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태자가 아닌 황제를 선택했다: Chapter 281 - Chapter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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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1화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내 누구에게 전하는 일은 없을 터이니.”다짐하듯 말하는 공난심의 모습에 금영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공 상궁은 참 좋은 분이십니다. 저는 이 일로 공 상궁께서 목숨을 잃는 건 원치 않아요.”“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어차피 내 목숨은 귀비께서 주신 것이나 다름없는 것, 죽는다 한들 아깝지 않다.”공난심이 말했다.금영은 단호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간곡히 말했다.“허나 공 상궁께서 이 일로 목숨을 내놓는다 하여도 원수에게 아무런 타격도 되지 않는다면, 공 상궁께서 그리 소중히 생각하시는 귀비께서 과연 편히 쉬실 수 있을까요?”공난심은 착잡한 눈길로 금영을 바라보며 물었다.“다 알고 있었던 게 맞구나.”사실 귀비가 중독으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모든 단서는 수강궁을 향하고 있었다.금영이 말했다.“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공 상궁의 충심에 탄복하여 이런 분이 헛되이 목숨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드린 말씀입니다.”금영은 지그시 공난심을 바라보다가 계속해서 말했다.“이는 선 귀비마마의 뜻이기도 합니다.”선 귀비 얘기가 나오자 공난심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금영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은 이미 전달했으니, 어떤 선택을 할지는 이제 공난심의 몫이었다.금영은 약을 들고 소녕전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일단 먼저 미향을 따로 잘 보관한 후에 다른 약초들은 모조리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꿀을 섞어 단약 형태로 빚었다. 그러고는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게 모조리 향낭 속에 집어넣었다.이제 이것을 손에 넣었으니 승산이 생긴 셈이었다. 만약 유혹에 실패하더라도 되돌릴 기회가 있었다.비록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수를 쓰고 싶지 않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었다.태후의 생신 연회는 궁중에서도 꽤나 큰 행사라, 조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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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이른 아침, 날이 밝자마자 금영은 침상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생신 연회는 오후에나 시작할 테지만 그때까지 준비할 일이 많아 늦잠을 잘 수는 없었다.오전에는 각궁에서 태후께 드릴 생신 선물을 한 번씩 점검하고 장기자랑을 할 사람들은 실수가 없도록 연습을 반복했다.오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각자 잠깐의 휴식을 마친 후, 수강궁으로 향했다.대신들도 속속 입궁하여 대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금영은 사람들 틈에서 맹운산을 발견했다. 맹운산도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운산, 뭘 보고 그리 웃고 있나?”옆에 있던 사람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정신을 차린 맹운산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친우들을 발견했다. 이들은 모두 세가의 자제들로, 비록 모두가 문무지략을 겸비한 것은 아니지만 출신만큼은 고귀했다.그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니네.”“아무것도 아니긴? 저기 선화전에서 예절 교육을 받는 처자들을 보고 있었지? 혹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다면 이따가 용기 내어 폐하께 간청을 들여보게. 비록 태자비와 이황자비는 이미 정해졌다지만, 황후마마와 현비마마께서 이 처자들 중에 둘을 간택하여 측비로 들일 생각이시라더군!”맹운산에게 말을 건 사람은 그의 친한 친우인 진회욱이었다.평소에 풍류를 즐기기로 유명한 자라, 매 한마디가 경박하게 들리지만 집안이 좋아서 그런지 말에 거침이 없었다.“자네가 누굴 보고 있었는지 내 맞춰볼까? 사실 배씨 가문의 큰딸만 아니면 아무 문제없긴 하지!”진회욱이 장난스럽게 말했다.“자네 무슨 그런 경솔한 말을 하는가! 혹 소문이라도 나면 폐하와 마마께서 불경죄로 자네와 자네 아버님을 엄히 다스릴 것이네!”맹운산이 다급히 말했다.금영은 맹운산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미리 도착해서 대기 중인 영안후부의 사람들을 바라봤다.영안후는 당연하게 송정희와 함께 입궁했고 배경천도 와 있었다. 그런데 송정희의 옆에 떡하니 서 있는 배명월은 예상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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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송정희는 안심하라는 듯이 배명월의 손을 다독였다. 금영은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참으로 인자한 어머니로구나!’*곧이어 연회가 시작되었다.사람들은 내전으로 들어가 태후에게 예를 올렸다. 금영이 기억했던 것처럼 태후는 온화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졌다. 그녀는 반백이 된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입가에 지어진 잔잔한 미소는 위엄과 기품이 흘러넘쳤다.황제는 태후의 옆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먼저 서 황후가 뭇 비빈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태후께 축하 인사를 올렸다. 금영은 긴 대오를 바라보았다. 품계가 낮은 비빈들은 연회에 참석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는지, 서 황후의 뒤에 줄을 선 인원은 겨우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명문가들조차 첩실을 여럿 두는데, 나라의 생사대권을 쥔 황제의 후궁이라기에는 수가 적은 편이었다.황제는 근 몇 년 간, 새로 후궁을 들이지 않고 있었다. 역임 황제들과 비교하면 황제는 흔치 않게 조정의 업무에 전념하고 금욕적인 황제였다.뒤이어 황자들이 들어섰다. 황제에게는 공주가 없었고 비빈도 많지 않았으니, 황자의 수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삼황자는 이번 연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지 못한 듯했다. 결국 모습을 드러낸 황자는 두 사람뿐이었다.곧이어 대신들이 축하 인사를 올리고 귀녀들의 춤이 시작되었다.무대의 중앙에는 금영과 유진설이 있었다. 한 명은 화려하고 눈부신 외모를 한껏 뽐내고 있었고 한 명은 부드럽고 우아한 춤선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춤을 추는 와중에 금영은 은근하게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황제에게 눈길을 주었다.황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하늘거리는 그녀의 자태를 바라보고 있었다.한 곡이 끝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진설과 금영을 주목했다. 둘은 뭇 귀녀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런데 이때 한 쌍의 눈빛이 금영을 거슬리게 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마침 서왕 세자인 소성원이 의미심상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면사포를 두른 금영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개망나니 같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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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찻잔을 든 금영은 땅에 버리거나 마시는 척만 하는 얕은 수는 쓰지 않고, 송정희가 보는 앞에서 내용물을 반쯤 들이마셨다.송정희는 흔쾌히 마시는 금영을 보고 어쩐 일인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날 금영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금영은 늘 그녀를 경계해왔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거부하지 않고 자신이 건넨 차를 마셨다.‘설마 사람들이 보는 앞이라 내가 대놓고 무슨 짓을 못할 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면 뭔가 대비해 놓은 것이라도 있나?’송정희는 속에서 의문이 가득 피어올랐다. 하지만 금영이 반쯤 남은 찻잔을 내려놓자, 테두리에 남은 붉은 입술 자국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괜히 걱정했네. 아무렴 어린 계집애가 무슨 지략이 있다고.’송정희는 자신이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먼저 손을 내밀자, 금영이 품위와 명성을 지키기 위해 감히 내치지 못하고 주는 대로 받아마신 것이라 확신했다.금영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차를 마셨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계획은 성공이었다.송정희는 마침내 시름이 놓였다.그녀는 반쯤 남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마저 마시라고 권유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면 너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입을 열지 않았다.연회가 반쯤 흘러갔을 무렵, 태후는 노곤하다며 먼저 돌아가서 쉰다고 했다. 밤에는 생신연을 축하하는 불꽃연회가 있을 예정이었다.영안후는 불꽃연회가 끝나고 황제와 태후께서 기분이 좋을 때 배명월의 혼사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잠시 후, 황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금영은 점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입김만 불어도 뜨거운 열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옆에 있는 송정희를 싸늘한 눈길로 노려보았다.‘결국 그 더러운 수작을 또 쓴 것이로구나.’하지만 그 덕분에 하려는 일이 더 수월해졌다. 금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송정희가 물었다.“금영아, 어디 불편하니?”금영은 담담히 답했다.“좀 어지럽네요.”송정희는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하는 척 말했다.“어디 아픈 거니?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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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잠시 후.배명월은 금영을 수강궁 뒤쪽으로 데려갔다. 이곳엔 태후가 평소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당과 잠시 쉴 수 있는 별채도 몇 곳 있었다. 사실 수강궁에는 남녀를 구분해, 미리 손님들이 잠깐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하지만 오늘은 큰 행사가 있는 날이라 궁녀와 내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연스레 태후가 있는 수강궁 내전에 경비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다른 곳은 비교적 한적해 몰래 숨어들기 어렵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배명월은 그걸 이용해서 금영을 이끌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금영을 침상에 눕힌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옷깃을 쥐여뜯는 금영을 보며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언니, 이곳에서 잠시 쉬고 계세요. 제가 가서 숙취 해소탕을 구해올게요.”말을 마친 배명월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밖으로 향했다. 뒤돌아선 순간, 그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조금 버티면 영안후가 자신과 주윤안의 혼인 주청을 포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이번 일을 계기로 영안후부의 자랑이었던 금영은 매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남자와 한 침상에 뒹굴다 순결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배명월은 후부의 유일한 자랑이자 순결을 보유한 딸이 될 터였다.금영이 어떤 처지에 처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이 수로 인해 영안후부의 명성에도 약간의 영향이 가겠지만, 어차피 그때 되면 수치를 느낀 금영이 자결하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영안후부의 명성도 보전될 것이다.이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장녀인 금영은 그 누구보다 결백과 명성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이렇게 허무하게 누군가에게 더럽혀져서 태자와 혼인할 수 없게 된다면 그녀 스스로 얼굴을 들 수 없어 살아갈 용기를 잃게 될 가능성이 컸다.배명월은 밖으로 향하며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소매의 향기를 맡았다. 언제부터인지 몸에 달콤하고도 묘한 향기가 묻어 있었다. 역하진 않지만 굉장히 진하고 어지러운 향기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미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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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금영은 단호한 표정을 하고서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이야기 중이던 두 사람이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문을 지키던 위명이 안에서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주 순조롭게 대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위명은 그녀를 침입자로 간주하고 엄한 소리로 꾸짖었다.“무례하다! 어찌 허락도 없이 함부로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이냐!”그러나 바로 금영을 알아본 그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그... 금영 아가씨?”금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폐하, 신녀가 꼭 아뢸 것이 있습니다.”“말하거라.”황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금영을 바라보며 답했다.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왜 또 찾아왔는지 언짢았던 것이다.황제는 자신의 뜻을 거역하거나 무례한 사람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내전을 침범했더라면 바로 위명을 시켜 끌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상대는 금영이었기에 언짢아도 변명할 기회를 준 것이다.금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위명을 힐끗 보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위 총령,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위명이 난처한 눈길로 금영을 바라보았다. 비켜주기 싫은 게 아니라, 이건 황제의 명이 필요했다.금영은 간절한 눈길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당장 울 것 같은 그 눈을 바라보며 황제는 그녀가 또 어디서 상처받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태자 녀석이 또 서운한 짓을 한 건가?’영안후부의 둘째 아씨가 입궁한 것은 황제도 알고 있었다.‘영안후, 감히 내 충고를 무시하고 또 일을 벌이다니,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위명에게 물러가라 손짓하였다.또 뭐가 저리 서러운지 들어나 볼 생각으로 황제는 조용히 금영을 응시했다.위명은 서둘러 뒤돌아서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금영은 곧 태자비가 될 여인이고 황제와 단둘이 있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위명은 밖에서 대기하며 손복안을 기다리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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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하지만 금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황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만 지키고 있는 그녀를 보고 속으로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짐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당장 꺼....”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다시 말했다.“물러가거라.”황제는 결국 그녀에게 너무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때, 금영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소리를 들은 황제는 흠칫하다가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잠깐 금영을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팔을 잡아주며 물었다.“어디 불편한 것이냐?”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그런데 그 잠깐의 접촉에 줄곧 침묵하던 금영이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억눌렀던 무언가가 갑자기 터진 것처럼 그에게 몸을 안겨오기 시작했다.황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품에 폭삭 안겨 있었다.가녀린 팔이 그의 목을 휘감고 하얗고 보드라운 손길이 그의 진청색 겉옷을 마구 쓰다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황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쳤다.“무엄하다! 어찌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말을 마친 그는 손을 뻗어 힘껏 금영을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에 옷감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영이 잡고 있던 황제의 겉옷이 찢어진 것이었다.그는 차가운 조소와 함께 엄하게 꾸짖었다.“정녕 미쳤느냐!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는 이러는 것이냐!”금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들고 황제와 시선을 맞추었다.면사포를 두르고 있어 표정은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청순한 눈망울에는 고통과 어리둥절함, 야릇한 색기가 담겨 있었다.“폐... 폐하...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애원했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귀에 익은 말투였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직설전에서 자신에게 부딪쳐 오던 여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곧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미래의 태자비인 금영에게서 결코 나와서는 안 될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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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황제는 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착잡한 눈으로 눈앞에 선 금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금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여도 정신은 멀쩡한 상태였다. 차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미리 준비해 온 정심약(靜心藥: 각성제와 비슷한 효과)을 복용한 덕분이었다.금영은 오늘 서 황후든 송정희든 반드시 무슨 수를 쓸 것이라 보고, 이미 대비책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러니 순순히 차를 마신 것 역시 송정희의 의심을 거두게 한 뒤 판세를 뒤집기 위한 계산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금영 역시 황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도박하고 있었다. 금영은 황제가 절대로 이 문을 열어 서 황후를 안으로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믿어서라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황가의 체면을 중히 여기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서 황후의 질문이 들린 후에도 내전에는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위명은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서 황후의 물음에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조금 전 마주한 금영의 모습만 보아도, 분명 좋지 않은 일을 당한 채 서러움을 품고 이곳까지 찾아온 듯했다. 더구나 뒤이어 서 황후마저 발걸음했다. 이 일은 십중팔구 태자와 얽혀 있을 터였다.사정을 모르는 위명은 함부로 답할 수 없었다.“폐하! 신첩, 잠깐 아뢸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서 황후의 목소리가 재차 밖에서 들려왔다. 평온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분노가 느껴졌다.금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고작 이런 것에 화를 내시면 나중에 진실을 마주했을 때 어찌 감당하시려고!’금영은 비틀거리더니 황제의 몸 위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가녀린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여인의 달콤한 숨결이 제왕의 심금을 마구 흔들었다.“폐하... 제발... 제발... 저의 이런 모습을... 타인이...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그녀는 온몸의 기운을 쥐어짜는 듯, 애타는 목소리로 절절이 애원했다.황제는 오늘 같은 일은 서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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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서 황후의 최측근인 궁녀 조씨와 환옥은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황제께서 정체도 불분명한 여인 때문에 서 황후에게 호통을 치다니, 그녀들에게도 상당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굳이 묻지 않아도 서 황후의 심정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서 황후는 냉소를 지으며 읊조리듯 말했다.“태후마마의 생신 연회에서 어떤 여우년이 이런 깜찍한 짓을!”“마마, 고정하시지요.”곁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 서 황후의 온화하고 단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음침한 얼굴만 남았다.“현비에게 이 일을 티 나지 않게 알리거라.”잠시 고민에 잠겼던 서 황후가 다시 덧붙였다.“그리고 사람을 시켜 별채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그년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라고 일러라! 폐하가 언제까지 그년을 감싸주진 못하실 것이다!”*한편, 문밖의 위명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폐하, 황후마마께선 이미 멀리 가셨습니다.”얘기를 들은 황제는 금영을 내려다보며 호통쳤다.“멀리 갔다고 하니, 이만 이 손 놓거라!”금영은 살며시 황제를 풀어주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네, 폐하....”황제도 그 모습을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짝 긴장했던 몸이 마침내 풀어지고 안도의 숨이 저절로 나왔다.금영은 여전히 옷깃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비단 겉옷은 이미 어깨까지 내려가 하얗고 둥근 어깨가 드러났으며, 붉은색의 속옷도 언뜻 보였다. 사내가 보면 단번에 피가 쏠릴 매혹적인 모습이었다.정말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황제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눈앞에 매혹적인 광경이 펼쳐졌다.겨우 사그라들었던 욕구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통제를 잃은 이런 느낌은 황제의 분노를 자극했다.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배금영!”금영은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읊조렸다.“폐... 폐하... 신... 신녀는... 약에... 당해... 너무 더워요....”힘겹게 말을 잇던 그녀는 어느 순간 이성을 상실한 듯, 가는 신음을 내뱉었다.그 소리에 황제의 마음은 다시 심란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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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금영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최대한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오늘 이곳까지 찾아왔을 때는 이미 그에게 진실을 토로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상태였다. 하지만 전개는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그녀는 욕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은 틈을 타 이 고고한 황제를 심연으로 끌어내릴 계획이었다. 그에게 다른 여인이 아닌, 자신을 품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도 있음을 깨닫게 할 생각이었다.황제가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면사포를 벗기게 된다면, 그도 함부로 군주를 기만한 죄를 묻지 못할 터였다.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황제는 절제하고 있었다. 황제는 금영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허나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고, 되돌릴 길은 없었다.금영은 조용히 기다렸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폐하께서는 내가 영지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기쁜 얼굴을 하실까? 아니면 분노하실까?’사실 황제가 진실을 마주하고 자신을 어떻게 처분할지는 금영도 확신이 없었다.*황제는 두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을 잠시 내려보다가 손을 면사포로 가져갔다. 이걸 살짝 잡아당기기만 하면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예전이었다면 아무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영이 달려와서 그를 껴안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폐하라고 불렀을 때, 계속 억누르고 참아왔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또렷해지기 시작했다.황제는 그렇게 조용히 금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한 눈빛 속에서 거센 폭풍이 일고 있었다.*금영도 방 안의 분위기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면사포에 살포시 닿았던 손길은 결국 다시 떨어져 버렸다. 그는 그 면사포를 벗기지 않았다.금영은 곤혹스러웠다.‘왜지?’“손복안을 부르거라.”황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분부했다.부름을 들은 손복안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폐하.”그는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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