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611 - Chapter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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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1화

맹시은은 뜰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당에는 아직도 몇 마리의 반딧불이가 느릿하게 날고 있었다.누각 문을 닫지 않아 안에 있던 반딧불이들이 그대로 흘러나온 것이다.송하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아, 세자께 귀한 손님이 계셨군요.”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저는 제비나 참새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사내와 단둘이 있지는 않습니다.”노골적인 비아냥이었다.주종현의 미간이 깊게 주름졌다.“동산은 밤이 되면 기온이 많이 내려간다. 그러니 할머니께서 요양하시기엔 적절치 않지. 할머니께서는 요 몇 해 다리에 냉기를 받으면 안 되는데 어찌 동산으로 오시겠느냐?”송하윤은 태연히 하인들을 시켜 상자들을 안으로 들였다.“세자께서 진국공부의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계시니 조모님께 소홀해지신 모양이군요. 조모께서 요즘 의원의 약을 드시고 열이 올라 땀이 멈추지 않습니다. 온종일 땀에 젖어 계시지요. 의원께서 서늘한 곳으로 옮겨 피서를 하라 하셨습니다.”맹시은이 발걸음을 옮겨 앞채로 들어섰다.“큰 마님의 몸이 우선이지요. 저희는 내일 아침 일찍 경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송하윤은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 아가씨.”이곳은 본래 주 가의 장자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양보라는 말을 썼다.마치 시은이 남의 둥지를 빼앗은 사람처럼.송하윤의 의도는 분명했다.하지만 맹시은은 그저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송 아가씨는 참 부지런하시네요. 이 깊은 밤, 산길도 험한데 말입니다. 향 유모도 이런 일로는 나오지 않으시겠어요 역시 송 아가씨의 효심은 감동적입니다.”말끝은 부드러웠지만 칼날처럼 얇았다.향 유모와 비교한다는 것은 지금의 송하윤은 그저 시중드는 처지라는 뜻이기도 했다.예전의 송하윤이라면 이 말을 삼키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더한 말도 들으며 살아왔다. 눈동자에 미소를 띠었으나 빛은 닿지 않았다.“과찬이십니다.”그때 한 하인이 달려왔다.“해가 잘 드는 동쪽 별채에 이미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송하윤이 즉시 꾸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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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2화

“원가로 다시 사 오자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보게 하자는 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얹어 주면 되죠. 최소한 손해는 안 보게요.”동산 장자는 자리가 좋았기에 여름이면 피서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진국공부는 군량을 마련하려고 이 장자를 팔았었다. 이제 언니가 다시 사오겠다고 한다면 주종현이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맹시은은 아설을 흘겨보았다.“장사는 아직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강매는 벌써 익혔구나.”아설이 억울한 얼굴로 받아쳤다.“그게 무슨 강매예요? 서로 좋으면 되는 거죠.”맹시은은 더 말 섞기 싫다는 듯 손을 털었다.“조식 먹고 짐 정리해. 우린 돌아간다.”“이렇게 빨리요?”아설과 단낭이 동시에 놀랐다.“아직 덜 놀았단 말이에요!”연아도 맹시은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어제 겨우 또래 아이들과 친해졌는데, 오늘은 함께 뒷산에서 열매를 따기로 약속까지 했단다.그제야 아설이 어딘가 수상함을 눈치채고 맹시은에게 바짝 다가갔다.“언니… 싸웠어요?”맹시은이 그녀의 팔을 가볍게 밀었다.“애들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주씨 큰 마님께서 피서를 온다잖아. 남의 장자인데 우리가 눌러앉을 수는 없지.”아설이 입을 열었다.“어제 세자께서 분명...”“큰 마님이 누구예요?”연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영국공부를 떠날 때 그녀는 겨우 세 살 남짓이었다. 그 집 사람도, 기억도,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맹시은은 딸의 뺨을 쓰다듬었다.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이 장자, 많이 마음에 들어?”“네! 좋아요!”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래. 이 어미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문밖으로 넘실거리는 초록빛을 바라보며 맹시은은 입술을 다물었다.남의 둥지라... 차지하면 그만이지.짐을 절반쯤 정리했을 무렵, 주종현이 돌아왔다.어리둥절한 얼굴로 둘러보았다.“이건 또 무슨 일이냐?”“경성으로 돌아가요.”아설이 대신 대답하며 함께 들어온 위심을 향해 손짓했다.“저 상자 두 개를 먼저 실어주세요.”주종현은 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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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3화

주종현이 아이들을 위해 따 준 열매가 땅 위에 한가득 흩어졌다. 아이들은 집에서 가져온 대나무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는 환하게 웃으며 삼삼오오 장자 쪽으로 돌아갔다.연아는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물었다.“아버지, 우리 이제 바로 돌아가는 겁니까? 저 아직 다 못 놀았어요.”주종현은 달콤한 열매 하나를 집어 딸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안 간다. 우리 연아가 놀 만큼 다 놀고 가자.”“와아!”아버지의 약속을 들은 연아는 장자에 도착하자마자 또래 아이들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주종현은 맹시은을 바라보았다.“마음 놓고 지내. 다시는 아무도 안 올 거야.”맹시은이 힐끗 그를 보았다.“세자 말씀이 참 재밌습니다. 주 가의 장자에서 제가 마음 놓고 지내라니요. 제가 정말 누굴 쫓아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어제 송하윤의 일로 마음이 상했다는 걸 알았기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송하윤은 지금 할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어. 할머니께서는 가족을 잃고 홀로 된 그녀를 안쓰러워하시지. 지금은 나도, 아버지도 그녀를 어쩌지 못해.”맹시은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제가 송하윤 얘기를 했나요? 제 말이 그 사람과 무슨 상관이죠? 그녀가 좋든 나쁘든, 천왕이 감싸든 당신이 감싸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 입니다.”주종현이 작게 중얼거렸다.“나는 감싼 적 없…”맹시은이 눈을 흘겨보자 그는 말을 멈췄다.“연아가 여길 좋아해요. 그리고 이 장자, 원래는 맹 가의 것이었죠. 값을 말하세요. 저희가 다시 사겠습니다.”주종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굳이 살 필요 없어. 그냥 지내.”정말로 팔아버리면 그가 세 식구를 핑계 삼아 이곳에 데려올 이유도 사라질 터였다.그사이 아설은 사람들을 시켜 상자를 다시 마차에 실어 놓았다.“언니, 다 실었어요. 언제 출발해요?”주종현이 얼른 대신 답했다.“안 간다. 다시 내려.”아설의 눈이 동그래졌다.“뭐요?”아침 내내 허리 휘게 정리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안 간다니.아설이 거의 펄쩍 뛸 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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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4화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뽀얗던 두 어린 계집아이의 얼굴은 눈에 띄게 그을려 있었다.맹시은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장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문턱을 막 넘는 순간, 장자 옆 수풀에서 바람과는 다른 기척이 일렁였다.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담장 뒤로 스며들었다.장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부엌에는 물을 데우기 위해 아궁이 하나만 남겨 두었다.산속의 밤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뛰놀다 지쳐 일찍 잠들었다.아설은 맹시은 곁에 앉아 자수를 배우고 있었다. 자신의 혼례복을 손수 지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맹시은은 그녀의 바느질 바구니 밑에 깔린 단단한 천 조각을 눈치챘다. 저건 신을 만들기에 딱 좋은 재질이었다.“이건 혼례복감 같지는 않네.”그녀가 장난스레 말하자 아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러나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위심에게 신발 한 켤레 만들어 주려고요. 자수장이가 신발감으론 최고라는데 너무 단단해서 송곳도 잘 안 들어가요.”맹시은은 천을 들어 살폈다.“이건 뜨거운 물에 한 번 담가야 해. 부드러워지면 다시 빨아 쓰면 되고. 내일 내가 다시 가르쳐 줄게.”“지금이요!”아설은 들뜬 얼굴로 곧장 부엌으로 뜨거운 물을 뜨러 갔다.사랑채와 부엌은 멀지 않았다.어둠은 이미 산자락을 덮고 있었다. 아설은 등롱을 들고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달빛은 두터운 구름 뒤에 숨어 한 줄기 빛도 내주지 않았다. 희미한 등불은 마치 밤바다를 떠도는 작은 배 한 척처럼 어둠 속을 천천히 가르고 나아갔다.산바람은 서늘했고 꽃향과 과실향이 어우러져 밤을 한층 더 깊고 신비롭게 만들었다.아설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부엌 문은 반쯤 열려 있었기에 계단을 오르다 안에서 스치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아직 주방 아주머니가 남아 있는 건가?끼익—문을 밀어 여는 순간, 아설의 눈빛이 번쩍 흔들렸다.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녀는 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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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5화

형부 대옥.주종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불찰친왕이 도주한 것이다.모두가 그가 경사아문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실상 그는 비밀리에 형부 대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형부상서 종 대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울상이 되었다.“주 대인, 불찰을 지키던 이들은 모두 금위의 고수들이었습니다. 이 일을 제 한 사람의 과오로 돌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주종현은 이를 악문 채, 흠집 하나 없는 자물쇠를 노려보았다.“종 대인, 지금 누구의 잘못을 따질 때입니까? 폐하의 노여움을 어떻게 감당할지부터 생각하셔야지요.”종 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형부 대옥에는 싸움의 흔적도, 파괴된 자취도 없었다. 옥졸과 호위, 심지어 죄수들까지 전부 약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이토록 감쪽같은 탈옥. 형부 대옥을 속속들이 아는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불찰의 탈옥이 한 사람의 책임일 수는 없었지만 그 자신은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황성, 근정전.대전 안에는 숨소리만이 맴돌았다.종 대인은 땅에 엎드린 채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폐하는 늘 희로를 드러내지 않는 군주였다. 그러나 오늘의 얼굴은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불찰은 형부의 모든 죄수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오늘 그는 온전한 몸으로 이 전을 나서지 못할지도 모른다.어좌 앞에 놓인 폐하의 두 손이 주먹으로 꽉 쥐어졌다. 눈동자 속의 분노가 전 안의 신하들을 태워버릴 듯 타올랐다.그는 수년간 밤을 지새우며 정사를 돌보았다. 태후와 진 각로의 전횡을 무너뜨리고 진씨에게 맡긴 개혁안도 막 시행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란 공주 역시 자신과 아이를 위해 한 번 싸우려 했다.모든 것이 마침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와중에 불찰이 달아났다.그런데 자기한테 올라온 보고는 과연 어떤 것이었나? 밥을 나르던 관차 하나가 은 몇 십 냥에 넘어가 옥사 전체에 약을 풀었다고?조금만 더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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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6화

동산 일대는 밤새 샅샅이 뒤집혔다. 하늘이 희끗하게 밝아오자 장자에 딸린 농가 사람들은 밤새 떨어야 했던 두려움을 겨우 추스르며 담장 위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밤새 산을 뒤진 관병들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려는 것이었다.집집마다 대담한 이도, 겁 많은 이도 모두 반쯤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살폈다. 그러나 단 한 집만은 끝내 아무 기척도 없었다.“종현”문을 두드리던 주종현이 막 소리를 내자 그를 부르는 노인의 음성이 겹쳐 들렸다.“종현아, 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주씨 큰 마님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황제가 혼절했다는 소식은 아직 공식적으로 퍼지지 않았지만 소식이 빠른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만약 황제의 몸에 정말 변고가 생긴다면 손자의 혼사는 서둘러야 했다. 국상이 나면 삼 년 동안은 혼례를 올릴 수 없으니.주종현은 이미 서른이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과연 손자 며느리를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녀는 밤새 집에서 속을 태우다 끝내 참지 못하고 동산 장자까지 달려온 것이다.“할머니, 이곳은 할머니께서 계실 곳이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주종현은 이마를 짚었다. 큰 마님이 온 이유는 뻔했다. 황제가 살아 있을 때 혼사를 매듭지으라는 것이었다.“안 된다! 오늘은 네가 반드시 확답을 줘야 한다!”큰 마님은 그동안 손자의 혼사를 너무 많이 미뤄왔다. 예전이야 그렇다 쳐도, 지금은 다르다.송하윤의 말이 맞았다. 이처럼 급박한 때에 서두르지 않으면 주 가의 향화가 끊길 수도 있다.주종현은 송하윤을 부축한 채 서 있는 그녀를 한 번 흘겨보았다.“할머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큰 마님은 송하윤의 손을 잡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윤이를 탓할 것 없다. 내가 오고 싶어 온 것이다. 그동안은 네 뜻을 봐주었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아느냐. 네가 싫다 해도 이번만큼은 따라야 한다!”주종현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할머니께서도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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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7화

동산 곳곳은 이미 주종현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그가 따라잡았을 때, 불찰친왕은 맹시은을 인질로 붙들고 있었다.그 순간,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불찰의 손에는 날 선 장작칼이 들려 있었고 칼끝은 시은의 목을 바짝 누르고 있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주종현을 향해 그가 비웃듯 말했다.“주 대인, 나를 놓아주면 이 여자를 풀어주겠다.”주종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좋습니다.”“말 한 필 끌어오거라.”불찰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주 대인도 미인을 아끼는 성정이로군.”주종현은 말을 받아치며 동시에 주변 지형을 빠르게 훑었다.“불찰친왕. 우륵과 대성조는 본래 우호국입니다. 친왕께서는 우리 경성에서 아란 공주를 해치려 했고 지금은 무고한 사람까지 인질로 잡았습니다. 폐하께서는 애초에 친왕을 해칠 뜻이 없었습니다. 우리 사신이 화친을 마치고 돌아오면 친왕께서는 본국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불찰의 눈에 분노가 번뜩였다.“함정에 빠뜨린 건 너희다! 아란은 이미 돌아갔다!”그는 냉소했다.“우륵의 열일곱 연맹기와 육십이 개 부족은 모두 기회를 노리는 늑대들이다. 젊은 나이에 죽은 내 형도 이루지 못한 일을 너희는 소아란 그 여자 하나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느냐?”주종현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아란 공주는 우리 조정의 공주이자 우륵의 왕후이며 지열 왕자의 생모입니다. 그러니 친왕의 그 말씀은 단순한 도발을 넘는 것이지요.”그는 말을 이어가며 왼손을 등 뒤로 감추고 조용히 손짓을 보냈다.불찰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주 대인, 시간을 끌 생각은 마라.”칼이 한층 더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시은의 목을 스치며 피부를 갈랐다. 선홍빛 피가 곧바로 흘러내렸다.“한 시각 늦어질 때마다, 이 여자의 숨은 더 줄어든다.”“대인, 말이 왔습니다!”건장한 조홍빛 말이 끌려왔다. 주종현은 멀리 매복한 궁수들을 재빨리 훑어본 뒤, 말을 불찰 쪽으로 조금 더 몰았다.“말도 왔으니 이제 시은을 놓아주십시오.”불찰은 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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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8화

맹시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진국공부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스며든 공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어머니!”연아는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더니 끝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 역시 겁에 질려 있었고 잠만 들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아설은 한시도 떨어지지 못한 채 아이 곁을 지켰다.주종현은 딸의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연아, 무서워하지 마.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왔잖니.”그러고는 맹시은을 바라보았다.“불찰친왕이 형부 대옥을 탈출한 건,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을 벗어났다면 우리가 손쓸 틈도 없이 멀리 달아날 수도 있었지. 그런데도 굳이 동산 장자에 가서 너를 납치했다.”그 말에야 맹시은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굳어 있던 목을 조심스레 돌리며 입을 열었다.“동산 장자의 사람들은 전부 주부 소속 노복이에요. 저를 따라간 맹 가 하인들은 고작 여섯뿐이었고 그들은 한 번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헌데… 변수 하나가 있었죠.”어제 장자에 다녀갔던 송하윤.주종현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송하윤과 관련 있다면 이번엔 누구도 그녀를 감싸주지 못한다.”맹시은은 농가 마당에서 보았던 파란 천 보자기를 떠올렸다.“아침에 누군가 마당에 파란 보자기를 던졌는데 참깨전병 같았어요.”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그렇게 이른 시간에 고작 참깨전병 하나를 보내려고 온 걸까요? 불찰이 저를 끌고 농가에 숨었을 때… 길을 세어 가더군요.”목소리가 낮아졌다.“마치 누군가 미리 그곳을 답사해 두고 거기 숨으라고 알려준 것처럼요.”주종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폐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다. 이 일은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거라.”주종현은 영국공부 송학당으로 돌아갔다.송하윤은 주씨 큰 마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큰 마님의 눈꼬리 주름이 두 줄은 더 늘어날 만큼 웃음이 번져 있었다.그러나 주종현이 굳은 얼굴로 들어서자 송학당 안은 순식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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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9화

“폐하께서 용안이 노하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 일이… 영국공부와 관련이라도 있다면?”영국공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어, 어찌 그게 우리와…”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주씨 큰 마님 뒤에 숨다시피 선 송하윤에게 꽂혔다.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켰다.“내 이럴 줄 알았다. 이 계집은 두어선 안 된다. 제 집안을 모조리 망쳐놓고 이제는 우리 집까지 재수 없게 하려는 게냐!”송하윤은 주씨 큰 마님의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움켜쥐고서야 겨우 표정을 지워냈다.지금 자신의 처지가 누구 때문인지,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저는 스스로 죄를 짊어진 몸임을 압니다. 매일 조모님의 작은 불당에서 경을 외우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업보를 덜기 위해서입니다.”숨이 떨렸다.“오라버니가 어리석어 그릇된 주인을 따랐기에 화를 불렀습니다. 그는 이미 벌을 받았습니다. 남은 죄는… 제가 청등 아래에서 조금씩 갚겠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세상에 휩쓸린 가엾은 고아 같았다.주씨 큰 마님은 아들과 손자를 번갈아 보며 숨이 막힌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너희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내가 있는 한, 감히 하윤이를 건드릴 생각은 말아라!”그때 금위군이 두 손을 모아 아뢰었다.“대인, 현재까지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영국공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형부 대옥 같은 곳을 탈옥시키는 일에 어린 아가씨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그는 아들을 보며 덧붙였다.“오늘 아침 네 할머니께서 동산 장자에 간 일도 들었다. 허나 나는 네 할머니 말이 옳다 생각한다. 궁중 상황이 불투명한 지금, 네가 맹시은과 하루라도 빨리 혼인해야 한다. 부인을 맞고 맹 가를 우군으로 삼아야 두 아이도 정식으로 주 씨 족보에 올릴 수 있다. 일거삼득이지 않느냐?”그러나 주씨 큰 마님은 고개를 저었다.“나는 반대다. 경성에 어찌 저 아이 하나뿐이더냐. 죽은 줄 알고 도망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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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0화

황성, 난옥각.폐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위로 드리운 명황색 장막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지 못했다.황후는 기쁨에 찬 눈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폐하, 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장비.”황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선발을 거쳐 입궁한 후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폐하가 자신을 ‘장비’라 부르다니.아주 짧은 찰나였다. 폐하의 눈빛은 이미 또렷해져 있었다. 그는 침상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황후,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느냐?”황후는 전 내관이 건네준 인삼차를 받아 들고 다가왔다.“사흘이나 혼수에 계셨습니다. 즉위하신 뒤로 쉼 없이 국사를 돌보시니 기혈이 크게 허해지셨다고 합니다. 태의가 더는 과로하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폐하는 낮게 응답한 뒤, 곧바로 물었다.“주종현과 종도치는 어디 있지. 불찰친왕은 잡았느냐?”전 내관이 머뭇거리다 말했다.“주 대인께서… 불찰친왕에게 접응자가 있어 놓쳤다고 하셨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벌하실 자는 벌하시되 성체만은 상하게 하지 마옵소서.”폐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전 내관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그때 황제는 이미 황후의 손을 짚고 일어선 뒤였다.“주종현과 진도림을 들라 하라.”황후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황제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겉옷을 걸친 채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그의 등을 바라보며 황후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곁의 상궁이 부축하며 속삭였다.“폐하께서는 사직을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우륵의 일도 중대한 시기이니 폐하를 더 살펴드리면 폐하께서도 황후 마마의 정성을 아실 것입니다.”황후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사직을 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나는 그저 성체가 걱정될 뿐이다.”최 태의가 자신에게 사실을 모두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과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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