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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화

계연수는 눈을 크게 뜨고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사옥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옥현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고상하고 온화하던 귀공자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그녀는 애써 그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사옥현은 힘을 주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더니 그녀를 끌고 서재 안으로 향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붙잡더니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연수야, 너도 이 얼굴이 얼마나 사내의 마음을 홀리는지 알지? 참으로 어여쁘지 않느냐. 눈처럼 희고 고운 이 얼굴을 어떤 사내가 거부하겠어?”사옥현은 자세를 숙여 계연수를 책상 변두리로 몰아넣더니 증오가 가득 담긴 말투로 말했다.“이 몸을 거부할 사내가 몇이나 되겠어. 너는 내가 네 어떤 모습을 가장 좋아하는지 아느냐? 나랑 같이 침상을 뒹굴 때 나른하고 교태가 충만한 모습은 기루의 기녀들보다 더….”그는 계연수의 표정을 빤히 노려보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속하고 원색적인 말을 지껄였다.그는 보복하듯이 계연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의 두 손은 그녀가 꼼짝도 못하게 꽉 잡고 있었고 가늘게 뜬 두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를 감상하듯 내려다보았다.고운 눈망울에 눈물이 맺히자, 그는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발버둥 치는 계연수를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능욕의 말을 내뱉었다.“연수야, 또 누구에게 네 몸을 보여주었느냐?”말을 마친 사옥현은 고개를 들고 계연수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치심에 입술을 꽉 깨물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니 짓밟혔던 자존심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했다.그는 계연수의 성격에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의 고고한 자존심을 짓밟고 싶었다.‘너는 내 것이어야 해. 영원히.’계연수는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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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조금 전 했던 말은 내 실수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 사이는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최악은 아니지 않았느냐.”“내일이 할머니 생신이니 그전까지 잘 생각해 보거라.”“연수야, 나는 너와 여생을 함께 보내자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말을 마친 사옥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는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났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몸싸움 덕분에 머리에 하고 있던 비녀가 빠지며 바닥에 떨어졌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어깨를 타고 내려와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아련한 옆모습은 여전히 정갈하고 고왔지만, 겉옷에는 아까 그가 힘껏 움켜쥔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주름을 펴주려 했지만,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더니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사옥현의 두 눈에 슬픔이 고였다.그는 한참이나 허공에 손을 뻗고 있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연수야, 미안하다….”계연수는 그를 보지도, 그의 말에 응답을 주지도 않고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한참이 지난 후, 그녀가 말했다.“나으리, 이만 나가주시겠습니까. 저는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사옥현은 묵묵히 손을 내렸다. 무언가가 가슴을 꽉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상심한 얼굴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수야, 설령 내가 잘못한 게 있더라도 내게 뉘우칠 기회를 한번 줄 수는 있지 않느냐. 어찌 이렇게 매정하게 내게서 뒤돌아서려 하느냐.”“화리는 장난이 아니다. 잘 생각해 보거라.”말을 마친 사옥현은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그가 떠난 후, 계연수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달려 들어오는 용춘을 보고 작게 말했다.“용춘아, 혼자 좀 있고 싶으니 이만 나가주렴.”걸음을 멈춘 용춘은 상심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그녀는 어떻게든 사옥현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의 시종에게 꽉 잡혀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영혼이 나간 듯한 계연수를 보니 용춘도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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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다음 날 아침, 용춘이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계연수는 아직도 침대에 웅크린 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용춘은 안타까운 마음에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작은 마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계연수는 오늘이 노부인의 생신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용춘에게 물었다.“노부인께 드릴 선물은 준비되었느냐?”용춘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작은 마님. 어젯밤에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어제 그 사람이 가져온 물건은 모두 창고로 가져가거라. 모두 귀중품들이고 은자도 있으니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하고.”계연수는 사옥현이 가져온 물건을 직접 그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그와는 아무런 일로도 엮이고 싶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어차피 집을 나갈 때 가져가지도 않을 테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용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은 계연수의 눈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삶은 달걀 하나를 건넸다.“작은 마님, 이거라도 좀 문지르세요.”계연수는 달걀로 눈가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밤을 자고 나니 우울감은 이미 가시고 마음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곧바로 침상에서 일어났다.오늘 저택 안은 매우 시끌벅적했다. 고귀한 출신인 사씨 노부인이었기에 명절 기간이라도 축하를 드리러 선물 들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큰 부인 임씨는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쳤다. 계연수는 임씨의 부름을 받고 뒤뜰로 가서 여인들의 접대를 맡았다. 계연수는 용춘을 시켜 반년 정도 돌본 송나무를 노부인에게 보내드리도록 했다.노부인이 방에서 키우고 있던 송나무는 작년에 이유 없이 시들었는데 노부인은 이 일로 오래도록 상심해 하시며 불길한 징조라고 되뇐 적 있었다.계연수는 그 말을 듣고 송나무를 사다가 서재에서 기르기 시작했다. 반년 정도 돌본 끝에 겨우 잎이 자라게 되자, 노부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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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내가 이명유한테 무슨 짓을 할까 봐 나으리가 일부러 숨긴 거겠지.’그녀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진씨는 계연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불만을 토로했다.“이명유는 참으로 이기적이고 악랄한 사람이군요. 이번에 형님이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 큰아주버님은 그런 인간을 위해 노부인께 사정을 하시다니.”“형님은 큰아주버님의 이런 행위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시나요?”사옥현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그는 계연수가 어찌 생각할지 한 번도 고려한 적 없었다.하지만 그런 걸 따지며 상심에 빠질 이유는 없었다.대화를 나누는 사이, 계연수는 이명수의 거동을 조용히 관찰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이명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계연수는 시선을 거두고 옆에 있는 임씨 어멈에게 이명유를 잘 주시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지난번처럼 같은 수법에 또 당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지금까지 갇혀 지내다가 힘들게 밖으로 나왔으니 얌전히 있을 리가 없었다.임씨 어멈은 계연수의 말을 듣고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걱정 마십시오, 작은 마님. 저 여자가 작은 마님을 해하지 못하게 소인이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계연수는 고개를 돌리고 진씨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사금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진씨는 사금희를 보자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오만하기로 소문난 사씨 가문의 장녀이기에,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사금희와의 접촉을 피하고는 했다.사금희는 오늘 유난히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겉모습을 중요시하고 또한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기에 경성의 귀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를 우러러보았다.사금희는 오만한 자태로 계연수를 내려다보았다.계연수도 사금희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 앉은 사금희는 느긋한 시선으로 옆에 있는 계연수를 훑어보더니 물었다.“고준이 풀려났던데, 알고 있느냐?”이미 한달이나 지난 일을 왜 이제 와서 꺼내는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계연수는 입술을 깨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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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사금희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계연수의 평온한 표정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고씨 가문이 나중에 또 누굴 찾아갔길래? 아니면 지인 중에 지휘사 대인과 친한 사람이 있느냐?”계연수는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저는 외할머니 저택에 거의 가지를 않아서 자세한 건 잘 모릅니다.”전혀 이상할 게 없는 답이었지만 사금희는 묘하게 수상함을 느꼈다.고씨 가문처럼 몰락한 집안에 무슨 연줄이 있단 말인가? 만약 진짜로 연줄이 있었다면 가문의 큰 어른이 아직까지 먼 변방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계연수의 표정을 빤히 관찰하다가 부군이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그 집의 둘째 부인이 금의군 지휘사에게 은자를 보냈겠지.’좌도어사라면 아마 어딘가에서 이름을 듣고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을 것이다.사금희는 은은한 비웃음을 머금고 계연수에게 말했다.“내가 괜한 질문을 했구나. 보니까 너 외조부 가문과 그리 친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고준도 풀려났는데 대체 옥현이와는 왜 다툰 거야? 너 때문에 집안에 소란이 끊이지 않는구나.”“우리 집안에 시집을 왔으면 예의와 본분을 지켜야지.”계연수는 손난로를 집어들고 사금희를 바라보며 말했다.“형님, 앞으로 말을 하실 때 신중히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함부로 근거도 없는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오.”“첫째, 저는 이 일에 대해 나으리께 말씀드린 적도 없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둘째로 저는 소란을 피운 적도 없고 이 일 때문에 나으리와 다툰 적도 없습니다.”“벌써 한달도 지난 일인데 왜 이 일을 다시 꺼내는지 모르겠군요.”사금희는 평소의 온순함과는 다른 날카로운 계연수의 태도에 잠시 당황했다.감히 부군의 누이인 자신에게 이런 말투로 대하다니.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계연수를 노려보았다. 계연수는 단정한 자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월백색의 치마에 간단한 옥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려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하얗고 고운 피부와 빨간 입술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가는 목선과 은은하고 교태가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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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사금희는 계연수와 사옥현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계연수는 더 이상 사금희와 의미 없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옥현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며 여인들끼리 입씨름을 벌이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 이 집안에서 대체 누가 입씨름을 좋아하는지 알게 할 때도 되었다.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은 후, 계연수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사금희를 바라보며 말했다.“형님, 계속 이렇게 근거도 없는 말을 하실 거면, 저는 더 이상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나으리는 대리시의 시정이면서 한쪽 말만 쉽게 믿고 진실을 보려 하지 않으시던데, 형님은 나으리의 누이로서 역시 그러하시군요.”사금희는 안색이 급변하여 손가락으로 계연수를 가리켰다.“너….”계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계속 근거 없는 말을 떠든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그러나 오늘은 사씨 노부인의 생신 연회라 주변에 손님들도 많으니 여기서 사금희가 그녀에게 화를 내고 소란을 피운다면 불리한 건 사금희쪽이었다.어차피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나게 될 텐데 더 이상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마침 이쪽으로 다가온 임씨는 계연수에게 손가락질하고 있는 사금희를 보고 손님들 앞에서 집안이 화목하지 않다는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 다급히 사금희의 손을 잡았다.“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얘기하거라.”사금희는 엄숙한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화를 꾹 눌러 참았다.그녀는 임씨에게 고준이 풀려난 소식을 전했다.임씨도 놀란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형을 받은 줄 알았던 고준이 이미 풀려났을 줄이야.계연수도 그동안 이 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고 사옥현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 떠오르자, 임씨는 속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치밀었다.임씨는 다짜고짜 계연수에게 물었다.“너는 언제 알았니?”계연수가 답했다.“한달 전 일입니다.”임씨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계연수가 근래 들어 사옥현과 다툰 이유가 고준 때문인 줄 알았는데 진작에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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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점심때가 다가오자 계연수는 시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친지들에게 연회청으로 가서 식사를 드실 것을 권했다.연회청으로 향하는 길, 임씨 어멈이 다급한 걸음으로 계연수에게 다가왔다.가까이 다가온 오몸은 계연수의 귓가에 대고 초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소인이 밖에서 반 시진이나 기다렸는데 사람이 나오는 것을 못 봤습니다. 혹, 가서 확인해 보시렵니까?”“그 여우가 또 나으리에게 무슨 요사스러운 짓을 벌일지 걱정돼서 그럽니다.”계연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사옥현이 이명유를 데리고 뒤뜰의 서재로 간지가 언제인지 자세히 물었다.오늘은 노부인의 생신이니 사옥현은 장손으로서 앞뜰에서 손님들을 맞이해야 하는데 뒤뜰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수상했다.이때, 또다른 어멈이 다가와 계연수에게 물었다.“작은 마님, 대감 나으리께서 저희 나으리를 찾고 계십니다. 어서 나으리께 알려 앞뜰로 가보세요.”“나으리는 뒤뜰에 일이 좀 있다고 자리를 비운 후에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소인은 뒤뜰에서 한참을 찾았는데도 보이지 않아서 작은 마님께 물어보러 온 거예요.”계연수는 옆에 있는 임씨 어멈의 손을 꽉 잡으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다.그녀는 작은 소리로 그 어멈에게 말했다.“나는 조금전까지 어머니 곁에 있어서 나으리를 보지 못했네. 나으리는 평소에 서재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시니 차라리 서재로 가서 물어보는 게 어떤가?”그 말을 들은 어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재로 향했다.계연수는 임씨 어멈을 돌아보며 말했다.“어멈도 가서 계속 주시하고 계세요. 굳이 들어가서 나으리의 일을 방해할 필요는 없어요.”임씨 어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재로 향했다. 계연수가 연회청으로 들어가려는데 또다른 어멈이 달려오더니 계연수를 보고 다급히 말했다.“작은 마님, 큰일 났습니다!”그 어멈은 계연수 처소에서 일하는 어멈이었다. 계연수는 당황한 어멈의 표정을 보고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인가?”어멈은 계연수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작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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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계연수는 그저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날 예정인데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그러나 이 일은 임씨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려 덮어 보려 했음에도 결국 사씨 노부인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장군 가문의 차녀인 왕씨 가문의 노부인은 언니의 생신잔치에서 이런 추태가 벌어졌으니 당연하게 사씨 노부인에게 전했다.평소 노부인의 연회는 오후까지 이어졌지만 오늘은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이는 사씨 노부인이 크게 노했음을 반영했다.계연수가 노부인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 사옥현은 노부인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사 대감은 채찍을 들어 사옥현의 잔등에 휘둘렀고 잔등은 살같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울며 노부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빌었다.임씨는 모퉁이에 웅크린 채로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계연수는 오는 길에 이명유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바 있었다.이명유는 노부인 앞에 찾아올 자격조차 없었고 괜히 나타나서 노부인의 분노만 더 자극할까 봐, 처소에 돌려보내고 가두었다고 한다.조사 결과, 두 사람이 고의로 사통한 것이 아니라, 이명유가 사옥현의 차에 약을 탄 것이 밝혀졌다.이 또한 노부인이 조사하여 밝혀낸 것이었다.노부인은 사옥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이명유에게 마음이 있다고 해도 오늘 같은 날에 이처럼 황당한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판단하여 어멈을 시켜 서재를 조사하게 했다.조사 결과, 책상 위에 놓인 찻잔에서 대량의 최음제가 발견되었고 이명유는 몸에도 최음제를 바르고 사옥현에게 접근한 것이 확인되었다. 명확한 증거 앞에 노부인은 또다시 큰 분노를 터뜨렸다.방 안에는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사옥현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임씨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방 안에는 오직 큰댁 사람들뿐이었다. 노부인은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둘째네와 셋째네에게도 비밀에 부쳤다. 사옥현의 명성과 체면을 배려한 결정이었다.할머니의 생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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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사옥현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모두가 은근한 눈빛으로 계연수의 표정을 살폈다.사씨 노부인마저 계연수를 힐끗 쳐다보았다.계연수는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계연수에게 있어 사옥현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명유를 두둔하고 나섰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그는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했다.그녀는 만약 오늘의 범인이 이명유가 아닌 자신이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자신을 혐오했을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이명유에게 편애를 주고 관대한 만큼, 계연수에게는 냉정했다.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노부인이었다.노인은 홧김에 상을 쾅 두드리며 호통쳤다.“너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 비열한 수법으로 널 이용한 여인을 그런 식으로 두둔하다니!”사옥현은 고집스럽게 주먹을 꽉 쥐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만약 할머니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저를 쳐죽이십시오!”옆에 있던 사 대감은 아들의 말을 듣고 화를 참지 못해 채찍을 다시 휘둘렀다.“멍청한 자식! 정말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아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고통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사옥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대감은 고집스러운 그의 모습에 더욱 힘주어서 채찍을 휘둘렀다.사옥현의 겉옷이 뻘건 피로 흥건히 젖고 그가 거의 정신을 잃을 때가 되어서야 대감은 채찍을 내렸다. 더 때렸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임씨는 울다가 기절했고 차마 지켜볼 수 없던 노부인이 대감을 말렸다.사옥현은 힘없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계연수는 고개를 숙여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짙은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계연수는 그 죄책감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사씨 노부인은 시선을 계연수에게로 돌렸다. 노인은 가장 힘든 선택을 그녀에게 떠넘겼다.“연수야, 네가 옥현이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오늘 내 이 녀석을 쳐 죽일 수도 있다.”말을 마친 노인은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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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사옥현은 고통을 무릅쓰고 노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사 대감도 아들에게 크게 실망했지만 진짜로 아들을 때려죽일 생각은 아니었기에 노부인이 마침내 한발 양보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조금 전에 엄하게 채찍을 든 것도 아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사 대감은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연수야, 내 비록 절대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네 아버지와의 약조를 어겼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우리 집안을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앞으로 옥현이가 또 너를 서운하게 하면 내가 친히 저 녀석을 처벌할 것이다.”계연수는 시선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대감은 대답도 않는 계연수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 역시 계연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왕년에 계연수의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사 대감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은혜를 잊은 건 아니지만 아들이 목숨을 걸고 고집을 부리니 아버지로서 어쩔 수가 없었다.대감은 또 긴 한숨을 내쉬고는 사람을 시켜 사옥현을 부축해 의원에게 데려가게 했다.사옥현의 온몸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등에 난 자국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시종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계연수의 앞으로 다가온 그는 걸음을 멈추고는 움직이지 않았다.평소 단정하고 고고하던 그가 고개를 수그린 채, 애원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진한 슬픔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연수야, 미안하구나….”계연수는 그 모습을 보기 싫어 눈을 감았다.사옥현은 눈시울이 빨개져서 갈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해명을 이어갔다.“그 아이는 이미 내게 순결을 주었으니 이대로 내칠 수 없지 않느냐….”옆에 있던 임씨가 울며 재촉했다.“어서 의원에게로 데려가거라. 이러다 죽겠어….”사옥현을 부축한 두 시종이 재빨리 밖으로 그를 이끌었지만, 사옥현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계연수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씨가 계연수의 등을 떠밀었다.“뭘 멍하니 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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