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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잃고서야 알았던 사랑: Chapter 191 - Chapter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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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화

이현철이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자, 지나윤은 이현철과 그 윗선도 깊게 고민하거나 논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즉흥적인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그럼 중간 지점으로 HF그룹 본사에서 하면 어떨까요?”유시진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제안이라기보다는 거의 결정에 가깝게 들렸다.이현철은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없었기에, 결국 유시진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그다음 한 달 동안, 지나윤은 거의 매일 HF그룹을 오가게 됐다.HF그룹 직원들은 채연서를 보는 데 아무런 의아함이 없었다.원래도 채연서는 자주 회사에 드나들었으니까.또한 채연서가 정식 배우자인지, 아니면 내연녀인지 따지는 이는 없었다.그저 그냥 유시진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그래서 첫날, 회사 사람들이 지나윤을 봤을 때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리고 지나윤은 HF그룹 곳곳에서 직원들이 뒷말하는 걸 수시로 듣게 됐다.두 사람 사이에서 누가 진짜 내연녀인지 혹은 누가 진짜 아내인지, 몸담아있는 사람끼리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그리고 결론은 항상 같았다.어쨌든 마지막에 유시진 옆에는 채연서만 남는다고.설령 지나윤이 법적 배우자라 해도 결국 버려질 것이고, 채연서가 올라설 거라는 이야기였다.이런 말을 들으면 지나윤은 씁쓸해서 웃음이 나왔다.현실에서도 지나윤은 곧 이혼을 앞두고 있었고, 채연서는 그토록 원하던 자리를 거의 손에 넣기 직전이었다.처음엔 서로 협업하면 일 진행이 잘 안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채연서의 협업 태도는 순조로웠다.두 사람은 각자 디자인을 완성해 윗선에게 바쳤다.그렇게 선택된 것은 지나윤의 디자인이었다.그러나 채연서는 시비 걸지 않고 수정보완 의견도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냈다.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괜히 방해만 하지 않으면 지나윤으로서는 일이 훨씬 빠르게 풀렸다.결국 디자인은 확정되었고, 남은 제작 시간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지나윤이 만든 건 옥으로 만든 인장, 옥새만 한 크기였다.실제 도장으로도 쓸 수 있고 장식용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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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화

채연서가 디자인한 것도 인장이었다. 크기 역시 왕실 도장 크기였고, 실제 도장으로도 쓸 수 있고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었다.다만 채연서가 만든 인장의 꼭지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태였다.그리고 지나윤이 만든 인장의 꼭지는 말의 실루엣으로 로드를 표현한 형태였다.“국장님, 어떠세요?”채연서는 이미 제작까지 마친 완성품을 이현철에게 내밀었다.둘 다 옥을 썼지만, 지나윤이 요구한 최상급 옥에 비하면 몇 등급은 떨어지는 원석이었다.귀한 손님의 선물로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완벽하다고 하기엔 아쉬움이 많았다.주제, 의미와 품질 그 어느 것도 지나윤의 구상에 미치지 못했다.이에 이현철도 난처해했다.지금 지나윤의 디자인은 원석이 없으니 제작조차 못 했다.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실물이 없으면 그저 도면일 뿐이었다.“제가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지나윤은 곧장 몸을 돌렸다.“어디로?”회의실 문을 막 밀고 들어온 유시진 때문에 지나윤은 거의 부딪힐 뻔했다.“NY 시 쪽 공장으로 지금 출발하면 아직 맞출 수 있어.”“지금 밖에 비가 얼마나 오는 줄 알아?”유시진의 시선이 내려앉았다.물론 알고 있었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래도 가야 해.”지나윤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마주하자, 유시진은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그렇게까지 채연서 디자인을 쓰기 싫어?”마치 개인감정 때문에 고집부리는 것처럼 들려 지나윤은 변명하려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입술만 달싹였다.지금 가장 부족한 건 시간이었으니까.“원래도 같이 가려 했어요. 원석은 보는 사람이 직접 골라야 하니까.”짧게 설명한 뒤, 지나윤은 회의실을 향해 한마디 했다.“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그리고 그대로 유시진을 피해 나갔다.이윽고 유시진도 따라 걸어 나왔다.“장 비서한테 태워달라고 해.”지나윤은 뒤를 돌아보자 유시진이 차 키를 손으로 돌리며 무표정하게 말했다.“비 오면 도로 미끄러워. 장 비서가 운전하는 게 더 안전해.”그 말이 걱정인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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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화

유시진은 자신의 차가 지나윤의 차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지나윤의 운전 실력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었던 건, 지나윤이 이렇게까지 속도를 높여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시간을 아끼려는 듯, 지나윤은 도로 위에서 변변한 숙소 하나 예약하지 않았다.가는 길에 보이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간이 모텔에서 대충 눈을 붙이며 이동을 이어갔다.그렇게 나흘이 지나서야 주문했던 공장에 도착했고, 마침내 원석을 수령할 수 있었다.원석은 무엇보다 선별이 중요했기에 지나윤은 이번 여정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어차피 처음부터 운송 차량과 함께 이동해 직접 고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선별한 원석을 적재할 차량이 마땅치 않아, 결국 자신의 차 트렁크에 실을 수밖에 없었다.밖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그리고 지나윤의 차는 어디까지나 일반 차일 뿐, 장거리 운반을 견딜 설계는 아니었다.한참 달리던 중, 계기판이 갑자기 경고등을 띄웠다.곧 지나윤은 고속도로 갓길 긴급 차선에 차를 세웠다.차 안에 우비조차 없어서, 밖으로 나서는 순간 빗물은 그대로 지나윤의 전신을 적셨다.계절상 가을로 접어든 시기였고 가을비는 찬 기운을 머금었다.얼음장 같은 빗줄기들이 옷을 적시는 순간, 지나윤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머리부터 옷자락까지 이미 모두 젖어 있었고 빗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며 시야를 흐렸다.차 안에 있던 도구로 대략적인 점검과 응급 수리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손을 써도 엔진은 다시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견인차를 불러도 문제가 생겼다.‘트렁크의 원석은 어떻게 해야 할까?’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쏟아지는 빗속에서 고속도로 갓길에 홀로 서 있는 지나윤은 달리는 차들의 물보라 사이에서 갈수록 깊은 무력감에 잠식됐다.마치 바닷물이 코끝까지 차오르듯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그때였다.앞에서 차량 헤드라이트가 깜박이며 지나윤을 향해 번쩍였다.가까이서 라이트를 교차로 비추며 시야에 신호를 보내는 듯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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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화

유시진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중간이었다.그 애매한 온도 때문에 언제나 지나윤은 유시진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당연히 아니지.”지나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며칠 뒤면 이혼할 사람에게 그런 식의 착각을 할 이유가 없었다.페라리가 고속도로 서비스구역으로 진입하자 지나윤은 유시진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굳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각박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아?”그렇게 조심스레 말하자, 유시진은 고개를 돌려 지나윤을 바라봤다.은은하게 젖은 흑발 사이로 내려오는 눈빛은 묘하게 침착했고, 조금의 당혹감도 비치지 않았다.지나윤이 급히 설명했다.“그게 아니라 여긴 너한테 너무 불편할 것 같아서. 나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잘 필요는 없으니까.”“그럼 난 어디서 자야 하는데?”유시진은 무표정하게 묻자 지나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유시진이 이런 허름한 서비스구역 모텔에서 잔다는 건 상상이 안 됐다.“5성급 호텔 같은데?”말이 끝나자마자, 유시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짧은 숨 같은 옅은 웃음이었다.차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아갈 때쯤, 비는 여전히 잦아들지 않았지만 하늘빛은 조금 덜 어두웠다.그리고 지나윤이 트렁크를 열려고 우산을 들자, 어느새 유시진이 뒤에 서 있었다.말도 없이 지나윤의 손에서 우산을 가져가 머리 위로 펼치자 유시진의 어깨는 금세 비에 젖어갔다.하지만 지나윤 쪽으로는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순간 지나윤의 가슴 한쪽이 미묘하게 저릿했다.빗물 속의 공기는 차고 맑아서, 지나윤은 본능적으로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고마워.”“별말을.”건조하게 들릴 수 있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예전 부부였던 시절 특유의 부드러움이 은근히 스며 있었다.서로가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던 그때의 두 사람처럼.지나윤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다시 트렁크 속 원석을 살폈다.“이걸 방 안에 옮기고 싶어서.”말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마치 의견을 묻는 것처럼 유시진을 바라봤다.“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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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지나윤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몸을 살짝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그런데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등 뒤에서 유시진의 낮고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잘 자.”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지나윤은 깊은 잠에 빠졌다.며칠 동안 빗길을 뚫고 달린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탓이었다. 눈을 뜨니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유시진은 이미 정장을 다시 갖춰 입은 상태였고, 테이블 위에는 아침식사가 놓여 있었다.“여긴 패스트푸드밖에 없더라. 그냥 이걸 먹어.”“이 정도면 충분해.”지나윤은 KFC 같은 예닐곱 번 데운 패스트푸드라도 절대 가리지 않았다.오히려 유시진이 이런 걸 못 먹을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둘은 작은 모텔 방에서 마주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몇 번이나 지나윤은 유시진의 위염이 요즘 다시 도지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 사이에서 맴돌던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유시진에게는 채연서라가 있었고, 돌이켜보면 유시진과 자신은 서로에게 딱 그만큼의 인연이었다.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비는 완전히 그쳤고 유시진의 운전 속도도 빨라졌지만 지나윤은 더 이상 초조하지 않았다.이제 그 원석을 사용할 일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일주일 넘게 오가며 고생한 끝에 HF그룹으로 돌아왔을 때, 채연서는 승리감에 찬 얼굴이었다.“결국 내 디자인으로 결정됐대. 허탕 치느라 고생했네.”“그럴 수도 있지.”지나윤은 짧게 답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채연서가 앞을 가로막았다.“시진이 너 데려다줬다며.”“그래.”반응이 지나치게 담담하자 채연서의 표정이 굳었다.“딱 그때 출장이 있었다고 하더라? 진짜 운 좋네. 별것도 아닌데 그런 우연을 만들다니.”지나윤은 본래 이런 말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가 문득, 채연서의 오버하는 반응을 보자 장난기가 올라왔다.“유시진이 일부러 날 데리러 온 건데?”“뭐라고?”채연서의 눈빛이 흔들렸다.“걱정돼서 온 거라고. 내가 위험할까 봐.”“말도 안 돼. 너희 둘은 이혼하는 사이잖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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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화

순간적으로 눈앞의 장면에 이끌린 유시진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갔다.“시진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채연서는 자전거를 세워 유시진 앞에 서자 남자는 정신을 차리며 되물었다.“이건 내가 물어봐야지. 너는 여기서 뭐 해?”“동창이랑 선생님 뵈러 오기로 했지. 오늘 학교 창립기념일이잖아.”채연서는 미리 준비해 둔 이유를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늘의 채연서는 평소의 단정하고 귀여운 스타일과 달랐다.여느 고등학생과 다름없이 발랄하고 산뜻했다.채연서는 유시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을.“선생님 보러 올 거면 나한테도 말해주지.”“바쁜 줄 알았지.”채연서는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내가 초청받아서 연설하러 안 왔으면, 너 이런 모습도 못 봤을 뻔했네.”유시진의 말에, 채연서는 지난 며칠간의 불면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사실, 창립기념일 행사에 유시진을 초청하자고 교장에게 제안한 사람이 바로 채연서였다.이 학교는 예전에 유시진과 연애했던 바로 그곳이었다.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만들어둔 것이었다.그리고 예상대로 비슷한 풍경은 유시진의 기억을 자극했다.둘은 은행나무잎이 가득 깔린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고, 예전에 두 사람은 이렇게 데이트했다.“시진아, 나 자전거 좀 태워줄래?”채연서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를 마주한 유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정장 차림이라 자전거를 타기엔 불편했지만, 유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페달을 밟았다.그리고 채연서는 뒷자리에 앉았다.선남선녀 커플이라 그런지 학교 안의 사람들 눈길들을 모조리 끌어당겼다.이에 학생들도 걸음을 멈추고 바라봤다.그중에는 지나윤도 있었다.지나윤이 이곳에 있게 된 이유는 다른 디자이너가 갑자기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주말에 열릴 야외 보석 전시를 위해, 이 학교 운동장을 점검하러 온 참이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그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마치 다시 10대가 된 듯, 유시진이 자전거를 타고 채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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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화

지나윤은 시원하게 대답했다.회의실을 나서려던 순간, 뒤쪽에서 유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결국 헛수고가 아니었네.”유시진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나윤은 곧바로 이해했다.비를 뚫고 먼 길을 달려 원석을 가지러 간 그 일을 말하는 것이다.“그때도 네가 도와줘서 가능했던 거야.”지나윤의 말을 듣고 유시진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곁에서 지켜보던 채연서는 새로 바른 젤네일을 죄다 뜯어버릴 만큼 이를 악물었다.‘어렵게 모교에서의 첫사랑 회상 연출을 만들어내고, 그 장면을 지나윤이 직접 보게까지 만들었는데.’‘그런데도 자신과 유시진이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앞에서 태연하게 눈빛을 주고받다니.’채연서의 눈에는 지나윤이 그야말로 요망하고 뻔뻔한 여우 같았다.그러나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문화로 하나 되는 세상, 국제 문화교류회에서 지나윤이 디자인한 비취 인장이 대단한 호평을 받으며 주목을 끌었다.또한 지나윤의 회사는 정부의 표창까지 받았다.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피터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날 밤 지나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퇴근 직후 도착한 지나윤은 일을 마친 그대로, 단정한 오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러나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지나윤은 얼어붙었다.이곳은 일반적인 레스토랑이 아니었고, 2인 좌석에 좌석은 하트모양의 반 오픈된 구조였다.신선한 빨간 장미와 촛불이 모두의 테이블을 장식한 곳이라 한눈에 봐도 커플들을 위한 레스토랑이었다.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여성 손님들은 모두 드레스 차림이었고, 정장은 지나윤 혼자였다.다소 민망했다.‘피터가 미리 알려줬다면 옷이라도 갈아입었을 텐데.’하지만, 만약 피터가 미리 커플 레스토랑이라고 말했다면 지나윤은 오히려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정해진 자리로 가자 피터가 앉아 있었다.평소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정장을 더 잘 갖춰 입은 것 같기도 하고, 헤어스타일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지나윤이 나타나자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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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화

지나윤은 눈을 떼지 못한 채 유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유시진은 표정과 목소리는 너무 잔잔해 무엇을 속에 품고 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잠시 머뭇거리던 지나윤이 입을 열었다.“싫어.”유시진이 아주 짧게 멈칫하고는 한 치의 다급함도 없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문서 한 장이었다.지나윤과 유시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라 그 문서의 내용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그 문서는 자신과 깊게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안 오면 이걸 그대로 버릴 거야.]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하지만 지나윤은 크게 흔들렸다.“그게 뭐야?”[네가 간절히 원하던 것.]지나윤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위로 떨렸다.예상대로라면 유시진 손에 들린 것은 새로 작성된 이혼 협의서였다.지나윤은 손에 든 휴대폰을 세게 틀어쥐었다.“나 지금 친구와 식사 중이야. 그 문서는 식사를 마치고 얘기해도 늦지 않잖아.”지금 당장 이혼 협의서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지금 이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면 다시는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분위기가 될 것 같았다.무엇보다 피터에게 무례해지는 상황이 싫었다.유시진은 화내기는커녕 낮게 웃었다.“보아하니 정말 이혼하고 싶은 건 아닌가 보네. 이렇게 오래 밀고 당기는 여우짓이 아직도 재밌어?”유시진이 문서를 내려놓는 순간 지나윤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설 뻔했다.자신이 밀고 당긴 적이 있는지 유시진은 알고 있을 것이다.물론 유시진은 오만방자했고, 그럴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하지만 최근의 모든 상황을 보면 누가 봐도 지나윤이 진심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이것이 명백한 도발인 것도 알았다.그럼에도 자리에 앉아 있는 지나윤을 보며 유시진의 짙은 눈썹이 무심하게 좁아졌다.[지나윤. 오늘 밤 놓치면, 이 협의서는 내가 직접 없애고 앞으로 다시는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거야.]마침내 최후통첩이 떨어지자 지나윤의 마음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그때, 옆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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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결혼할 때, 지나윤은 유시진에게 끌려다녔고 그 마음속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지금 이혼을 앞두고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유시진이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티기만 하면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심지어 이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지나윤은 손바닥을 세게 움켜 아프게 만들었다.식사가 나오자 피터와 마주 앉았던 그 테이블과 완전히 같은 구성의 메뉴였다.지나윤은 피터에게 너무 미안했다.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지만 유시진의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이거 먼저 봐. 최신 버전이야.”이혼 협의서가 드디어 눈앞에 놓이자, 지나윤은 그것을 받아 들고 첫 페이지부터 살폈다.옆에서 유시진은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고 그 침착함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지나윤은 협의서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의 접시에 이미 여러 조각의 음식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잘라놓은 트러플 고베 스테이크, 캐비아, 프렌치 푸아그라, 알래스카산 킹크랩 다리 살.이에 지나윤은 눈을 두 번 깜빡였다.‘이걸 유시진이?’“식으면 맛없어.”유시진은 자기 접시에서 음식 하나씩을 옮기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지나윤은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배는 고팠고, 이미 접시에 올라와 있는 음식을 그대로 두는 것도 이상했다.지나윤이 마침내 나이프와 포크를 드는 순간, 유시진의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휘어 올랐다.둘 사이에는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는데 둘은 이 식당에서 가장 조용한 한 쌍이었다.식사를 이어가면서 지나윤은 계속 이혼 협의서를 읽었다.이번 것도 얇지는 않았지만 지난번 자신에게 6조 원을 청구했던 그 괴랄한 협의서보다는 훨씬 얇았다.지난번의 충격 때문에 이번에는 어떤 장치가 숨어 있든 대비가 되어 있었다.물론 유시진이 또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몇백억쯤의 손해배상 조항은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그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었다.앞의 십여 쪽은 특별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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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유시진이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가 잠깐 멈췄다가 잠시 뒤, 식어버린 스테이크를 다시 잘라 입에 넣었다.식은 스테이크는 맛없었지만, 그래도 지나윤 접시에 올려준 건 모두 따뜻했고, 맛도 괜찮았을 것이다.“그냥 마음이 가서라고 생각해.”“너 이혼 후에 HF그룹 주주라는 신분으로 나를 붙잡아두려는 거지?”지나윤은 단호하게 말했다.지나윤은 어떻게 해서든 유시진과 이혼하고 싶었고 둘 사이의 모든 연을 끊고 싶었다.일도, 인생도, 완전히 분리하고 싶었다.유시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미 채연서에게 명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 이런 중요한 지분을 넘기는 걸까?’HF그룹의 10퍼센트는 결코 가벼운 비중이 아니었다.그 지분을 가지게 되면 지나윤은 HF그룹의 모든 중대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또한 주주총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배당받으며, 회사 기밀 자료도 열람할 수 있었다.그런 권한은 채연서에게 줘야 자연스럽지 자기 같은 사람에게 줄 이유가 없었다.지나윤의 충격과 의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을 본 유시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HF그룹으로 널 묶어두면 뭐가 좋다고? 진짜로 네가 그 정도로 예뻐서, 주주총회 핑계 대면서 한 번 더 보려고 하는 줄 알아?”뜻밖의 농담이었지만 지나윤은 웃을 수 없었다.“유시진, 너의 의도가 뭐든 간에 HF그룹 지분은 절대 안 받아.”지나윤이 말을 끝내자마자 유시진은 슬쩍 이혼 협의서를 들어 올렸다.“그래. 그럼 이혼 안 해.”“뭐라고?”지나윤은 재빨리 협의서의 반대쪽을 붙잡았다.둘은 이혼 협의서를 사이에 둔 채 각자 한쪽을 꽉 쥐고 버티고 있었다.지난번 협의이혼이 실패했던 이유는 유시진이 6조원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이번 협의이혼은 유시진이 너무 많이 주기 때문에 또다시 실패할 위기에 놓였다.HF그룹 지분 10퍼센트를 넘기는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유시진, 이렇게 중요한 지분 넘기는 거 네 부모님은 알아?”뜻을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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