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극 로맨스 / 주문춘귀 / 챕터 81 - 챕터 90

주문춘귀의 모든 챕터: 챕터 81 - 챕터 90

148 챕터

제81화

계연수는 고개를 숙였다. 귀 옆의 귀걸이가 얼굴에 살짝 부딪히며 희미한 냉기를 전했다.고씨 노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사가 노부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이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니 두 사람이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법이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선택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되면 그땐 돌아올 길도 없지.”그러고는 계연수의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연수야,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다 받아들일 생각이다. 다만… 그저 네가 훗날 후회할까 봐 그게 걱정일 뿐이다. 지금 사가는 형세가 좋다. 사가의 세 분 어른은 모두 관직에 있고 옥현의 부친께서는 선주에서 돌아오시면 적어도 시랑쯤은 되실 게다. 그리고 옥현 역시 제 몫을 해내고 있지 않느냐? 젊은 나이에 이미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게다가 당시 사가에서는 절대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 이런 혼인을 정말로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외조모의 말들은 계연수가 수없이 많은 밤에 이미 되뇌었던 것들이었다.그녀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계연수는 외조모를 바라보며 예전과 다르지 않게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사가는 분명 좋은 집안일지도 몰라요. 헌데 이번에 고준 오라버니 일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사가가 좋은 것과 제가 잘 지내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사가의 부귀가 아닙니다. 저와 나으리는 처음부터 한마음이었던 적 없어요. 출세하는 건 그분의 일이고, 부귀를 누리는 것도 그분의 몫이에요. 저는 그저 사가에 세워진 장식품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언젠가 나으리의 마음이 다른 여인에게로 향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그건 그분에게 너무도 쉬운 일이니까요. 차라리 지금 물러나는 게 훗날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번엔 조금 제멋대로 구는 걸지도 모르지만… 외조모, 이번 한 번만은 제 마음대로 하게 두시지요.”고씨 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계연수를 깊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성격도 마음도 모두 자라 있었다
더 보기

제82화

그 목소리에는 옅은 쉰 기운이 섞인 듯한 부드러움이 실려 있었다.그 소리에 고준안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긴장한 손바닥에는 금세 땀이 맺혔다. 그는 감히 계연수를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고개를 숙여 그저 그녀의 연녹색 물결 같은 가느다란 어깨만을 응시했다.어깨 위에는 암문이 은은히 흐르는 비단이 얹혀 있었고 찬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그의 마음까지 어지럽혔다.그는 애써 태연한 기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내 당번이라서 외조모를 뵈러 왔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외조모께서는 지금 한가하십니다. 안색도 전보다 좋아 보이시고요. 오라버니의 효심이라면 외조모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고준안의 눈앞에는 그녀가 살짝 옮겨 딛는 연약한 연보만이 들어왔다. 문득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그는 시선을 들어 계연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눈가, 눈동자에 맺힌 작은 별빛들, 오똑한 콧날 끝까지 옅게 붉어 있었다.그는 무심코 손을 들며 다급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느냐?”계연수는 고개를 저었다.“걱정 마세요. 그저 외조모를 뵈어 기뻤을 뿐입니다.”고준안은 반쯤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가슴속에 치밀어 오른 뜨거운 감정이 한곳에 눌려 쌓여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계연수는 다시 고준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께서는 여기서 오래 기다리신 듯하군요. 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가세요.”고준안은 고개를 숙였지만 시선은 본능적으로 멀어지는 계연수의 등을 따라갔다.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는 또 한 번 식은땀이 맺혔다. 심장이 물에 잠긴 듯 빠르게 뛰는 소리에 안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도 어쩐지 흐트러졌다.계연수는 어머니 처소에 들러 잠시 머물렀다. 약을 하나하나 살핀 후 자리를 뜨려 했으나 이번에는 둘째 외숙모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외숙모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고 이내 눈물까지 보이며 사가에서의 계연수 앞날을 걱정했다. 계연수는 차분히 달
더 보기

제83화

계연수는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끝내 생각해내지 못한 채 다시 침묵 속으로 돌아갔다.사실 사가 노부인 또한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사옥현과 체면을 지키며 한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다소의 억울함쯤은 견디면 되고 부군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일 역시 참아내면 그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지루하다고 느꼈다. 이곳에 갇혀 살아가는 삶이 너무도 무미건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옥현은 그럴 가치가 없었다. 그를 위해 참고 견딜 이유도, 그를 위해 아이를 낳아 줄 이유도 없었다.노부인은 계연수의 분명한 답을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다.“모레 황후 마마께서 심부에서 설상연을 연다더구나. 사가에도 초청장이 왔다. 그날, 집안 사람들과 함께 다녀오거라.”그러고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사실 네가 꼭 갈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너를 보내려는 건 다른 집안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남들의 사는 모습도 좀 보라는 뜻이다. 사람 사는 게 다 완벽할 수는 없다. 달도 늘 보름으로 차 있는 것은 아니지 않더냐. 바람도 쐬고 마음도 풀다 보면 생각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마음이 정리되면 일찍 나오거라. 옥현의 마차가 널 기다릴 게다. 두 사람 사이에 할 말이 있다면 그날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네 시어미가 말한 첩 이야기는… 걱정 말거라. 옥현이도 내게 약속했다. 예전에 부친께서 혼담을 할 때 내세운 맹세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설령 네게 자식이 없더라도 종중의 아이를 네 이름으로 들일지언정 첩은 들이지 않겠다고 하더구나.”계연수는 고개를 숙인 채, 손끝에 힘을 실었다.심부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노부인의 말이 이어졌다.“연수야, 나는 언제나 네 편인데, 내 마음도 이제 좀 받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내가 너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지. 사양하지 말거라. 옥현에게도 한 번은 기회를 줘야 한다
더 보기

제84화

계연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바로 그때, 앞쪽에서 마부가 다가와 사옥현에게 지금 출발해도 되는지 물었다. 사옥현은 계연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몇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끄덕였다.이명유는 발을 걷어 올리고 사옥현을 바라보았다. 사옥현의 시선이 끝내 계연수가 탄 그 마차를 좇고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눈빛 또한 미묘하게 달라졌다.심부에 도착하니 후원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정자와 수사 곳곳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나 심부의 후원이 워낙 넓어 번잡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유리처럼 반짝이는 정자와 누각이 물가를 따라 들어서 있고 사방에는 이름난 나무와 진귀한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값비싼 매화 가지들이 회랑과 정자 너머로 가지를 내밀고 있었고 시녀들은 금빛 쟁반을 들고 구불구불한 회랑을 지나갔다. 치맛자락이 스칠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흩어지고 처마 아래 달린 동령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사르르 내려앉는 잔설과도 묘하게 어울렸다.도착하면 먼저 황후 마마와 심씨 부인께 문안을 올려야 했기에, 계연수는 맨 뒤에서 홀로 걸었다. 고개를 낮추고 시선을 거두고 있을 뿐, 다른 이들처럼 이리저리 신기해하며 둘러보지도 않았다.사가의 다른 며느리들과는 평소에도 그다지 말을 섞지 않았기에 그녀의 곁에는 줄곧 사람이 없었다.그때 이명유가 다가와 말했다.“네가 이렇게까지 밀고 당길 줄은 몰랐네. 이런다고 사옥현 오라버니가 널 더 보게 될 줄 알았어? 오라버니 마음은 늘 내게 있어!”계연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는 상대할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그 무심함에 이명유의 얼굴빛이 급격히 굳어졌다.한편, 심서준은 누각 위에 멀찍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맨 뒤에서 걷는 계연수의 모습에 머물렀다.그녀는 연분홍빛 연꽃색 바탕에 은은한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있었다. 아담한 체구는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고 걸음에 맞춰 나부끼는 치맛자락은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는 허리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눈처럼 맑은 피부에
더 보기

제85화

한편, 계연수는 사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문안을 올렸다. 실내에는 문안을 기다리는 이들이 가득했고 누구나 황후 마마와 심씨 부인 앞에서 얼굴을 비추고자 애쓰던 터라 귀부인들이 겹겹이 둘러서 있었다.계연수는 고개를 낮춘 채 사가 부인들 뒤를 따랐다. 눈에 띄지 않게 묻혀 가니 특별히 주목받는 일도 없었다.황후 마마는 예전에 한두 번 뵌 적이 있었는데, 성품이 온화한 분이었고 심씨 노부인 또한 인자한 기색을 지닌 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계연수는 남들 앞에서 일부러 인연을 붙잡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사가 사람들과 함께 물러나려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고하운이 황후 마마 앞에 낮게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둘째 외숙모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운 채 황후 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계연수의 존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그 광경을 보며 계연수는 문득 생각했다. 정말로 황후 마마가 고하운을 마음에 둔 것은 아닐까?오늘 모인 귀한 규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서도 굳이 고하운을 곁에 두고 말을 건넨 거라면, 그 자체로도 이미 뜻이 담겨 있음이 분명했다.만약 사실이라면 계연수는 진심으로 고하운이 잘되기를 바랐다.밖으로 나와 계연수는 혼자 회랑 쪽으로 향했다.한때 손수건을 나누던 벗들은 계씨 집안에 일이 생긴 뒤로 자연스레 멀어졌고 사옥현과 혼인한 뒤에는 시어머니를 따라 몇 차례 연회에 참석하긴 했으나 대부분 인사치례를 나누는 사이일 뿐 깊은 교류는 없었다.사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결국은 어떻게 해야 사옥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로 귀결되었으니까. 모두들 걱정하는 얼굴로 조언을 늘어놓았지만 속으로는 그녀를 비웃고 구경거리로 삼고 있다는 것을 계연수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그들은 답답하고 지루한 후원 생활 속에서 계연수를 자신들보다 나은 처지임을 확인하는 위안으로 삼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그녀가 사옥현과
더 보기

제86화

계연수는 쓴웃음을 지었고, 더는 할 말이 없었다.그렇다. 인정해야 했다. 인생은 결코 둥글게 완성되지도, 모든 것이 온전하게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녀의 집착과 억울함, 그리고 실망은 오직 스스로만 아는 것이었다.이야기해 보아야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누가 알아주길 바란 적도 없었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여겼으니 말이다.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어디선가 이명유가 불쑥 다가와 계연수의 곁에 섰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며 달콤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형수님, 어째서 저희랑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앞에서 매화 수수께끼를 하고 있어요. 아가씨들은 모두 구경 가고 싶다던데 형수님도 함께 가실래요?”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이명유를 바라보았다. 연회 자리에서 이명유는 늘 사가의 아가씨들과 어울려 한창 떠들 뿐, 이렇게 먼저 다가오는 일은 드물었다.계연수는 이명유의 팔을 가볍게 밀어내며 미소 지었다.“먼저 즐기세요. 잠시 후에 찾아가겠습니다.”이명유는 밀려난 손에 잠시 표정이 굳었으나 이내 다시 웃음을 띠었다.“그럼 형수님, 멀리 가지 마세요. 이따가 같이 돌아가요.”그렇게 말하며 두어 걸음 물러난 그녀는 웃으며 몸을 돌려 사가의 둘째 부인 쪽으로 향했다.계연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딘가 미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시선을 다시 그쪽으로 옮기자 마침 이명유와 눈이 마주쳤다. 이명유는 순간 흠칫한 듯 급히 시선을 피했다.계연수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곁에서 방씨가 무언가 말을 건넸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씨가 몇 번이나 부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앞쪽이 꽤 북적이는 구나. 우리도 가볼까?”방씨가 물었다.계연수는 앞을 바라보았다. 매화 가지마다 향낭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는 수수께끼가 들어 있었다. 맞히면 상을 받는 놀이였다. 아가씨들은 향낭을 찾느라 매화나무 사이를 오가며 웃음소리를 터뜨리고 있었다.계연수는 다시 이명유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앞쪽으로 걸어
더 보기

제87화

가는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심서준은 계연수의 힘없이 늘어진 허리를 받쳐 안고 고개를 숙여 품속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계연수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몸에는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젖은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고 온몸에서는 뜨거운 열이 올라 얼굴마저 축축했다. 이마에서 맺힌 땀방울이 머리칼을 타고 뺨으로 또르르 떨어지고 있었으니 분명 평범한 상태는 아니었다.붉어진 입술이 벌어지고 반쯤 뜬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숨결에 실린 열기가 스며들 듯 퍼졌고 입술 사이로는 물을 찾는 낮은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심서준의 담담하던 시선이 잠시 멈췄다. 그는 옆에서 놀라 주저앉아 있는 용춘을 한 번 바라본 뒤, 계연수를 가로로 안아 들고 몸을 돌려 뒤쪽으로 향했다.용춘은 그 뒷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어 허둥지둥 일어나 뒤따라갔다. 이상하게도 부인이 다른 이의 품에 안겨 가는데 마음 한구석이 놓이는 듯했다. 마치 이제야 살 길을 찾은 것 같았다.곁에 있던 문하는 그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주인이 던진 눈빛을 보고는 곧장 용춘 앞에 다가와 낮게 말했다.“우리 주인어른은 함부로 사람을 돕는 분이 아닙니다. 조용히 밖에서 지키기만 하세요. 소리 내지 말고. 알겠습니까?”용춘의 머릿속에는 그녀를 구했다는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문하는 용춘이 말을 이해한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고 곧바로 부의를 부르러 달려갔다.용춘은 심서준의 뒤를 따라가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어요. 헌데 갑자기 몸이 뜨겁다더니 이렇게 됐습니다.”그러고는 애원하듯 말했다.“나으리, 제발 저희 부인을 살려 주세요.”심서준은 아무 말 없이 계연수를 안은 채 곧장 뜰 안으로 들어섰다.평소 심서준의 거처에는 시중드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설령 남아 있던 이들이 있어도 주인이 여인을 안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모두 숨을 죽였을 것이다.
더 보기

제88화

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녀가 아직 소녀였을 때의 목소리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심서준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깊게 내려앉았다. 완만히 이어진 곡선은 마치 고운 운산이 겹겹이 이어진 듯했다.몸속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정욕과 충동이 요동쳤으나 얼굴에는 여전히 고결하고 냉담한 기색만이 남아 있었다.그는 다시 몸을 돌려 그녀 곁에 앉았다. 계연수가 그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그해, 물에 빠진 뒤에도 그녀는 지금처럼 이렇게 그의 소매를 꼭 붙잡고 있었다.심서준은 허리를 굽혀 말없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길고 단정한 손가락을 뻗어 눈꼬리에 번져 나온 물기를 조심스레 닦아냈다. 늘 서늘하던 그의 눈빛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미세하게 누그러졌다.손바닥만 한 얼굴에 눈물이 한 방울씩 굴러 떨어졌다. 마치 세상이 무너질 만큼 큰 억울함을 겪은 아이처럼 울었다. 그는 그녀가 아프다며 내뱉는 낮은 신음을 들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고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희미한 향이 타오르는 실내에서 늘 허리를 굽히지 않던 흰 옷의 사내가 침상 위 여인의 귀가에 고개를 낮춰 속삭였다.“괜찮아. 무서워하지 마.”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듯, 물처럼 부드러운 손으로 부유목을 붙잡듯 그의 허리로 더듬어 올라왔고 뜨거운 얼굴 또한 바짝 붙였다.심서준은 낮게 숨을 삼켰다. 계연수의 난잡한 손을 눌러 멈추게 하며 흐릿하게 반쯤 열린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 안에는 물결치는 수기가 가득 차 있어 혼을 빼앗을 듯 요염했다. 마치 사람을 휘감는 요물처럼.붉은 입술 사이로 극히 유혹적인 따뜻한 향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손목을 쥔 그의 손등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심서준의 몸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아래로 기울었고 손등에는 미세하게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향기롭고 연약한 붉은 입술이 어느새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의 호흡이 더욱 무거워졌다. 손바닥은 계연수의 가는 허리에 닿았고
더 보기

제89화

회 선생은 급히 표정을 가다듬고는, 장막 안의 심서준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이 아가씨의 맥상이 심상치 않습니다. 기운의 흐름이 막혀 있고 습열의 징후가 뚜렷하며 화기가 안에서 성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보통의 간화가 성한 경우라면 이런 맥은 나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몸이 이토록 뜨겁게 달아오른 점으로 보아 소인은 독에 중한 것으로 판단됩니다.”심서준의 눈매가 차갑게 들어 올려졌다.“어떤 독인가?”회 선생은 한참을 곱씹은 뒤 조심스레 말했다.“화독으로 보입니다. 다만 일반적인 화독은 온몸에 통증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그는 잠시 더 헤아리다가 말을 이었다.“서역에 전해 내려오는 벌레 하나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적독충이라 하는데 이 벌레는 체내에 매우 강한 독을 지니고 있으며 불개미를 먹고 삽니다. 물리면, 몸에 열이 급격히 오르고 전신에 통증이 번져서, 물에 몸을 담가야만 증세가 가라앉게 됩니다. 게다가 이 적독충의 독은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어 열에 취한 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물로 뛰어들게 만듭니다. 이 독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으나 물에 반 시각 정도 몸을 담그면 독의 대부분이 풀립니다. 다만 통증은 며칠 더 남지요. 그래서 중독자 대부분은 독으로 죽기보다는 물에 뛰어들다 익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서역에서나 있는 물건이라 경성에서 이를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이 아가씨 몸에 물린 자국이 있는지 살펴보시지요. 적독충에 물린 자리에는 붉게 부어오른 흔적이 남아 아주 뚜렷합니다.”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몸부림치는 사이에 드러난 계연수의 희고 고운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 안쪽에는 작고 붉은 부기가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분명하게 물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는 품속의 사람을 바라보며 복잡한 빛을 띠었다. 사가의 후원에는 다른 여인이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한 집안의 안채에 머무는 사람일 뿐이었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이런 독을
더 보기

제90화

사실 그녀는 이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심서준의 거처를 향해 걸어갔다. 심서준의 뜰은 심부 전체에서도 가장 고요한 곳이었다. 그는 늘 적막한 것을 좋아했기에, 다른 뜰의 하인들조차 별다른 일 없이는 그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심서준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그는 고결한 인물이었다. 차갑고 냉담해 보일지언정, 비열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외면한다 해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심서준의 곁이라면 그녀에게는 아직 스스로를 지킬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다만, 그가 그녀를 자신의 뜰로 데려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돌보려 들지 않을 거라 여겼다.이제 서서히 정신이 맑아지자 그녀는 앞뒤 사정을 하나씩 짚어보기 시작했다. 이명유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처럼 이상한 증상이 나타날 리는 없었다.용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계속 물을 찾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매화림은 바로 수상 정자 곁에 있었다. 이명유가 그녀를 매화림으로 이끈 이유도 이제는 너무도 분명했다.만약 그때, 그녀가 그곳으로 갔다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 뒤의 결과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후택의 여인들만이 아니었다. 수상 정자 건너편에는 함께 초대된 남자들이 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대낮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물에 뛰어드는 꼴을 보였다면 설령 목숨은 건진다 해도 흠뻑 젖은 모습이 남자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가문 역시 고개를 들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가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내칠 것이 분명했다.세가의 여인에게 명예는 하늘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향염한 빛이 도는 소문이 난다면 한 여인의 인생은 송두리째 무너진다. 하
더 보기
이전
1
...
7891011
...
15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