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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351 - Chapter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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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1화

오가은이 그럴수록 송남지의 마음속에서는 이상하게 죄책감이 솟구쳤다.하정훈은 일어나기 전 송남지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잠깐 사이에 그녀의 손은 무척 차가워져 있었다.떠나기 전, 하정훈이 단호하게 말했다.“걱정 마. 남지야.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푹 쉬고만 있어. 계속 불편하면 호출 벨 눌러서 의사 부르고.”송남지는 원래 마음이 불안했지만, 하정훈의 단단한 눈빛과 마주치자 이상하게 마음을 휘젓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병실 밖.오가은은 여전히 하종현과 상의 중이었다.“여보, 난 이 병원 격이 영 맘에 안 드네. 당장 내일 서경 최고의 산모 케어 센터로 옮겨요. 우리 남지한테는 그 정도는 해줘야지!”하정훈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여전히 들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아빠, 엄마, 미란 이모한테 뭐라고 들으신 거예요?”대화가 끊긴 오가은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먼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남지처럼 귀한 애를 어떻게 이런 병원에 데려올 생각을 하니?”하정훈은 어이가 없었다. 이곳은 이미 서경에서 가장 수준 높고 권위 있는 병원이었다.오가은은 투덜거린 후에야 기억을 더듬었다.“미란이가 그러더라. 남지가 요즘 생리가 늦어진다고, 그리고 네가 아침부터 병원에 검사받으러 갔다고. 그 뒤는 너무 기뻐서 제대로 듣지도 못했어!”하종현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이제 맨날 손주 자랑하는 영감탱이들 하나도 안 부럽다! 나도 이제 손주 업어 키울 일만 남았어!”하정훈의 찌푸린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아빠, 엄마, 남지 임신 아니에요.”그 짧은 한마디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두 사람의 귓가에 내리꽂혔다.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그 말은 하종현과 오가은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하정훈은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최근 남지의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아 혹시 하는 마음에 병원에 와서 검사한 거예요. 미란 이모가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마지막으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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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2화

조용한 병실 안.송남지가 고개를 들자 오가은이 혼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그간 송남지가 보아온 오가은은 성공한 기성세대 특유의 여유와 고고함, 그리고 너그러운 품위를 잃지 않는 이였다. 언제나 흠잡을 데 없는 옷차림과 흐트러짐 없는 용모를 고수하던 그녀였지만 오늘, 송남지는 그녀의 얼굴에서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실망과 비통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읽어냈다.송남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마침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통증은 이 허망한 소동이 결국 철두철미한 웃음거리일 뿐이라고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그녀의 무력감은 이 순간 약간의 좌절감으로 변해 표정에까지 드러났다.하지만 어른 앞에서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그녀는 서둘러 마음을 다잡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오가은을 바라보았다.“어머니, 왜 혼자 들어오셨어요?”오가은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저 두 부자는 회사 얘기로 할 말이 많은가 봐. 나는 정훈이한테 지분을 다 넘겨주던 날 말했어. 앞으로 회사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가은과 단둘이 한 방에 있는 것은 사실 꽤나 숨 막히는 일이었다.특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겪은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오가은은 송남지가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챈 듯 평소라면 절대 내비치지 않았을 만큼, 한없이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오가은은 가져온 보양식들을 풀기 시작했다.송남지가 입을 열었다.“어머니, 정훈 씨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그녀는 임신하지 않았고 임산부도 아니니 이건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오가은은 그저 웃으며 값비싼 보양식 포장을 계속 뜯었다.“이런 보양식이 어디 임산부 전용이라고 쓰여있기라도 하니? 남지야, 너도 이제부터 이런 거 끊지 말고 챙겨 먹어. 여자 몸엔 이게 최고야. 네 몸부터 챙기는 게 최우선이라고, 알겠지?”송남지는 순간 멍해졌다.그녀는 이 일이 터지고 나면 오가은이 크게 실망해서 자기와는 말도 섞기 싫어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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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3화

송남지는 젖은 눈을 깜빡였다.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정훈 씨가 정말 그랬나요? 아이는 필요 없고 저만 있으면 된다고.”오가은이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그럼, 그렇고말고. 그 고집불통인 녀석이 오직 너 하나만 바라보잖아. 어릴 때부터 그랬어, 한 번 꽂히면 앞뒤 안 가리고 그것만 아는 녀석이거든.”‘내가 정말 하정훈이 일편단심으로 바라보는 유일한 사람인 걸까.’심장 부근이 몽글몽글하게 달아올랐다.오가은은 송남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보낸 선물은 사인했어? 정훈이가 갤러리 이름을 재스민이라고 붙였더라고. 내가 핀잔을 좀 줬지. 이제 네 건데 왜 지가 나서서 이름을 짓느냐고, 네 마음에 안 들어도 거절 못 하면 어쩌냐고 말이야.”“어머니, 저 마음에 들어요.”송남지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직접 이름을 지었더라도 아마 똑같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재스민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때가 바로 그림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고 확신한 시점이었으니까.“다만 갤러리에 아직 가보질 못해서요...”원래는 오늘 가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괜찮다. 몸도 안 좋은데 며칠 뒤에 가면 어떠니. 그리고 남지야, 시내 한복판 최고급 갤러리라 시작이 좀 거창해 보일 순 있지만, 그냥 타고난 재벌 2세라고 생각하렴. 돈 좀 까먹으면 어떠니? 그저 네가 행복해지는 일을 하렴. 그거면 충분하단다.”송남지는 평생 부모님 말씀 한번 거역해 본 적 없는 모범생으로 살았다.그런 그녀가 스물 중반을 넘긴 나이에 시댁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금수저’로 거듭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가은이 아낌없는 배려를 건넸지만 송남지는 그저 흥청망청 돈이나 축내는 한량으로 남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송남지는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어머니, 이건 두 분이 정성과 거금을 들여 제게 주신 선물이잖아요. 갤러리가 두 분의 고혈을 짜내는 곳이 되게 하진 않을 거예요. 이 선물을 받은 이상,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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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4화

서경의 가을이 깊어갔다.노랗게 물든 낙엽이 도심 곳곳을 수놓았다.재스민 갤러리 외벽 너머로 늦가을의 화사한 황금빛이 일렁였다.급격히 떨어진 기온에 송남지는 서둘러 트렌치코트를 챙겨 입었다.가을바람이 스치자 그녀는 코트 깃을 단단히 여몄다.사계절 중 남지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바로 이 깊어가는 가을이었다.여름의 불쾌한 더위가 가시고 아직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찾아오지 않은 화려하고도 짙은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옷깃을 여미며 느껴지는 그 특유의 온기가 그녀는 무척이나 아늑했다.재스민의 안면 인식기가 그녀를 확인하자 띵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문이 매끄럽게 열렸다.내일 있을 개관식을 준비하느라 송남지는 할 일이 산더미였다.갤러리 안은 온통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그때 하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미란 이모가 그러는데 갤러리 나갔다며? 몸도 안 좋다면서 거긴 왜 간 거야?”수화기 너머 하정훈의 목소리엔 옅은 타박이 섞여 있었다.송남지는 비뚤게 걸린 그림을 바로잡으라고 인부들에게 지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내일이 개관인데 당연히 와서 준비 상황을 체크해야죠.”주인이 되어서 나 몰라라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수화기 너머 하정훈의 말투는 여전히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했다.“일 끝나면 데리러 갈까?”송남지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단아한 시계는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아니요, 차 가지고 왔어요. 일 마치고 직접 운전해서 갈게요.”전화기 너머로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에야 그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뗐다.“그래,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말고 일찍 돌아와. 집에서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하정훈은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으로 거실을 서성였다.이미란조차 보다 못해 한마디 거들었다.“도련님, 회사에서 막 돌아오셨으니 좀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며 쉬세요. 사모님께는 업계 최고의 팀까지 붙여주셨잖아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이미란의 설득에 하정훈은 겨우 자리에 앉았지만 눈앞의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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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5화

하정훈이 그 사실을 잊었을 리 없었다. 그는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짐짓 고집을 피웠다.“갤러리 일에 참견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남지가 제때 밥이나 챙겨 먹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거든요.”이미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제때 밥 먹는 게 요즘 세상에 무슨 대수라고요. 배달 앱만 켜면 금방 오는데. 아무리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밥 주문할 시간은 있겠죠. 21세기에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하정훈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송남지의 갤러리에 찾아갈 명분을 더는 찾을 수 없게 된 그는 결국 멋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녁 준비는 됐어요. 남지 돌아오면 같이 먹을게요.”한편 갤러리에서는 송남지가 아트 디렉터와 내일 있을 개관식 명단을 검토 중이었다.아트 디렉터가 제안한 명단을 보며 송남지는 곤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이 명단에 있는 분들은 현재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급의 인물들이 아니잖아요.”명단 속의 임소훈은 송남지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나머지 사람들은 임소훈보다도 인지도가 높고 명성 또한 쟁쟁했다.송남지는 지금의 재스민이 그들을 초대할 역량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사실 이 갤러리의 아트 디렉터 겸 큐레이터는 하정훈이 인맥을 동원해 다른 일류 갤러리에서 공들여 스카우트해 온 인재였다.그녀의 이름은 민지현, 이번에 민지현은 자신의 전문 팀까지 이끌고 이곳에 합류했다.하정훈이 그녀와 팀원 모두가 만족할 만한 파격적인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사모님, 이분들을 초청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요?”하정훈이라는 이름 석 자만 내세워도 서경 최고의 권력자인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거절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사모님이라는 호칭 하나에 송남지는 민지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간파했다.하정훈의 위세를 빌려 그의 아내라는 명분으로 미술계 대가들을 움직이겠다는 심산이었다.송남지는 별다른 말 없이 펜을 들어 뚜껑을 열더니, 몇몇 거물들의 이름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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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6화

사무실 안.민지현은 명단을 손에 쥔 채 눈썹을 까딱이며 혀를 찼다.“내일 나랑 커피 내기할 사람 있어?”오랜 시간 발을 맞춰온 팀원들 사이의 분위기는 무척 가벼웠다.내기라는 말에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물었다.“무슨 내기인데요?”민지현은 송남지가 수정한 명단을 팀원들에게 내밀었다.“송 관장님이 내일 어떤 자리든 격을 높여줄 거장을 모셔오겠다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리스트 외에 더 대단한 사람이 누가 있나 싶어서 말이야.”민지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관장님은 이쪽 바닥 생리를 너무 모르시는 거 아니에요? 관장님이 말하는 그 대단한 거장이라는 게 어디 이름도 못 내미는 피라미일까 봐 걱정이네요.”뼈 때리는 말이었지만 틀린 구석 하나 없었다.“전 내일 송 관장님이 모셔올 ‘거장’이라는 분, 분명 듣보잡 뜨내기일 거라는데 걸게요!”“저도요!”“저도!”민지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결국 내가 내 무덤을 판 꼴인가? 어디 보자, 대체 몇 명이나 되나.”쓱 훑어보니 팀원 전원이 송남지가 대단한 인물을 데려오지 못할 거라는 쪽에 배팅한 상태였다.민지현은 체념한 듯 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됐다, 실장 노릇 하면서 커피 한잔 사는 게 뭐 대수라고. 소영아, 내일 출근할 때 커피 여덟 잔 사와.”갤러리 업무를 마칠 때쯤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송남지는 서둘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탄 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리고 카톡에서 류 교수님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대화창을 열자 마지막 메시지는 무려 4년 전에서 멈춰 있었다.윤해진과 결혼할 당시 류 교수를 초대하며 보냈던 초청장이 마지막 대화였다.하지만 류 교수의 답장은 없었다.메시지에 찍힌 날짜를 바라보는 송남지의 마음이 초조하게 일렁였다.당시 그가 국내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보낸 초청장이었다. 해외에 있다는 핑계로 정중히 거절이라도 해주길 바랐던 그녀의 기대는 묵묵부답으로 돌아왔었다.한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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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7화

수화기 너머에서 당혹스러운 침묵이 흘렀다.“사모님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림까지 포기하고 시집가서 뒷바라지하며 그 고생을 다 하더니, 그 배은망덕한 놈이 너를 차버리기라도 한 거야?”송남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그 사람을 찬 거예요.”그 말을 듣자마자 괴팍한 노인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그것참 경사로다! 내 진즉에 말했지, 너희 둘은 끝까지 못 갈 거라고!”송남지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교수님 말씀대로 됐네요.”경사라고는 하나 그 이면엔 아픈 사연이 깔려 있는 법이다.류무영이 성격은 괴팍할지언정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는 더 이상 송남지를 몰아세우지 않고 화제를 돌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 이 괴팍한 늙은이한테 전화는 왜 한 거냐?”송남지는 입술을 살짝 달싹이며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교수님, 제 갤러리가 내일 개관식을 하는데 교수님을 커팅식의 주인공으로 모시고 싶어서요.”“갤러리라고?”류무영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당혹감, 그리고 아주 희미한 대견함이 섞여 있었다.“네 갤러리라니. 매일 국이나 끓이는 게 지겨워져서 이제 다시 예술이라도 하겠다는 게냐?”송남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하지만 류무영은 송남지의 이런 성격을 오히려 아꼈다. 주변에 워낙 말만 번드르르한 인간들이 넘쳐나다 보니, 바위처럼 묵묵한 송남지의 태도가 유독 진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커팅식이라니, 이 늙은이가 가위 하나 제대로 못 쥘까 봐 겁나지도 않니?”류무영의 농담 섞인 핀잔에 송남지의 입가에도 그제야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교수님, 저 작년에 교수님 작품전 다녀왔거든요. 교수님의 필력과 기세라면 가위로 리본을 자르는 건 물론이고 호랑이도 때려잡으실 수 있을 것 같던데요.”수화기 너머로 류무영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호랑이 잡는 건 관두자꾸나. 보호종이라 불법적인 일은 안 하련다. 하지만 네 갤러리 커팅식이라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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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8화

통화가 끝나자 류무영은 윤이 나는 값비싼 지팡이를 짚으며 입을 뗐다.“유미야, 내 짐 좀 챙겨주고 가장 빨리 귀국할 수 있는 항공권도 알아봐 줘.”온유미는 시간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선생님, 지금 라쿠 시간으로 밤 11시인데 서경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요?”류무영은 이미 라쿠에 정착한 지 몇 년이나 지났고 자식도 없는 데다 이 나이에 모실 어른도 없으니 국내에는 이미 미련을 둘 곳이 없었다.그런 그가 갑자기 귀국하겠다고 하니 분명 중요하고도 긴박한 일임이 틀림없었다.류무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급하지, 아주 급하고말고. 내 아끼는 제자가 갤러리를 연다는데 내가 가서 커팅식을 해줘야 돼.”말을 마친 류무영은 자신의 주름진 손을 들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풍파를 견뎌온 이 손에 커팅할 때만큼은 더 힘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온유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짐을 챙기며 말했다.“혹시 임소훈 씨 갤러리가 오픈하는 건가요? 에휴, 그 제자분도 참 너무하시네요. 선생님 연세도 있으신데 이 고생을 시키다니. 그분 인맥이면 업계 거물들을 얼마든지 부를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류무영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소훈이 아니야.”류무영이 말을 멈추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호화로운 별장의 밝은 조명이 노인의 세월을 가감 없이 비추고 있었지만 오늘 밤 그의 기색은 그 어느 때보다 정정해 보였다.“됐다, 유미야, 더 묻지 마라. 벌써 11시가 넘었는데 이러다간 정말 비행기를 놓치겠다.”온유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선생님, 이 시간엔 괜찮은 항공편이 없을 텐데요. 일등석이라 해도 불편하실 거고요. 게다가 연세도 있으신데 심야 비행기를 타고 가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바로 커팅식에 가신다면...”류무영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면 그 누구도 이 노신사에게 심야 국제선을 타고 쉬지도 못한 채 바로 행사장으로 오라고 강요할 배짱은 없었다.도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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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9화

류무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유미야, 내 나이엔 욕심도 욕망도 다 부질없는 거란다. 네가 워낙 막무가내라 곁에 두긴 했다만... 이만하고 짐 다 쌌으면 차 시동이나 걸고 있거라. 나는 수장고에 들러서 내 제자에게 줄 선물 좀 챙겨야겠다.”온유미는 수장고로 향하는 류무영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수장고 안에 있는 물건은 하나같이 버릴 것 없는 값진 보물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 가치를 알기에 본능적인 경계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송남지가 저택으로 돌아온 건 밤이 깊어서였다.뜻밖에도 거실에는 여전히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하정훈이 상석 소파에 앉아 있었고 위에서 쏟아지는 조명 빛이 경제 뉴스를 시청하는 그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완벽한 윤곽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었다.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하정훈의 눈동자가 송남지를 발견하자마자 은은하게 빛났다.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왜 이렇게 늦었어?”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송남지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그러고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미란 이모, 밥상 차려주세요.”주방에서 얼굴을 내민 이미란이 송남지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사모님, 도련님이 사모님 안 오신다고 식사도 거르고 기다리셨어요.”송남지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아직 저녁 전이세요?”하정훈은 먼저 송남지의 의자를 빼준 뒤 곁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응, 별로 입맛이 없어서.”사실은 송남지가 없으니 밥 먹을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음식이 차려지자 하정훈이 넌지시 운을 뗐다.“민 실장한테 연락 왔어. 내일 커팅식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던데.”그의 말뜻은 명확했다.송남지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그녀의 눈빛 하나, 몸짓 하나, 혹은 아주 작은 한마디만 있어도 그는 당장이라도 내일 행사에 올 귀빈들을 직접 섭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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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0화

깊은 밤.잠든 송남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하정훈은 발코니로 나가 민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이 섭외한 게스트가 누군지 알아냈어요?”늦은 밤, 하정훈의 전화를 받은 민지현은 얼떨떨했다.임소훈의 추천으로 연이 닿은 이 거물이 이토록 지극정성일 줄이야.사실 그녀는 하씨 가문에서 송남지의 취미 생활을 위해 적당히 적자나 면할 정도의 놀이터를 만들어준 거라 짐작했었다.취미 삼아 운영하기엔 갤러리만큼 우아하고 적당한 투자처도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하정훈의 태도는 예상외로 진지했다. “관장님께서 게스트 명단을 비밀에 부치셔서 아직 확인된 정보가 없습니다.”명확한 리스트가 없다는 말에 정훈의 미간이 좁아졌다.내일 정오에 열릴 커팅식은 송남지의 미술계 데뷔를 결정지을 중대한 승부처였다.이 데뷔전이 화려하게 빛나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녀가 걸어갈 길은 가시밭길이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하정훈은 믿음과 걱정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으면서도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봐 마음이 쓰였다.몇 초 뒤, 전화를 끊은 하정훈은 곧장 임소훈에게 연락을 취했다.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어 발이 넓은 그라면 무언가 실마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임소훈은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하 대표, 게스트 쪽은 내가 움직여볼까? 서경에 마침 괜찮은 작가들이 몇 분 와 있는데, 늦긴 했어도 내 부탁이면 거절 안 할 거야.”하정훈은 고개를 돌려 넓고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깊이 잠든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창가로 스며든 달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조용히 비추는 정적이고도 따스한 밤이었다.하정훈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게 가라앉았다.“소훈아, 남지 쪽에서 이미 게스트 섭외를 끝냈대. 대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커팅식에 참여할 예비 인원을 한 명만 더 컨택해줘. 다만 그분께는 상황에 따라 참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분명히 전달해놓고.”임소훈은 역시 영리한 사람이었다.“알았어. 대기 인원을 섭외하라는 말이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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