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모니터를 보는 주현우를 본 허아연은 말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모니터에 시선을 돌렸다. 주현우는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넘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자료는 문제없어. 나중에 후반 공사 때 품질관리팀에 좀 더 신경 쓰라고 해."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허아연은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더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허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리고 다시 물었다. "디자인은 더 업그레이드 안 해도 될까요?" 경주 그룹이 투자하는 사업은 아주 다양했다. 실물 사업부터 기술 분야, 그리고 부동산 등이 있었다. 일찍 주현우의 아버지는 부동산으로 경주 그룹을 일으키신 분이었다. "일단 볼게." 주현우는 짧게 답하고 다시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만 너무 가깝고 다정한 거리는 허아연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주현우의 완벽에 가까운 옆모습에 허아연은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 다 허아연이 예쁘다고 했지만 허아연은 오히려 주현우가 더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현우가 입을 열었다. "디자인도 괜찮네. 네가 예산도 잘 잡았어." '주현우가 지금 나 칭찬한 거야?' 허아연은 깜짝 놀랐다. 허아연의 반응에 주현우도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허아연은 주현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주현우는 싱긋 웃는 허아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무 적나라한 주현우의 시선에 허아연은 어쩔 줄 몰랐다. 허아연이 입술을 말아 물며 무슨 말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볼까 고민하던 그때, 주현우가 갑자기 훅 들어와 예고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허아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왜 또 키스하는 거야?' 허아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주현우는 눈을 감은 채 완전히 밀착하며 점점 더 깊게 파고들었다. 허아연은 미간이 살짝 찡그리며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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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마침 핑곗거리가 없던 허아연은 화면에 뜬 전서진이라는 이름에 재빨리 휴대폰을 들며 주현우에게 말했다. "서진 씨 전화예요." 허아연은 일어서며 말했다. "전화받고 올게요." 허아연은 말하며 휴대폰을 들고 도망치듯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전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연아, 내일 저녁 시간 있어? 같이 밥이나 먹자." 통유리창 앞에 선 허아연은 창밖 야경을 보며 말했다. "난 빠질게요, 다들 재밌게 놀아요." 비록 주현우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지만 전서진과 심유환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종종 허아연을 불러 같이 어울리고 가끔 주현우와의 만남을 주도하기도 했다. 몇 번 모임 자리에 나가봤지만 주현우는 두 사람 체면도 봐주지 않고 여전히 허아연에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대하거나 모른 척했다. 게다가 주현우가 매번 다른 여자들과 웃고 떠들며 가깝게 지내는 걸 볼 때마다 오랫동안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자리를 피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갈 마음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 전서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연아, 내일 내 생일이야. 여자애들이 몇 없으니까 너랑 민경이라도 좀 와줘." 허아연은 전서진의 말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허아연이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었다. 사실 허아연은 이미 민망하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전서진 생일 초대인데 더 거절하는 건 실례 같아서 허아연도 초대에 응했다. "그럼 내일 민경이랑 같이 갈게요. 생일 축하해요, 서진 씨." 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주현우가 이미 대신 책상 정리를 마친 뒤였다. 주현우가 책상 앞에서 물러나는 모습에 방금 전 밀착해 있던 순간이 떠오른 허아연은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허아연은 휴대폰을 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주현우에게 말했다. "서진 씨가 내일 생일이래요." "응." 주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시 평소처럼 무심한 모습이었다. 전서진이 또 두 사람이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는 거라고 주현우가 언짢아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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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전서진은 주민경이 건넨 선물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민경 님 와줘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선물은 안 받는 걸로 할게요." 주민경과 인사를 나눈 뒤, 전서진은 바로 배시시 웃으며 허아연에게 인사했다. "아연아." 허아연도 웃으며 선물을 건넸다. "서진 씨, 생일 축하해요." 허아연은 얼굴도 예쁘장한데다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에 말투도 너무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너무 매력적이어서 유난히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전서진도 한층 부드러워진 톤으로 말했다. "고마워, 아연아. 빨리 앉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민경이랑 같이 더 시켜." "네." 허아연은 전서진의 말에 답하며 천천히 자리를 둘러보았다. 주현우의 오른쪽은 비어있었고 왼쪽에는 지참금이 두둑하다던 임윤아가 앉아 있었다. 허아연은 바로 주현우를 스킵했다. 스스로 불편하게 주현우 옆에 앉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허아연이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주현우는 계속 휴대폰만 하고 있을 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임윤아와 눈이 마주치자 임윤아는 스낵을 먹으며 비웃듯 말했다. "아이고, 부대표님 오셨네. 자리 비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전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아연도 무덤덤하게 받아쳤다. "아니에요, 다른 빈자리도 많은데요." 허아연은 바로 주민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민경아, 우리 여기 앉자." "그래." 주민경이 시원스레 답했다. 두사람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전서진도 허아연 오른쪽에 앉았다. 종업원이 음식을 서빙하기 시작하자 주현우는 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맞은편에 앉아 있는 허아연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허아연은 한창 전서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전처럼 몰래 주현우를 훔쳐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주현우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주현우 맞은편에서 전서진과 허아연은 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연아, 남교 프로젝트 착공했지?" 허아연이 전서진의 말에 답했다. "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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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네. 민경이가 술 마셔서 이따가 내가 운전해야 해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건 놀라울 것 없었다. 하지만 주현우가 먼저 말을 걸어온 건9 조금 의외였다. 예전 같았으면 허아연을 봐도 못 본 척 절대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아연아, 아연아. 어디 갔어?" 허아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주민경이 앞에서 찾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어." 허아연은 주민경에게 답하고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 "민경이가 찾아서 먼저 가볼게요."주현우의 답을 듣기도 전에 허아연은 이미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주현우에게 어떤 미련도 남지 않았다. 더욱이 주현우가 먼저 말을 걸어준다고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좋아하지도 않았다. 지난 날 허아연의 사랑은 너무나 초라했었다. 주현우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멀어져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허아연이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진 건지, 언제부터 연기조차 하지 않게 된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현우야, 왜 여기 서 있어?"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심유환이 부르는 소리에 주현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함께 호텔 입구로 걸어가며 심유환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주현우도 허아연은 어느새 뒷전이었다. 잠시 뒤, 사람들이 노래방에 도착하고 허아연은 여전히 주민경 옆에 앉았다. 주현우는 심유환 옆에 앉았다. 오늘 임윤아도 주현우와 가까이 앉을 수 있었다. 다만 주현우가 별로 대꾸하지 않을 뿐이었다. 룸 안 왼쪽 구석에서 주민경은 허아연을 끌고 다른 사람들과 게임 중이었다. 게임을 잘 모르는 허아연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울리려 노력했다. "허아연, 또 지면 진짜 술 마셔야 해." "허아연, 게임 너무 못하는 거 아냐."매번 질 때마다 허아연은 게임 블랙홀 같은 자신의 실력이 민망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주현우는 심유환과 이야기를 나누다 가끔 곁눈질로 허아연을 쳐다보곤 했다. 허아연이 찡그린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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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주현우를 주씨 가문에서 쫓아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허아연에게 그의 재산 절반을 나눠주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유 없이 재산을 절반 넘긴다는 건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허아연과의 관계에서 허아연은 그 정도 가치가 없었다. 전서진은 주현우처럼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난간에 기대어 두 손은 걸친 채 고개만 돌렸다. "그러니까 아연이에게 재산을 나눠주기 싫어서 이렇게 질질 끄는 거면 아연이에게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주현우가 피식 웃었다. "불공평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허아연이 선택한 길이야, 난 할아버지가 허아연한테 했던 약속 지키지 않는 것뿐이고. 서진아, 내 재산의 반을 줄 만큼 허아연이 가치가 있는 것 같아?"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고,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하고. 허아연은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다. 전서진이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 "아연이는 그렇게 큰 욕심이 없어.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좋게 끝내. 이혼에 관해 자세하게 다시 얘기해 봐."주현우는 천천히 담배 연기만 뱉을 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허아연의 비밀을 알아낸 후에도 주현우는 단 한 번도 이혼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전서진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허아연은 확실히 쓸모가 있었다. 허아연이 연기하고 싶다면 끝까지 맞춰줄 생각이었다. 입을 꾹 닫은 주현우에게 전서진이 다시 물었다. "아직 생각이 정리 안 된 거야? 요즘 돌이켜 보니까 아연이도 딱히 나쁠 건 없다고 느껴진거 아냐?" 주현우가 웃으며 말했다. "왜? 또 붙여주려고?" 주현우는 담뱃재를 털며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유환이랑 너희 둘 앞으로 괜히 엮지 마."-할아버지 약속을 진짜라고 믿는 모양이야.-내가 할아버지 계약서 동의 안 하면 조용해질 수밖에 없어. -허아연이 그정도 가치가 있는 것 같아?-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테라스 한쪽에서 주현우와 전서진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허아연은 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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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전서진의 외침 소리에 주현우도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정말 허아연이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주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담배를 꺼버렸다. 옆에 있던 사람이 허아연일 줄 몰랐다. 깜짝 놀란 두 사람과 달리 허아연은 평온했다. 주현우를 흘끗 쳐다본 허아연은 전서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잠깐 전화받으러 나온 거였어요. 먼저 방에 돌아갈게요. 일 봐요." 허아연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말을 마친 허아연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멀어져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아연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전서진은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 "하필이면 아연이가 옆에 있었다니." "또 돌아가서 몰래 슬퍼하겠네. 오히려 잘됐지 뭐.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아연이가 대충 생각이 있을 테니." 주현우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난간에 두 팔을 걸쳤다. 하지만 저 멀리 야경을 볼 기분은 아니었다. 전서진도 똑같이 난간에 기대어 주현우를 보며 물었다. "현우야, 아연이가 정말 재산 때문에 너와 이혼하려는 거라고 생각해?" 주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허아연 본인만 알겠지." 그 뒤로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왔을 때, 허아연은 주민경 옆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카드 게임을 구경 중이었다. 주현우와 전서진이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더 이상 주현우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밤 12시, 주현우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오지은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돌아온 주현우는 정장 재킷을 들고 전서진에게 말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민경이랑 허아연 사람 붙여서 돌려보내." "그래, 알았어. 가서 일 봐." 한밤중에 전화 한 통으로 불러갈 사람이 그분 말고 누가 있을까. 때문에 전서진은 잡지도 않았다. 잡지 못할 걸 아니까. 주현우가 떠나려는 걸 본 주민경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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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왜 나한테 전화도 안 했어요? 언제 돌아왔어요? 내가 여기서 노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주진우는 잔뜩 신난 주민경을 한 손으로 껴안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저녁에 막 집에 도착했어. 네가 여기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길래 데리러 왔지."주민경은 두 팔로 주진우의 목을 감싸안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빠, 이번엔 거의 1년 만이지? 진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그때, 허아연과 전서진 일행도 다가왔다. 허아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진우 오빠." 허아연이 다가오자 주진우는 주민경을 내려놓고 오는 손으로 허아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연아, 오랜만이야." 주진우는 키도 크고 군에서 근무하여 평소엔 엄숙해 보이지만 주민경이나 허아연 같이 어린 여동생들에게는 늘 다정했다. 전서진 일행도 서둘러 따라 인사했다. "형님." "형님." "형님." "진우 형님." 주진우는 일일이 답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 주진우가 전서진을 보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전서진, 생일 축하해." 전서진이 웃으며 답했다. "형님, 미리 얘기라도 해주지 그랬어요. 알았으면 제가 모시러 갔죠." 주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젊은이들이 노는데 끼면 실례지." 주진우는 전서진이나 심유환보다 나이가 많았다. 비록 3상 더 많을 뿐이지만 어려서부터 침착했고 나중에 군대에 간 뒤로는 더 듬직해졌다. 주진우는 원래 술자리나 이런 복잡한 곳보다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주민경은 주진우의 팔짱을 낀 채 잠시도 놓지 않으려 했다. 주민경은 어릴 때부터 주진우를 좋아했다. 주진우가 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에 입대한 뒤로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존경이었다. 주민경 인생의 유일한 아이돌이었다. 전서진과 심유환에게 인사를 마친 뒤 주진우는 허아연과 주민경을 차에 태워 먼저 돌아갔다. 주진우가 앞에서 운전하고 허아연과 주민경은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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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허아연이 고개를 들고 무언가 말하려는데 주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앞에 타면 얘기하기 편하잖아." 그 말에 허아연은 바로 주진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허아연과 주현우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이었다. 말없이 주진우를 바라보던 허아연은 결국 앞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차 문이 닫히고 허아연이 안전벨트를 착용하자 주진우는 시동을 걸었다. 한없이 조용한 도로 위를 비추는 희미한 흰 가로등이 적막함을 더해주었다. 주진우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허아연을 힐끗 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현우와 이혼할 생각이야?" 허아연은 주진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 씨가 지금 손에 있는 프로젝트들 사인만 마치면 절차 밟으러 가자고 했어요." 주현우는 허아연이 재산 분할을 노린다고 생각하여 이혼 서류에 사인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오해만 풀면 망설임 없이 사인할 것이다. 주진우는 이혼을 말리지도 않고, 주씨 가문 입장에 서지도 않았다."현우와 이혼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억지로 말리지 않는 주진우의 태도에 허아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전공과 관련된 일자리를 찾고 할아버지랑 같이 시간 보내려고요." 그 말을 끝으로 주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대부분 부대에 있었지만 허아연과 주현우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나름 들은 것이 있었다. 주현우가 허아연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주진우가 물었다. "어느 회사 가고 싶어?" "스타라이트 테크요. 얼마 이력서 넣었는데 언제든 출근 가능하다고 연락 왔어요." 스타라이트 테크 인사팀 매니저는 허아연의 이력서를 받자마자 바로 대표인 유건희에게 전달했다. 경주 그룹 부대표가 지원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건희는 몇 년 전 국가 인재 양성 프로젝트로 영입한 수재였다. 26살에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바로 교진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 본인의 하이테크 회사를 세우고 최근 몇 년 동안 자동화 기술 분야에서 교진대와 국가 연구에 큰 공헌을 해온 인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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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그때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다. 혼인신고 역시 못하게 해야 했다. ……그 시각, 병원. 오지은은 검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쉬고 있었다. 주현우는 복도에서 전서진에게 전화해 모임이 마무리됐는지, 주민경과 허아연을 집에 데려다주었는지 물었다. 전화기 너머 전서진이 말했다. "너희 형이 와서 민경이와 아연이 데리고 갔으니까 걱정 마." '진우 형이 돌아왔다고?' 주현우는 조금 놀란 듯했다. 계산해 보니 거의 1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주현우와 허아연이 결혼한 뒤로 돌아오는 일이 드물어졌다. 주현우가 몇 마디 더 나누고 전화를 끊고 병실에 돌아가자 오지은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현우야, 정말 미안해. 늦은 밤에 또 오게 해서……"이은빈이 옆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은이가 심장이 아프다고 해서 정말 너무 놀랐어. 예은이도 없는데 지은이까지 잘못되면 나랑 애 아빠 이젠 못 살아." "현우야, 오늘 밤 고생 많았어. 지은이 아빠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지 않았으면 너한테 연락하지 않았을 거야." 주현우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쉬세요. 지은이도 쉬어." 오지은은 못내 아쉬워하며 말했다. "운전 조심해. 내일 재검 결과가 나오면 다시 얘기할게." "응." 주현우는 짧게 답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주현우는 열린 차창 위에 담배를 쥔 손을 걸쳐놓고 다른 손에는 핸들을 잡고 있었다. 바람에 연기가 흩어졌다. 갑자기 주현우 머릿속에 허아연이 떠올랐다. 소리 없이 주현우와 전서진 앞에 나타나던 모습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주현우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반쯤 남은 담배꽁초를 버리고 액셀을 콱 밟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나지 않아 허아연은 기분이 한결 개운했다.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데 침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고개를 들어오니 주현우가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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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허아연이 건네는 합의서를 본 주현우는 머리를 털다 말고 그저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 주현우와 전서진 대화를 듣자 마자 합의서를 내밀다니. 효율이 참 빠르네. 허아연을 한참 쳐다보던 주현우가 머리를 털던 오른손을 내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허아연, 잘 생각했어?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어?" "잘 생각했어요. 아주 꼼꼼히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현우 씨도 나한테 빚진 거 없고 주씨 가문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주씨 가문 걸 받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애초에 결혼할 때도 두 사람은 재산 관련 문제는 없었다. 때문에 지금 이혼한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빈손으로 나간다는 허아연 말에 주현우는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돌아서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현우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아연이 이혼 중에 재산 분할로 한참 실랑이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서진과의 대화를 듣고 빈손으로 나간다고 하다니. 참 자존심도 세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주현우가 허아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빈손으로 나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경주 그룹에서 나가서 뭘 할 수 있는데?"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한 건 맞지만 그냥 공부와 시험밖에 모르던 학생이었다. 경주 그룹 부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주씨 가문 덕분이었다. 주씨 가문과 경주 그룹이 아니면 허아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현우의 질문에 허아연은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마요. 지금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나긋나긋하게 전하는 허아연의 단호한 말에 주현우는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도 합의서를 받지 않는 주현우 탓에 허아연은 왠지 머쓱해졌다. 솔직하게 얘기하고 합의서만 건네면 바로 사인할 줄 알았다. 허아연은 입술을 말아 물고 주현우가 편할 때 사인할 거라는 생각에 합의서를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으려 했다. 주현우가 갑자기 입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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