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 Chapter 201 - Chapter 210

All Chapters of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Chapter 201 - Chapter 210

397 Chapters

제201화

지나윤은 손에 쥔 이혼 합의서를 내려다보았다.유시진이 내놓은 HF그룹 지분 10%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번에는 두 사람의 협의 이혼이 무리 없이 성사될 것이었다.어느 순간, 지나윤은 이 합의서 한 장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손끝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갔고, 불끈 솟은 마디마다에는 핏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유시진...”지나윤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인지한 유시진이었지만, 여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아챘다.지나윤은 그저 시선을 깊이 떨군 채 그저 합의서만 바라보고 있었다.3년의 결혼생활...10년의 사랑...그날, 유시진이 사고를 당했을 때 지나윤은 그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갔다.목숨을 건질 만큼 위기를 넘기자, 유씨 집안의 경호원은 은인의 자격으로 지나윤의 병실 출입을 허락했다.그때의 마음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또한 지나윤이 상상해 왔던 장면은 너무도 단순했다.서로를 알아보고, 감격스럽게 다시 만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함께 걸어가는 미래.연애, 결혼, 육아, 그리고 같이 늙어가는 과정들까지.하지만 막상 마주할 순간이 오자 두려움이 더 컸다.오랜 세월이 흘렀고, 달라진 모습 때문에 혹시나 유시진이 자신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마음을 짓눌렀다.그럼에도 유시진은 예전에 말했다.“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해도 나는 무조건 너를 알아볼 거야.”그러나 병실 문이 열렸을 때, 침대 위 유시진이 내뱉은 첫마디는 이랬다.“누구세요?”그 한마디에 지나윤은 깨달았다.유시진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곧이어 우원재의 말이 들렸다.“연서 이미 M국에 도착했대.”유시진은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미 여자친구도 있었다.시간이 훌쩍 지나 우원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더욱 잔인했다.그 여자친구가 유시진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 말이다.지나윤은 오랫동안 스스로가 유시진의 첫사랑이라고 믿어왔다.그렇기에 유시진이 못 알아봤다는 말보다, 유시진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Read more

제202화

원나이트는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회원제로 운영되는 작은 바였다.지나윤은 회원이 아니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피터가 눈에 들어왔다.“오래 기다렸어요?”지나윤이 다가가며 물었다.“아니요. 딱 맞춰 왔어요.”피터는 지나윤을 안으로 안내했고, 두 사람은 조용한 카운터 쪽 소파 자리에 앉았다.미리 주문해 둔 칵테일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피터는 마가리타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곧 지나윤은 잔을 가볍게 들며 말했다.“오늘 진짜 미안해요. 분위기 완전히 망쳤죠? 다음에 내가 제대로 대접할게요.”“음, 좋아요.”피터는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들였다.“유 대표님이 나윤 씨 찾은 거 이혼 때문이죠?”피터가 무심한 듯 물었지만, 지나윤은 남자의 신중한 태도를 금세 느꼈다.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잡은 이유도 결국 이것을 묻고 싶어서일 거라 생각됐다.“그렇죠.”지나윤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이혼 얘기를 길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피터가 궁금해한다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혹시 힘들게 한 건 아니죠?”피터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배려가 담겨 있었다.“아니에요. 예전엔 좀 그랬지만 이번엔 아니거든요.”지나윤은 씁쓸하게 웃었다.“힘들게 하기는커녕 보상금으로 160억을 주겠대요.”피터는 놀랄 거라 생각했지만, 남자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음. 그 정도는 받아야죠. 사실 단위가 조여도 적다고 생각하거든요.”그 말에 지나윤은 피식 웃었다.지나윤은 적어도 유시진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그렇게 큰 가치가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그럼 그 사람은 안 힘들게 하고 돈도 괜찮게 받는 건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려요?”그 말에 뜨끔한 지나윤은 잠시 멍해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이나?’피터와는 동료나 상사 같은 비즈니스 관계였고, 오래 알았어도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그래서 숨기지 않고 지나윤은 이혼 합의서에서 유시진이 HF그룹 지분 10%를 넘긴다는 내용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Read more

제203화

“부담 갖지 마요.”피터는 지나윤의 망설임을 보며 설명을 이어갔다.“내가 원래 주얼리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여자한테 뭘 선물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늘 보석류만 떠오르거든요.”“이건 그냥 데일리용이에요. 데이지 디자인이라 값나가는 것도 아니고, 세공을 잘했죠. 나윤 씨 평소 회사 갈 때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지나윤은 결국 한마디로 정리했다.“고마워요.”사실 피터는 원래 더 비싼 하이엔드 주얼리를 준비해 두고 있었으나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예전에 퇴사할 때 자신이 선물한 브로치를 지나윤이 단 한 번도 착용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특별한 날이 아니면 지나윤은 늘 단정하고 소박하게 꾸몄고, 악세서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그래서 피터는 계획을 바꾸어, 평소에도 부담 없이 낄 수 있는 반지를 선택했다.그러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지길 바랐기에, 조금 무리해서 반지를 고른 것이었다.지나윤은 반지를 상자째 가방에 넣으려 했지만 피터가 ‘평소에 부담 없이 끼기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되뇌는 것을 보니, 지금 당장 껴보라는 의미라는 걸 느꼈다.결국 지나윤은 상자만 가방에 넣고 반지를 왼손 중지에 끼웠다.손가락마다 끼는 반지가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이야기엔 관심도 없었고,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낀 이유도 간단했다.그저 본인이 오른손잡이라 일할 때 불편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오늘은 명절이었다.그래서 지나윤은 꿀떡과 치킨, 우유, 그리고 직접 만든 갈비찜과 새우찜을 들고 주경요양병원으로 향했다.그곳에는 지나윤의 엄마, 지연순이 있었다.자기 회사를 차리기 전까지만 해도 매주 들렀지만, 회사를 운영한 뒤로는 고작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이 다였다.또한 오늘은 명절이라 오랜만에 직접 요리를 해온 자리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원비를 정산하러 온 날이기도 했다.이 요양병원은 원래 유시진이 알아봐 준 곳이라, A시에서 가장 비싸고 시설과 인력 모두 최고 수준이었다.자
Read more

제204화

유시진이 부를 때마다 지나윤이 아닌 나윤아라고 부르는 바람에, 여자의 등에는 소름이 돋았다.하지만 지연순 앞에서는 이혼 이야기를 들킬 수도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걸어가 유시진 옆에 앉았다.유시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나윤과 지연순의 그릇에 반찬을 하나씩 덜어주었다.“나윤의 손맛은 정말로 좋아, 그래도 시진이가 맨날 네가 해주는 것만 먹으면 질릴 수도 있지 않나?”지연순은 지나윤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가끔은 다른 요리도 해봐. 새로운 맛도 익히고. 밖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집에 오면 든든하게 밥상을 준비해 줘야지. 그래야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는 거야.”“알겠어!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입으로는 대답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지연순은 오래전부터 전형적인 조선시대 가치관으로 살아왔고 그 기준으로 지나윤을 길러왔다.처음엔 지나윤도 그 가르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무엇보다, 지나윤은 유시진을 사랑했다.사랑했기에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꼈다.대학교도 포기할 수 있었고 학력도 딱히 중요치 않았다.경제활동도 하지 않고 유시진의 카드로 살면서, 매일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모든 집안일을 도맡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지연순이 늘 말했던 대로, 남편을 잘 내조하는 것이 아내의 본분이라고 여겼기에 3년 동안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모든 헌신과 노력은 유시진에게도, 유씨 집안 사람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지나윤은 유시진에게 계속 반찬을 덜어주는 지연순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지나윤의 가슴 어딘가가 서늘하게 식어갔다.아무래도 자신의 엄마조차도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무기력함을 느꼈다.“걱정 마세요 장모님. 나윤이가 해주는 건 뭐든 맛있어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거든요.”유시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부드러웠고 지금만큼은 정말 효도하는 사위였다.그리고 지나윤의 남편으로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유시진이 연기가 이렇게 능숙하다는 사실조차 지나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말과 표정
Read more

제205화

유시진은 지나윤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만든 밥을 먹고 싶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돼.”그제야 지나윤은 유시진이 자신의 음식을 먹어본 지 오래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3년 동안 먹었으면 질릴 때도 됐지. 가끔은 다른 맛을 먹는 게 네 위장엔 더 좋을걸?”그 말의 속뜻을 유시진이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아무런 반응하지 않았고, 잠시 침묵한 뒤에야 조용히 말했다.“정기적으로 위장약을 먹는 게 더 좋겠지.”지나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는데 아무래도 더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다.원래 재무 담당 직원에게 가서 앞으로의 요양병원 비용을 자신이 직접 결제하도록 변경하려 했지만, 유시진이 계속 붙어 있는 바람에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결국 그 일은 나중으로 미루었다.두 사람은 주경요양병원 입구 앞에서 멈춰 섰고 이제 각자 갈 길을 가야 했다.“지금 할아버지 댁 가려는 거지?”유시진이 묻자 지나윤은 깜짝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들킨 기분이었다.그리고 유시진은 그런 지나윤을 보며 미묘하게 웃었다.그 웃음은 마음을 참 읽기 쉽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너도 같이 갈 생각이 있어?”입 밖에 나오고서야, 지나윤은 스스로 깨달았다.이건 초대하는 말처럼 들렸다.그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아니.”유시진은 고개를 저었다.“너 혼자 다녀와. 난 회사에 먼저 들러야 해.”“그래.”지나윤은 속으로 안도했다.사실 오늘 단순히 명절 인사만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HF그룹 지분 10% 문제를 직접 확인하려고 간다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그랬기에 유시진이 옆에 있으면 차마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지나윤이 주차장을 향해 돌아서려던 바로 그때, 유시진이 갑자기 여자의 손목을 잡아챘다.이에 지나윤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다.곧 유시진은 지나윤의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리더니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아까 방에서부터 말하려 했는데 네가 반지 낀 건 처음 보네.”유시진은
Read more

제206화

그날 밤, 지나윤은 본가에 머무르기로 하고 직접 부엌에 들어가 유희봉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큰 상을 차렸다.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현관 쪽에서 강수정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르신, 작은 사모님, 도련님 오셨어요.”지나윤은 깜짝 놀랐다.강수정 아주머니가 말하는 도련님은 당연히 유시진이었다.오늘은 본가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평소라면 유시진이 돌아올 때마다 강수정 아주머니뿐 아니라 유희봉 역시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띠곤 했다.그거도 그럴 것이, 유희봉에게 유시진은 유일한 손자이자 자랑이었다.그런데 오늘은 달랐고 유희봉의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여긴 또 왜 왔어? 공짜 밥 먹으러 왔냐?”유희봉의 시큰둥한 말투에도, 유시진은 자연스럽게 걸어가 허리를 굽히며 어깨를 주물렀다.“역시 할아버지가 제일 잘 아시네요.”“난 널 몰라. 이젠 다 컸다고 말도 안 듣고 완전 제멋대로야.”연달아 쏟아지는 잔소리에도 유시진은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그저 웃고 있었다.“맞아요. 제 잘못이에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나윤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유희봉이 이렇게 심하게 말하는 건, 분명 낮에 자신에게 들은 ‘이혼’ 이야기를 떠올린 탓일 것이다.하지만 유시진은 유희봉에게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오히려 이상한 점은 따로 있다면 유시진은 부모인 유태산, 양화영과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둘이 보여주는 관심도 따뜻하다기보다 차분하고 적당한 수준의 예의에 가까웠고, 유시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생각이 그쪽으로 닿자, 지나윤은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다.이혼을 앞둔 사이인데 괜히 집안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결국 한참을 달래고서야 유희봉은 유시진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허락했다.곧 유시진은 지나윤 맞은편에 앉았다.“오늘은 안 오는 줄 알았어.”지나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시진은 회사에 일이 있다고 했으니 당연히 늦을 거라고 생각했다.“오늘은 명절이잖아.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리러 와야
Read more

제207화

예전에는 두 사람이 본가에 올 때면 늘 같은 방을 썼고 지금은 이혼 전이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예전과 다르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또한 유희봉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면 깊게 의심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하지만 지나윤은 이제 유시진과 같은 공간에서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오늘 너도 여기서 잘 거야?”지나윤이 조용히 묻자, 유시진은 어깨를 가볍게 올리며 웃었다.“왜, 내 할아버지 집인데 내가 못 자?”“그게 아니라, 나는 그냥...”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시진은 고개를 돌려 강수정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아주머니, 방 두 개 준비해 주세요. 나랑 지나윤 방 따로요.”강수정 아주머니는 잠시 당황했으나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유시진은 말이 끝나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지나윤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이제 만족해?”그러자 지나윤은 숨을 들이마셨다.그때 유시진의 휴대폰이 울렸고, 남자는 지나윤이 보는 앞에서 전화받았다.“여보세요? 연서...”지나윤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유시진이 본가에 오기만 하면 채연서는 어김없이 전화를 걸었다.채연서가 두 사람이 본가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도 지나윤은 알고 있었다.“아니야. 방 따로 쓸 거야.”그 말과 동시에 유시진은 지나윤을 힐끔 바라보며 입가를 살짝 올렸다.지나윤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저 준비된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두 방은 문만 마주 보는 구조였다.문을 닫자마자 습관적으로 잠금을 걸었지만, 곧 불필요한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다.유시진이 몰래 들어올 사람은 아니었다고 판단한 지나윤은 다시 잠금을 풀었다.밤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다.아무 꿈도 꾸지 않은 채,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었다.아침 햇살이 방 안에 쏟아지자, 지나윤은 눈을 비비며 크게 하품했다.그 순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지나윤의 몸은 반사적으로 긴장했다.유시진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지나윤은 잠은 잘 잤지만, 침대에 앉아 있는 상대를 예
Read more

제208화

유시진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잔잔했고, 억누른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말투까지 예의 바른 편이라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그런데도 지나윤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마치 유시진이 화를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이에 지나윤은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끝냈다.식탁에는 두 사람뿐이었고 유희봉은 새벽에 이미 식사를 마친 뒤였다.식사 후, 지나윤은 유희봉에게 인사를 드리고 먼저 본가를 나왔다.지금 그녀에게는 이혼 협의서 문제와 동시에 놓칠 수 없는 일이 있었다.LD주얼리 패션위크 측에서 초청 디자이너들에게 도면과 샘플 제출 기한을 알린 것이다.참가하려면 완성된 주얼리는 한 시리즈가 필요했고, 한 시리즈는 보통 6점에서 8점의 작품을 묶어야 했다.수량은 어렵지 않았지만 수많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새로운 영감을 더 끌어올려야 했다.지금처럼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되는 시기였다.그 시각, 본가의 서재.유시진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할아버지, 왔어요.”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 있는 유희봉을 보자마자, 오늘 들을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미 감이 왔다.“시진아, 너랑 나윤이 이혼한단 말이 사실이냐?”유희봉은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묻자 유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유희봉의 눈에 아주 잠시 희망이 비쳤다.“걔가 저랑 이혼하려고 해요.”조용하지만 확실한 어조였다.그리고 그 한마디로 유희봉의 시선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혹시 너는 그게 걔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아니에요.”“그럼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는 있어?”이번엔 유시진이 대답하지 않았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곧 유희봉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밖에서 딴짓하고 다니면서 네 아내를 이혼할 수밖에 없는 자리까지 몰아넣고도... 하, 내가 이런 불효자를 두고 살아야 하나?”탁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이 크게 울렸고 서재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울림이었다.반면 유시진은 여전히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만 표정은 확
Read more

제209화

유시진은 계속 침묵하자 유희봉은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듯 단숨에 쏘아붙였다.“너 그렇게까지 채연서를 좋아하는 거냐?”그러나 유시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희봉의 인내심이 터졌는지 이번에는 책 한 권을 집어 바로 유시진에게 던졌다.“말을 못 해?”책이 몸에 부딪히자, 유시진은 조용히 책과 벼루를 주워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건강이 먼저예요.”그 말은 진심이었다.“그래도 네 할아버지한테 심장병 있다는 건 기억하는구나.”유희봉은 차 한 모금을 삼키고 겨우 호흡을 가다듬었다.“아까 나윤이랑 공원에서 얘기를 좀 했는데 걔는 네 생각보다 단단하게 마음을 굳힌 것 같더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이혼하고 싶은 거냐?”유시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고요가 길게 이어진 뒤에야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음.”그 한 글자는 결심이었다.“좋아. 그럼 이혼하고 나서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윤이랑 헤어진 뒤에 말이다.”이번 질문은 더 직설적이었고 유시진은 다시 잠시 생각했다.“연서에게 약속했어요. 이혼하면 제대로 된 명분을 줄 거라고.”A시 로열갤러리.지나윤은 작품에 집중하느라 옆에 누가 서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이렇게 여유롭게 구경하는 거 보니 LD주얼리 패션위크 디자인은 다 끝났나 보네.”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서 있는 채연서와 눈이 마주쳤다.“진짜 어디서든 마주치네.”지나윤이 낮게 중얼거리자 채연서는 비웃듯 팔짱을 꼈다.“어젯밤 시진이 말해줬어. 너희 둘이 본가에서 방 따로 썼다고.”“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지나윤은 바로 받아쳤다.“당연히 상관있지. 그러니까 시진이 내게 바로 얘기한 거잖아. 나한테 오해 생길까 봐.”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지나윤은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채연서는 지나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갤러리는 조용했기에 채연서의 말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울렸다.“시진이 이혼 협의서 건넸다며. 뭐가 그렇게 고민되는데
Read more

제210화

LD주얼리 패션위크 준비 기간 동안 지나윤은 디자인에 몰두하면서도, 유시진과의 이혼 문제를 완전히 잊고 지낸 것은 아니었다.유시진이 넘겨주려는 HF그룹 지분 10%는 결국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받으면 부부 관계는 끝낼 수 있지만, 동시에 회사에서는 비즈니스 관계로 남을 수가 있었다.그렇다고 거절하면 이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오랜 고민 끝에 지나윤은 결국 수락이라는 답을 선택한 것이었다.지나윤은 사전에 준비된 이혼 협의서에 먼저 서명한 뒤, 유시진이 M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이번에는 정말 끝을 내리라는 마음이었다.사무실에서 책상 위에 놓인 협의서를 바라보다가 지나윤은 작은 숨을 내쉬었다.미련은 없었고 유시진을 포함해 무너진 결혼 생활도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다만 마음 한쪽이 공허한 건 온전히 자신이 10년 동안 바친 청춘과 사랑이었다.휴대폰이 진동했고 유시진의 답장은 단 한 글자였다.[응.]짧고 건조하며 차갑기까지 했다.지나윤은 묘한 허탈함 속에서 숨을 고르며 출발 시간을 맞췄다.협의서를 챙겨 차에 올랐고 목적지는 가정법원이었다.한편, 유시진 역시 차를 몰고 있었는데 조수석에는 채연서가 앉아 있었다.채연서를 먼저 집에 데려다준 뒤 법원으로 갈 생각이었다.회사에서 법원까지는 거리가 있었고 도로는 꽤 막혀 있었다.신호 대기 중, 지나윤은 답답한지 깊은숨을 내쉬었으나 마음속은 여전히 덩굴처럼 뒤엉켜 있었다.그때, 전화가 걸려 왔는데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떴다.“여보세요?”지나윤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전화받았다.[혹시 지나윤 님 맞으신가요?]“네.”[여기는 주경요양병원이에요. 정말 죄송한데요, 오늘 새로 들어온 인턴의 부주의로 인해 어머니께서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셨어요.]“네? 뭐라고요?”횡단보도를 막 빠져나오던 지나윤은 자칫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정말 죄송해요. 경찰에도 이미 연락을 드렸고요. 지난번 오셨을 때 어떤 문제가 생겨도 먼저 지나윤 님께 연락하라고 하셔서...]더
Read more
PREV
1
...
1920212223
...
4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