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571 - Chapter 580

775 Chapters

제571화

강지연은 지도교수를 따라 한 달간 조사를 이어갔다. 마지막 주에는 더블린에서 이틀을 남겨두었다. 지도교수는 전통 축제가 있다며 다른 분위기도 한번 느껴보자고 했다.이번에도 숙소는 민박이었다. 민박 주인은 지도교수의 오랜 친구로 그가 이곳에 올 때마다 늘 이 집에 머물렀다고 했다.이번 조사 첫날 세레니아에 도착했을 때도 바로 이곳이 숙소였다.민박 주인은 축제 날이 되면 아이들이 분장하고 집집이 다니며 춤을 춘다고 설명해 주었다. 강지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도교수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두 사람도 같이 참가해 보지 그래요?”“저희가 무슨 아이도 아니고요.”강지연이 쑥스러워하자 민박 주인과 지도교수는 동시에 웃었다.“우리 눈엔 다 애들 같아서 그래요.”강지연과 민다혜는 그 말에 크게 웃었다.“춤추면서 모은 돈은 전부 기부할 거예요.”지도교수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축제 당일, 강지연과 민다혜는 아이들처럼 분장하고 현지 아이들에게서 춤 동작을 배웠다. 즉석에서 익힌 동작을 그대로 써먹으며 집집이 찾아가 공연을 했다.그날은 큰 눈이 내렸다. 도시 전체가 새하얗게 덮였지만 축제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곳곳에서 음악과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마치 겨울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강지연과 민다혜는 아이들과 함께 동네를 돌며 한 집, 또 한 집 춤을 췄다. 몸이 후끈후끈해질 즈음 또 한 집의 문을 두드렸다.문이 열리며 환한 얼굴이 나타났다가 잠시 굳더니 곧 더 큰 미소로 바뀌었다.민다혜가 강지연보다 더 들떠서 웃었다.“와, 진짜 이렇게 또 만날 수도 있네요!”문을 연 사람은 온하준이었다. 그는 민다혜를 보며 웃었다.“그러게요.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더는 이동 안 하려고요. 그냥 돌아가서 내년 봄에 다시 올 생각이에요.”그는 민다혜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시선은 잠깐 강지연을 스쳤다. 마치 설명이라도 하듯이.강지연의 눈에는 집 안에 있는 안나가 먼저 들어왔다. 안나가 웃으며 손을 흔들자 강지연도 가볍게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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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2화

강지연은 이 집에서 춤을 마치고 민다혜, 아이들과 함께 다음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는 온하준이 또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을 찍고 있었다.민다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단장님, 왜 저는 빵집 사장님이 단장님이랑 더 친해 보일까요?”강지연은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내 전남편이야.”“네?”민다혜는 놀란 표정으로 굳었다가 곧바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그것도 모르고 저는 저 사람이랑 그렇게 떠들고 웃은 거예요? 제 입장은 뭐죠? 단장님, 저는 저 사람을 미워해야 해요, 아니면 원망해야 해요?”강지연은 그 반응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상관없어. 다 지난 일이고 이제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아니죠, 전 안 돼요.”민다혜는 괜히 결연해졌다.“이렇게 좋은 단장님이랑도 이혼한 사람이면 분명 좋은 사람은 아닐 거예요.”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자, 이제 우리 차례야. 춤추자.”아이들의 음악과 노랫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경쾌한 리듬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고 그런 옛 인연을 떠올릴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이미 바람에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오후에는 민다혜와 함께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갔다. 한번 발을 들이니 좀처럼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따뜻한 와인, 구운 사과, 수제 베이커리, 현지 소스와 간식들, 심지어 김밥까지 정말 없는 게 없었다.시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손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눈을 떼기 힘든 건 공예품들이었다.디자인 감각이 살아 있는 니트 모자, 수제핸들, 장신구, 목제 장난감, 양모 제품들까지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강지연은 전부 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한 항아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원래도 그릇이나 병 같은 물건을 좋아했는데 이 항아리는 유독 마음에 들어왔다.하지만 이미 손에는 몇 개의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이건 들고 가기도, 보내기도 애매했다. 강지연은 항아리를 안은 채 한참을 놓지 못했다.“단장님, 안고 계세요. 제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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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3화

“그럼 난 이만 갈게. 두 사람도 즐거운 시간 보내.”온하준은 끝까지 웃는 얼굴이었다. 민다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단장님, 저 사람 웃는 거 너무 여유 있지 않아요?”강지연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축제 시장의 불빛 속에서 온하준도 마침 뒤를 돌아 그녀를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요즘 들어 온하준은 참 자주 웃었다. 그리고 그는 웃을 때 꽤 예쁘기도 했다.고등학생 때 그를 좋아했던 이유도 사실 그것 때문이었다. 늘 싸늘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두르고 있었지만 가끔 웃을 때면 겨울 햇살처럼 눈 부셨다.여전히 서늘한데 묘하게 사람을 흔들어 놓는 그런 미소였다. 그런데 결혼한 오 년 동안 그는 거의 웃지 않았다.‘아마도 나는 너를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래도 이제는 괜찮았다. 어차피 남남이 되었고 저렇게 환하게 웃게 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것도... 아, 젠장. 저런 인간이 운까지 좋은 게 세상 이치가 맞나. 역시 못된 놈들은 인생이 술술 풀린다더니, 하늘이 참 불공평하네.’온하준은 김밥을 발견하고 신이 난 얼굴로 안나에게 말했다.“이거 먹어볼래? 너 김밥 먹어본 적 없다고 했잖아. 맛이 같은지 확인해 보자.”안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그런데 요즘 너 되게 행복해 보여.”“그래 보여?”“응. 이해가 안 돼.”안나는 살짝 빈정거리듯 말했다.“전처한테 관심도 못 받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데?”온하준은 고개를 돌려 강지연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그녀가 행복해 보이잖아. 그걸로 충분해.”강지연은 다음 날 정오 비행기였고 공항에서 온하준을 다시 마주치지는 못했다.이번 세레니아 일정에는 앨런을 데려오지 않았던 터라 가족들은 꽤 걱정했는데 돌아오자마자 앨런이 정확히 공항에 나와 있었다.그는 민다혜까지 함께 태워 먼저 기숙사에 내려주고 다시 강지연을 학교 근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문 앞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있었다.“이게 뭐죠?”강지연이 놀라자 앨런은 즉시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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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4화

세레니아에 머무는 동안 베르덴의 크리스마스를 놓쳤지만 아직 방학이었고 연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돌아온 김에 짐을 조금 정리하고 곧장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가족들 선물을 챙겨 넣은 뒤 앨런을 불러 함께 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강지연은 준비해 온 선물 세 개를 꺼내 조수석 위에 올려두었다.“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건 한 사람당 하나씩이에요. 대신 전해 주세요.”“아, 이건...”앨런이 잠시 난처해했다.“별거 아니에요. 늘 고생 많잖아요.”강지연이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아가씨.”“천만에요.”앨런은 그녀를 강희라의 집 앞에 내려주고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홍순자가 다가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연달아 말했다.“말랐다, 말랐어.”도대체 어른들 눈에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안 말랐다고 하는 걸까.강지연은 난감한 얼굴로 할머니를 안고 애교를 부렸다.“이번에 가서 고기만 먹고 왔어요. 오히려 오 킬로는 쪘다니까요. 더 찌면 춤 못 춰요.”홍순자는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흘겨보았다.“안 쪘어.”그때 강희라가 계단을 내려오며 웃었다.“명절에 네가 없으니까 집이 허전하더라. 예전엔 시우랑 나 둘만 있어도 잘 지냈는데 말이야. 역시 한 번 익숙해지면 돌아가기 힘들어.”강시우도 뒤따라 내려오며 거들었다.“맞아. 네가 크리스마스에 집에 안 오니까 엄마가 하루 종일 나만 보면 트집이야.”강지연이 낄낄 웃었다.“고모, 혹시 오빠한테 결혼하라고 하셨어요?”“그건 아니고.”강희라가 담담하게 말했다.“난 결혼 재촉 안 해. 다만 밖에 애는 없는지만 물어봤지. 혼자 사는 건 상관없는데 혹시 누군가한테 상처 주고 있는 건 아닌지.”“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강시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틀린 말 했니? 서른이 넘도록 소문 하나 없는 것도 이상하잖아. 엄마가 구식이라서가 아니라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나 걱정돼서 그래.”강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이 집 안엔 여자들뿐인 데다 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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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5화

강지연은 온하준이라는 이름이 오빠의 마음속에서 이미 완전히 지워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강시우가 여동생 앞에서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못 들은 척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제 밥 먹자. 할머니랑 엄마가 며칠 전부터 계속 얘기하면서 메뉴를 몇 번이나 바꿨어. 전부 네 취향에 맞춰서.”그 말에는 자신은 늘 뒷전이라는 뉘앙스가 은근히 묻어 있었다. 강지연은 입이 귀에 걸릴 만큼 웃었다.처음 강시우를 알게 됐을 때만 해도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잘해 주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 무섭기는 했다. 기세가 워낙 강했으니까.그런데 집에서, 특히 고모 앞에서의 강시우는 의외로 장난기 많고 허술한 사람이었다.가족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푸짐한 식사를 했다.전날까지 계속 먹던 스튜와 소시지에서 벗어나 늘 먹던 음식으로 돌아오니 또 다른 맛이 느껴졌다.식사가 끝난 뒤에도 자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강지연은 세레니아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새로 배운 현지 춤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집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방으로 돌아왔을 때야 이 한 달간의 여정이 정말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방 안에는 여전히 치자꽃 향의 디퓨저가 은은히 퍼져 있었다. 그녀는 통유리창 앞 부드러운 러그에 앉아 따뜻한 과일차를 한 잔 들고 언제부터인지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올려둔 봉투를 열었다.그 안에는 안나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정중하게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다. 어찌 되었든 안나의 호의를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고맙다는 말은 해야 했다.안나는 곧바로 요청을 수락했고 이모티콘으로 인사를 건넸다. 강지연도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고 나서 메시지를 적었다.[항아리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두 분.]그녀는 일부러 ‘두 분’이라는 표현을 강조했다. 온하준과 안나는 함께인 사람들이니까.안나가 곧 답했다.[별말씀을요.]강지연은 다시 물었다.[그런데 그걸 어떻게 옮겨 오셨어요? 꽤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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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6화

만약 다른 여자가 접시에 담긴 요리를 가리키며 온하준이 만든 거라고 말했다면 강지연은 분명 그 안에 은근한 과시가 담겨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 말을 안나가 하니 이상하게도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하준이 요리 실력 꽤 괜찮아요. 특히 케이크를 정말 잘 만들거든요.”강지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온하준이 케이크를 잘 만드는 건 알아요. 쿠키 하우스도 안나 씨를 위해 꾸민 거 아니었어요?”그 말을 꺼내는 순간에도 강지연은 맹세코 질투라 부를 만한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다만 오래된 기억이 스치듯 지나가며 남긴 옅은 감회와 씁쓸함이 잠깐 머물렀을 뿐이었다.뜻밖에도 그녀의 물음에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저를 위해서요? 아니에요. 전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아요.”“그래요?”강지연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안나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저는 오히려 유치하다고 놀렸어요.”그 순간 강지연의 머릿속에 문득 온하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때 그는 케이크 가게를 왜 쿠키 하우스로 꾸몄는지 현국어로 또박또박 설명해 줬었다.‘그럼 안나는 알아듣지 못한 걸까?’그때 안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준이 왔어요.”‘온하준?’곧바로 휴대전화 화면에 온하준의 얼굴이 나타났다.그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강지연, 안전하게 돌아온 거야?”“응.”강지연은 대답하는 동시에 무심코 화면 속 온하준과 안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득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조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따뜻한 분위기가 감도는 식탁 위에는 그가 직접 준비한 요리들이 놓여 있었고 안나는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온하준은 안나가 앉은 의자 뒤에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서 있었다.강지연은 무심코 화면을 캡처했다.딱 보기 좋은 순간이었다.온하준과 안나는 나란히 미소를 짓고 있었고 유럽식 고풍스러운 집 안에서 두 사람은 마치 한 폭의 유화처럼 보였다.그때 온하준이 말을 이었다.“저녁에 눈 온다더니 일기예보가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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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7화

강지연은 병원에서 온하준과 안나를 마주쳤다.이미 아침이 다 된 시간이었다.홍순자의 상태는 다행히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밤새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몇 시간 정도 경과를 지켜본 뒤, 상태가 비교적 안정되었기에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 쉬기로 하려던 참이었다.그리고 주차장에서 마침 차에서 내리는 온하준과 안나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두 차량이 나란히 서 있었기에 못 본 척하며 지나치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온하준과 안나는 두툼한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롱패딩으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강지연은 그가 패딩을 입은 모습을 본 것이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늘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던 온하준은 패딩이 둔탁해 보이고 격식에 맞지 않는다며 싫어했었다.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가 먼저 홍순자와 강희라 그리고 강시우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지연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누가 아픈 거야?”“별일 아니야.”강시우는 바깥 공기가 차갑다는 걸 핑계 삼아 홍순자를 서둘러 차에 태우며 온하준을 향해 말했다.“관심 가져주셔서 고마워요, 온하준 씨. 어르신도 계시고 하니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말투는 정중했지만 그만큼 차갑고 분명한 거리감이 묻어 있었다.홍순자는 차에 오르면서도 궁금한 듯 물었다.“넌 병원엔 왜 왔어? 어디가 아픈 거니?”“아니요, 제가 아니고요.”온하준이 서둘러 대답했다.“안나가... 감기에 걸려서요.”“날씨가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녀.”홍순자는 끝까지 걱정을 놓지 않았다.“네, 할머니. 감사합니다.”그는 눈시울을 붉힌 채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더 이어질 말은 없었다.홍순자와 강시우의 시선은 잠시 온하준의 팔을 꼭 붙잡고 있는 안나의 두 손에 머물렀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향했다.“얼른 타.”강지연은 마지막으로 차에 올랐다.그때 안나가 그녀를 불렀다.강지연이 돌아보자 안나는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하다가 미소를 지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날씨가 추우니까 조심해요. 저처럼 감기 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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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새해가 되면 많은 무용단과 오케스트라들은 한창 공연 준비로 분주해진다.하지만 강지연의 무용단에는 별다른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다.강희라는 차라리 가족끼리 음악회나 무용극을 보러 가자며 강지연에게도 무대 위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관객이 되어보라고 권했다.그 말에 그녀는 인터넷을 열어 공연 티켓을 찾아보기 시작했다.수많은 제목들 사이에서 강지연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선녀와 봉황’이라는 현국 무용단의 작품이었다.그녀는 홍보 이미지를 보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함이 스쳤다.그리고 그 밑에는 안무 임유경이라고 적혀 있었다.그때 강지연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민다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단장님, 새해 공연 홍보 이미지 보셨어요? 인터넷에 전부 ‘선녀와 봉황’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춤이요...”민다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필요도 없었고 의미는 충분히 전해졌다.“일단 표를 사서 직접 가보자.”강지연이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는 임유경의 인품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 사람에게 인품이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강지연은 세레니아에 한 달 동안 머물러 있었고 임유경은 그녀가 세레니아로 떠나기 보름 전 이미 무용단을 나갔다.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무용극을 완성하고 안무와 연출, 그리고 공연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무대에 오른다는 건 설령 임유경이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강지연에게는 선뜻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지난 한 달 동안 그녀는 세상과 거의 격리된 채 지내며 인터넷을 들여다보지 않았다.그리고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이미 온라인은 이 작품의 홍보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고 그 열기는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퍼져 있었다.더욱이 이 작품은 임유경이 5년 동안 갈고닦아 만든 전통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에너지를 세계 곳곳에 전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모든 홍보 콘텐츠는 불타는 듯한 열정과 정신을 담아냈고 이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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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9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게 무슨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란 말인가.그날 이후 온라인에는 온갖 루머가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보이는 이야기는 이러했다.‘단군신화’는 장시범과 임유경의 공동 작품이었고 강지연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것이다.그리고 다리를 치료해야 한다는 핑계로 장시범에게 접근했고 그는 선후배 관계의 정을 생각해 그녀를 도와주었고 심지어 재활 치료에까지 함께 해주었다는 이야기였다.온라인이 만들어낸 강지연의 최종 목적은 장시범을 유혹하는 것이었고 그가 끝내 넘어오지 않자 임유경과 장시범이 함께 만들고 아직 무대에조차 올리지 못한 작품 ‘단군신화’를 몰래 훔쳤다는 서사로 이어졌다.거기서 끝이 아니었다.강지연, 장시범과 엘리에서 함께 학교에 다녔던 몇몇 학생들이 사진까지 공개했다.사진 속에는 장시범이 ‘단군신화’의 안무를 연습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고 이를 근거로 온라인은 이 작품은 분명 장시범의 것이라고 단정했다.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여러 차례 진행된 공연에서 남자 주인공이 장시범이 아니었던 점이 오히려 이 루머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어버렸다.그 순간 강지연은 남의 남자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불륜녀에 남의 작품까지 훔친 도둑으로 몰렸고 온라인 댓글은 차마 눈으로 담기 힘들 정도로 악랄해졌다.그중에는 분명 임유경이 재력을 등에 업고 사들인 여론 조작 계정들도 섞여 있었고 가짜가 많아질수록 진실은 그사이에 묻혀버리고 말았다.사정을 모르는 사람들마저 그 흐름에 휩쓸려 무차별적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가장 먼저 강지연의 개인 인스타가 초토화되었고 이어 무용단 공식 계정, 그리고 소속 단원들의 개인 계정까지 차례로 폭풍에 휘말렸다.댓글 하나하나는 마치 벌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추잡한 욕설과 비난으로 도배되어 버렸고 몇몇 단원들은 이 집단적인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강지연을 찾아와 눈물을 보였다.만다혜는 처음엔 댓글로 맞받아쳤지만 혼자서 수천수만 개의 손을 이길 수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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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임유경이 일으킨 이 소동이 장시범과 어디까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강지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봉황의 안무가 외부로 흘러 나간 경로는 장시범을 거쳤을 가능성밖에 없었다.하여 강지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선배, 나도 다 봤어.”“그래.”그녀는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장시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건 내 잘못이야. 내가 유경이를 제대로 막지 못했어.”강지연은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고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왜 나랑 엮인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른 여자를 위해 대신 잘못을 빌고 사과를 하는 거지? 이것도 전염병인가?'“선배.”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리게 들렸고 마치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며 말하는 듯했다.“여론을 뒤집는 건 사실 아주 간단해.”“그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장시범의 말투에서 그녀는 이 일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나 지금 베르덴에 있는데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아니. 할 말 있으면 그냥 전화로 해.”강지연의 태도는 단호했다.이미 끝난 사이라면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었다.“한 번만 만나는 것도 안 돼?”이 말은 어쩐지 귀에 익었다.‘온하준도 예전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헤어진 뒤에 하는 공통 대사라도 되는 건가?’“장시범.”강지연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우린 더 이상 만날 필요 없어.”“하지만... 여론이 이대로 계속 가면 선배한테 불리하잖아. 나도 너무 걱정돼서 베르덴까지 찾아온 거야. 선배 도와주려고.”“괜찮아. 고마워.”그녀는 더는 할 말이 없었기에 통화를 끊으려 했다.“선배, 잠깐만요!”그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선배, 너무 매정하잖아.”장시범의 말투에 억울하다는 기색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그래도 난 선배가 상처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선배가 나오지 않아도 내가 도와줄 거야.”“진짜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해.”강지연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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