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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화

Author: 경옥
눈처럼 고운 소리가 가는 눈발 속에 스며들어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을 머금었다.

심서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바로 뒤에 서 있던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반쯤 마른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렸는데, 창백한 얼굴에 흘러내린 잔머리 몇 가닥이 찬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다가오다가 멈춘 자리에서 규범을 어기지 않는 정중한 태도로 깊이 감사의 만복례를 올렸다.

힘이 덜 실린, 그러나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눈발 사이로 흘러왔다.

“이번 일은 심 대인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수없이 흩날리는 눈송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내려앉았다.

심서준은 고개를 낮췄고, 시선은 오로지 계연수의 창백한 얼굴에만 머물렀다. 하얀 눈이 그녀의 머리칼과 어깨 위에 내려앉고 찬바람이 옷자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가냘픈 모습이었다.

그는 눈썹을 낮추어 정리하듯 내리며 시선의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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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mi kim
쓸데없는 생각말고 빨리 이명유가 한짓이라고 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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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1054화

    희고 서늘한 빛이 계연수의 몸 위로 길게 내려앉아, 옥처럼 맑은 얼굴을 한층 더 희고 티 없이 비추었다.피어오른 단향 연기가 가늘게 허공을 맴돌았다. 계연수는 한 손을 앞에 놓인 작은 온돌 탁자 위에 가볍게 얹었다.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마저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계연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모두의 가슴은 점점 조여 들었다.한참 뒤에야 계연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도울 수 없습니다.”옥쟁반 위로 구슬이 굴러떨어지는 듯 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늘함만이 가득했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씨는 의자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계연수는 창백하게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장씨를 내려다보았다. 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이번에 한 번 도와주면 앞으로도 끝없이 도와줘야 할 겁니다. 설마 제가 백씨 집안에 들어가 고하운의 삶까지 대신 살아 줘야 합니까? 고하운이 선택한 사람이고, 큰외숙모께서 선택한 혼처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혼처로 보이지 않는다고. 그때 큰외숙모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하운은 또 뭐라고 했고요?”고씨 노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만하자꾸나. 더는 말하지 말거라.”계연수는 고씨 노부인을 바라보았다.“할머니,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잊었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일이 정말로 끝났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사람은 이제 다 지나간 일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요. 헌데 직접 겪은 사람에게는 영영 지나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제 아픔을 대신 잊어 주거나, 저를 대신해 지난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고씨 노부인은 흠칫했다.계연수가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내놓을수록 노부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계연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지난 세월 내내 한결같이 밝고 맑았다. 자신이 무엇을

  • 주문춘귀   제1053화

    “제가 그곳에 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지실 겁니까?”계연수의 목소리에는 집안을 다스리는 안주인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기세에 짓눌린 장씨는 감히 계연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초조하게 손을 비비던 장씨는 구원을 청하듯 고씨를 바라보았다.본래 마음이 약한 고씨는 큰동서의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계연수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그렇다면 백씨 집안에 초대장을 보내는 건 어떻겠니? 백씨 큰 부인에게 하운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라고 한 뒤, 네가 따끔하게 경고하는 거야.”장씨도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연수야, 이번 한 번만 도와다오.”계연수는 입술을 비틀었다. 지긋지긋한 일들이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어 둥근 베개에 기댄 뒤, 장씨를 바라보았다.“제가 이번에 그들을 불러 경고한다고 한들, 그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면 앞으로 명씨가 고하운을 잘 대해 줄까요? 백선혁이 갑자기 다정한 부군이라도 된답니까? 백씨 집안사람들이 고하운을 조상님처럼 떠받들기라도 할 것 같으세요?”계연수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했다.“안채에서 사람을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씨는 백선혁의 적모예요. 집안의 법도와 효를 내세우면 고하운을 옭아맬 명분쯤은 끝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명씨가 작정하고 고하운을 괴롭히려 든다면, 겉으로는 엄연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이니 누가 나서도 소용없어요. 고하운이 더는 핍박받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일어서야 합니다. 계속 짓밟히든가, 아니면 아예 판을 뒤엎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합니다. 제가 해 줄 말은 이것뿐입니다. 저는 고하운을 돕지 않을 것이고, 그 아이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도 이미 분명히 밝혔습니다.”계연수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적막에 잠겼다.장씨조차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판을 뒤엎는다니… 어떻게 말이냐?”계연수는 싸늘한 눈으로 장씨를 바라보았다.“받을 수 있는 수모를 모조리 당하고도 더는 거리낄

  • 주문춘귀   제1052화

    계연수는 담담히 이야기를 들었다. 백씨 집안이 백작부로 강등되었다고는 하나,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백씨 큰 대감은 여전히 부총병의 자리에 있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졌다 한들 시녀조차 두지 못하고 식은 밥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울 만큼 몰락했을 리는 없었다.누가 보아도 일부러 고하운을 괴롭히는 것이 분명했다.고하운은 명씨의 친며느리도 아니었다. 더욱이 백선혁은 제법 재주가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서자였다. 명씨의 식견과 성정을 생각하면, 쓸모를 잃은 고하운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쪽이 오히려 이상했다.고씨가 계연수를 바라보며 분개했다.“백씨 집안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에게 이럴 수 있니?”계연수는 어머니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물었다.“백선혁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그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씨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백선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단다. 아예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관아에서 지내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집에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더구나.”고씨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하운이가 직접 찾아가 집으로 돌아와 자기 편을 들어 달라고 빈 적도 있었다. 제 부인이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직접 와서 봐 달라고도 했고. 헌데 백선혁은 무슨 일이든 적모의 뜻을 따르라는 말만 했다고 하더구나. 곧 태어날 제 아이조차 안중에 없는 모양이야.”“요즘 하운이가 하루도 빠짐없이 서신을 보내와 백씨 집안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내는지 하소연하고 있다. 나도 이제는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그 말을 듣고도 계연수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백씨 집안이 그처럼 나오는 것은 딱히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예전에 계연수가 살았던 사씨 집안도 바깥에서는 나름대로 가풍을 중시하는 명문가로 통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권세 있는 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힘없는 자는 짓밟았다. 친정의 비호를 받지 못했던 계연수 또한 사씨 집안에서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롭게 살아야 했다.고하운은 언제나 누군가가 자신을

  • 주문춘귀   제1051화

    장씨는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좋은 집에서 수많은 시녀와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껏 제 딸이 겪은 설움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한 번 잘못 내디딘 걸음이 결국 모든 것을 그르치고 말았다.고씨 노부인은 안으로 들어와 담담하기만 한 계연수의 얼굴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보니 계연수가 고하운의 일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예전에 계연수는 고하운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며 모진 말까지 내뱉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고씨 노부인이 계연수를 나직이 불렀다.계연수는 손에 들고 있던 은수저를 내려놓았다. 곁에는 용춘만 남기고 다른 이들을 모두 물린 뒤, 외조모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우선 앉으세요.”그토록 평온한 목소리에 고씨 노부인은 마음을 졸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미처 운을 떼기도 전에 장씨가 울먹이며 하소연을 쏟아 냈다.“연수야, 하운이도 이제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안다. 그 아이가 지금 백씨 집안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단다. 백씨 큰 부인은 사람도 아니더구나. 만삭인 하운이에게 허드렛일이나 하는 시녀 노릇을 시키고 있어.”장씨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 아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건 안다. 헌데 하운이가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아무리 깊은 원한이라도 눈 녹듯 사라질 게다.”계연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장씨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한 점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큰외숙모께서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저는 고하운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무엇 때문에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냉담한 대답에 장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눈앞의 계연수는 흐트러짐 없이 나한탑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어느새 온몸에 서늘하면서도 기품 있는 명문가 안주인의 풍모가 배어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마저 마치 높은 곳

  • 주문춘귀   제1050화

    그 물건들은 고준안이 보낸 것이 아니었다. 계연수의 숙부가 고준안의 손을 빌려 보내온 것이었다.휘안현의 소박한 향토 음식과 아이들이 가지고 놀 만한 자잘한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계연수의 아버지가 어릴 적 가지고 놀았다는 낡은 장난감도 몇 개 섞여 있었다. 숙모가 손수 지은 아기 옷도 두 벌 들어 있었는데, 계연수는 촘촘하고 반듯한 바느질 자국만 보아도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물건과 함께 숙부의 편지도 도착했다. 계연수가 그 집에 머물 틈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사람을 시켜 틈틈이 쓸고 닦게 하고 있으니 모든 것이 예전 모습 그대로라는 내용이었다.편지에는 휘안현에서 벼슬살이하는 고준안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청렴하고 올곧게 정사를 돌보는 훌륭한 관리라는 말이었다.여러 소식이 두서없이 이어졌지만 계연수는 고준안에 관한 대목을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숙모가 보내온 물건들을 하나씩 바라보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곧 사람을 시켜 답례로 경성의 물건들을 골라 보내게 했다.특별히 귀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전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다.그 밖에 전해 들은 소식이 하나 더 있었다. 고하운에 관한 일이었다.영국공부에 변고가 닥친 뒤, 고하운의 처지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본래 백씨 가문의 가풍은 그다지 반듯하지 못했다. 서로를 속이고 견제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으며, 잘나가는 사람에게는 앞다투어 붙고 기세가 꺾인 사람은 거리낌 없이 짓밟았다. 고하운이 그동안 믿고 의지한 것은 계연수라는 든든한 배경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배경이 자신을 받쳐 주지 않으니, 백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더구나 고하운은 계연수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자 백씨 가문 사람들은 이번 사태의 책임마저 자연스럽게 고하운에게 떠넘겼다. 계연수의 도움 하나 얻어 내지 못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긴 것이다.백씨 가문 사람들은 제 딸인 백씨에게조차 매정했다.

  • 주문춘귀   제1049화

    심서준이 물었다.“조호의 진술서에는 수결까지 받아 두었느냐?”주예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그 노참장은?”“입이 어찌나 무거운지 좀처럼 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손자가 주원길의 휘하에서 장부를 맡아 온 막료입니다.”심서준은 검지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일정하게 울리던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낮게 번졌다.“사람을 몇 데리고 가서 그 손자를 잡아 오거라. 조부가 그가 장부를 조작한 사실을 모두 자백했다고 전하고.”주예는 즉시 명을 받들어 사람을 보내러 나갔다.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위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서신을 전하러 간 소기가 밤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심서준은 그 말만으로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미 풀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한 셈이니, 주원길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이곳은 주원길의 터전이었다. 반면 심서준이 거느린 병력은 고작 오백 명뿐이었다.주원길은 평부진에 자리를 잡은 뒤 고향 마을 사람들을 거의 모두 불러들였고, 주씨 일족까지 데려와 곳곳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흐르는 동안 평부진은 어느덧 물샐틈없는 철옹성이 되어 있었다.심서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굳게 다문 입술 아래로 생각이 깊어졌다. 이윽고 손을 가볍게 내저어 호위를 물렸다.서신을 보내지 못하는 것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해 오는 길에 따로 대비해 두었다.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계연수가 그의 서신을 받지 못하면 틀림없이 걱정할 터였다.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매끄러운 천 위를 스치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추더니,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계연수는 어느덧 보름 가까이 심서준의 서신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늦어질 때만 해도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조용히 몸집을 불렸다.그날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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