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후 전설이 된 여자: Chapter 341 - Chapter 350

423 Chapters

제341화

어둠 속에서 강하면서도 따뜻하게 스치는 남성적인 향기가 강시원의 굳어버린 몸을 휘감았다.벽에 등을 바짝 더 기댄 강시원은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해 머릿속에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큰 기럭지를 자랑하는 서정혁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자 강시원의 몸 위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이슬에 젖은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그 모습에 눈빛이 더욱 깊어진 서정혁은 저도 모르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두 사람의 발끝이 무심코 부딪혔다.예전에는 강시원이 조금만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도 짜증이 나 피했었는데 지금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할머니가 안 계셨다면 방금 나한테 손을 댄 순간 바로 한 대 쳤을 거야.”강시원은 화가 나 입술이 살짝 떨렸다.“왜 그리 태연한 척하는 거야?”서정혁은 숨통이 꽉 막혔지만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강시원, 나랑 5년이나 같이 잤으면서 이런 말 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5년? 2년 반도 안 돼.”강시원은 주저 없이 맞받아치며 서정혁의 냉담함과 거만함, 그리고 위선적인 모습을 그의 눈앞에서 낱낱이 까밝혔다.“본인에게 물어봐,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부부라고 할 수 있었는지.”강시원의 날카로운 시선은 차가운 단검처럼 서정혁의 목을 가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서정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적어도 절반 이상의 시간은 임지민과 늘 붙어 다니거나, 임지민을 데리고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병을 보러 다녔잖아. 설령 집에 있어도 우리가 일주일에 같은 침대에서 같이 자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됐고.”그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서정혁, 우리가 부부였던 건 맞지만 사실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잖아.”눈시울이 붉어진 남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임지민은...”강시원이 피식 웃었다.“결백한 사이? 그냥 여동생이라고?”숨이 턱 막힌 서정혁은 벽을 짚은 팔의 근육 라인마저 극도로 팽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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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2화

자태가 정말 고결하고 우아했다.강시원의 드러난 하얀 피부를 응시하던 서정혁은 눈빛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눈을 살짝 감았다.“시원아, 할머니가 준 비취 팔찌는 왜 안 끼고 다녀? 정말 최고급 물건인데!”박해순이 강시원의 가는 팔목을 꽉 잡았다.“마음에 안 들어?”“그럴 리가요? 정말 좋아해요. 다만 팔찌가 너무 귀한 물건이라 제가 따로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일도 없고 평소에 끼고 다니면 눈에도 너무 띌 것 같아서요.”강시원은 할머니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설명했다.“게다가 제가 워낙 덤벙거리는 성격이라 여기저기 부딪히기 쉬워요. 이렇게 비싼 액세서리를 끼고 다니면 망가뜨릴까 봐 부담스러워서 잘 간직해 두고 있을 뿐이에요.”“바보 같은 녀석, 액세서리는 끼고 다니라고 있는 건데 꽁꽁 숨겨두면 어떡해? 넌 우리 서씨 가문의 안주인이야, 이런 장신구는 신분의 상징이자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아. 자기 분수를 모르는 요 녀석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어야지.”말을 마친 박해순은 서정혁에게 눈짓을 했다.하지만 강시원의 팔목에 정신이 팔린 서정혁은 멍하니 바라볼 뿐, 할머니의 숨은 뜻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강시원은 할머니 뜻을 알아챘지만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할머니의 진심은 알지만 본인은 서정혁을 상대로 그저 겉치레인 연기를 할 뿐이었다.“그냥 당당하게 끼고 다녀, 망가지면 할머니가 또 사줄 테니.”박해순은 서정혁을 쳐다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위엄이 다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정혁아, 언제쯤 당당하게 네 와이프를 공개할 거야? 시원이가 벌써 5년이나 숨어 지냈어. 이대로 계속 둘 셈이야?”서정혁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강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할머니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지금 이 상태로 만족스러워요. 원래부터 밖에 나서서 사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괜찮아요. 이래야 제가 좋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고 정혁 씨의 삶도 간섭하지 않을 수 있어요. 정혁 씨가 워낙 자유로운 사람이라 저는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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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3화

배기훈의 시선이 이내 두 사람이 꽉 쥔 손으로 향했다. 그 순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부부간의 화목하고 따뜻한 풍경을 마주하자 왠지 모르게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심장이 뒤틀리는 듯 아팠고 넘을 수 없는 큰 벽이 목구멍 깊숙이 가로놓인 것처럼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강 건너편에 서 있는 남녀 두 사람이 용모가 너무나 빼어났기에 배기훈의 어머니도 당연히 그 모습을 보았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강시원에게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서정혁의 준수한 얼굴에 고정되었다.한참 뒤, 시선을 내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훈아, 가자.”그러나 배기훈은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기훈아? 빨리 가.”“어? 혹시 효선이니?”놀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배기훈 엄마의 본명이 바로 한효선이었다.표정이 굳어진 한효선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행동했다.김설연이 서유정을 데리고 다가오자, 그제야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설연아, 오랜만이야.”그제야 정신을 차린 배기훈은 어두웠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자신의 어머니가 서정혁의 어머니와 아는 사이일 줄은 정말 예상 못 했다.어두운 눈빛으로 배기훈의 얼굴을 바라본 김설연은 여기서 배기훈을 만난 것에 꽤 많이 놀란 상태였다. 물론 서유정도 마찬가지였다.“아, 소개해 줄게.”김설연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본 한효선은 활짝 웃으며 배기훈의 차가운 큰 손을 잡았다.“이쪽은 내 아들, 배훈이야.”배기훈이 곧바로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배기훈입니다.”한효선도 살짝 놀란 얼굴로 서둘러 말을 고쳤다.“미안하다 아들, 엄마가 입에 밴 대로 불렀네. 배기훈이야.”“배 대표님이 효선이 아들이라니, 정말 뜻밖이네요.”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굳어진 김설연은 약간 어색한 기색으로 말했다.한효선이 놀란 듯 물었다.“기훈아, 너 설연이를 알아?”배기훈은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시선은 강시원에게서 한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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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4화

“우리 아들과 며느리, 결혼한 지 벌써 몇 년 됐어. 며느리는 우리 서씨 가문 핏줄을 이어받은 귀여운 손자까지 낳아줬어. 애가 벌써 다섯 살이야. 원래 며느리한테 한 명 더 낳아 1남1녀면 더 좋겠다고 했는데 며느리가 첫 아이 낳을 때 난산으로 몸이 많이 상했어. 손녀 보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걱정이 돼서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어.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은 거니까.”김설연은 말을 이어가며 어두운 눈빛으로 배기훈의 표정을 살폈다.하지만 배기훈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복숭아꽃 같은 눈동자는 안개가 싸인 듯 희미해 기쁨과 분노를 알 수 없었다.한효선이 미간을 찌푸렸다.“기훈아, 너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언제 서 대표님 와이프를 알게 된 거야?”“저 집 손주와 다울이가 같은 반 동창입니다.”배기훈은 낮은 목소리로 억누르듯 말했다.“그저 그뿐입니다.”“그뿐이라고요? 배 대표님, 저희도 다 알아요. 저희 새언니와 사적으로 아주 각별한 사이시잖아요.”서유정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올렸다.“지난번 부태사에서 우리 가족과 딱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배 대표님께서 저희 새언니 곁에서 각별히 챙겨주시는 모습, 다 봤어요.”깜짝 놀란 한효선은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아이고, 사모님 오해 마세요. 그때 저희 새언니가 다치셔서 거동이 불편해 배 대표님께서 안아서 휠체어로 옮겨줬을 뿐이에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서유정은 일부러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괜히 한마디 더 보탰다.한편 강시원은 박해순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신을 줄곧 응시하는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더욱이 두 남자 사이에 감도는 거센 기 싸움도 눈치채지 못했다.갑자기 차고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쳐 호수 위에 잔물결이 일었다.강시원은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얇게 입었다. 게다가 입원하였던 동안 배기훈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바깥 날씨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점점 바람만 스쳐도 쓰러질 듯한 여린 온실 화초처럼 변해 있었다.차갑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자 온몸이 싸늘한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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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5화

배기훈은 입을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하지만 깊고 어두운 복숭아꽃 같은 눈동자에서 살을 에는 듯 차갑고도 예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설연아,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혹시 우리 아들이 너의 며느리와 뭐 떳떳하지 못한 관계라도 맺고 있다는 소리야?”얼굴이 잔뜩 어두워진 한효선은 분노가 치민 듯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우리 아들은 인성도 좋고 품행이 단정해. 네 아들처럼 명문가 자제로서 엘리트 교육도 받고 자랐어, 그런데 어떻게 유부녀와 이상한 사이로 얽힐 수 있겠어? 아무리 뚫린 입이라고 해도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거만하게 입꼬리를 올린 김설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물론 그런 일이 없다면 나야 더없이 좋지. 내가 혼자 생각이 많았던 걸로 하자.”한효선은 여전히 가슴이 답답해 한마디 반박하려 했다. 바로 그때 배기훈이 아주 단호하게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엄마, 가요.”말을 마친 뒤 배기훈은 인사 한마디 없이 어머니를 밀고 차가운 바람처럼 서씨 모녀 앞을 스쳐 지나갔다.“엄마, 진짜 깜짝 놀랐어요.”서유정은 이제야 배기훈의 떡 벌어진 어깨와 뒷모습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한효선 사모님 아들이 바로 배기훈이었다니! 예전에 배씨 가문에 배강수가 절대 외부에 입도 뻥긋 안 하는, 남들에게 드러내기 꺼리는 사생아가 한 명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사람이 배기훈일 줄 몰랐어요!”김설연의 눈빛은 한겨울 폭설처럼 싸늘했다.“원래 이름이 배훈이었는데, 나중에 스스로 이름을 바꿨으니 못 알아볼 수도 있지.”“잘 사는 사람이 왜 이름을 바꿨을까요?”서유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그런데 ‘훈’이라는 이름, 너무 평범한데, 배강수가 아이한테 왜 그런 이름을 지어준 건지 모르겠네요.”“일개 사생아가 어찌 네 오빠 같은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어? 아버지에게 중시 받지 못하는 아이는 이름조차 대충 짓기 마련이지.”김설연은 뭔가 자기가 우세를 점한 듯한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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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6화

“기훈아, 듣고 있니?”배기훈이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그러면 엄마가 네 아빠한테 부탁해서 선 자리 좀 알아봐달라고 할게. 아빠가 알아보면 그래도 아가씨들이 하나같이 용모도 빼어나고 집안도 훌륭해서 김설연 며느리랑은 비교도 안 될 거야. 그 사람들과 인연 맺으면 네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거다.”배기훈이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필요 없습니다.”잠시 침묵하던 한효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기훈아, 너 정말 서정혁 와이프하고 알고 지내는 사이 맞니?”“안면은 있습니다.”“설마 김설연이 말한 것처럼 너희 둘이...”배기훈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런 사이 아닙니다.”“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 여자는 유부녀에 아이까지 있는데 왜 남편 잘 모시고 아이 잘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너와 몰래 가깝게 지내려 들어? 보아하니 속셈이 이만저만이 아닌 사람 같구나. 최대한 거리 두고 지내.”한효선은 안도하며 온기가 없는 배기훈의 손을 꽉 잡았다.“기훈아, 네 아빠가 간신히 마음을 열어 너를 배강 그룹으로 불러들인 거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우리 모자가 제일 잘 알잖아. 엄마가 하는 모든 일은 다 너를 위한 거야. 그러니 이번 기회는 꼭 잘 잡아야 해, 다시 제멋대로 굴면 안 돼.”배기훈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듯했지만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정말... 저를 위한 건가요?”한효선은 어깨를 살짝 떨더니 입술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깨물었다.“엄마가 저를 위한 거라고 믿을게요.”배기훈은 두 손으로 한효선의 어깨를 천천히 살짝 아래로 눌렀다.“세상의 엄마들 중에 자기 친아들 생각 안 하는 엄마가 어디 있겠어요. 귀국하기 전까지는 엄마가 단 한 번도 제 입장을 생각해준 적 없었지만 말이에요. 엄마는 내 엄마이긴 하지만 그 전에 배강수 와이프고 배명욱과 배율희의 계모이기도 하죠.”한효선이 쓴웃음을 지었다.“기훈아...”“제가 서씨 가문 와이프와의 관계에 대해선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배기훈은 입꼬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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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7화

한밤중, 강시원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그러다가 고개를 든 순간 소파 팔걸이에 걸린 서정혁의 정장이 무심코 시선에 들어왔다. 오늘 억지로 그녀 어깨에 걸쳐주었던 그 옷이었다.눈빛이 정장에 멈춘 순간 수많은 추억이 머릿속에 밀려 들어왔다.돌이켜보니 정말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괴로울 필요가 없는 억지로 고통받은 굴욕적인 시간들이었다.강시원의 어머니는 평생 집안일 한 번 하지 않고 빨래도 요리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 손에는 가는 굳은살이 배어 있었고 한 번밖에 없는 짧은 청춘을 연구와 사업에 바쳤다.반면 강시원 본인은 아이 방과 부엌 사이에서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했다. 가늘고 하얗던 손도 지금은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듯 거칠어져 있었다.학업도, 전문 기술도, 원래 자신이 손에 꼭 쥐고 자랑스러워했던 별처럼 빛나던 재능들을 모두 스스로 버렸다.서정혁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이토록 혐오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문득 한 구절의 말이 떠올랐다.인생이란 먼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며 그러면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부족한 사랑을 메우기 위해 사랑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참으로 마음에 새길 인생 명언으로, 죽은 뒤 비석에 새겨도 좋을 말이었다.남자의 정장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강시원은 현관으로 가 쓰레기통 뚜껑을 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안에 던져 넣었다.오늘 서정혁이 유독 자신에게 잘해주었다. 그녀가 서정혁을 사랑할 때는 갖지 못했던 친밀한 행동들이, 마음이 식어버린 지금 하나둘 이루어지고 있었다.강시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왜냐면 그건 단지 할머니 앞에서의 연극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예전이라면 가슴이 두근거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몹시 위선적으로 느껴지며 심지어 역겨울 따름이었다.이때 탁자 위 휴대폰이 울렸다.서둘러 다가가 보니, 다름 아닌 배다울의 전화였다.이렇게 늦은 시간인 데다 배다울이 절대 보채는 성격이 아니기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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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8화

‘어머! 진짜 미치겠다!’매번 배기훈한테 끌려가 방패막이 역할만 하더니, 이런 결정적인 순간엔 몸이 먼저 반사적으로 대답해 버렸다.이러다 몇 년 뒤엔 정말 공식적인 자리에 파트너로 참석해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이마에 손을 짚은 신우민은 잔뜩 취한 배기훈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시비 걸려던 남자는 신우민이 나서자 더 이상 손을 대려 들지 않고 그저 얕보듯 흘겨보았다.“쯧쯧, 근육 하나 없고 엉덩이도 평평하네? 같고 얼굴은 기생오라비처럼 하얗고 수염도 없어 정말 못생긴 게이가 따로 없군. 취향 정말 별로다.”말을 마친 남자는 서운한 듯 돌아가 버렸다.신우민은 홀로 남아 이를 악물며 격분했다.“제길! 너야말로 못생긴 게이야! 너 두고 봐!”“신 선생님!”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온 황근우는 만취해 정신을 잃다시피 한 배기훈을 보자 처음 본 이 모습에 당황했다.“대표님... 어쩌다 이렇게 취하신 겁니까? 평소에 밖에서 이렇게 술을 많이 드시는 일도 없고 이렇게 만취할 일도 없는데!”“누가 알겠어요. 연애하다 차여서 상처받았거나, 그냥 몸 상태가 안 좋은 거겠죠.”신우민은 연이어 고개를 저으며 배기훈의 맥을 짚어보았다. 맥박은 다소 빨리 뛰는 듯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그냥 술에 취해 멍해진 거예요. 빨리 룸 잡아서 술 깰 때까지 자게 해요.”얼마 지지 않아 황근우와 신우민은 만취한 배기훈을 부축해 룸으로 데려갔다. 꿀물을 타 먹인 뒤 술 깨는 약을 먹은 뒤 두 차례 토하고 나서야 하얗게 질렸던 남자의 얼굴이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왔다.“제길...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야, 너 정말 내가 아는 배기훈 맞아? 내가 아는 그 배 대표 맞냐고? 대답해 봐!”신우민은 두 손으로 배기훈의 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깨우고 싶었지만 토할까 봐 함부로 흔들지도 못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우민아... 아파.”배기훈이 축축한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눈부신 검은 눈동자는 깊은 계곡에 떨어진 얼음처럼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산산조각이 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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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9화

강시원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배씨 가문 별장에 도착했다.문을 들어서자마자 배다울이 울면서 그녀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작은 몸으로 덜덜 떨며 통곡했다.“아빠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됐거나, 무슨 일이 있어 전화 못 받았을 거야. 다울아, 겁내지 마, 오늘 밤 이모가 곁에 있어 줄게.”강시원은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 한쪽이 왠지 시리고 뭉클해져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사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강시원인지라 행복한 세 식구가 한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늘 동경해 왔다.자신의 아들에게서 얻지 못했던 소박한 행복을 배다울을 통해 조금씩 되찾으며 텅 빈 마음의 빈 구멍을 메워가고 있었다.배다울은 강시원에게 의지하듯 작은 얼굴을 그녀 허리에 깊이 파묻었다.“시원 이모... 계속 곁에 있어 주면 안 돼요? 엄마처럼...”쓴웃음을 지은 강시원은 허리를 숙여 울어 퉁퉁 부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녀석의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파 이마에 입을 맞췄다.“이모가 네 엄마는 아니지만 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가장 빨리 네 곁으로 올게.”‘마치 네 아버지가 나에게 그래 줬던 것처럼.’집 안으로 들어간 후, 배다울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고집부리며 배기훈 방에서 자고 싶어 했다. 아빠의 냄새가 나는 침대에서 자야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강시원은 어쩔 수 없이 녀석을 데리고 배기훈 침실로 왔다.엄마 노릇을 해본 강시원인지라 아이 재우는 건 능숙했기에 녀석도 이내 편안하게 잠들었다.강시원은 배다울의 이불을 잘 여며준 뒤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왔다.이때 소파에 남자가 정리하지 못한 옷가지가 어질러져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책상에 산처럼 쌓인 서류도 보였다.‘집에 가정부가 있을 텐데, 왜 이리 어질러져 있을까?’한참을 바라보던 강시원은 결국 참다못해 자연스럽게 방 정리를 시작했다.옷을 개어 옷장에 넣으려고 문을 연 순간 시선이 갑자기 굳어버렸다.이 남자와 처음 만났을 때 배기훈이 입고 있었던, 서도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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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0화

‘설마 스승님께서 말하신 그 아끼는 제자가 바로 기훈 씨일까?’...신우민과 황근우는 힘을 합쳐 축 늘어진 배기훈을 차에 태웠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남자는 영혼마저 부서질 듯 처참한 모습이었다.배기훈이 사는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 황근우가 운전을 하고 신우민은 뒷좌석에 앉아 만취해 정신을 잃은 배기훈을 돌보았다.“신 선생님, 배 대표님과 오랜 시간 절친으로 지내셨으면서 배 대표님과 강시원 씨 사이 일을 정말 전혀 몰랐습니까?”황근우는 백미러를 통해 고민에 잠긴 신우민을 흘끗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이 녀석이 속으로 삼키고 몰래 짝사랑하는 건데 내가 이 자식 머릿속에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고개를 숙여 깊고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배기훈의 얼굴을 바라보던 신우민은 쓸쓸히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네요.”“뭔데요?”신우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배기훈의 머리를 툭 한 대 쳤다.“이 녀석, 진짜 일편단심형이네요. 큰일이네요! 내 말 맞죠? 기혼에 아이까지 있는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었잖아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에 변함없이!”‘배기훈. 도대체 강시원 씨를 얼마나 좋아했기에 오늘 이토록 초라하게 무너지는 거야. 너라는 사람에게 이처럼 나약해지는 모습도 있구나.’배기훈을 집 앞까지 데려다준 뒤 신우민은 혹시라도 아이가 자는 걸 방해할까 봐 먼저 자리를 떴다.배기훈을 부축하고 집 안에 들어서려던 황근우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강시원과 마주쳤다.“시원 씨?”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강시원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달려와 함께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황 비서님, 기훈 씨 어떻게 된 거예요?”황근우의 귓가에 배기훈이 취중에 털어놓은 진심 어린 고백이 맴돌았다. 살짝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배 대표님께서...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지 혼자 술을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무슨 큰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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