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Chapter 611 - Chapter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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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1화

노인들의 눈에는 손주 손녀가 언제나 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온하준은 홍순자의 손바닥에 얼굴을 살짝 비비듯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맺힌 물기가 더 또렷해졌고 잿빛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네, 그럴게요.”“그래. 말 잘 들어야 해.”홍순자는 단단한 목소리로 당부했다.“의사 말도 잘 듣고 안나 말도 잘 듣고 할머니 말도 들어야 한다.”“네.”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홍순자는 강지연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복도를 걸으며 강지연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할머니와 안나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할머니의 눈빛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기가 서려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순간 본 안나의 얼굴에는 분명 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병실 문을 나서며 강지연은 한 번 뒤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안나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녀는 온하준의 침대 곁에 서 있었고 그 뒤에 누워 있는 그는 보이지 않았다.“할머니.”복도에서 강지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안나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온하준 상태 얘기였어요? 심각하대요?”안나가 울었던 이유가 혹시 그 때문은 아닐지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괜찮대. 이미 중환자실에서 나왔잖니. 그만큼 좋아졌다는 거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다. 의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니?”그렇다.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은 따라오지 않았다.“할머니, 정말로 온하준한테 음식 해다 줄 거예요?”홍순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엔 우리 때문에 다친 거다. 네 오빠가 병원비도 맡고 간병인도 붙였지만 온하준이랑 우리 집 사이엔 얽힌 게 너무 많다. 그러니 여기서 끊어내자꾸나. 이쯤에서 다 흘려보내자. 지연아, 이건 할머니 마음이다. 너는 네 생각대로 살아라. 그리고 하준이한테 더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애 곁엔 이제 안나가 있으니.”“네.”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 한편이 이유 없이 불안했다.섣달그믐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오자 집 안은 이미 설 준비로 분주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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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2화

강지연은 휴대전화를 쥔 채 무심하게 영상을 넘겼다. 화면은 쉴 새 없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손에 쥔 기계만 붙든 채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꿈을 꾸었다.도시 곳곳이 새해를 맞을 설렘으로 들떠 있던 그날도 섣달그믐이었다.강지연은 홍순자 집에서 나와 치킨 한 마리를 포장해 종이봉투에 담고 온하준을 찾아가던 길이었다.온하준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해는 그에게 처음으로 할머니 없는 설이었다.조금만 오래 서 있어도 얼음 창고에 갇힌 듯 온몸이 시릴 정도로 날씨는 유난히 매서웠다.최근 온하준의 눈빛도 지금 날씨와 다르지 않았다. 얼어붙은 것처럼 차갑고 어딘가 깊은 곳이 비어 있었다.그때 온하준은 할머니와 함께 큰 집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겨 준 유일한 유산이자, 그가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자리였다.강지연은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온 동네가 불빛으로 가득한 날, 그 집 창문만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강지연은 불 꺼진 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화려한 도시의 반대편에서 혼자 남은 어린 늑대가 어둠 속에 웅크려 자기 상처를 핥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그리고 지금 온하준은 그런 모습일 거라 예상했다.하지만 생각은 빗나갔다. 초인종을 오래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친척 집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그도 아니었다. 온하준한테 친척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으니까.그렇다면 친구 집일까. 그 역시 아닐 것 같았다. 온하준은 무너진 모습을 쉽게 남에게 보이지 않는, 자존심 강한 사람이었으니까.어디선가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설을 보내고 있기를 바라며 그녀는 치킨을 든 채 돌아섰다. 그리고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차유준이었다.“어이.”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온하준 찾으러 왔어?”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거 뭐야? 냄새 엄청 좋다.”그는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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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3화

설날 아침이었다.강지연은 밤새 얕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꿈속에서는 고등학생이었고 눈을 뜨면 다시 지금의 현실이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깊이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점심 무렵이 가까워져 있었다.강지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홍순자는 점심 도시락을 모두 싸 두고 병원에 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식은 물론이고 안나의 입맛을 생각해 양식도 따로 준비해 두었다.“할머니, 왜 저 안 깨우셨어요?”이대로라면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홍순자의 미간에 스치는 근심이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굳이 그럴 필요 없지. 보고 싶은 건 내 마음인데 뭐 하러 너까지 데리고 가.”그 말의 속뜻을 강지연은 짐작했다.“잠깐만 기다리세요. 저도 같이 가요.”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은 닫혀 있었다. 강지연이 문을 두드리자 안나가 나왔다.그녀는 강지연을 보는 순간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곧바로 문을 다시 닫았다.“지금 약 갈고 있어요.”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짧은 사이,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정말로 처치 중인 듯했다.“오늘은 좀 어때요?”문 앞에서 조용히 묻자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럭저럭 괜찮아요.”더 이어질 말은 없었다. 강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복도에서 가만히 기다렸다.한참 뒤 의사가 나와 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조여 있던 심장이 조금은 풀렸다.그러나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강지연은 그의 얼굴빛이 어제보다 더 창백해진 것을 보았다. 이불은 목까지 단단히 덮여 있었다.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온하준이 억지로 웃었다.“그 표정은 뭐야? 방금 약 갈 때 조금 아팠을 뿐이야.”조금 아팠을 뿐이라니.강지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칠 년 전, 자신도 병상에 누워 똑같이 말했었다.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하지만 그때는 몸도 마음도 미어질 듯 아팠다.오늘 강지연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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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4화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에 진정한 공감이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강지연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지금의 그녀는 온하준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칠 년 전, 강지연도 병상에 누워 입버릇처럼 말했었다.“안 아파. 괜찮아. 나 곧 나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하지만 정말로 안 아팠을까. 정말로 두렵지 않았을까.온하준은 간절한 눈빛으로 강지연을 바라보고 다시 홍순자를 보며 말했다.“할머니, 부탁할게요. 앞으로는 오지 말아 줘요. 지금 이렇게 무기력하고 초라한 모습을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다 나으면 멋지게, 정말 멋지게 나타날게요. 그때 다시 보면 안 될까요?”홍순자는 길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온하준은 강지연을 바라보았다.“강지연?”그녀는 코끝이 찡해지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지켜보던 홍순자가 엄숙하게 덧붙였다.“그럼 약속해라. 퇴원하면 꼭 할머니한테 말해야 한다. 할머니가 데리러 와서 맛있는 거 사 줄게.”“네. 꼭 말씀드릴게요.”그날 이후, 강지연과 홍순자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며칠 뒤 제인과 에리크는 퇴원했지만 온하준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어느새 정월 대보름도 지났다.오곡밥을 먹던 밤, 홍순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원래는 오곡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는데. 아직 완전히 낫지도 않았을 테니 소화도 안 되겠지.”“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사람 붙여서 보러 갔고 음식이랑 선물도 보내 놨어요.”강시우의 말에 홍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밤, 강지연은 또 꿈을 꾸었다.요즘 들어 유난히 고등학교 시절이 자주 나타났고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과 장면들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마치 다시 그 시간을 사는 것처럼.눈을 뜨면 한동안 현실이 낯설었다.열흘 남짓 지나고 학교도 개강을 앞두고 있었다. 무용단 연습도 곧 다시 시작될 것이다.강지연은 바빠지기 전에 한 번은 병원에 가 보고 싶었다.강시우가 치료비를 책임지고 있고 체납 문제도 없다는 걸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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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5화

“아가씨?”울타리를 넘어 들어온 경호원은 그녀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강지연은 온몸의 힘이 빠진 사람처럼 철제 울타리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경호원이 다시 한번 부르자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눌러 두었던 긴장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온하준, 넌 또 약속을 어겼어. 퇴원하면 말해 준다더니. 도대체 나는 너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믿어도 되는 걸까?’그러나 강지연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이유가 결국 회복 결과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강지연은 문득 고개를 들어 눈앞의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모두 강시우의 최측근이니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온하준 병원비 얼마 나왔어요?”경호원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가 짧게 답했다.“모릅니다.”“오빠는 뭐라고 지시하셨죠?”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저는 모릅니다, 아가씨. 제 임무는 아가씨를 보호하는 겁니다.”강지연은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메말라 있었다.“그래요. 알겠어요.”이들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다면 직접 물어야 했다.늦게 집으로 돌아온 강시우는 2층 계단에 앉아 있는 강지연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지연아? 여기서 뭐 해?”그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온하준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어요?”강시우는 그녀 옆에 앉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준이 퇴원할 때 오빠도 못 봤어요?”잠시 뒤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못 만났어. 병원에서 연락이 왔을 땐 이미 떠난 뒤였어.”“그럼 그냥 사라진 거예요? 안나도 연락이 안 돼요. 너무 이상하잖아요.”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나도 다쳐 본 사람이에요.”강지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때 내가 말없이 떠나려 했던 이유는 하나였어요. 도무지 나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서 온하준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사라지려고 했던 거예요.”강시우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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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6화

강지연은 그 지점에서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 익숙한 치자꽃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그러나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은 아무리 되짚어도 또렷하게 이어지지 않았다.‘고등학교 시절에 온하준이 차유준과 싸운 적이 있었나? 그리고 차유준은 왜 그런 말을 했지?’정말 있었던 일인데 자신이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이 꿈으로 빚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런데도 그 기억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기억 속에 다시 끼워 넣은 것처럼.원래는 학교에 가려던 날이었다.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이른 줄 알았는데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였다.‘이렇게 오래 잤다고?’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홍순자는 이미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할머니, 저 왜 이렇게 오래 잤어요?”오늘은 학교에 가기 어렵겠다 싶었다.“그래. 네 고모가 그러더라. 요즘 네가 피곤해 보인다고. 깨우지 말고 푹 쉬게 하자고.”피곤한 건 아니었다. 다만 꿈이 많았을 뿐이다.“왜 그래, 지연아? 어디 아프니?”“아니에요. 그냥 오늘 학교 가려 했는데 내일 가야죠, 뭐.”그날 밤 그녀는 알람을 오 분 간격으로 연달아 맞춰 두었다. 다음 날은 간신히 제시간에 일어났지만 또 온밤 내내 꿈꿨다.학교로 돌아가면 온하준의 집과 더 가까워진다. 그녀는 다시 그의 집을 찾았다.그러나 문을 열어 준 건 또다시 옆집 이웃이었고 돌아온 적 없다는 대답도 같았다.쿠키 가게도 가 보았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문 앞과 창틀에는 두툼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퇴원하면 한의원에 와서 물리치료를 받겠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또다시 약속을 어겼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한의원을 찾았다.그러나 곽현성은 고개를 저었다.“온하준? 온 적 없습니다.”한의원 문 앞에 선 강지연은 온몸의 힘이 빠진 채, 분노에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했다.화가 났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였다. 그녀는 화단 가장자리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무용단은 정식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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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7화

그 외침 속에서 강지연은 숨이 막혀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신발부터 끼워 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려 도착한 곳은 먼지가 내려앉은 쿠키 가게 앞이었다. 초콜릿색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문 앞에 선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어떤 일들은 이미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다.한 번의 수업, 아무 생각 없이 그렸던 한 장의 그림. 그렇게 사소했던 것들이 왜 지금에 와서 이렇게 되살아나는 걸까.이혼하면 남이라고, 다시는 얽힐 일이 없다고 말했었다.‘온하준, 나는 정말 우리가 남으로 남기를 바랐어. 네가 더 이상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네가 네 행복을 찾아가면 되는 관계. 차라리 처음부터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 이후의 모든 일도 없었을 텐데.’그날 이후 강지연은 현실에서는 온하준을 다시 보지 못했다. 대신 그는 꿈속에선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냈다.학창 시절의 교실과 복도, 운동장, 잊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 사건들.마치 지나온 인생을 다시 한번 통째로 살아내는 듯했다.꿈속에서 또 한 번 삶을 반복하는 일이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앗아가는 탓인지 그녀는 점점 더 잠이 많아졌다.아침마다 몸이 납처럼 무거워 일어나기 힘들었고 어느 주말에는 꼬박 이틀을 잠들어 있었다.가족들은 혹시 병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병원으로 데려가 온갖 검사를 했지만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가장 공포스러웠던 건 여름이었다. 무용단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녀는 닷새를 연달아 잠들었다.그때는 병원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도무지 깨지 않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겁에 질려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그 소동 속에서도 그녀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도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다는 말뿐이었다.깨어 있는 동안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했다. 고강도, 고난도의 무대도 무리 없이 소화했다.가족들은 학업을 잠시 멈추고 원인을 찾자고 했다.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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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8화

안나는 쿠키 가게 앞에 서서 불 꺼진 진열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가게는 예전에 강지연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더러워져 있었다. 몇 차례 비를 맞은 탓에 먼지는 진흙이 되어 유리창을 얼룩지게 덮고 있었다.안나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유리를 닦기 시작했다. 몇 년 묵은 시간의 흔적이 휴지 몇 장으로 지워질 리 없는데도.“안나 씨.”강지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안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돌아섰고 그녀를 보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강지연 씨.”“안나 씨, 돌아온 거예요?”강지연은 심장이 세게 뛰는 걸 겨우 눌러 담으며 물었다. 말끝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써 숨을 고르며.“나는 돌아왔어요.”안나는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한참 전에.”“얼마나 된 거죠?”‘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돌아왔다는 건가? 아니면 함께 돌아왔다는 뜻인가?’“온하준이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돌아왔어요.”그 말에 강지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면 온하준은?’“온하준 회복이 안 좋았어요?”혹시 다리가 심하게 망가져서, 그래서 헤어진 건가. 온갖 추측이 스쳤다.안나는 고개를 숙인 채 씁쓸하게 웃었다.“아니요. 그럭저럭 괜찮았어요.”안도감이 스쳤지만 동시에 더 큰 의문이 밀려왔다. 왜 안나 혼자 돌아온 건지.안나는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강지연 씨, 나는 온하준의 여자 친구가 아니에요.”강지연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뭐라고요?”“나는 온하준이 고용한 사람이에요.”안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 쿠키 가게를 가리켰다.“가게를 꾸렸을 때 직원이었어요. 그런데 두 배 월급을 주면서 강지연 씨 앞에서 여자 친구인 척해 달라고 했어요.”‘왜 그런 짓을...’묻기도 전에 이유가 떠올랐다. 앞으로는 남처럼 지내자고 말했던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온하준은 강지연 씨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 했어요.”조용한 말 속에 희미한 원망이 비쳤다. 강지연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안나 씨,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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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9화

강지연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분주히 오갔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초콜릿색 창문에만 머물러 있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어 안이 비어버린 껍데기처럼 서 있었다.경호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부르지 않았다면 더 오래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발걸음을 옮길 때도 공허했다. 몸이 비워진 듯 속이 헛헛했고 어디에도 단단히 디디고 서 있지 못하는 느낌이었다.차에 올라타자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백색소음처럼 귓가를 채우는 진동이 오히려 의식을 더 흐리게 만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만 같았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다혜였다. 이제는 무용단 부단장이 된, 가장 든든한 오른팔.“단장님, 곧 귀국하시는 거죠? 가을 공연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요.”“응, 아마 며칠 안으로 돌아갈 거야. 지난번 회의안 괜찮았어. 수정한 부분 있으면 보내줘.”“네, 바로 보내드릴게요.”전화를 끊자 파일이 곧 도착했고 강지연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무리 없는 구성이라는 판단이 서자 그대로 진행하라고 답했다.[단장님, 언제 돌아오세요?]그 마지막 질문에서 손이 멈췄다. 두 번이나 답을 썼다가 지우고 결국 짧게 보냈다.[아직은 몰라. 다혜야, 당분간 무용단을 부탁해. 해성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게.][네, 단장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문자를 끝으로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잠깐 눈을 붙이자 어느새 집이었다.요 며칠 집안의 화제는 줄곧 그녀의 귀국 문제였다.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강희라는 이민을 포함해 장기 체류를 고려해 보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홍순자의 적응을 걱정해 결정을 미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달라졌다.강시우의 회사는 국내에서 자리를 잡았고 유럽에서 자란 그조차 이제는 그곳이 더 편하다고 했다.결국 선택은 그녀와 할머니의 몫이었다.오늘은 강시우도 집에 있었다. 온하준의 행방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조차 흔적을 찾지 못했다.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추적하는 시대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감쪽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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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0화

눈앞의 온하준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소년의 턱에 막 돋아난 짧은 수염까지 보였고 눈썹 끝에 맺힌 땀이 석양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이전의 꿈들 속에서 그녀는 늘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객이었고 무대 위 강지연의 삶을 구경하듯 지켜보는 처지였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또 다른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물 안 줄 거야? 뭐 그렇게 멍하니 있어?”온하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강지연은 물병을 꽉 움켜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나한테 한눈 팔려서 그러는 거잖아.”온하준의 뒤에서 웃으며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친 사람, 차유준이었다.고등학생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던 얼굴을 그녀는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았다.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 여겼기에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니 이목구비가 생각보다 선명했다. 그리고 눈빛 어딘가에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스쳤다.그녀와 차유준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두 사람 뭐 하는 거야?”온하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아무것도 아니야. 나 물 좀 줘.”차유준이 길게 팔을 뻗어 그녀 손에서 물병을 낚아챘다.“그거 내 거야.”온하준의 목소리에 드물게 날 선 기색이 섞였다.차유준은 물병을 흔들며 느긋하게 물었다.“이름 써놨어? 부르면 대답이라도 한대?”“강지연 손에 들려 있으면 당연히 내 거지. 네 거야?”이를 악문 온하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내 이름이 안 쓰여 있다고 네 이름이 쓰여 있는 건 아니잖아.”날 선 말투에도 차유준은 웃으며 물병을 흔들었다.“내 거야, 차유준 물. 대답해 봐.”그리고 몸을 돌려 일부러 가느다란 목소리로 덧붙였다.“네, 주인님. 여기 있습니다.”강지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나이대 남자애들은 다 이렇게 유치한 건가.그녀는 가방을 메고 등을 돌렸다. 오늘은 주말이었고 할머니 댁으로 가는 날이었다.익숙한 길을 걷는데도 기분은 이상했다. 마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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