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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361 - Chapter 370

390 Chapters

제361화

그 말에 임소훈은 황송할 따름이었다.천하의 하정훈이 이토록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심지어 자신을 낮추며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임소훈은 너무 놀라 멍해진 나머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내 신분과 명성은 모두 네가 이끌어준 덕분이잖아.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발 벗고 나설게.”하정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임소훈을 키워줬던 건 그저 마음속 깊이 남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고 그를 통해 미술계에서 여전히 활동 중인 송남지를 상상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요긴하게 써먹을 날이 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어둠이 한층 짙게 깔렸다.하정훈은 발코니에 앉아 깊어가는 가을의 냉기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깊어가는 가을바람은 특유의 서늘함을 머금은 채 낙엽 냄새를 실어와 하정훈의 코끝을 스쳤다.사실 그는 지난 몇 년간 이맘때의 가을을 몹시 싫어했다.송남지와 윤해진의 결혼식이 바로 이 계절에 치러졌기 때문이었다.당시 그는 북유럽으로 도망치듯 떠났었다.그저 멀리,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아주 멀리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오로라가 가득한 길을 걸으면서도 그 어떤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때부터 그가 가장 혐오하는 계절은 만추가 되었다.하지만 올해는 그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적어도 지금처럼 밤공기를 마시며 옆얼굴을 스치는 찬 바람을 느끼고 침대에 누운 그녀를 바라보며 누구도 뺏을 수 없는 평온과 안락을 누릴 수 있으니까.다만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침대 위에서 그녀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송남지는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한 팔로 침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 졸음 가득한 눈을 비비며 발코니에 앉은 하정훈을 보았다.“아직 안 자요?”한밤중에 잠에서 깬 송남지는 옆자리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자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하정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가 송남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송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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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하정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송남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댔다. 곧 낮게 가라앉은 은밀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네 생각에는?”송남지는 귓가에서 시작된 찌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간지러운 기분에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하정훈은 그대로 그녀를 푹신한 침대 위로 눌러버렸다.무게감에 움푹 들어간 침대 시트 위로 두 사람의 신체가 묘한 곡선을 그리며 뒤섞였다.하정훈의 공세는 거침없고 노련했다.그간의 시간 동안 그는 이미 송남지의 몸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다.그가 의도한 리듬에 말려든 송남지는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백기를 들었다. 힘이 다 빠진 쉰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더는 안 되겠어요...”“벌써? 이제 시작인데.”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정훈은 다시 그녀를 집어삼킬 듯 몰아붙였다.곧바로 다시 시작된 공세는 새벽을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하정훈은 달콤한 여운 속에서 본능적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흔적을 남기려 했다. 그러자 송남지가 힘겹게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안 돼요, 내일...”그 말 한마디에 하정훈은 아쉬운 듯 곧장 타깃을 바꿨다.송남지가 고개를 숙이자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하정훈의 짙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다시금 몽롱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송남지는 상기된 얼굴로 하정훈의 화려한 ‘스킬’에 내심 경악했다.낙인찍기 작업을 끝낸 하정훈은 제 결과물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모양도 색깔도 아주 완벽했다.몸은 땀으로 끈적거렸고 체력은 방전된 상태였다.송남지는 샤워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 하정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처럼 그가 자신을 안아다 씻겨줄 줄 알았건만 평소 결벽증 수준으로 청결을 따지던 하정훈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송남지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안 씻어요?”하정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씻어.”그녀가 다시 물었다.“안 씻으면 찝찝할 텐데.”하정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난 이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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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가끔 그들과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나누는 게 전부였고 직원들은 다시 묵묵히 옷을 다듬는 일에 매진하곤 했다.송남지는 처음엔 하정훈에게 이런 과한 대우는 필요 없다고 말할까 고민했다.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그들은 연인이 아닌 부부였고 하씨 가문 사모님으로 불리는 이상 그녀는 곧 하정훈의 얼굴이자 명함이나 다름없었으니까.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하정훈의 재력에 비하면 드레스룸을 채우는 비용 따위는 그저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스타일링 팀에게 몸을 맡긴 채 예술 작품처럼 다듬어지는 30분 동안에도 송남지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오늘 행사의 성패는 전적으로 류무영의 참석 여부에 달려 있었기에 그녀는 류 교수의 일정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송남지는 카톡 창을 열어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교수님,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셨나요? 서경 공항에 대기 인원을 보내두었으니 언제든 연락 부탁드립니다.]오늘 아침 확인한 항공편 정보대로라면 라쿠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진작 서경 공항에 착륙했어야 할 시간이었다.이내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음성메시지였다.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송남지 씨 안녕하세요. 선생님과 저는 방금 서경 공항에 도착했어요. 보내주신 마중객들도 만났고요. 다만 선생님 건강 상태를 고려해 병원에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메시지를 확인한 송남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오늘 커팅식을 망치는 건 사소한 문제였다. 진짜 두려운 것은 교수님의 안위였다. 다만 제 욕심에 못 이겨 노령의 스승을 심야 비행기로 모셔왔는데, 만에 하나 건강에 탈이라도 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송남지의 몫이었다.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던 찰나, 다시 메시지가 왔다.“송남지 씨, 선생님 같은 어르신을 심야 비행기로 모셔다 휴식도 없이 행사장으로 굴리는 건 예의가 아니죠. 참 대단한 배짱이시네요.”단숨에 내뱉는 가시 돋친 목소리에 송남지는 교수님과 같이 온 분이 화가 났음을 눈치챘다.송남지는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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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송남지는 몇 번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통화가 끝나고 환하게 켜진 화면에는 하정훈의 번호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방금 전 병원 수배를 위해 하정훈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려던 참이었다.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엷은 미소를 지었다.‘언제부터 하정훈에게 이토록 의지하게 된 걸까.’이런 의존심은 그녀의 마음속에 달콤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자아냈다. 하정훈에게 기대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믿었던 산이 무너지고 믿었던 사람이 떠난다는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만약 나의 이런 의존이 하정훈을 지치게 한다면 그 사람도 언젠가 떠나버리지 않을까?’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스타일링 팀이 그녀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모두 완성했다.스타일링 팀원들이 그녀를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사모님은 정말이지 톱스타 엄가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세요.”스타일링 팀의 극찬에도 송남지는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려니 넘겼다.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눈동자에는 말로 다 못 할 영롱함이 맺혀 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서려 있었다.연한 화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른 아침의 가장 부드러운 햇살을 얼굴에 녹여낸 듯한 느낌이었다.가루 날림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는 형광빛처럼 맑은 광채를 뿜어냈고 두 볼에 스친 선홍빛은 본래의 건강한 혈색인 양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인위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한 달빛 아래 빛나는 진주처럼 청아하고 독보적인 아름다움이었다.과연 톱스타 엄가을의 전담팀다운 탁월한 감각이었다.그녀가 무심코 지은 미소는 사람을 홀릴 만큼 치명적이었으나 정작 송남지는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팀원들이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할 때, 청력이 좋았던 송남지의 귀에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재벌가에 입성하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역시 미모가 받쳐줘야 하나 봐. 사모님 미모 좀 봐, 저 정도면 재벌가 프리패스권이나 다름없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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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차를 발견하자마자 송남지는 오늘 신은 높은 하이힐도 잊은 채 차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급한 마음에 발이 엉켜 휘청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차 안에서 온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그녀는 송남지라는 인물에 대해 검색 중이었다.발달한 네트워크 덕분에 온유미는 송남지에 관한 정보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반달 동물원의 벽화 한 점으로 SNS에서 화제가 된 천재 소녀 화가.온유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요즘 SNS 스타들이 이렇게 돈을 잘 버나? 고작 그사이에 서경 시내 중심가에 갤러리를 오픈할 정도라고?’온유미는 마음속으로 이 갤러리의 수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기껏해야 2층짜리 작은 건물에 그림 몇 점 걸어둔 수준일 것이다.온유미의 시선이 발치에 놓인 금고로 향했다.‘쯧쯧, 이런 구멍가게 같은 화랑이 정말 선생님의 이 작품을 감당할 자격이나 있을까?’온유미가 눈썹을 치켜올린 그때, 뒷좌석 차창이 가볍게 똑똑 울렸다.고개를 들자 창밖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프라이버시 필름이 붙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마치 빈티지 필터가 씌워진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짙은 선팅이라는 필터를 거쳐 온유미의 시야에 들어온 그 얼굴은 가히 완벽했다.마치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대스타를 마주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정교하게 빚어낸 성형 미인들이 흔해진 요즘이기에, 세월의 결을 간직한 그녀의 천연스러운 미모는 외려 경이롭기까지 했다.차창에 바짝 다가선 그 얼굴을 보며 온유미는 내심 오늘 행사에 초대된 연예인일 거라 짐작했다.이 갤러리가 홍보에 돈 좀 썼나 보다고 생각하던 찰나, 류무영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에 그 짐작은 산산조각 났다.“남지야.”그녀는 게스트가 아니라 오늘 행사의 진짜 주인공이자 재스민 갤러리의 관장인 송남지였다.온유미는 당황해서 굳어버릴 뻔한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너스레를 떨었다.“선생님, 제자가 이렇게 경국지색이라는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류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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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송남지의 시선이 온유미에게 머물렀다. 아까 메시지로 목소리를 들려준 바로 그 여인이었다.류무영이 허물없이 웃으며 소개했다.“남지야, 이쪽은 네 사모님이란다.”송남지는 두 사람의 상당한 나이 차이에 당황했지만 예의를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며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놀라움을 삼켰다.송남지는 깍듯한 태도로 온유미에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안녕하세요. 제 생각이 짧아 교수님과 사모님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꼭 갚겠습니다.”온유미는 미소로 화답했다. 왜 류무영이 이 제자를 그토록 아끼는지 단번에 알 것 같았다.아까 음성메시지로 대놓고 곤란하게 만들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겸손하게 예우를 갖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온유미가 보기에 송남지는 사회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외모 또한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새벽이슬을 머금은 채 자극적이지 않은 향기를 내뿜는 치자꽃 같다고 할까.서경 미대의 수재였다는 소문대로 실력까지 출중할 테니 류무영이 편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온유미 본인도 묘한 경쟁심만 없었더라면 송남지라는 사람을 아주 좋아했을 터였다.“은혜라니요, 저희는 그저 교수님과 오랜만에 고국 나들이 온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대답을 마친 온유미가 류무영을 만류했다.“선생님, 오늘 개관식이라 남지 씨도 바쁠 텐데 금고 속 물건은 나중에 천천히 보시죠.”하지만 류무영은 워낙 고집이 세고 독불장군 같은 면이 있었다.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로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나중에 보면 선물의 선도가 떨어지거든.”류무영이 완강하게 버티자 온유미도 더는 고집을 꺾지 못하고 차 문을 열어 뒷좌석에 둔 금고를 꺼냈다.송남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교수님, 설마 라쿠에서 저 주시려고 싱싱한 생물 특산물이라도 공수해 오신 거예요?”온유미가 건넨 금고를 받아 든 류무영이 허허 웃었다.“라쿠엔 딱히 신선한 게 없어. 오염도 심해서 여기 것만 못해.”말을 마친 류무영이 금고를 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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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류무영은 표정을 굳히고 송남지를 쏘아보며 위엄 있게 말했다.“스승이 주는 건데 거절이 말이 돼? 너도 공짜로 받는 게 아니잖아. 너도 내가 그토록 탐내던 유화를 내게 주기로 했잖아.”송남지는 눈앞의 그림에 압도되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교수님, 제 그림이 어떻게 온권임 선생님의 작품과 비견될 수 있겠어요?”온권임이 누구인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가이자, 그의 작품가는 15세기나 16세기 대가들의 진품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송남지가 계속 거절하자 류무영의 안색이 금세 나빠졌다.“왜 비교가 안 된다는 게냐? 온권임은 내 친구고 너는 내 제자다. 이 그림은 그가 생전에 내게 준 것이니, 내가 이것을 네 그림과 바꾼다면 딱 맞는 게 아니겠어?”류무영이 정말 화를 내려 하자 온유미가 급히 송남지를 말렸다.“남지 씨, 선생님이 주시는 건 그만큼 아끼신다는 뜻이니까 선생님 얼굴을 봐서라도 얼른 받아요. 뒤에 행사도 있는데 지체하면 안 되잖아요.”류무영의 서슬 퍼런 기세에 송남지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금고를 받아 들었다.송남지가 마침내 선물을 받아들자 류무영의 안색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투덜거렸다.“이 그림을 다른 놈에게 줬어 봐라. 좋아서 자지러졌을 게다. 그런데 너란 녀석은 어찌 된 게 이렇게 밀어내기만 하는 거야? 참으로 복을 발로 차는 고약한 계집이야.”비난보다는 애지중지하는 제자를 향한 애정이 묻어나는 투정이었다.재스민 갤러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 류무영의 등장은 현장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류무영은 온권임과 동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답게 그 영향력이 막강했다.특히 최근 몇 년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 그의 등장에 갤러리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쏟아지는 인파에 송남지와 온유미는 구석으로 밀려났고 서로 서먹한 사이인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먼저 침묵을 깬 것은 온유미였다. 그녀는 송남지가 든 금고를 힐끗 보며 입을 뗐다.“남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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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한편 하정훈은 오전 회의를 미루고 임소훈과 함께 갤러리를 찾았다.귀빈석에 앉아 검은 마스크를 쓴 그의 모습은 고귀하면서도 신비로웠다.그 옆의 임소훈 역시 업계의 거물이었으나, 하정훈의 압도적인 분위기 앞에서는 평범해 보일 정도였다.임소훈은 사람들이 하정훈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주변의 아부 섞인 인사들을 모두 물리쳤다.그때 갤러리 안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하자 임소훈이 깜짝 놀라며 농담을 던졌다.“남지 씨가 아이돌 스타라도 부른 건가?”평소 조용하던 업계 사람들이 이 정도로 동요할 만한 인물은 인기 연예인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안쪽을 살폈다. 몰려든 인파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남지가 아이돌이라도 불렀나?”노이즈 마케팅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송남지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하정훈이 아는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고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가 채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 인기 아이돌이나 연예인을 앞세우는 식의 편법은 그녀의 사전엔 없는 선택지였다.하정훈은 송남지의 그런 고집스러운 강단과 열정을 좋아했다.임소훈이 목을 길게 빼고 살펴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그사이 민지현은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인파에 둘러싸여 송남지를 찾지 못한 데다 전화도 안 받으니 결국 하정훈을 찾아온 것이었다.민지현은 들고 있던 커피를 비서에게 넘기고 허리를 숙인 채 하정훈에게 달려와 귓속말을 건넸다.“하 대표님, 커팅식 시작까지 30분도 안 남았는데 아직 관장님과 연락이 안 됩니다.”여유롭던 하정훈의 눈매가 서서히 좁아졌다.지각은 송남지의 사전에 없는 단어였기에 혹시 게스트 섭외에 문제가 생겨 뒷수습을 하느라 늦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하정훈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급해하지 마세요. 다 생각이 있을 테니까.”하지만 민지현은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이미 현장을 가득 메운 취재진과 카메라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중계까지 진행되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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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커팅식요? 선생님이 재스민 갤러리의 커팅식 게스트라고요?”“재스민에서 류무영 선생님을 모셔왔단 말인가요?”업계의 젊은 관계자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절필하신 지 한참 된 류무영 선생님을 게스트로 불렀다니, 이건 돌아가신 온권임 선생을 부활시킨 거나 다름없는 일 아닌가요?”그 말을 들은 류무영이 호탕하게 웃으며 청년을 가리켰다.“틀렸네, 틀렸어!”화가 난 줄 알고 모두가 긴장한 찰나, 류무영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여기 온 건 권임이를 부활시키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지. 그 녀석의 산수화를 직접 들고 왔거든.”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모든 경매사가 탐내는 온권임 선생님의 산수화를 류무영 선생님이 직접 가져왔다니. 그럼 오늘 재스민 갤러리에서 그 귀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건가요?”류무영은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평소 괴팍하고 말수 적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오늘은 작정한 듯 입담을 과시했다. “글쎄,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재스민 관장한테 달린 문제지. 난 이미 그림끼리 맞바꾸는 조건으로 관장에게 그 녀석의 산수화를 줘버렸네.”“그림을 맞바꿨다고요? 대체 선생님의 눈에 든 그 그림이 무엇인가요?”그게 어떤 그림이든, 온권임 선생님의 산수화와 나란히 놓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명작임에 틀림없었다.류무영이 하얀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당연히 재스민 관장이 직접 그린 작품이지.”그 순간 모든 시선이 송남지에게 꽂혔다.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신예 화가가 거장 온권임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상황에 송남지는 몸 둘 바를 몰랐다.교수님이 자신을 밀어주려 애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왕관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웠다.송남지는 겸손하게 손사래를 쳤다.“교수님께서 저를 너무 아껴주시는 바람에 재스민 개관 선물로 그림도 주시고 커팅식까지 와주신 거예요. 제 마음이 무거울까 봐 억지로 제 그림을 받아 가신 거니 다들 오해하지 마세요.”정중하게 사실을 바로잡은 송남지는 온유미와 함께 인파를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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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민지현은 순간 멍해졌다.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머릿속으로 류무영이 대체 누구인지 한참을 뒤졌다.사람은 누구나 첫인상의 한계에 갇히기 마련이다.민지현은 송남지가 초대한 사람이 자신처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 인사이거나, 도저히 행사의 격을 살릴 수 없는 수준일 거라 확신했다.혹은 그녀가 짐작한 대로 그저 화제성만 노린 인기 연예인 정도로 꼼수를 부렸을 거라 여겼을 뿐이다.은퇴한 지 오래된 업계의 전설, 그 거물을 송남지가 불러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류... 류무영 선생님 말씀이세요?”송남지의 대답은 단호했다.“네, 류무영 선생님이요.”하지만 송남지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민지현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는 멍한 표정으로 팀원들을 돌아보았다.귀빈실로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뒤따라오는 팀원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다들 나중에 나한테 커피값 7천 원씩 입금해. 그리고 각오해. 다음 주부터 매일 아침 나한테 커피 한 잔씩 대령하는 거야.”팀원들은 민지현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뒤를 쫓았다.“네? 민 실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송 관장님이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도 부른 건가요?”민지현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대단한 사람 정도가 아니야!”사실 귀빈실로 향하는 내내 민지현의 귀에는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생생하게 들려왔다.사람들은 모두 류무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그러니 지금 귀빈실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류무영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았다.민지현은 떨리는 손으로 귀빈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문을 열어준 사람은 송남지였다.민지현은 대기실 안을 힐끗 살피자마자 류무영의 본모습을 목격했다.소파에 앉은 그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민지현은 격앙된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목소리를 죽인 채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정말로 류무영 선생님을 모셔온 거예요?”송남지는 으스대는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류무영 선생님은 예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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