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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일이 마무리되자 벌써 저녁때가 다가왔다.방안에서는 난로가 타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계연수는 노부인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옆에 앉지는 않았다.그녀는 노부인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노부인, 한 달 기한은 이미 다 되었습니다. 나으리도 원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이만 제가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말을 마친 그녀는 미리 준비해온 화리서를 꺼내 노부인의 앞으로 내밀었다.“화리서는 이미 준비했습니다. 저는 내일 떠날 것입니다.”사씨 노부인은 계연수가 건넨 화리서를 받아들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펼쳐 보지도 않고 그것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노인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수야, 내가 약조를 어기려는 게 아니라 네가 고씨 가문으로 돌아간다고 그 집에서 널 받아줄 것 같니?”“잠시는 받아줄지 몰라도 시간이 길어지면 그 집에서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어?”“게다가 화리한 여인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는 하니? 넌 원래 가진 혼수도 별로 없는데 평생 고씨 가문에 기대어 살 거니?”“이 세간의 여인은 누구든 결국 사내에게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지. 하물며 네 어머니까지….”계연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노부인의 말을 끊었다.“앞으로 제가 어떤 삶을 살지는 사씨 가문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노부인.”그녀의 목소리는 노부인에 대한 실망감으로 떨리고 있었다.사씨 노부인은 멈칫하더니 고집스러운 계연수의 얼굴을 보며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노인은 화리서를 집어 들더니 타고 있는 난로에 집어넣었다. 불길이 치솟아 종이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계연수가 한획 한획 정성들여 쓴 화리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노부인의 손에서 재가 되었다.계연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사씨 노부인은 비통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수야, 날 원망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나중 되면 너도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게야.”“옥현이는 네게 아직 정이 남아 있어. 네가 다시 받아주기만 한다면 너희 둘은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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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노부인은 자신이 편협했다는 것을 인정했다.손자를 위하여 계연수가 더 이상 이 집안에 미련이 없고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이곳에 남겨두고 싶었다.사씨 노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계연수에게 말했다.“연수야, 넌 잘못한 게 없어. 옥현이가 네게 미안한 짓을 한 게지.”“앞으로는 잘해줄 게다. 네가 이 집에서 즐겁지 않다는 걸 알아. 내 명의로 된 점포 세 개를 네게 양도하마. 창고에 있는 장신구도 네 처소로 보낼 것이다. 모두 네 것이니 좋아하는 것은 마음대로 골라도 좋아.”“난 곧 죽어서 땅에 묻힐 사람이니 그것들을 남겨둬서 무슨 소용이겠니. 앞으로는 다 네게 남겨줄 것들이야.”계연수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숨이 턱턱 막혔다.그녀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말했다.“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이 집을 떠나고 싶어요.”사씨 노부인은 여전히 인자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수야, 우리 집안을 떠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니?”계연수는 주먹을 꽉 쥐며 고집스레 말했다.“사씨 가문을 떠나면 어쩌면 힘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되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사씨 노부인은 비통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수야, 넌 아직 어려. 화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그래.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거라.”말을 마친 노부인은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계연수의 앞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갔다.계연수는 병풍 뒤로 들어가는 노부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하늘에서는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복도에 걸린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고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용춘이 다가와 여우털 망토를 계연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녀는 계연수의 표정을 살피며 뭐라도 말을 걸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비록 밖에 있어서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이 갔다.‘이명유 그 여자는 왜 하필 오늘 같은 날에….’계연수는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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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문앞을 지키던 시녀가 멍하니 서 있는 계연수를 보고 다가와서 말했다.“바람이 찹니다. 작은 마님, 안으로 드시지요.”계연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정원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자신이 3년 동안 정붙이고 살았던 곳을 눈에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어깨에는 흰 눈이 얇게 내려앉았다. 용춘은 다급히 우산을 펼치고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키고 섰다.정원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었다. 모든 시종들은 안방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시녀들은 따뜻한 물대야를 들고 들어갔다가 핏빛으로 물든 물대야를 들고나왔다. 의원이 약 상자를 들고 다급히 안으로 들어갔고 문 앞에 있는 시녀는 웅크리고 앉아 물을 끓이고 있었다.임씨 어멈은 계연수의 곁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나으리의 부상 정도는 그야말로 참혹했습니다. 소인이 들어갔을 때, 나으리께서는 작은 마님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찾고 있던데 안으로 들어가 보시렵니까?”계연수는 처마 밑에 서서 손으로 흩날리는 눈꽃을 받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임씨는 계속해서 조곤조곤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나으리께서는 작은 마님이 안 보이면 약을 바르지 않겠다고 버티고 계십니다. 의원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려도 듣지를 않으셔요.”곁에서 듣고 있던 용춘은 헛웃음이 나왔다.조금 전에 노부인의 처소에서는 맞아 죽더라도 이명유를 첩실로 들이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사람이 이제 와서 계연수에게 깊이 빠진 사람처럼 굴고 있다니. 어떻게 한마음에 두 사람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계연수의 입가에 은은한 비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임씨 어멈에게 들어가 보라고 한 뒤에 서재로 향했다.임씨 어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오늘 오전에 정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어멈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었고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일개 하인으로서 어멈은 연유를 물을 자격이 없었고 감히 입에 담지도 못했다. 어멈은 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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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계연수는 오늘 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서신에 써서 용춘을 시켜 전달하게 했다.용춘이 나가자마자 큰 부인 임씨가 기세등등하게 계연수를 찾아왔다.방 안에 들어선 임씨는 성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계연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곧이어 임씨는 계연수를 손가락질하며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옥현이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너를 찾고 있는데 너는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매정하고 악독한 년!”계연수는 평온한 시선으로 임씨를 마주하며 사실을 말했다.“나으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임씨는 멈칫하더니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더 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아 계연수의 손목을 잡고는 밖으로 끌었다.“옥현이가 병상에 누워 있는 와중에 널 벌할 생각이 없다. 나중에 옥현이가 건강을 회복하고 명유가 아이를 가지게 되면 산으로 올라가 불당에서 여생을 보내거라.”“어차피 넌 우리 가문에 남아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 않느냐. 너 누구 보라고 여기서 혼자 지내는 거니? 옥현이랑 잘살아볼 마음이 없다면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마.”임씨는 계연수의 손을 꽉 잡고서 그녀를 강제로 끌고 밖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시녀들은 감히 말릴 수 없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용춘은 조급한 마음에 그들을 따라 안채로 갔다.안방으로 들어온 임씨는 계연수를 힘껏 밀쳐 사옥현의 침상 곁으로 보내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네 부군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눈 똑바로 뜨고 보거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약을 바르길 거부하며 네가 와야 치료를 받겠다고 하는구나.”말을 마친 임씨는 흐느끼기 시작했다.“대체 우리 집안에서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네 부군이 죽는 걸 봐야 만족하겠어?”방 안에는 은은한 피비린내와 약 냄새가 섞여서 코를 자극했다. 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창문이 굳게 닫힌 탓에 공기마저 갑갑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계연수는 힘없이 침상 변두리를 짚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사옥현의 모습이 들어왔다.그의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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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계연수는 언젠가 이 집안사람들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한때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밀쳐내기만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애원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참으로 황당하지 않은가.그녀는 사옥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나으리, 제가 가서 이명유를 데려오길 바라시나요?”사옥현은 비통에 잠긴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역시 넌 날 원망하는구나….”이제 와서 원망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계연수의 눈에는 모든 게 가식적으로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옥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한 번도 나으리를 원망한 적 없습니다. 그저 나으리께서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랄 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이곳에는 사람도 많고 제가 시중을 들기에 불편할 테니 나으리께서 좋아하는 이명유를 불러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단호하게 뒤돌아섰다. 사옥현에게 내일 화리하자고 얘기할 예정이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안 좋은 일로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계연수는 주저 없이 안채를 나갔다. 병풍을 지나는 순간, 등 뒤에서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임씨의 자지러지는 비명과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계연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병풍을 지나쳤다.용춘은 몰래 뒤를 돌아보았다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사옥현은 상반신이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진 상태였는데 등에 난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는 음울한 눈빛으로 계연수만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용춘은 저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나으리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다급히 계연수의 등 뒤로 다가갔다.임씨는 울며 바닥에 떨어진 아들을 부축하다가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물었다.“대체 왜 이러는 거니… 이 어미에게 말해 보거라. 너는 도대체 왜….”사옥현은 멍하니 어머니의 절규를 듣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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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공중에서 흩날리던 눈이 조용히 그녀의 망토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임씨 어멈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늘 저녁에 처소를 비워야 하니, 어멈이 수고 좀 해주세요.”집안 꼴이 엉망이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들을 대신하여 이 난장판을 수습하고 싶지 않았다.임씨 어멈은 눈시울을 붉히며 공손히 답했다.“소인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작은 마님께서 떠나시면 집안이 많이 썰렁해지겠군요.”계연수가 있을 때도 처소는 썰렁했다.그녀는 애써 처소를 관리하고 겉보기에 떠들썩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식었는데 어찌 다시 옛날의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계연수는 임씨 어멈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한편, 영향관.어멈이 들어와 희소식을 전했다. 이명유는 그제야 안심한 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오늘 그녀는 일부러 사옥현의 서재에 가서 서책을 빌린다는 핑계로 그를 유혹했다. 모험을 택한 이유는 이 집을 떠나기 싫어서였다. 그녀는 평생 시골에서 늙어 죽고 싶지 않았다. 비록 미천한 첩실이라도 사옥현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하물며 계연수처럼 나약한 정실 부인이 무슨 수로 그녀와 대적한단 말인가. 이왕에 늘 그녀의 손에 당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사옥현의 마음이 그녀에게 있다면 언젠가는 정실의 자리를 빼앗고 떳떳하게 그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서재에 사람이 들어온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그럼에도 그녀의 도박수는 결국 성공하고 말았다.장씨 어멈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아씨, 이만 일어나세요.”이명유는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구슬픈 목소리로 장씨 어멈에게 물었다.“어멈, 옥현 오라버니는 정말 저를 연모하는 게 맞겠죠?”장씨 어멈은 멈칫하더니 답했다.“나으리의 마음에 아가씨가 없었다면 어찌 죽음을 각오하고 아씨를 곁에 두려고 하셨겠어요.”이명유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오라버니가 저를 안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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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마차 안, 용춘은 은자가 든 상자를 들고서 작은 소리로 계연수에게 물었다.“아씨, 지금 고씨 저택으로 돌아가실 건가요?”계연수는 창가에 드리운 가림막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주변이 고요하니 그녀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그녀가 말했다.“용춘아, 안평교에 가보고 싶어. 매화주를 마시고 싶구나. 계화떡도 먹고 싶어.”그런 말을 하는 사이, 마차는 천천히 안평교를 향해 가고 있었다.오전부터 내리던 눈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렸다.계연수는 한때 아버지와 자주 갔었던 안평교 다리 위에 있었다.그녀의 등 뒤에는 휘황찬란한 등불이 반짝이는 시장거리가 있었다. 거리에서 이어진 불빛이 고요한 호수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망토 위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 계연수는 호숫가에 앉아 한손에는 손난로를 쥐고 풍경을 감상하며 용춘이 건넨 매화주를 받았다.처음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와서 매화주를 마셨던 때가 떠올랐다.바로 이곳 호숫가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화로에 술을 데우며 호수너머의 풍경을 감상했다.아버지는 비록 곤경에 갇혀 있을지라도 힘을 내어 앞을 보라고 말했다. 그런다면 아무리 힘든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계연수는 술을 한잔 따라서 마시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도 흰 눈으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자신은 참으로 왜소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술을 너무 오래 입에 안 댄 탓일까?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계연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어디서 샀어? 이게 이렇게 독한 술이었나?”용춘이 다급히 답했다.“예전에 어르신께서 자주 가시던 춘강루에서 사 왔습니다.”계연수는 간신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차가워서 유난히 맵게 느껴졌나 보구나.”용춘도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화로를 구해올 수도 없으니 찬 대로 마실 수밖에 없겠네요.”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잔만 마시고 일어날 거야.”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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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따끈한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었더니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술기운 때문인지, 가슴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억압되었던 감정이 밀려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계연수는 멍하니 호수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춘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깃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바람이 찹니다, 아씨. 눈도 내리는데 저기 복도로 가서 앉으시지요.”계연수는 갑갑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흩날리는 눈꽃이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가에 내려앉았다.오늘이 지나면 더 힘든 곤경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힘든 때에 그녀는 아버지가 그리워졌다.조금 전까지 뜨거웠던 고구마가 식어서 차게 느껴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용춘에게 말했다.“하나 더 사다 주지 않겠니?”찬바람이 부는 곳에서 고구마를 들고 있었으니 식은 게 당연했다.용춘은 간곡히 그녀를 말렸다.“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저기 정자로 가서 저를 기다려 주세요. 제가 거리로 나가서 사 오겠습니다.”계연수는 그제야 일어서서 용춘과 함께 옆에 있는 정자로 갔다.정자의 주변에는 가지가 풍성한 매화나무가 늘어서 있어, 먼 곳의 풍경을 반절 가렸다.계연수는 정자의 석상 앞에 앉았다. 용춘은 자세히 그녀의 옷깃을 여며준 후에 손난로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소인이 곧 다녀오겠습니다.”계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여우털 망토에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용춘에게 말했다.“마차에 있는 등불을 가져오거라. 외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테니, 조금만 앉았다가 가자.”예전의 계연수는 밖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는 양갓집 규수가 아니기에 약간의 흐트러진 모습만 보여도 곤경에 빠질 것을 알았다.매화주의 술기운이 강했던 탓일까, 눈물이 두 눈에 그렁그렁 고였지만, 용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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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한편, 심서준은 예부 정당에서 주최한 연회에 와 있었다.올해는 3년마다 한 번씩 실시되는 지방관원들의 경성 알현과 고과평가를 보는 해였다. 이부와 도찰원이 지방관원들의 업적을 평가한 뒤, 예부와 광록사에서 포상 연회를 마련했다.고과를 마친 관원들은 황제가 하사한 포상 연회가 끝나면 다시 각자의 임지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연회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포상 연회라지만 자리에 참석한 관원들 중 감히 큰소리로 말하는 이는 없었다. 예부 정당밖에는 고과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은 십여 명의 관원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그들은 멍하니 서서 연회를 즐기는 동료들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오직 평가를 잘 받은 관원들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본디 황족의 자비로움과 위엄을 보여주는 경고이자 격려의 연회였기에 연회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심서준이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자, 남은 관원들도 황급히 수저를 내려놓았다.심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었다.“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그대들을 위한 연회를 하사하셨네. 그대들은 황은을 잊지 말고 본분을 지키며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공무에 임하기를 바라네!”현장에 있던 관원들은 다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그의 말에 호응했다.심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연회는 막바지에 다다랐다.그러나 아직 완전히 정당을 나간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도 감히 먼저 자리를 뜨지 못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그에게 잘 보이려고 용기를 내어 심서준에게 다가가 술을 건네고 아부의 말을 했다.그들 중에는 사옥현의 아버지인 사재관, 사 대감도 끼어 있었다.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심서준 앞에서 얼굴도장이라도 찍고 지난번에 심씨 저택에서 발생한 일에 대하여 감사 인사를 올려 심서준의 호감을 사기 위함이었다.심서준은 다가오는 관원들의 인사를 시큰둥하게 응대하다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자신에게 다가온 사재관을 보고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사재관은 심서준을 보자마자 여느 관원들처럼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지방관의 고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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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그가 이 자리에서 그날 얘기를 꺼낸 것은 심씨 노부인의 자비로움을 찬미하여 심서준의 호감을 쌓기 위함이었는데 허를 찌르는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사재관은 잠시 당황하더니 다급히 말했다.“제가 나서서 그 아이를 사당 앞에 무릎을 꿇리고 채찍형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며느리 앞에서 죄를 시인하고 사죄하게 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입니다.”심서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사씨 가문은 참으로 엄격한 집안이로군. 그런데 내 듣기로 그 벌을 받은 낭자가 지금은 댁 장남의 첩실이 되었다지?”그는 대놓고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집안의 안주인을 해한 아가씨가 첩실이 되어 안주인과 같은 지붕 아래 살게 하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사씨 가문이 범인을 처벌하기 싫어 오히려 포상을 내린 줄 알겠소. 참 독특한 처벌 방식이로군.”그 말을 들은 사재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불과 오후에 발생한 일을 도어사 대인은 대체 언제 아시게 된 걸까?사재관은 도찰원의 눈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렇게 사소한 사건까지 그들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으니 아들이 할머니의 생신 잔치에서 황당한 짓을 벌인 일도 도어사 대인의 귀에 들어갔을 거라 생각하니 저절로 식은땀이 났다.심서준은 뭐라고 해명하려는 사재관을 무시한 채, 그의 앞을 지나쳐 밖으로 향했다.사재관은 멍하니 서 있다가 떠나는 심서준의 뒤를 다급히 쫓아갔다.하늘에서는 큰 눈이 내리고 있고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심서준은 연회에서 술을 몇 잔 마셨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근래 공무가 바빠서 잠깐의 쉬는 시간도 없이 보낸 그였다.그는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무슨 심정으로 지내고 있을까 생각했다.그의 곁으로 다가온 문하가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뒤에서 사재관이 쫓아왔다.심서준은 냉담한 시선으로 사재관을 힐끗 바라보았다. 관복을 입은 그가 예부 대문 앞에 늠름하게 서 있고 뒤쫓아온 사재관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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