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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화

“그곳은 기후가 따뜻하니 어머니가 요양하기도 적합한 곳이에요.”휘안현은 계연수의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계연수의 둘째 숙부는 경성에 오기 싫다고 하여 아버지는 일찍이 그곳에 둘째 숙부의 명의로 저택을 두 채 마련했다. 나중에 관직에서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와 동생과 이웃으로 지낼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다행히 그 저택은 몰수당하지 않아서 계연수에게도 돌아갈 곳이 하나 생겼다.계연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며칠만 머물다 갈 테니 굳이 저를 위해 처소를 마련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 됩니다.”조금 전에 큰 외숙모인 장씨가 했던 말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씨 가문에 민폐를 끼친 것도 사실이었다. 집안에 아직 혼인을 안 한 어린 동생들이 있는데 그녀와 어머니가 같이 이곳에 머문다면 분명히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이다.고씨 노부인은 애통한 눈으로 어여쁜 손녀를 바라보았다.예전에 계연수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준수한 외모에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였고 태후의 치하도 받은 적이 있었다.그때는 계씨 가문이 가장 잘나갈 때였다.계정윤은 빈곤한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출세하여 성공을 거두자, 수많은 서생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그때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그의 노부인의 두 아들도 진심을 다해 계정윤을 도왔다.고씨 노부인은 아들들의 능력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계정윤 덕분이었다. 고준안과 고준이 왕년에 국자감에 들어가 글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계정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국자감은 황실 자제와 공신의 자식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고준안과 고준은 비록 관원 자제이긴 해도 국자감에 입성할 자격은 턱없이 부족했다.그때 노부인의 두 며느리는 계연수를 친딸처럼 귀여워했고 매번 계연수가 놀러올 때면 반갑게 맞아주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계정윤이 변을 당한 이후, 딸은 친정으로 돌아왔으며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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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다음 날 아침, 둘째 며느리 유씨가 가장 먼저 고씨 노부인의 처소를 찾았다.진작에 준비를 마친 유씨는 계연수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노부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계연수의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차림이 왜 그리 소박하니? 화리하러 갈 거면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가야지.”말을 마친 유씨는 금비녀 하나를 계연수의 머리에 꽂아주고는 계연수의 옷차림을 다시 살펴보았다.연보라색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해당화 무늬 저고리에 밑에는 흰 치마를 입었다. 얼굴이 예뻐서 보기에 초라해 보이지는 않지만 목에 장신구가 없고 색상이 너무 연해서 위엄이 부족해 보였다.그녀는 계연수를 끌고 편전으로 향했다.“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 초췌해 보이지 않게 연지도 좀 바르고. 우리가 먼저 화리를 제기한 거고 기죽을 필요가 없어.”계연수는 조용히 일을 빨리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지만 유씨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목에 마노목걸이를 한 후에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대청으로 들어온 고준안은 할머니의 옆에 앉아 있는 계연수를 보고 조용히 차를 따라 두 사람에게 건넸다.검은색 머리에 꽂은 금비녀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단정하고 수려한 이목구비에 눈처럼 하얀 피부가 오늘따가 더 돋보였다. 귓가에 찰랑이는 옥귀걸이에 빨간 입술에 시선이 닿자, 고준안은 저도 모르게 목이 탔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바깥은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고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고준안은 제자리에 서서 아름다운 계연수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고준안을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준비는 다 되었느냐?”고준안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는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마차도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안에 난로도 피워두었어요.”말을 마친 그는 계연수를 힐끗 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지금 목탄을 태우고 있으니 이따가 마차에 올라도 춥지 않을 겁니다.”노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너는 꼼꼼한 성격이니 당연히 알아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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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계연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은 임씨부터 만날 예정이었다.저택 안에 들어선 계연수는 고준안을 밖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노부인과 유씨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용춘을 시켜 사씨 노부인도 임씨의 처소로 모시도록 했다. 사씨 노부인은 그래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고 그녀 역시 서로 안 좋게 갈라서는 건 원하지 않았다.임씨는 고씨 노부인과 유씨와 함께 처소로 들어서는 계연수를 보고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물었다.“두 분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냉랭한 시선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이게 뭐 하는 짓이니?”“어젯밤에 옥현이가 그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옆에서 돌봐주지는 못할망정, 고작 첩실 한 명 들였다고 외조부 댁에 가서 고자질했어?”사금희도 임씨의 옆에 앉아 싸늘한 시선으로 계연수를 지켜보고 있었다.사금희는 오늘 아침 어머니의 서신을 받고 친정에 왔다. 다친 남동생을 보고 싶기도 했고 계연수에게 압력을 가해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다른 집 사내들은 사옥현 나이에 진작에 첩을 들였는데 계연수가 분수도 모르고 소란을 피우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친정 어른들까지 앞세워서 돌아온 계연수를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아무리 고씨 가문의 노부인까지 찾아왔다지만 힘없는 고씨 가문이 뭘 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경멸에 찬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유씨는 임씨와 사금희의 태도를 보고 화가 치밀었다. 그들의 시선은 지난번에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과 똑같았다.하지만 말다툼을 벌이긴 싫었기에 앞으로 나서며 먼저 입을 열었다.“사부인,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시정 나으리가 첩실을 들인 건 경사라 할 수 있지요. 저희도 나으리의 뜻을 이뤄주고 싶답니다.”임씨는 말없이 유씨를 바라보았다.유씨는 계연수가 준 서약서를 꺼냈다.“왕년에 사 대감께서 계씨 가문에 혼담을 청하러 오셨을 때 직접 쓴 서약서입니다. 여기에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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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계연수는 더 이상 임씨 모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늘 사리분별을 못하니 좋게 얘기하려 해도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마침 이때 사씨 노부인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기고만장한 임씨 모녀의 모습을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고씨 가문이 지금은 몰락했다지만, 임씨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표정을 얼굴에 다 드러내고 있으면 당사자가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좋게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이렇게 하면 큰 후환을 남길 수 있었다.사씨 노부인은 보면 볼수록 며느리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집안의 재물을 관리하는 것 외에는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사씨 노부인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예의 바르게 고씨 노부인의 팔을 잡고 동쪽 편전으로 모셨다.“내 고씨 가문의 노부인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오늘 이렇게 뵈니 참으로 친근감이 느껴지는군요.”“두 아이의 장래와 직결된 일이니 좋게 상의하는 게 마땅하지요.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가족끼리 너무 날을 세울 필요는 없어요.”고씨 노부인은 조금 전 임씨와 사금희의 말을 듣고 계연수가 이 집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갔다.하지만 좋게 끝낼 생각으로 왔기에, 사씨 노부인이 예의를 갖춰 대하자 표정을 풀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희도 오늘 소란을 피울 작정으로 온 게 아니랍니다. 저희도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하고 싶어서 왔어요.”사씨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그러시겠지요. 두 아이 사이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당연히 잘 해결해야지요. 우리 옥현이가 연수에게 미안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고씨 노부인은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두 노인이 앞에서 걷고 계연수는 유씨와 함께 뒤를 따랐다.이때, 사금희가 계연수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경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이렇게 친척들을 데려와서 소란을 피우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명유는 이제 옥현이의 첩실이 되었으니 네가 쫓아내고 싶다고 쫓아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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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사씨 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씨 가문에서 작정하고 화리하러 온 것을 노부인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계연수를 붙잡고 싶었다.“지난번 일은 옥현이가 잘못한 게 맞습니다. 저도 그 일이 있고 나서 따로 불러 녀석을 혼내주었고요. 연수가 착한 아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웃어른으로서 어찌 잘 살고 있는 두 아이를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고씨 노부인은 말이 안 통하자 슬슬 불쾌함이 치밀었다.“이 지경까지 왔는데 옛날 얘기를 꺼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화리 얘기부터 오늘 마무리합시다.”“손자 녀석이 밖에서 연수의 짐을 가져가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사씨 노부인은 고씨 노부인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 계연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연수야, 정녕 옥현이와 화리할 생각이냐?”계연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노부인,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저와 나으리는 어울리지 않아요.”그동안 그렇게 설득을 했는데도 전혀 통하지 않으니 사씨 노부인도 이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안타깝게도 사옥현은 오늘 아침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고씨 가문으로 가서 계연수를 데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보내기 아쉬울 거면 진작에 좀 잘해주지….’이제 계연수 본인이 작정하고 떠나겠다고 하니 강제로 그녀를 집안에 눌러앉힐 수도 없었다.고씨 노부인까지 찾아온 걸 보면 고씨 가문도 그들의 화리에 이미 동의한 모양이었다.고씨 노부인이 말하고자 하는 뜻도 명확했다. 사씨 가문에서 먼저 약조를 어겼지만 그들은 화리만 바랄 뿐, 그 어떤 보상도 원치 않는다고 하니 억지를 부린다고 남을 탓할 수도 없었다.사씨 노부인은 강제로 눌러앉혀도 두 사람이 잘 지낼 수 없을 테니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계연수는 사씨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짐을 가지러 나가려는데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사옥현이 두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임씨는 그를 보자 다급히 의자를 가져오라 명하고 사옥현의 시종을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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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사옥현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계연수가 야속하다는 듯, 조급해진 목소리로 따졌다.“명유는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아이라 하지 않았느냐. 이제 그 아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집에서 내쫓으면 명유는 어찌 살라고 그러느냐?”“왜 너는 늘 그 아이를 잡아먹지 못해 안 달인 것이냐? 너그럽게 받아줄 수는 없는 것이야?”계연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동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의 황당한 논리에 헛웃음이 나왔다.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게 독을 먹여 제 명성을 더럽히려 한 사람입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모두에게 버려지길 바라고 한 짓이에요.”“저는 누구에게도 잘못한 적이 없고 이명유를 괴롭힌 적도 없습니다.”“중독 사건이 있기 전에 저는 이미 나으리에게 화리를 제기했었지요. 나으리께서 제 말을 안 믿으시고 저를 질투심 많고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저를 원망하시는군요. 나으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저는 순종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편협하고 속 좁은 사람인 것입니까?”사옥현은 멈칫하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명유는 그 일이 있고 이미 처벌을 받았다. 뭘 더 바라는 것이냐?”계연수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입장이 바뀌어 제가 범인이었다면 저는 진작에 이 집에서 쫓겨나고 모두에게 악독한 여편네라고 욕을 들었겠지요. 아무도 제 사정은 알아주지 않았을 겁니다.”사옥현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변명하듯 말했다.“아니, 그렇지 않아….”계연수는 사옥현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나으리도 알고 저도 아는 답입니다. 나으리,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물론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우리가 오늘 화리하는 거예요.”사옥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난 허락 못한다….”임씨는 다급히 다가와 사옥현을 부축하며 말했다.“이런 애를 왜 굳이 만류하고자 하느냐? 화리하면 그만이지. 우리 집안에서 저애를 내친 것이다. 저애보다 좋은 여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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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임씨는 주먹을 꽉 쥐었다.고씨 노부인은 냉랭한 눈빛으로 임씨를 바라보며 말했다.“다른 말은 더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당장 연수의 짐을 챙겨 나갈 것입니다. 그쪽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씨 가문이 왕년의 약속을 어긴 일을 세상에 밝힐 것입니다.”“그리고 사옥현이 할머니의 생신 연회에서 사촌 여동생과 사통한 일도 널리 알릴 거예요. 원래는 좋게 끝내려고 왔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군요. 연수가 이 집에 와서 무슨 복을 누렸다고 마치 큰 은혜를 베푼 것처럼 얘기하시나요.”말을 마친 고씨 노부인은 사옥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연수가 이 집에 시집을 온 3년 동안 너는 저 아이에게 한 번이라도 잘해주었느냐? 네가 연수를 보살핀 적이 있느냐?”강남 출신인 고씨 노부인은 평소에는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한번 화를 내면 양갓집 규수의 위압감이 풍겼다.고씨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방안은 적막이 찾아왔다.사씨 노부인은 냉랭한 시선으로 임씨를 노려보았다.비록 처음부터 되돌릴 여지가 없는 일이지만 임씨가 막말을 하면서 완전히 양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고씨 노부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먼저 약속을 어긴 것은 사씨 가문이고 애초에 사 대감이 스스로 원해서 쓴 서약서였다.당시 노부인은 진심으로 계씨 가문의 은혜를 갚고 싶었고 계정윤의 딸인 계연수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그때 계정윤은 수보의 발탁을 받아 관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 일찌감치 혼사를 정하는 것이 가문을 위한 길이었다.나중에 일이 그렇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사씨 노부인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씨 노부인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옥현이가 연수에게 미안한 짓을 했습니다. 첩실 하나 때문에 화리까지 가는 건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 오늘 제가 결단을 내려 그 첩실을 집안에서 내쫓을 것입니다. 앞으로 그 아이가 어떻게 되든, 우린 상관하지 않겠습니다.”“옛말에 부부의 연은 쉽게 끊어놓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보기에 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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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사옥현이 쓰러지자, 방 안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계연수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누운 사옥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에는 원망과 실망이 가득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이었다.그는 마치 정인에게 버려진 사람처럼 슬픔에 고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정말이지 보고 있기 역겨운 광경이었다.계연수는 시선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씨 노부인의 앞으로 가서 정중히 큰절을 올렸다.“노부인도 방금 보셨지 않습니까. 나으리께서는 이미 선택을 하셨고 노부인께서도 이 혼사가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는 것을 깨달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저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사씨 가문을 떠날 것입니다.”사씨 노부인은 탄식하며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더 이상 말릴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만약 고씨 가문이 화리를 위해 사씨 가문의 배신을 외부에 알린다면 사옥현의 출세길도 순탄치 못할 것이다.노부인은 사람을 시켜 필묵을 가져오게 하고 미리 작성해 둔 화리서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사람을 시켜 사옥현의 손을 강제로 잡아 화리서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게 했다.사옥현은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글썽였다.그는 조용히 한편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단정한 자태로 서서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그녀를 만류하려고 그 많은 말을 했지만 계연수가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시야가 흐릿해지고 그날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제대로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사옥현은 서명을 안 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부상 때문에 시종들의 힘을 당해낼 수 없어 결국 지장을 찍고 말았다.화리서에 빨간 지장이 찍히자마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종이를 적셨다. 곧이어 사옥현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화리서를 적셨다.사옥현의 팔을 잡고 있던 어멈이 화들짝 놀라 손을 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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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고씨 노부인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옥현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화리 이야기를 더 꺼내기에는 분명히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유씨 역시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다가와 계연수의 손을 잡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시정 나으리에게 무슨 숨은 질병이라도 있는 게 아니니? 예전에 봤을 땐 너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오늘은 또 무슨 일이래?”계연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이미 이명유와 그가 함께할 수 있게 길을 비켜주었는데 마치 피해자처럼 구는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사옥현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보복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나를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하지만 이 상황에서 오늘은 더 이상 화리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그녀는 고씨 노부인의 곁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일단 돌아가요. 아마 오늘 마무리 짓기는 그른 것 같네요.”그 피는 하필 지장을 찍은 위에 뿌려졌기에 화리서를 들고 관아로 찾아가도 관아에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임씨는 사옥현의 곁을 지키고 사씨 노부인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의원이 어멈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아무도 계연수 일행을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했다.고씨 노부인이 계연수에게 물었다.“오늘 화리서를 받지 못하면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계연수는 노부인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사씨 가문에서 먼저 신뢰를 저버렸으니 화리서를 받지 못해도 저와 사옥현은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집에 더 남아 있을 이유도 없고요.”고씨 노부인은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도 일리가 있어. 화리는 반드시 해야만 하지. 여기 남아 있어 봐야 너만 괴로울 거다.”“하물며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사부인을 보니 상대하기 까다로운 시어머니 같던데 네가 여기 남으면 비난만 듣겠지. 가서 짐부터 챙기거라.”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향했다. 안에서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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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오라버니는 널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 돌아오지 마.”계연수는 이명유의 눈빛에서 은은한 광기와 집착을 읽었다.그녀는 이 시국에 이명유와 다투고 싶지 않아서 유씨와 고씨 노부인에게 먼저 가라고 당부했다.그러고는 이명유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내가 여길 떠나려는 건 맞지만 네가 나가라고 해서 나가는 게 아니다.”“그리고 난 오늘 화리를 마무리 지으러 왔고 지금 네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방에 계신 분이야.”말을 마친 계연수가 미련 없이 뒤돌아선 순간, 이명유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이명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위협하듯 물었다.“대체 무슨 수를 써서 옥현 오라버니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야?”“오라버니는 전에 이러지 않았어. 대체 무슨 수로 구워삶았길래 오라버니가 이러는 거냐고! 약이라도 먹였니?”계연수는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사람에게 약을 먹이기 좋아하는 건 너야, 내가 아니라.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니?”“지금 상황은 네가 바라고 만든 상황이지 않니?”이명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계연수는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밖으로 향했다.용춘은 이미 그녀의 지시에 따라 다 정리된 짐들을 어멈들을 시켜 뒷문으로 옮기게 했다.하지만 일은 그녀의 예상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뒷문으로 갔더니 큰 부인 신변의 어멈이 문을 지키며 사씨 집안의 물건도 같이 가져가지 않았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모욕적인 말에 용춘은 울상을 지었다.계연수는 임씨가 이렇게 나올 줄을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어젯밤에 은자와 은표를 먼저 가지고 고씨 저택으로 돌아갔던 것이다.큰 부인 임씨는 집안 살림을 장관하는 사람으로 그녀가 물건을 못 가져간다고 한다면 가지고 나가기 쉽지 않았다.계연수는 용춘을 위안하고는 일단 두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에 올 때 가져가도 늦지 않았다. 그중에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그림이 몇 점 있었기에 이곳에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용춘은 눈물을 닦으며 상심한 얼굴로 말했다.“그 어멈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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