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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화

이는 계연수가 쓰던 물건이 초라해서 보기도 싫다는 뜻이었다.임씨 어멈도 이명유가 이제 사옥현의 첩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개 첩실이 처소에서 작은 편전 하나 차지하고 살면 감지덕지할 사람이 주인방의 배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임씨 어멈은 사옥현이 어제 통증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 그녀의 만행을 눈감아준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옥현이 평소에 이명유를 총애했어도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었다.첩은 영원히 첩실이고 정실을 대신할 수 없었다.계연수는 그런 말을 듣고도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사씨 가문으로 시집오기 전에 이명유는 사옥현의 처소를 자주 들락거리며 그의 방을 자신의 취향으로 꾸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쨌든 다시 그 안방으로 돌아갈 일이 없으니 어떻게 꾸미든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계연수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작정하고 고자질을 하던 임씨 어멈의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임씨 어멈 본인도 자신이 괜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처소에서 일하는 하인으로서 그들 모두는 예전의 관대하고 온화한 작은 마님이 처소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사옥현이 지난 3년간 계연수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계연수를 붙잡으려 한다면 그동안 자신들에게 잘해준 계연수를 저버리는 것과 같았다.결국 임씨 어멈은 죄책감을 느껴 입을 다물었다.바람이 불어와 계연수의 머리가 흩날렸다. 계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잘 지내요, 어멈.”임씨 어멈도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에게 말했다.“작은 마님도 잘 지내셔야 해요.”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침내 뒤돌아섰다.고준안은 그녀의 곁에서 걷다가 마차에 오르기 전에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연수야, 내가 잡아줄게.”그는 더 이상 계연수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곁눈질로 힐끔 보인 그녀의 빨간 귓불이 참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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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화

장씨의 말이 끝나자, 주변은 고요해졌다.고씨 노부인은 담담히 장씨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잘못은 그쪽에서 저질렀으니 연수가 잘못한 건 없다.”“연수를 나무랄 것 없어. 내가 같이 오자고 했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바에는 연수가 지낼 추영원에 시녀나 둘 골라서 보내주거라.”장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지금 거기 보낼 시녀가 어디 있다고요? 지금 당장 암시장에 나가서 사오려고 해도 시간이 이미 늦었지 않습니까.”고씨 노부인은 버럭 성을 냈다.“어제 연수가 집에 오겠다고 말했을 때 미리 준비했어야지. 왜 지금까지 질질 시간만 끌고 있었던 게야.”계연수는 다급히 나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부인을 달랬다.“할머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용춘 한명이면 충분해요. 낮에는 어머니 곁에 있을 테니 시녀가 필요 없어요.”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물며 화리서만 받으면 아버지 고향으로 내려갈 거예요. 그쪽에 있는 저택은 이미 수리가 끝났으니 지금 저를 위해 시녀를 추가하는 건 낭비예요.”계연수는 장씨를 향해 공손히 예를 행했다.“며칠만 외숙모께 폐를 끼칠게요. 외숙모가 집안을 관리하느라 수고가 많으신 건 저도 알아요.”장씨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물었다.“그쪽은 정말 정리가 다 된 거니?”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외숙모. 이미 다 정리가 되었어요.”고준안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반면 장씨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말했다.“오래 머물 게 아니라면 시녀를 사올 필요도 없겠구나. 내 처소에서 일하던 애들을 두 명 보내주마.”고씨 노부인은 큰며느리의 처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티내지 않고 계연수와 함께 영안당으로 돌아갔다.계연수가 말했다.“저 어머니 먼저 뵙고 싶어요.”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어미를 뵙고 오는 것도 괜찮지. 화리 얘기는 나중에 마무리되면 얘기하거라.”“근래 네 어미 상태가 겨우 조금 좋아졌어.”계연수는 어머니가 계신 혜란원으로 향하다가 중도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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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화

사실 계연수는 장씨가 한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그녀는 고씨 가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씨는 집안을 관리하는 안주인으로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고씨 가문에서 지금 관직에 있는 사람은 고준안뿐이었다. 그러나 녹봉이 많지 않으니, 집에 한 사람이 더 들어오면 그만큼 부담이 커질 것이다.도의상이라도 그녀는 이 집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계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선물을 사양했다.“오라버니, 전 한 번도 마음에 둔 적 없어요.”“그 집에 있을 때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다 계획해 두었어요. 괜찮으시다면 저 대신 외숙모께 전해주세요. 저는 경성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어요. 화리서만 받으면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떠날 거예요.”“아버지의 고향이 금릉 휘안현이에요. 예전에 아버지께 들은 바로 기후가 따뜻하고 사계절 꽃이 핀다고 하니 어머니가 요양하기 딱 좋은 곳이에요.”그녀는 고준안이 내민 귀걸이를 가볍게 밀어내며 진지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오라버니는 제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오히려 고씨 집안에 민폐를 끼치고 있죠. 외숙모는 제 어머니를 3년간 보살펴 주셨어요. 안 그래도 죄송한데 선물은 사양할게요.”얘기를 들은 고준안의 손끝이 떨렸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한 계연수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은은한 체향을 주변에 풍겼다. 그가 늘 그리워했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자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유일하게 알아들은 말은 그녀가 떠난다는 말이었다.그가 건넨 선물을 그녀는 받지 않았다.이 귀걸이는 그가 온 경성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위해 정성 들여 고른 선물이었지만 그녀는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계연수는 한참 기다려도 그가 답이 없자, 어머니를 빨리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담담히 말했다.“오후에 국자감으로 가보셔야 한다고 들었어요. 점심때가 다 되었으니 이만 돌아가서 잠깐이라도 쉬고 계세요.”청아한 목소리가 귓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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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내려 음침한 눈빛을 가렸다.등 뒤에서 시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고준안은 표정을 수습하고 뒤돌아섰다. 장씨의 시녀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더니 말했다.“도련님, 큰 부인께서 급히 찾으십니다.”고준안은 담담히 옷깃을 정리하고는 계연수를 대할 때와는 다른 태연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머니의 처소로 향했다.그는 올해 상반년에 국자감 시험을 거쳐 관직을 수여받았고 절차를 걸쳐 실제로 관직에 오른지는 고작 서너 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벌써부터 그의 혼처를 물색하고 있었다.고준안에게 이런 일은 딱딱하고 지루한 일이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장씨조차도 매번 아들이 자신을 대할 때마다 따분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오늘은 정월 초칠일, 인승절(人勝節: 한해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명절)이었다. 황궁에서는 제사를 진행하고 이날 밤 황제는 만휘각에서 대신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매년 인승절마다 있는 연회였고 경성의 오품 이상의 관원들은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 지방 고과시험까지 겹쳐 고과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관원들도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기에 오늘의 연회는 여느 때보다 더욱 북적였다.심서준은 음주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관료들도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설령 그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어도 공적인 일만 이야기했으며 심서준 앞에서는 사적인 일을 거론하기를 꺼렸다.하지만 황제는 심서준에게 술을 권하기를 즐겼다.황제는 그가 평소에 너무 진지하다고 말하고는 했다. 고작 스물네 살의 나이에 늙은이처럼 꼿꼿하고 냉엄하다고, 평소에는 긴장을 좀 풀어야 사람들이 다가오기 쉽다고 타이르고는 했다.계속 정색하고 있으면 아가씨들도 그에게 접근하기 어려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오늘 심서준은 황제의 권유로 벌써 몇 잔이나 마셨다. 연회가 끝난 후에도 황제는 그를 궁중에 남기고 술을 가져오게 했다.심서준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의 권유에 못 이겨 점점 취기가 올랐다.황후는 비틀거리는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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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영현현주는 제주에 있는 안영 후작과 혼인했다. 안영 후작은 제주의 병력을 장관하는 무장으로 영현 현주도 부군과 함께 제주에 거주하며 거의 경성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황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황제가 동생을 일부러 궁중에 남기고 손보경을 불러둔 이유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듯했다.황제는 심씨 가문을 신임하고 그녀의 아버지와 동생을 중용하지만, 제왕으로서 탄탄한 유대감을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심서준의 곁에 태후의 사람을 붙여준다면 황제도 더 안심할 것이다.하지만 황후는 누이로서 유일한 동생이 이익을 위한 혼인이 아닌, 진심으로 연모하는 이와 혼인하기를 바랐다.가문의 이익에 따른 혼인은 결국 동생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물론 황제의 마음도 이해하기에 황후는 묵묵히 동생을 바라보았다. 심서준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침묵하고 있었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심서준의 눈빛은 침착하고 싸늘한 것이 전혀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대전 안의 불빛은 희미하여 심서준의 눈빛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가려주었다. 황후는 그 순간 동생의 뜻을 바로 눈치챘다.심서준은 무언으로 황후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황후는 적절한 때를 노려 황제에게 음주는 적당히 하라고 당부한 후에 물러갔다.황제는 여전히 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황후가 떠나자 옆에 있는 궁인에게 술을 따르라 명했다.심서준은 황제의 권유에 못 이겨 또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그는 손바닥으로 상을 짚고 비틀대고 있었다.황제는 몸을 일으키며 심서준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심서준이 느린 반응을 보이자, 황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곧이어 황제는 손보경을 불렀다.손보경이 다가오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옆에 있는 심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했다.“서준이 너, 주량이 짐보다 못하게 되었구나.”심서준이 급히 몸을 일으키자, 황제는 그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그러고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취했으니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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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화

그녀는 만약 상대가 미색을 탐하는 자라면, 만약 그가 자신을 거칠게 대하거나 품행이 단정치 못한 자라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내키지 않을 것 같았다.그런데 직접 눈으로 본 심 후작은 그녀의 예상을 초월했다.그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에게서는 냉철하고도 예리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귀티가 흐르고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어지는 사람이었다.손보경도 고귀한 출신이지만 심 후작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겸손해지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술에 취한 뒤에도 흐트러짐 없이 우아한 자세, 고결하고 맑은 얼굴에 추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눈빛에 떠오른 약간의 취기와 진한 술냄새만이 그가 확실히 취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도 그는 그녀의 옷깃조차 건들지 않았다.그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과 고결함은 사람을 그에게 빠지게 만드는 독약처럼 저도 모르게 그의 앞에 굴복하게 되고 그의 마음속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게 만들었다.적어도 지금 손보경의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원하게 되었고 그의 부인이 되고 싶었다.태후와 황제께서도 이 혼사를 중시하신다니, 만약 자신이 그의 마음까지 가질 수 있다면 모두가 기뻐할 것이다.손보경은 마음속으로 살짝 긴장했다. 그녀 역시 사내에게 접근하고 아부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배운 예법은 어떤 경솔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심서준의 손을 살짝 잡았다.“심 대인, 많이 불편해 보이시니 제가 떠먹여 드리겠습니다.”심서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용히 눈앞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빼어난 용모에 정숙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고 다소 긴장한 듯한 눈빛은 과거 계연수가 그에게 말을 걸려 할 때의 눈빛과 매우 흡사했다.하지만 계연수는 포기가 빠른 아이였다. 소심하게 한번 시도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그녀는 절대 스스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고 가까이 온다 해도 이렇게까지 가까운 곳에 서지 않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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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화

소리가 흐릿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손보경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대전 안은 일부러 어둡게 조절한 불빛 덕분에 어슴푸레했다. 그의 붉은색 관복 위로 어두운 촛불이 비치니, 냉혹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손보경은 이런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제주는 부유한 지역으로, 사내들은 학식과 용모 모두 경성의 사내들보다 뒤처지지 않았지만 심서준처럼 겉보기에 예리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다가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그녀는 살며시 걸음을 늦추었다. 그녀는 이 고결하고 냉철한 사람이 취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졌다.하지만 손보경이 다가갔을 때는 알싸한 술 냄새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는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란 손보경은 뒤로 뒷걸음질 치다가 당황함에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는 애써 놀란 가슴을 달랬다.그의 눈에 담긴 냉혹함이 그녀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는 사람이 가져야 할 희로애락도, 인간미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그에게 접근하는 것마저도 큰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손보경은 평생을 바쳐 그에게 다가가려 해도 그의 마음을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너무나도 위험한 사람이라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손보경이 뛰쳐나가자 문하가 급히 들어와 문을 닫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나으리,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심서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온몸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후끈거렸다.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황제가 이렇게 심혈을 기울였는데 취한 모양새라도 보여줘야 했다.그는 힘겹게 일어나 비틀거리며 내실로 들어갔다.문하는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심서준이 사실 많이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안방으로 들어간 그는 침상에 앉아 허리띠를 풀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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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화

다행히 심서준은 어제 궁중에 머물렀고 대문을 지키던 내관은 평소 결벽증이 심하던 그가 목욕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잠자리에 들었다고 고했다.황제는 그 보고를 듣고 마침내 표정을 풀었고 당시 곁에 있던 황후도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황제에게 이는 심서준이 충심을 표할 기회를 준 것이었으니 만약에 그가 대놓고 거절한다면 황제의 불쾌함을 살 것이다.황후가 심서준을 따로 부른 이유도 그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였다.비록 심서준은 누구와 혼인해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손보경은 제주에서 첫째 가는 귀한 여인이고 품행과 용모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누이인 황후는 동생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나 데려다 부인으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그리했을 것이다.심서준은 어젯밤의 취한 모습은 전혀 없이 단정한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그는 의자에 앉아 평소 마시던 군산차를 들고 담담한 얼굴로 한 모금 마셨다.황후는 차분한 그의 모습에 오히려 조바심이 났다.“어젯밤 네게 접근한 여인이 있었느냐?”심서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황후가 다시 물었다.“그 여인이 누군지는 알고?”심서준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정중히 답했다.“압니다.”황후는 잠시 당황하다가 그가 오전에 소식을 들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심서준이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다는 것은 황제의 뜻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황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넌 어쩔 생각이냐.”“내가 조사해보니 사실 영현현주는 태후와 왕래가 빈번하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태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집을 오면 경성에 거주하게 될 것이고 성격도 꽤 온순하고 조용한 걸 좋아하는 아이 같더구나.”심서준은 황후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저는 그녀에게 마음이 없습니다.”황후는 그 답변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그럼 폐하께는 어떻게 말씀드리려고? 그 아이는 영현군주의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로 귀한 신분이야. 만약 태후와 폐하께서 꼭 너희를 이워주려 하신다면 어떻게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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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고씨 저택.계연수가 돌아온 이틀 사이, 그녀는 외할머니의 뜻대로 화리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꺼내지 않았다. 어제 한번 어머니를 뵙고 온 뒤, 아침에는 밖에 있는 춘화에게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얼마 전까지는 추운 날씨 때문에 종일 방 안에만 있어 병세가 조금 나아졌는데 날씨가 따뜻해지자 밖에 산책을 나갔다가 다시 두통이 찾아왔다고 했다.고씨는 독약을 먹은 이후로 몸상태가 좋아진 적이 없었다. 몸이 허하여 작은 병증도 고씨에게는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큰 병이었다.계연수는 문앞에 서서 춘화의 보고를 들었다.“아가씨, 걱정 마세요. 부인은 잠을 좀 오래 주무시긴 하지만 어제보다 밥을 반 공기나 더 드셨어요. 두통은 예전부터 있었으니 며칠 요양하면 괜찮아질 거예요.”계연수는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용춘을 시켜 처방 받은 약재를 춘화에게 건네며 작게 말했다.“의원은 어머니가 몸이 허약하시어 소화가 힘들다고 하니, 평소 적게 드시더라도 강요하지 말거라.”춘화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아가씨. 명심할게요.”계연수는 정원을 둘러보고는 외할머니가 마련해 준 춘의원으로 향했다.춘의원은 저택 동쪽에 있는 처소였는데 예전에 고씨 가문의 장녀가 살던 곳으로 위치가 꽤 괜찮았다.가는 길에 계연수는 오늘 서신이 온 게 없느냐고 물었다. 용춘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소인이 가서 확인해 봤는데 온 게 없다고 합니다.”사씨 가문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보내오지 않았다. 계연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지금 그녀에게 가장 급선무는 하루라도 빨리 사옥현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거였다. 시간을 질질 끌다가 나중에 또 무슨 일로 엮일지 알 수 없었다.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대문을 지키던 문지기가 서신 한통을 들고 왔다.계연수는 다급히 서신을 펼쳤다. 임씨 어멈이 보낸 서신이었다.임씨 어멈은 쓸 줄 아는 글자가 적어 서신에 간략하게 내용만 전달했다. 사옥현이 이미 깨어났고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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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여덟 살 고완영이 호기심 어린 어투로 물었다.“둘째 오라버니는 예전에는 과자 같은 걸 사오시지 않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가요?”고완영 옆에 앉은 백 이랑이 다급히 소녀의 손바닥을 살짝 쳤다.“네가 뭘 알아. 연수 아가씨가 좋아해서 사온 거겠지.”계연수가 행인 과자를 좋아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예전에 계씨 가문이 아직 건재할 때, 두 외숙모가 직접 만들어준 적도 있었다.고준안은 손에 과자를 들고 열심히 먹고 있는 계연수를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고씨 노부인은 멀뚱하니 서 있는 그를 보고 말했다.“너도 서 있지만 말고 여기 와서 앉으렴.”평소의 고준안이라면 어린 여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국자감에 입성한 이후로는 공무와 글공부가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그는 줄곧 최상의 성적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왔고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고준안은 높은 자리로 가려면 본분만 지켜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맥 관리도 하느라 평소에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그러나 할머니까지 자리를 권했으니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연수의 옆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그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마노 장식이 달린 은비녀를 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고준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곁눈질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도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게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어차피 모인 김에 함께 저녁이나 먹자고 제안했다. 이때, 밖에서 어멈이 다급히 달려오더니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사 시정께서 오셨습니다.”계연수를 포함해 아무도 사옥현이 지금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사옥현은 한 번도 고씨 가문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아픈 장모에게도 신경을 써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고씨 노부인은 어멈에게 물었다.“혼자 왔더냐? 아니면 누구랑 같이 왔더냐?”어멈이 다급히 답했다.“사 시정 혼자 오셨습니다. 시종을 몇 명 데리고 오긴 했는데 뭔 물건을 가득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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