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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1화

김지영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변명에 나섰다.“하나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넌 아직 미성년자였어. 우리가 차마 널 보육원에 보낼 수 없어서 네 후견인이 되어주고 집안 재산을 관리해 준 거잖아!”송종현 역시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그래! 너희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회사는 빚더미만 안고 집도 이미 담보로 넘어간 상태라 빈 껍데기나 다름없었어. 하도 가족이니까 엉망진창인 걸 뒷수습해 준 거지 누가 손이나 대고 싶었겠어? 너무 주제넘게 굴지 마라!”송하나는 변명하는 두 인간을 싸늘하게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아직은 때가 아니다.아버지의 옛 운전기사 안재준 씨가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는 중이고 아직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니 일단 참아야만 한다.결정적인 단서를 손에 쥐거든 반드시 이들을 죗값을 치르게 해줄 것이다.그녀의 냉혹하고 결연한 눈빛에 송종현 부부는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고 감히 송하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바로 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천천히 길가에 멈춰 서더니 이강우의 운전기사가 안에서 내려와 정중하게 뒷문을 열었다.“송태리 씨, 대표님께서 댁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송종현과 김지영은 마치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재빨리 송태리를 끌고 차에 올라탔다.“태리야, 얼른 타! 이 년이랑 여기서 시간 낭비할 거 없어!”송태리는 아무 이득도 얻지 못했고 더 붙잡고 있어봤자 본인만 망신당할 꼴이 될 테니 송하나를 힐긋 노려보곤 차에 올라탔다.차는 금세 멀어져 갔다.송하나는 제자리에 선 채 눈가의 한기가 계속 서려 있었다.한참 후,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눈빛에 드리운 증오와 냉랭한 기운을 천천히 짓눌렀다.돌아서 차 문을 열 때, 얼굴에는 어느덧 평온을 되찾은 뒤였다.“괜찮니, 하나야? 그 사람들이 또 험한 말로 널 속상하게 하진 않았어?”홍경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송하나가 얼른 할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으며 안심시키는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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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안정인은 곧장 객실을 정리했다.정리를 마친 후, 송하나는 자신의 베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살며시 닫았다.한편 이 모든 장면을 멀지 않은 곳에서 홍경자가 지켜보고 있었다.어르신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안정인이 그런 홍경자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어르신, 사모님께서... 도련님과는 정말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으신 것 같아요... 도련님이 쓰시던 침대도 이제 안 쓰려 하시네요.”홍경자는 짙은 눈길로 굳게 닫힌 객실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보이는구나.”어르신은 누구보다 잘 안다.예전에 두 아이가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져도 송하나가 이강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항상 빛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예 낯선 사람을 대하듯 삭막함과 거리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하나가 강우에게 정말 상처가 깊은 것 같아.”홍경자는 탄식하며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한편 송하나는 본가에서 할머니와 함께 며칠 더 보냈다.매일 함께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아늑하고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눈 깜짝할 사이에 주말이 되었다.저녁 무렵, 홍경자는 주방에 친히 분부하여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렸는데 전부 송하나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이제 막 테이블 앞에 앉았을 때 문밖에서 차분하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이강우가 돌아온 것이다.그는 양복 재킷을 벗어 가정부에게 건네며 은근한 피로감을 드러냈다.홍경자도 회사 일을 대충 들은 터라 관심 조로 물었다.“회사 일은 어떻게 됐어?”“다 처리했어요. 별일 아니에요.”이강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식탁을 훑어보다가 그제야 발견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홍경자가 곧바로 그의 속내를 꿰뚫었다.“오면 온다고 미리 말하지. 오늘은 하나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차렸어. 우리 하나는 몇 년 동안 네 입맛에 습관까지 다 맞춰가면서 살았으니 이제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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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화장대 위 가지런히 놓인 화장품들, 옷장 안 그녀가 즐겨 입던 잠옷 몇 벌,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읽다 만 책들까지...송하나에게 속한 모든 흔적이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다.마치 그녀가 이곳에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너무 깔끔하게 정리됐다.이강우는 문득 그녀가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보이던 차가운 표정을 떠올리며 이유 없는 분노가 버럭 치솟았다.아직 이혼 절차도 안 밟았는데 송하나는 자꾸 그와 선을 긋고 있었다.이런 것도 나름 밀당의 수법일까?전에 그녀는 갖은 수단으로 이강우의 환심을 사려 애썼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해 안달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칼같이 선을 긋고 남보다도 못하게 쌀쌀맞은 태도만 보인다.그토록 오랫동안 품어왔던 애틋한 감정을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떨쳐낼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바로 그렇게 되는 걸까? 그는 도통 믿기 힘들었다.이강우는 불쾌한 기분을 안고 샤워하러 들어갔다.하지만 차가운 물줄기조차 마음속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했다.그는 대충 잠옷을 걸치고 위스키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태웠지만 오히려 답답함만 더욱 선명해졌다.‘이대론 안 되겠어. 직접 가서 물어봐야겠다!’이제 막 문을 열자 안정인이 우유 한 잔을 들고 객실 앞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있었다.이강우는 걸음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주세요.”안정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 도련님.”그녀는 따뜻한 우유를 이강우에게 건네고는 곧바로 물러났다.객실 문이 이내 열리고 송하나가 옅은 색 홈웨어 차림으로 나왔다. 머리는 느슨하게 묶어 올리고 가늘고 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다.문밖에 떡하니 서 있는 이강우를 보자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샤워를 마친 노곤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차가운 눈길로 그와 거리감을 두었다.이강우가 건넨 우유 잔을 받으며 그녀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고마워요.”이제 곧 문을 닫으려 하는데 이 남자가 긴 팔을 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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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송하나도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더니 모든 걸 깨달았다.그녀는 야유 섞인 어조로 말했다.“그러니까 방금 했던 말들 모두 핑계였네요? 실은 강우 씨가 이혼하기 싫은 거죠?”이강우는 입술을 꾹 다물고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이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이혼 안 하면 강우 씨가 그토록 사랑하는 송태리는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설마 평생 명분도 없는 내연녀로 살게 하려고요?”“걔한테는 내가 알아서 보상해줄 거야.”이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방식으로.”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식의 태도에 송하나는 참고 참았던 분노가 그대로 폭발해버렸다.“내가 지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 거죠?”“할머니가 널 많이 좋아하셔.”이강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친손자인 나보다 너를 더 아끼시지. 네가 만약 우리 집에 계속 머물러 준다면 할머니가 엄청 기뻐하실 거야.”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앞으로는 일주일에 시간을 내서 꼭 너랑 함께해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만족시켜 줄 수 있어. 태리보다 뒤처지지 않을 거야.”은혜를 베푼다는 식의 말투, 하지만 그 속에서 존중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도, 송하나는 이제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완전히 고갈되었다.그녀는 문을 가리키며 한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꺼져 당장!”순간 이강우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송하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힘이 너무 센 나머지 그녀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야, 송하나, 대체 뭐가 불만이야?”이강우의 목소리에는 모욕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분노가 가득했다.“전에 내가 한 달에 한 번이나 집에 돌아올까 말까 해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잖아! 이제 시간도 내주고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준다니까.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냐고? 투정도 정도껏 부려!”찰싹.찰진 뺨 소리가 마침내 계속 폭주하려는 이강우의 입을 틀어막았다.송하나는 이 뺨 한 대에 온 힘을 쏟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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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라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이강우는 오히려 끈질기게 달라붙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홍경자 할머니와의 정을 생각하여 서로에게 마지막 체면이라도 남겨주려 했다.그런데 왜 결국 이렇게 칼날이 곤두선 듯,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는 결말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다음 날 아침.이강우는 밤새 가시지 않은 울화통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그의 안색은 창밖의 흐릿한 날씨보다 몇 배는 더 침울했다.주방에 막 발을 들여놓자 이미 안주인 석에 앉아 있던 홍경자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추궁을 시작했다.“너 또 하나 괴롭혔지?”이강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딱딱한 말투로 부인했다.“그런 적 없어요.”“내 앞에서 거짓말할 생각 마!”홍경자의 말투가 더욱 강경해졌다.“하나가 오늘 아침 일찍 떠났어! 아침도 나랑 같이 안 먹고 가버렸단 말이야. 비록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잔 게 훤히 알리더라. 네가 아니면 하나가 뭣 하러 급하게 떠났겠니?”이강우는 어젯밤에 뺨을 맞은 일을 떠올리니 또다시 분노가 치솟았다.그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아니라고 했잖아요. 제발 억측 좀 하지 마세요.”홍경자는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이제 막 나무라려던 참인데 무심코 볼에 난 손자국을 발견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시 한번 확인해보려는 듯싶었다. 한편 두 눈동자에는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얼굴에 난 붉은 자국은 뭐냐? 뺨 맞은 자국 같은데? 설마 하나가 때렸어?”이강우는 피식 웃으며 야유 조로 대답했다.“걔 말고 누가 더 있겠어요? 제가 허구한 날 스스로 뺨 때리면서 놀 리는 없잖아요.”이 말을 들은 홍경자는 화내긴커녕 되레 바짝 긴장하며 그에게 따져 물었다.“그럼 넌 혹시... 하나한테 손찌검했니?”그녀는 자신의 손자가 얼마나 오만한 성격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강우의 인생에 본인이 남을 괴롭히는 일은 부지기수여도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은 단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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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이강우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양복 재킷을 집어 들었다. 분노가 채 가시지 않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잠시 후, 정원에서 자동차 엔진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점점 더 멀어져갔다.줄곧 홍경자 곁에 서 있던 안정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나직이 말했다.“어르신... 도련님이 사모님을 아예 신경 안 쓰시는 건 또 아닌 것 같네요.”홍경자는 텅 빈 현관문 입구를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그녀의 눈가에는 복잡한 걱정이 드리워졌다.“어휴, 강우가 단호하게 놓아줄 수 있다면 나도 마음이 편할 텐데. 하나를 우리 집안으로 들여서 친손녀로 삼으면 되잖아. 그래도 난 똑같이 아끼고 보살펴줄 수 있는데, 지금처럼 우리 하나 속상하게 할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욱 깊은 안타까움을 담아서 말했다.“지금 내가 가장 걱정되는 건 강우 저 녀석이 제 마음을 알지 못하다가 어느 날 깨달아버린다면 그땐 진짜 늦어버린 거잖아. 하나 그 아이는 겉보기엔 다소곳해 보여도 누구보다 강단 있어. 한번 마음이 돌아서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안정인은 별안간 무언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어르신, 제가 또 들은 바에 의하면 도련님이랑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심씨 가문의 심성빈 도련님도... 사모님께 유난히 마음을 쓰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얼마 전 청림시에서 심성빈 씨가 사모님을 구하려다 다치셨는데 그 일로 저희 도련님과 사이가 엄청 틀어지셨대요. 두 분 거의 싸울 뻔했다는 말도 있던데요.”홍경자는 이 말을 듣더니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러다 결국 더욱 깊은 안타까움과 손자의 집요한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로 변해갔다.“하나가 얼마나 괜찮은 애인지는 눈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지. 강우는 사업이나 다른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똑똑하고 강단 있는 애인데 감정 문제에서는 왜 이렇게 멍청하고 갈피를 못 잡는지 모르겠어! 송태리 같이 천박한 여자한테 마음을 빼앗긴다는 게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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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정말요? 너무 잘됐네요... 연구원님, 진짜 고맙습니다! 연구원님은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송하나는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를 더 건네고 두 분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야 입원 병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병실 문 앞에 이르자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그녀가 가볍게 노크했더니 안에서 간병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누구... 찾으세요?”“안녕하세요, 서유준 씨 친구인데요. 어르신 병문안 왔습니다.”송하나는 예의 바르게 말씀드렸다.“서 대표님 친구분이시구나. 어서 들어오세요.”간병인은 반갑게 맞이하며 문을 열어주었다.“일단 앉아 계세요. 대표님은 방금 의사 사무실에 가셨어요. 지금 바로 모셔오겠습니다.”송하나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어르신은 침대 머리에 반쯤 기댄 채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정신 상태가 확실히 많이 나아졌다.인기척 소리에 어르신이 고개를 들고 돋보기를 밀어 올리며 자애로운 눈길로 송하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누구 찾으시죠?”송하나는 가져온 과일과 꽃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는 서유준 씨 동료인 송하나라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여기서 요양 중이시라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문병 왔습니다.”어르신은 귀가 조금 어두워서 가장 중요한 ‘동료’라는 두 글자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서유준과 그녀의 이름만 포착했다.그는 순간 두 눈을 반짝이며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자네가 바로 유준의 여자친구였군. 어서 앉게. 서 있지만 말고.”어르신은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 옆 의자를 가리켰다.“이 망할 놈이 숨기는 건 참 잘한다니까. 드디어 여자친구도 내게 보여주는구려.”“할아버지, 오해하셨어요.”송하나는 재빨리 설명했다.행여나 어르신이 제대로 못 들으실까 봐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더 높였다.“저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동료예요. 함께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뭐라고? 이제 막 함께했다고?”어르신은 또 잘못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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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이때, 간호사가 치료 트레이를 들고 들어와 어르신의 체온을 재기 시작했다.어르신의 붉어진 얼굴과 웃음이 멈추지 않는 모습에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할아버지,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안색이 정말 좋아 보이시네요!”어르신은 곧장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그럼, 당연히 기쁘지! 내 평생 가장 큰 소원이 바로 우리 외손자가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일으키는 건데 이 녀석이 드디어 철이 들었지 뭐야. 아니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손주며느리를 데려오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나?”간호사는 웃으며 할 일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한편 어르신은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는지 바람을 쐬고 싶다면서 산책하러 가겠다고 했다.그것도 외손주며느리인 송하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콕 집어 말했다.서유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송하나를 향해 미안함 섞인 눈길을 보냈다.“저야 좋죠! 오늘 날씨도 좋으니 저랑 함께 산책가요, 할아버지.”송하나는 싱긋 웃으며 먼저 나서서 어르신의 팔을 부축하고 흔쾌히 대답했다.이른 아침, 흐릿했던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맑게 개어 있었다.햇살은 따사롭고 병원 아래 아늑한 정원은 싱그러운 초록으로 가득했다.송하나는 조심스럽게 어르신을 부축하고 그늘 아래 벤치에 앉혔다.서유준도 옆에 함께했다.눈앞의 화목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그는 마음이 심란해졌다.송하나의 사려 깊음과 너그러움에 감사하면서도 외할아버지의 오해 때문에 민망할 따름이었다.그와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은밀한 기대감이 싹트고 있었다.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이 헛된 환상이 아니기를, 그녀가 정말 자신의 여자친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한편 어르신은 곁에 있는 두 사람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더 잘 어울려서 어르신의 눈가에 온통 흐뭇함이 가득했다.그는 한 손으로는 송하나를, 다른 한 손으로는 서유준을 잡고 불쑥 본론에 들어갔다.“유준아, 언제쯤 하나랑 결혼할 생각이야? 내가 비록 몸이 허약하지만, 너희 둘 결혼식을 준비할 것만 생각하면 온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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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지금은 또 눈 깜빡할 사이에 서유준의 외할아버지한테 와서 빌붙더니 서유준 여자친구 행세까지 한다고?송태리는 코앞에 다가온 호화로운 저택을 날려버린 것만 생각하면 분노와 증오, 그리고 아쉬움까지 온몸을 휘감을 지경이었다.게다가 요 며칠 이강우도 회사 일로 정신없이 바빠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혼자 남겨진 송태리는 산더미 같이 쌓인 서러움과 분노를 그 어디도 풀 곳이 없어 끙끙 앓고 있는데 이 천한 년 송하나가 뻔뻔하게 서유준의 여자친구로 둔갑해서 상대방 가족들한테까지 저토록 예쁨받고 인정받고 있다니.왜 모든 좋은 일은 송하나만 독차지하는 걸까?병실로 돌아온 송하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어르신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그때 서유준이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짙은 표정에 깊은 미안함을 담아 목소리를 내리깔고 성심성의껏 말했다.“하나야, 아까 일은... 정말 미안해. 외할아버지 말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송하나는 담담하게 미소를 짓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괜찮아요, 선배. 할아버님께서 기운 차리시고 빨리 건강만 회복하신다면 이 정도쯤이야 신경 안 써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편안하게 잠든 어르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지막이 덧붙였다.“할아버님께서 기운이 좀 좋아 보이시는 것 같으니 저도 안심이 돼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괜히 방해될라.”“그래.”서유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병실 문 앞까지 배웅했다.“하나야, 오늘 외할아버지 병문안까지 와줘서 정말 고마워.”그는 문 앞에 서서 뒤돌아 멀어지는 송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잔잔하게 피어올랐다.송하나가 막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노골적인 적의를 품은 실루엣이 불쑥 나타나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송태리였다.송태리는 야유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누군가 했네! 이렇게 정성껏 병원에 와서 착한 척하는 거야? 하나 너는 사람 마음을 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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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송하나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졌고 그 안에는 전례 없는 흉악함과 날카로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그녀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뚫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뱉지 마라!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할머니를 한 번만 더 저주한다면 그땐 네 아갈머리를 확 찢어버릴 거야! 걱정 마. 난 뱉은 말은 꼭 지켜!”할머니는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기에 그 누구도 감히 저주하거나 헐뜯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복도 끝에서 침착하면서도 다소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이강우가 비서와 그룹 임원들을 대동하고 사고 피해자를 문병하기 위해 병원으로 오고 있었다.입원 병동에 막 들어섰을 때, 멀리서 대치하고 있는 송하나와 송태리를 발견했다.한편 송태리가 곁눈질로 이강우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더니 재빨리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곧이어 선명한 손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흐느끼는 목소리에도 서러움이 가득 찼다.“하나야...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난 그저 네 사촌 언니로서 걱정돼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분수 좀 지키라는 게 그렇게 잘못됐니? 밖에서 함부로 딴 남자랑 엮이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고 그렇게 되면 네 명성에도 흠집이 날 거잖아. 어떻게 이런 일로 나한테 손을 대...”그녀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런 걸 두고 피해자 코스프레의 정석이라고 하는 걸까?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강우가 미간을 확 구겼다.그는 손을 들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혼자 빠르게 다가갔다.그의 시선은 제일 먼저 송태리의 얼굴에 꽂혔다.눈에 띄는 붉은 자국을 보더니 이강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고, 억눌린 분노가 눈가를 맴돌았다.그는 송하나를 휙 돌아보며 목소리를 내리깔고 확신에 찬 태도로 추궁했다.“송하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난폭하고 거칠어졌어? 옳고 그름도 안 따지고 무작정 사람을 치고 보는 거니? 너 고작 이것밖에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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