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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심서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다가 사재관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이어 그는 손을 내리고 가림막을 걷어젖혔다.창밖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호위와 시종의 손에는 등불이 걸려 있고 예부 대문 앞은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사재관은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그는 아들의 출세를 걱정하고 있었다. 심서준이 황제 앞에서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 얘기를 꺼낸다면 아들의 출세는 여기서 그치게 될 것이다.불효를 저지른 관원의 말로는 절대 좋지 않았다. 정말로 탄핵 소리가 나온다면 지금 사씨 집안의 실력으로는 아들을 지켜내지 못할 터였다.심서준의 고귀한 얼굴에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 표정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자, 사재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심서준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런가? 내보낸다고 하였소?”사재관은 허리를 굽히며 재빨리 답했다.“내일 당장 내보내겠습니다. 그년이 음흉한 수작을 부려 제 아들의 차에 약을 탔을 뿐, 제 아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심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사실 자초지종이 어떤지는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보낸 첩자들이 이명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고 그녀가 몰래 유모를 시켜 최음제를 구해온 것까지 부하에게 낱낱이 보고받았다.그가 모른 척한 이유는 사옥현이 이명유와 함께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오직 둘을 묶어놓아야지 계연수가 완전히 마음을 접고 사옥현과 화리할 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방금 그가 그 말을 꺼낸 것도 사옥현이 첩을 들였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는 계연수의 미래를 위한 배려였다. 약조를 먼저 깬 쪽은 사씨 집안이었으니 말이다.심서준은 사재관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한 처자의 순결을 취해 놓고서 내보낸다는 말이오?”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그 처자는 시녀 출신도 아닌 것 같던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처자는 한때 폐하께서 포상을 내린 적이 있는 이 지부의 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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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고요한 밤길에 마차 한 대가 안평교 뒤쪽에 살며시 멈춰 섰다. 심서준은 손을 뻗어 가림막을 열었다. 무심한 눈빛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그마한 인영에 닿았다.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치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이곳은 번화가와는 조금 떨어진 성 외곽의 외딴곳이었다. 경치만 유독 운치가 있을 뿐, 평소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사옥현이 첩을 들인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일까. 이런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가치가 없었다.계연수는 돌상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기나긴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아버지가 그녀를 안고 장터에서 어떤 간식을 먹고 싶은지 묻고 있었다.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옷깃에 스며들고 머리카락이 뺨을 스치며 흩날렸지만, 그녀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단지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무탈하셨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그러나 막 어머니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은 순간, 몸이 갑자기 어떤 힘에 의해 끌어올려졌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이마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쳤다. 머리 위로 뜨거운 숨결이 전해지더니, 엄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계연수는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짙고 어두운 눈동자였다.검은 눈동자에는 압도적인 위엄이 서려 있었다. 마치 어릴 적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혼내던 아버지의 눈빛과 너무 닮아 있었다.계연수는 갑자기 서글퍼져서 고개를 숙여 그 넓은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심서준의 옷섶을 적셨다.당황한 심서준은 오늘따라 계연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석탁 위에는 거의 다 타버린 촛대가 미약한 빛을 뿜고 있었다.미약한 광선 아래 울어서 퉁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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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심서준은 다시 계연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사옥현 때문에 속상해서 술을 마신 걸까.조금 전 그녀가 비틀거리며 난간으로 향할 때, 그는 그녀가 사옥현이 첩을 들인 일로 절망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줄로 생각했다.그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홧김에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아당겼던 것이다. 아무리 사씨 가문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두 눈이 새빨갛게 부어서 울고 있는 그녀를 보니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사옥현을 떠나기 아쉬워서 슬퍼하는 거라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게 도와줄 것이다.이명유를 멀리 보낼 수도 있었다.조금 전의 충격의 여운은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때 그녀가 물에 빠진 것을 목격했을 때의 느낌과 아주 흡사했다.심서준은 손에 힘을 살짝 주어 그녀의 등을 가슴에 더 단단히 밀어붙였다.부드럽고 말랑한 느낌이 몸에 닿고 그녀의 체온이 전해져왔다. 그 순간 폭풍처럼 요동치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계연수의 머리를 반쯤 덮고 있는 모자를 젖히고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 아래에 비쳐진 희고 윤기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촉촉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얗고 고운 이는 붉고 풍만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심서준은 저도 모르게 목이 탔다. 그녀를 거의 잃을 뻔했던 감정의 후폭풍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잔뜩 긴장했던 몸은 이 순간 모두 그녀를 향한 집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왜 아직도 이렇게 슬퍼하는 걸까.사옥현 같은 자에게 아직도 기대를 하는 걸까.심서준은 가슴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갑갑함이 피어올랐다. 그가 소중히 여겨 감정을 억지로 숨겼던 사람을, 사옥현이 그렇게 홀대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사옥현 그 무능한 자식이 대체 뭐라고.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사옥현은 대리시에 남아 있을 자격조차 없었다.가슴에 요동치는 감정은 이미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손가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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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계연수는 작고 가녀리게 보이지만 절대 깡마른 체형이 아니었다.그녀는 의식이 몽롱한 채로 마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심서준의 거대한 체구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계연수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 몽롱하게 눈을 깜박였다. 붉은색 관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잠깐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내리니 맹수의 무늬를 수놓은 허리띠가 보였다.그녀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이빨을 드러낸 맹수의 모습이 두려워 심서준의 옷깃을 붙잡았다.심서준은 서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그는 평소 정갈함을 중시하여 의복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계연수가 움켜잡아 주름이 생겼는데도 그저 그 하얗고 곧게 뻗은 손가락만 한참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살포시 감싸고는 계연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눈가에 물기가 맴돌고, 붉게 물든 눈꼬리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살짝 깨문 입술은 윤기가 돌았고 술기운 때문인지 뺨이 발그스름하게 붉어져 있었다.심서준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매혹적인 자태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손바닥 안에 들어온 작은 손은 그가 주무르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정말 취했군.’심서준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그는 붉게 물든 그녀의 눈매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갈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부인.”계연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심서준의 가슴에 얹은 손이 힘없이 움직이며 살짝 밀어냈다.심서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곧바로 힘이 풀렸는지 손을 축 내렸다. 심서준은 그 참에 그 손을 다시 잡았다.그는 그녀의 옆에 앉아 한손으로 그녀의 뺨을 보듬으며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뺨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취한 게 분명한데 그녀는 조용히 침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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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그 독한 술을 마셨으니 몸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심서준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창턱을 두드렸다.대기하고 있던 문하가 부름을 듣고 다급히 다가왔다.그는 문하에게 해장 탕약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문하는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나으리는 다 좋은데 너무 정직하셔.’어차피 시정 부인은 취한 상태이고 밖에 아무도 없는데 그가 저돌적으로 나와도 부인이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그러지 않고 늘 냉담한 얼굴로 부인을 대한다면 아마 시정 부인은 평생 가도 그가 자신을 연모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물론 이건 문하 혼자만의 생각이고 분부를 받은 그는 곧바로 가서 해장 탕약을 구해왔다. 물론 용춘에게도 한 그릇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탕약을 받은 심서준은 숟가락으로 약을 떠서 계연수의 입가로 가져갔다.평소에는 고분고분하고 심술이라는 것을 부려본 적 없는 계연수였지만 꿈을 꾸는데 방해가 되었는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탕약을 밀쳐냈다. 탕약은 그대로 옷깃에 쏟아졌다.심서준은 낮은 한숨을 터뜨리고는 부드러운 눈빛을 하고 손수건으로 옷깃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며 탕약을 떠먹였다.계연수는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얌전히 입을 벌리고 떠먹여주는 탕약을 받아먹었다. 그녀는 원래 거절할 줄 모르고 순한 성격이었다.심서준은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과 취향,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그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탕약을 반쯤 먹고 나니 빨간 입술이 촉촉하게 물들었다. 굳게 감은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심서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손을 내리려던 순간, 부드러운 손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그녀는 마치 서러운 듯 그의 손을 잡고 품으로 이끌었다. 사내의 두터운 손바닥이 풍만한 가슴에 닿자, 심서준은 바짝 긴장하여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까이 다가가서야 그는 그녀가 뭘 중얼거리는지 듣게 되었다.그녀는 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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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그녀의 입술은 물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계연수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심서준은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마치 몸 안에서 뭔가가 폭발할 것 같았다. 그녀의 등을 잡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와의 입맞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처음 그녀가 물에 빠졌을 때, 그때의 그는 입맞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서툴게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영혼이 이탈할 것 같은 낯선 자극에 이성은 이미 저 멀리 사라졌다. 그동안 그가 애써 지켜왔던 절제와 금욕은 이 순간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녀에 대한 집요한 욕망만이 소용돌이쳤다. 허리를 감싼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그는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녀의 몸이 조금 더 자신에게 단단히 밀착되기를 바랐다.그녀를 밤새도록 안아주고 싶었다.영혼까지 녹아내리는 이런 경험은 오직 그녀만이 줄 수 있었다.그는 아련하게 눈을 뜨고 괴로워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초승달 같은 가느다란 눈썹 아래로 더욱 무거워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귀밑머리를 적셨다. 홍조를 띤 그 요염한 모습은 그의 영혼조차 빼앗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심서준은 더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지니, 비단보다 더 매끄러온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는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으며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그녀의 괴로운 신음 속에 이성이 서서히 돌아왔다. 심서준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빨갛게 부은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그가 손을 뻗어 살짝 어루만지니, 애교 섞인 신음이 돌아왔다.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돋았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여주었다. 솟구치던 욕망도 서서히 가라앉고 원래의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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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그녀는 아직 그가 지금 뭘 하려는지 모르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심지어 그녀는 그를 깊이 신뢰하여 피하지도 않고 있었다.그 맑고도 순수한 눈망울은 심서준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미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서 있음을 자각하게 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욕망은 한 걸음만 내딛으면 타락의 심연으로 떨어질 것이고 평생 그녀를 단단히 묶어 자신의 곁에 두고 함께 추락하게 할 것이다.결국은 이성이 승리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칠 수 있지만, 그녀는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심서준은 그녀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하더라도 반드시 떳떳하게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어야 하고 그녀가 진심으로 원해야 했다.그는 그녀가 늘 자신을 신뢰해 왔음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가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그는 손수건 하나를 계연수에게 건네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옷깃이 젖었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일어나서 그녀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압박감이 서서히 사라지자, 계연수는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의복을 살펴보았다. 옷깃은 약간 젖어 있고 옆에는 탕약 그릇이 놓여 있었다. 해장 탕약인 것으로 보아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그녀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심서준이 건넨 손수건을 받았다. 손수건에서 그의 향기가 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감사합니다, 심 대인.”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심서준의 마차에 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에게 민폐를 끼친 게 아니길 바랐다.그녀는 손수건으로 옷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얼굴을 붉혔다. 어쩐 일인지 자신이 가장 초라할 때 언제나 심서준이 나타났다.그녀는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정자에 간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왜 항상 이럴 때만 이분을 만나는 걸까.’그녀는 몇 번 되지도 않은 외출인데 최근은 빈번히 그를 마주치는 것 같았다.계연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고 심서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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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심서준은 고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엄한 그 눈빛에 그녀는 또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그는 그저 조용히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강한 위압감이 풍겼다.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계속 물었다.“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어서 그 독한 매산주를 마셨습니까.”계연수는 순간 당황했다.‘분명 용춘에게 매화주를 사오라고 시켰는데….’아마 글을 모르는 용춘이 술을 잘못 사온 듯했다.계연수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심서준에게 물었다.“혹시 제가 취해서 주정을 부렸습니까?”심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자 위에 놓인 그릇을 가리켰다.“해장 탕약은 제가 먹여드렸습니다.”계연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서야 자신이 왜 심서준의 마차에 있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아마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녀를 심서준이 지나가다가 본 듯했다.하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고 술 취해서 그에게 결례를 범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어차피 난 이분 앞에서 단정한 숙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그녀는 자신의 술 취한 모습을 보고 그가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계연수는 감히 자신이 술 취해서 무슨 결례를 범했는지 묻지도 못하고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빨리 여기를 떠나야겠어.’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그에게 예를 행했다.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에게 경단 한그릇을 건네며 말했다.“술을 마셨으니 뭐라도 드시고 가는 게 좋습니다.”계연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에서 그릇을 받고 다급히 고맙다고 인사한 뒤, 자리에 앉았다.그가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알 수 없지만, 경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고 마차 안에는 경단의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계연수는 몇 숟가락 떠먹고는 다시금 심서준을 힐끗 훔쳐보았다. 심서준처럼 타고난 재능에 모든 면에서 치밀하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마차에서 경단을 먹을까.‘아니면 날 위해 일부러 준비한 걸까.’그녀는 예전에 심씨 저택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심서준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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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계연수가 마차를 타고 고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중이었다.옷깃이 젖은 탓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수건을 꺼내 닦으려다가 서늘한 그 향기를 맡고 뒤늦게 심서준의 손수건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멍하니 손수건을 내려다보다가 다급히 소매 안으로 그것을 숨겼다.용춘은 빨갛게 부은 계연수의 입술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그러다 계연수의 귀걸이 한쪽이 없어진 것을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작은 마님, 귀걸이 한쪽이 사라졌네요.”계연수는 귀를 매만지며 아마 조금 전 호숫가에서 잃어버린 거라고 짐작했다.비록 좀 아깝기는 했지만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마차에서 내리니 고준안이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계연수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하늘에서는 여전히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린 건지, 고준안의 푸른색 두루마기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 계연수는 다급히 마차에서 내리며 그에게 물었다.“오라버니, 왜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나요?”고준안은 우산을 펼쳐 그녀의 머리를 가려주며 빨갛게 부은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깐 주저하다가 그녀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께 얘기 들었다. 너 사옥현과 이혼한다면서.”말을 마친 고준안은 안쓰러운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 감춘 손은 꽉 움켜쥐고 있어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계연수는 오늘 외할머니께 서신을 써서 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드렸다. 그러니 고준안이 이를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고 계연수도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고준안의 시선을 마주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사씨 가문과의 관계를 이제 정리하려 합니다.”이어서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한마디 덧붙였다.“준안 오라버니, 아마 당분간은 고씨 가문에 잠깐 머물게 될 것 같아요.”고준안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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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그녀는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잘 왔어, 연수야. 사씨 집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왕년의 약속을 어기고 첩을 들인 것도 모자라, 그것도 너를 해하려 한 여자를 첩으로 들이다니.”“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 굳이 참고 그곳에 남아 서러움을 당할 필요 없어.”장씨는 유씨를 힐끗 보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서럽기는 무슨. 사씨 가문 같은 귀한 집에 시집을 갔으면 괴롭힘 좀 당해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을.”“하물며 화리도 안 하고 이렇게 친정에 돌아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연수가 비록 고씨는 아니지만 나중에 고씨 집안으로 돌아오게 될 텐데 경성에 화리를 한 처자가 몇이나 된다고? 집안에 아직 시집을 안 간 처자들도 있는데 같이 손가락질 받으면 어쩔 테야?”계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외할머니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옆으로 끌었다.고씨 노부인은 장씨를 바라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화리한 처자가 어때서? 화리한 게 큰 죄가 되니? 먼저 신뢰를 저버린 것은 사씨 가문이고 연수는 아무 잘못 없다.”“왕년에 사 대감은 연수가 앞으로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절대 아들이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노라고 친히 서약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그런데 혼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고작 3년 만에 사씨 가문은 약속을 저버렸으니, 연수가 왜 그 굴욕을 참고 지내야 하느냐? 친정에 왔다고 한들 이유 없이 그리한 것이 아니니, 무턱대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위엄과 분노가 서린 고씨 노부인의 말에 장씨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시어머니 말에 감히 반박할 수 없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유씨는 계연수가 사씨 집안에서 얼마나 무시당하며 살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변을 당했을 때, 그들이 나서서 한마디만 해주면 해결될 일도 사씨 집안에서는 모른 체하고 도움을 거부했을뿐더러, 듣기 거북한 말로 그들을 비웃고 굴욕을 주었다. 유씨는 그날의 굴욕감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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