딸은 뭐든 다 좋은데 기억력이 문제지. 네가 그땐 겨우 여섯 살이었잖아. 당연히 기억이 안 나는 게 정상이지.”최미경은 말을 덧붙이면서 눈가에는 장난기 어린 빛이 스쳤다.“정말 기억 안 나? 너랑 정훈이가 어릴 때 같이 밥 먹은 거?”그러자 송남지는 까만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하나도 기억 안 나요. 다만 엄마랑 아빠가 가끔 얘기하셔서 대충 아는 정도예요.”억지로 떠올려 보려 해도 송남지의 머릿속에는 아무 장면도 잡히지 않았다.최미경은 20년 전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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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허상미는 살짝 불룩해진 배를 내민 채 웃음을 띠었다.하지만 그 웃음의 진심을 아는 사람은 송남지뿐이었다. 허상미는 임신한 뒤로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외출할 때면 항상 경호원 두 명이 대동했고 방금도 축하 선물을 예식장에 내려놓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송남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맞받아쳤다.“안정기가 아니라서 많이 움직이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허상미가 이곳에서 어떤 일이라도 생기면 손윤영이 송씨 가문을 난장판으로 만들 게 뻔했다.허상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송남지를 훑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눈빛에는 호의가 하나도 없었다.“나는 남지 씨가 빨리 과부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게 정말 기뻐요. 이렇게 금방 재혼을 결심하다니... 참 잘됐어요.”허상미의 말투에서는 비꼬는 냄새가 진하게 났고 송남지는 냉정하게 웃음만 지었다. ‘과부의 상실감을 말하려면 진짜 과부가 되어야 할 텐데... 윤해진은 잘 살아 있는데 무슨 과부냐고.’그러나 송남지는 이 일을 굳이 세상에 말할 생각이 없었다. 윤해진이 저지른 일을 알고 윤씨 가문에서 깔끔히 손을 떼고 나오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모른 척하는 편이 송남지에게 더 큰 힘이 되기도 했다.허상미가 비아냥거리자 송남지는 어깨를 들썩이며 맞장구쳤다.“어쩔 수 없죠.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나도 내 삶을 살아야죠.”허상미는 주위를 힐끔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게 사는 건 좋지만 강현 씨만은 그만 좀 붙잡아요. 남지 씨가 계속 그러면 안 되잖아요.”손님을 접대하느라 바쁘던 최미경은 허상미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머니를 향해 눈짓을 보낸 송남지는 다시 허상미를 보며 이를 물었다. “제가 송씨 가문으로 돌아왔고 이제 재혼할 건데... 왜 제가 윤강현을 붙잡는다고 생각하는 거죠?”허상미는 콧방귀를 뀌며 얼굴에 남아 있던 가식적 미소를 지웠다. 그 일만 꺼내면 분노가 숨길 수 없어졌다.“네 붙잡지 않았다면 왜 강현 씨가 네 이름을 불러대겠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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