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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451 - Chapter 460

580 Chapters

제451화

들은 대로 박재용의 성격이 괴팍하다면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었다.송남지는 조심스럽게 이미 잠금이 해제된 문을 밀었다. 문이 천천히 열리자 블랙과 그레이 톤으로 꾸며진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정갈한 북유럽풍 인테리어였고 통창 옆 화판에는 미완성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은 시선을 단숨에 압도했다.그 짧은 찰나 송남지는 왜 박재용이 차세대 작가 중 가장 기대받는 인물인지 확실히 깨달았다.이런 재능을 가진 작가라면 계약만으로도 확실한 성공이 보장된 셈이었다.사실 송남지는 처음에 민지현이 수백억을 운운할 때만 해도 허풍이 섞여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생동하면서도 압도적인 붓놀림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그 말들에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는 것을 확신했다.화구와 물감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어수선한 작업 공간을 지나 송남지는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박재용 씨? 안에 계신가요?”허락 없이 들어온 사실이 내심 마음에 걸려 목소리엔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안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할지 말지 망설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폈지만, 여전히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그러다 갑자기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송남지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사람 살려!”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정신없이 달려간 곳은 욕실 앞이었다.“사람 살려!”안에서 다시 한번 비명이 터져 나오자 송남지의 머릿속엔 온갖 상상이 스쳤다.‘박재용이 욕실에서 무슨 변이라도 당한 걸까? 그래서 한참 동안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었던 건가?’모든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비록 상황이 조금 극적이긴 해도, 여기서 박재용을 구해준다면 계약 건도 훨씬 수월하게 풀릴 게 분명했다.송남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욕실 문을 힘껏 걷어찼다.“박재용 씨, 제가 구하러...”하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송남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얗고 조밀한 거품 속에 몸을 담근 채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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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2화

귀엽긴 참 귀여웠다.하지만 방금 전 박재용이 ‘살려줘, 너무 귀여워’라고 했던 걸 생각하니 송남지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그럼 이렇게 무작정 쳐들어온 자신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무단침입에 금품 갈취, 아니면 미색이라도 탐내러 온 괴한?송남지는 욕실에서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치며 멀어졌다.“작가님, 우선 옷부터 입으세요. 거실에서 기다리며 설명해 드릴게요.”박재용은 송남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욕실에서 지뢰밭이라도 본 듯 질겁하며 멀찍이 도망쳐, 거의 별장 밖까지 나갈 기세였다.그는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잘 갖춰 입은 것 아닌가?송남지는 거실로 달려가 숨을 골랐지만, 박재용이 거실로 나왔을 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송남지는 고개를 들었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분명 옷을 입고 나오라고 했는데, 왜 여전히 가운만 걸친 차림이란 말인가.송남지는 거듭 확인했다.“작가님, 그게... 옷을 다 입으신 건가요?”박재용은 태연한 태도로 대꾸했다.“내 집에서 샤워 가운을 입고 있는 게 옷을 안 입은 건가요?”듣고 보니 그랬다. 여기는 그의 집이었다.송남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초인종을 계속 눌러도 기척이 없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어요. 허락하신 줄 알았거든요. 문이 저절로 열렸으니까요.”자신이 억지로 따고 들어온 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남지는 한결 당당해졌다.절로 어깨가 펴졌다.박재용은 송남지의 맞은편 소파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고 무릎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에는 채 닦이지 않은 물방울과 짙은 털이 엿보였다.남성적인 기운이 물씬 풍기는 광경에 그녀는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저렇게 자유분방하잖아. 별일 아니야.’박재용은 여자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며 물었다.“우리 집 문이 고장 났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인종이 울렸다.박재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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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3화

‘어떻게 내가 같은 업계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까?’박재용은 그녀의 눈에 어린 의문을 읽어낸 듯 비릿하게 웃었다.“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날 찾아올 사람이 그림쟁이들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요 며칠 사이 그의 집 앞마당은 업계 사람들 발길에 풀이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송남지처럼 무식하게 초인종을 눌러 대문을 열어젖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도 여러 팀이 다녀갔지만 대답이 없자 다들 예의 바르게 발길을 돌렸다.오직 이 여자만 빼고 말이다.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송남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인물이 훤하시네. 이 바닥에서 썩기엔 아까운 미모예요.”칭찬인지 가시 돋친 비아냥인지 모를 말투에 송남지도 입술을 삐죽이며 응수했다.“작가님도 충분히 잘생기셨고 복근도 그렇게 탄탄하시면서, 이 일만 하기엔 아깝지 않나요?”박재용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내 복근이 탄탄한 건 또 어떻게 알았대요?”‘내가 어떻게 알았냐고?’송남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예전에 최보라가 한창 연예계 소식을 훑어보다가 보여준 게 떠올랐다. 박재용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방금 욕실에서 대체 뭘 본 거예요?”자칫 오해를 살까 봐 송남지가 서둘러 해명했다.“아니요, 그냥 작가님 부계정을 발견해서 거기 올라온 게시물을 보고 안 거예요.”“부계정?”박재용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은 갤러리보다 사설탐정이 더 어울리겠어. 말해봐요, 어느 갤러리 소속인지. 확실하게 거절해 줄 테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헛수고하지 말아요.”송남지는 그제야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재스민 갤러리 관장 송남지입니다. 진심으로 작가님과 협업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재스민?”박재용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물었다.“류 선생님의 제자입니까?”송남지는 업계에서 자신의 명성이 본인의 실력보다는 류무영이나 하정훈의 이름값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류 선생님의 제자 중 한 명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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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4화

‘또 시작인가?’송남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엔 또 어떤 캐릭터가 죽을 만큼 귀엽다는 건지 궁금해하며 허탈하게 뒤를 돌아보았다.그런데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박재용이 거짓말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송남지는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다.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박재용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러진 채였다.하지만 곧이어 그녀는 이것이 박재용의 짓궂은 장난일 거라 확신했다.그녀는 다급히 달려가는 대신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이번엔 또 무슨 연기를 하시는 거예요?”송남지는 자신이 다가가면 박재용이 눈을 번쩍 뜨며 또 누군가가 너무 귀여워 기절했다는 실없는 소리를 할 거라 확신했다.그러나 30초가 지나도 바닥에 쓰러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숨이 멎은 사람처럼 고요했다.송남지는 당황했지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자신을 골탕 먹이는 것이라 여겼다.“박재용 씨, 저 진짜 갈게요. 장난 그만 하세요.”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침묵만이 돌아왔고 그녀는 뒤돌아 건물 밖으로 나섰다.대문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자 송남지는 문득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그녀는 결국 발길을 돌려 박재용이 연기를 하는 것인지 확인해보기로 했다.차라리 연기라면 다행이었다.송남지는 다시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열었고 박재용이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은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숨은 붙어 있었지만 아주 미약했고 체온 역시 낮게 느껴졌다.“박재용 씨? 정신 차려봐요! 장난치지 말라고요!”송남지는 다급히 그를 부르며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신고 전화가 연결되는 순간까지도 송남지는 박재용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블루 오션 별장단지고요. 단독 별장...”위치를 알린 뒤 바닥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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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5화

그녀는 그저 박재용을 향해 나직이 뇌까릴 뿐이었다.“죽지 마요, 박재용 씨. 제발 죽지 마. 창가에 둔 작품 아직 완성 못 했잖아. 꼭 살아야 해요, 제발.”십 분 후,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그제야 한시름 놓은 송남지는 서둘러 달려가 검은 대문을 열고 구급대원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환자와 어떤 관계냐는 물음에 그녀는 잠시 말을 더듬다 대답했다.“협력... 파트너 관계예요.”그녀는 반드시 박재용과 계약할 생각이었으니 파트너라는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대원들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더니 이내 신속하게 박재용을 들것에 옮기기 시작했다.“좀 도와주세요!”옆에 있던 대원의 외침에 송남지도 지체 없이 몸을 숙여 박재용을 함께 받쳐 들었다.상황이 워낙 급박하다 보니 자신의 배가 아물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힘을 썼고 그 순간 몸에 이상이 느껴지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대원은 그녀의 힘없는 손길이 마뜩잖은 듯 소리쳤다.“힘 좀 더 써요, 안 그러면 못 들어요!”송남지는 이를 악물고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힘을 쏟았다. 박재용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지금, 일분일초가 죽음과의 사투일지도 몰랐다.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부축했고 대원들과 함께 그를 들것에 싣는 데 성공했다.그 짧은 순간, 그녀의 이마는 이미 차가운 땀방울로 뒤덮여 있었다.“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같이 올려야 합니다.”구급대원은 송남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보았는지 미안한 기색으로 덧붙였다.“죄송합니다. 상황이 워낙 급한데 인력이 부족해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송남지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괜찮아요.”구급차에 올라타자 복부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주먹을 꽉 쥐고 고통을 견뎌냈다.아픈 와중에도 정신을 차려 목적지 병원을 확인한 뒤, 민지현에게 곧바로 위치를 전송했다.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하기 무섭게 민지현의 차도 뒤따라 들어왔다.민지현이 황급히 달려왔을 때, 송남지는 이미 사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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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6화

서경의 겨울밤은 유난히도 스산했고 매서운 밤바람이 몰아쳤다.블루 오션 인근의 한 병원 응급실 앞에서 민지현은 박재용이 나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박재용 대신 그녀 앞에 나타난 인물은 전혀 낯선 중년 남성이었다.단정한 옷차림에 웃음기 하나 없는 엄격한 인상의 남자는 민지현을 한 번 확인하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실례지만, 저기 응급실 안에 있는 환자가 박재용 씨입니까?”그 질문에 민지현은 본능적으로 경계심 어린 눈빛을 띠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상대가 경쟁 갤러리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송남지의 당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중년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지갑에서 고급스러운 질감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안녕하십니까. 저는 T&K 은행의 행장이자 박재용의 삼촌 박명규라고 합니다.”상대가 박재용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민지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아, 맞아요! 응급실에 있는 사람 박재용 씨예요. 저희 관장님이 계약 건으로 대화를 나누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박명규의 안색이 눈에 띄게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재용이는 어릴 때부터 심장 문제로 늘 고생해 왔습니다. 한시도 곁에서 눈을 떼면 안 되는 아이인데, 워낙 고집이 세서요. 라인국에서의 감시가 너무 엄격하다고 느끼고는 아예 이곳 서경으로 도망치듯 와버린 겁니다.”민지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적어도 관장님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관장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저에게 연락해 주십시오.”민지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저기... 실은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그녀는 재스민 갤러리가 처한 상황을 간략히 설명한 뒤 간절하게 덧붙였다.“박재용 씨의 삼촌이시니 박재용 씨도 삼촌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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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7화

박명규의 표정이 엄숙해졌다.“이제 위급한 상황은 넘겼고 곧 깨어나겠지만, 상태가 아주 심각합니다. 자칫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어요. 의사로서 제 소견은 가능한 한 빨리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라는 겁니다.”박명규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깨어나는 대로 본인과 상의하겠습니다.”박재용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그가 가장 혐오하는 하얀 천장이었다.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라인국에 있어야 할 삼촌 박명규가 병실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 쓰러졌어요?”박재용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박명규의 얼굴에 서려 있던 걱정은 순식간에 불같은 분노로 변했다.“너 죽다 살아난 건 알아? 이틀만 쉬고 바로 삼촌이랑 라인국으로 가자!”박재용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삼촌, 나 데리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빠랑 약속한 게 있으니까 난 절대 안 돌아가요.”박명규는 박재용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다 큰 성인인 데다 몸 상태도 특수한 애를 억지로 기절시켜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박재용은 병실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그 송남지라는 여자는요? 그 여자가 날 병원에 데려온 거 맞죠?”“송남지? 그 갤러리 관장 말이냐?”박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을 잃었을 때도 누군가 곁에서 죽지 말라고 간절히 빌던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들었기 때문이다. 꽤 우스운 일이었다.박명규가 엄한 표정으로 타일렀다.“그렇게 건들거리는 태도 버려라. 갤러리 관장은 네 생명의 은인이야.”“은인은 무슨. 그냥 마침 거기 있었던 것뿐이겠죠. 다른 사람이었어도 구급차는 불러줬을걸요.”박명규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재용아, 그분은 몸에 상처가 있었어. 널 구하려다 그 상처가 덧나기까지 했다고. 그런데도 네가 잘못될까 봐 동료까지 붙여서 널 지키게 하고 본인은 혼자서 치료받으러 갔어. 너도 이제 스무 살이야. 제발 철 좀 들어라. 사람의 호의를 그렇게 악의로 갚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란 말이다.”라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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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8화

박재용은 삼촌이 알려준 곳을 따라 송남지의 병실을 찾아냈다.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자 그는 노크도 없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그 바람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송남지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다가 이내 더 크게 놀라고 말았다.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박재용의 상태가 어떤지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탓이었다.박재용은 겁에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픽 웃음을 흘렸다.“내가 무슨 귀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목소리에는 제법 힘이 실려 있었고 음산한 기운도 없었기에 그제야 송남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목이 타들어 갈 듯 말랐지만, 적어도 이틀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래서 결국 그녀는 박재용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박재용 씨, 미안하지만 따뜻한 물 좀 한 컵 얻을 수 있을까요? 목이 너무 말라서요.”박재용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구급차 한 번 불러줬다고 해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닐 텐데요.”라인국의 귀한 도련님으로 자라며 평생 심장병을 달고 살았던 그에게 감히 무언가를 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누군가의 부탁을 듣는 상황이 낯설었던 탓에 본심과는 다른 오만한 말이 튀어나왔다.송남지는 허탈했다. 이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계약까지 따낼 심산이었는데, 물 한 컵조차 얻어 마시지 못할 처지라니. 그녀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바꿨다.“그럼 탁자 위에 있는 휴대폰 좀 집어다 주시겠어요?”민지현은 갤러리 일로 급히 돌아갔고 간병인을 두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송남지는 서둘러 최보라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최보라에게 연락해 잠시 간호를 부탁할 수 있을지 물어볼 참이었다.비록 최보라가 왜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느냐며 잔소리를 퍼부어댈 게 뻔했지만, 지금 같은 비상시국엔 그런 타박쯤은 견뎌야 했다.목이 타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처지보다는 백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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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9화

박재용은 누가 봐도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딱 보니 일밖에 모르는 독종 스타일인데, 평소에 일에만 매달리느라 가족들이랑 사이가 소원해진 거 아닙니까? 지금 이 꼴로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걸 보니 자업자득이네요.”그 말을 듣는 송남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흐릿하게 가라앉았다.하정훈과 결혼한 뒤 그녀에게 제1순위 가족은 당연히 하정훈이었지만,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정말 말씀대로 제가 가족 관계를 잘 못 풀었나 봐요.”처음 다쳐서 퇴원하고 다시 입원하는 이 소동 속에서도 그는 고작 한 번 얼굴을 비췄을 뿐이었다.그사이 메시지 한 통 주고받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언젠가 한 번은 대화창을 열어 뭐라도 적어보려 했으나, 굳이 먼저 말을 걸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던 적이 있었다.그때 그가 프로필 사진을 바꾼 것을 발견했다.그날 밤 모감주나무 아래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송남지는 혼란스러웠다.‘우리 사진을 프로필로 걸어둔 사람이 왜 나를 이런 태도로 대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귀찮은 여자들을 떼어내기 위한 방어막으로 활용하는 것뿐일까.’하긴, 하정훈 같은 남자라면 곁에 여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테니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었다.박재용은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독설이 습관이었던 그였지만, 은은한 노란 조명 아래 서글픈 기색이 감도는 송남지의 얼굴을 보니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그는 서둘러 말을 덧붙이며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가족이 안 오면 좀 어때요, 그게 뭐 대수라고. 나 때문에 상처가 도진 거니까 내가 최고의 간병인을 붙여줄게요.”송남지가 막 거절하려던 찰나, 귀찮은 파리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박재용의 눈에도 그 파리가 포착되었다.파리가 이불 위로 내려앉으려 하자 송남지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가만히 있어요, 내가 잡을 테니까.”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체를 숙이며 기회를 엿보았다.단번에 파리를 낚아채려던 순간, 등 뒤에서 다급하고도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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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0화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그 시선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박재용은 평생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아버지는 라인국 T&K 은행의 회장이었고 그 이름값은 라인국 내에서 절대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주변에는 아부하는 이들뿐이었고 게다가 성격까지 불같았던 탓에 사람들은 행여나 불똥이 튈까 봐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하정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재용을 응시했다. 젊고 잘생긴 외모, 몸에 밴 예술가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하정훈은 방금 병실에 들어섰을 때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박재용이 몸을 숙여 송남지에게 다가갔던 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몇 센티미터에 불과했다.하정훈은 인정했다. 그 찰나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그래서 박재용을 밀쳐낼 때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지금 박재용을 바라보는 하정훈의 눈에는 여전히 숨길 수 없는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고작 너 하나 구하겠다고 남지의 옛 상처가 터진 거라고?”하정훈은 당장이라도 박재용을 집어삼킬 듯 험악한 기세로 물었다.순식간에 두 남자 사이의 분위기가 칼날 위에 선 듯 팽팽해졌다.“당신 뭐야? 어디서 나타나서 이래라저래라야?”박재용 역시 물러서지 않고 하정훈을 쏘아보며 맞받아쳤다.하정훈이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내가 남지의 남편인데, 어디서 나타났겠어?”박재용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태연한 표정을 되찾았다.“오호, 바로 마누라가 입원했을 땐 오지도 않더니 한참 늦게 기어 나온, 사이 안 좋기로 소문난 그 남편분?”길게 늘어진 수식어들이 하정훈의 신경을 긁어놓았고 그의 눈빛은 더욱 험악하게 가라앉았다.두 남자 사이에서 불꽃이 튀려던 찰나, 침묵을 지키던 송남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요. 나 쉬어야 하니까.”말을 마친 그녀가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으며 탁자 위의 휴대폰을 잡으려 몸을 일으켰다.그러자 하정훈이 서둘러 그녀를 가로막았다.그는 송남지의 허리를 조심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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