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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1화

계연수를 데려가라는 고씨 노부인의 말에 장씨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심서준이 나서서 도와준 건 계연수였으니 그녀를 데려가지 않고 딸만 데려간다면 속셈이 뻔히 보일 터.장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서 방문장을 쓰고 준비하겠습니다.”계연수는 장씨가 자신이 같이 가는 것을 그리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너무도 초라해서 사람들을 만나기 껄끄러웠다.“저는 그냥 안 가는 게 낫겠습니다. 외숙모, 윤희를 데리고 다녀오세요. 어머니 곁에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니 근래는 어머니 곁에 있고 싶습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대신 제가 답례를 드릴 터이니 그것만 가지고 가서 전해주세요.”장씨도 계연수와 함께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자신은 고씨 가문의 안주인이고 계연수는 고씨 저택에 잠시 머물고 있으니 자신이 나서서 감사인사를 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번에 봤을 때 계연수는 심씨 노부인과 사이가 꽤 친근해 보였으니, 그녀가 안 가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계연수가 같이 가서 심씨 노부인의 환심을 사면 같이 간 고윤희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게다가 계연수가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는 있지만 이미 화리한 여인이니 심씨 가문에서 그녀를 심서준의 짝으로 생각할 리도 없어서 괜히 딸의 인연을 빼앗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고씨 노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장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심씨 가문처럼 귀한 집에 인사를 가는데 네가 직접 가지 않고 선물만 보내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아. 그쪽에서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니?”“네 어머니가 앓아누운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예전에 네가 여기 없을 태도 잘 지내고 있었으니, 하루 정도 네가 집을 비운다고 무슨 일이야 있겠어?”장씨는 단호한 어투로 결정을 내렸다.“이 일은 더 사양하지 말거라. 네 할머니 말씀대로 네가 우리와 같이 가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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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화

그녀가 뜰에 들어서자 춘화는 평소처럼 그녀의 곁을 따르며 고씨의 근황을 그녀에게 전했다. 계연수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안방 밖에서 끓고 있는 탕약을 발견하고는 몸을 굽혀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약재는 그녀가 며칠 전에 보내온 것이었다.어머니의 병을 보살핀지도 꽤 오래되었기에 그녀는 탕약에 들어가는 약재는 거의 다 알 정도였다.잠시 망설이던 춘화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아가씨, 앞으로 여기서 계속 지내실 생각인가요?”계연수는 기대에 찬 춘화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사씨 가문에는 다시 안 돌아갈 거야.”하인으로서 춘화는 비록 계연수의 화리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사씨 가문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사옥현은 사위로서 삼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장모를 뵈러 오지 않았으니 부인에게 무슨 정이 있다 말할 수 있겠는가.계연수는 어머니가 계신 안방으로 들어갔다. 고씨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고 기력이 없어 움직이기를 싫어하다 보니, 대부분 시간은 침상에서 보내고 있었다.고씨는 딸을 보고도 반가움보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네가 또 어쩐 일이니?”그녀는 약간 걱정되는 어투로 책망하듯 말을 이었다.“연수야, 시집을 간 처자가 친정에 자주 들락거리는 걸 좋아할 시어머니와 부군은 없어.”계연수는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온화하고 귀티 나던 부인은 병상에 몇 년을 누워 있더니 두 눈은 생기를 잃었고 고단함만 가득했다. 계연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왕년에 아버지가 건재하실 때, 일가족은 너무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이런 행복이 영원할 줄만 알았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사씨 가문에서도 그녀를 그 정도로 홀대하지는 않았을 거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니, 저 그 사람과 화리하였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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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3화

고씨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졌다.계씨 가문에 변고가 생기고 사랑하던 부군을 잃은 이후로 또 하나의 큰 타격이었다.계연수는 그녀의 유일한 딸이자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녀는 딸이 어떻게든 잘 살 거라고 매일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왔다. 왕년에 부군이 미리 혼약을 정해두어서 계연수가 가문에 변고가 생긴 뒤에도 사씨 가문처럼 괜찮은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적어도 딸만큼은 귀족 가문에서 부유하고 안락하게 평생을 살 거라고 기대했고 나중에 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 무한한 영광을 누릴 거라고 확신했다.그런데 모든 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까.딸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살아온 것 같지 않았다.경성의 세가들 중에 화리한 여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었다.고씨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 딸을 책망해야 할까? 그렇기에는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키운 딸에게 모진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딸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복잡한 감정이 엉켜 가슴을 조이며 아프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죽더라도 부군을 볼 면목이 없었다.그녀는 본래 부군을 따라 죽으려 했다가 지금까지 친정에서 형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살아온 이유도 딸이 잘 사는 걸 보고 싶어서였다.그런데 그랬던 딸이 화리했다고 말하고 있었다.고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만 부여잡고 있었다. 의식이 점차 흐릿해지고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계연수는 자신의 앞에서 쓰러지는 어머니를 보고 가슴이 철렁하여 황급히 용춘을 불러 의원을 불러오게 했다.용춘 역시 깜짝 놀라 비틀거리며 뛰쳐나갔다.텅 빈 방 안에서 계연수는 숨이 막힐 듯 괴로워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자신이 고집하여 성사된 화리가 옳은 결정이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소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어머니가 뭘 바라는지 잘 알면서도 끝내는 그 발을 내딛고 말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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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화

“자존심도 상황을 봐가면서 부려야지. 화리가 장난이니? 뭐 그리 광채로운 일이라고!”말을 마친 장씨가 가림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계연수를 보았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녀를 불러 상태를 묻고는 침상에 누워 아직도 기절한 채로 있는 고씨를 바라봤다.둘째 부인 유씨는 다가가서 계연수의 안색을 살폈다. 소박한 차림에 서럽게 울고 있는 그녀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가볍게 계연수의 어깨를 다독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네 어머니도 언젠가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애처로운 눈빛으로 유씨를 바라보았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비를 피할 곳 하나 없이 홀로 내버려진 느낌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조차 이제는 확신이 없었다.고개를 들자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외숙모, 제가 잘못한 걸까요?”유씨는 잠깐 홀린 듯, 계연수를 바라보았다.하얗고 말간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고 어여쁜 두 눈은 아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찌 이리도 고운 아이가 있을까. 혼인을 안 한 처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유씨는 더 이상 계연수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노부인으로부터 고준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계연수가 심씨 가문에 부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어쨌거나 부군은 계연수의 아버지에게 연루되어 유배지로 가다가 사망하였지만, 이를 계연수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비록 마음에 약간의 원망과 상심이 남아 화풀이 상대가 필요하고 계연수는 계정윤의 유일한 딸이라 가끔 말이 안 좋게 나갈 때도 있었어도 계연수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그녀는 작은 소리로 계연수를 위로했다.“잘못한 건지 잘한 건지는 이제 와서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넌 선택을 하였고 되돌릴 여지는 없으니까 괜한 생각하지 말거라.”되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은 계연수 본인도 알고 싶었다. 그녀는 그저 주변인들에게 이해받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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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5화

그때 계정윤의 나이는 스물다섯,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수많은 명문가 귀녀들이 그를 흠모하고 그와 혼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심씨 가문의 딸이 그를 흠모한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는데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당시 계정윤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는 점은 사실이었다.고씨는 막 성년례를 치른 어린 소녀였는데 밖에서 계정윤을 한번 마주치고 서로 눈이 맞아 얼마 후에 혼인까지 가게 되었다.그때 그들의 혼례를 축하해 주러 온 사람은 많고도 많았다. 한 사람은 수보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제자였고 또 한명은 경성 제일 미인이라고 소문이 났으니 모두가 선남선녀가 만났다고 부러워했다. 계정윤은 비록 부모님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금릉의 시골 출신이었지만 그런 건 다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씨가 시부모도 없는 집에 시집을 가서 복받은 거라고 부러워들 했다. 그때 유씨 역시 고씨를 부러워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그때의 혜란원은 지금처럼 삭막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씨에게 아첨하러 몰려들었으며 심 수보와 연줄을 대고 싶은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를 않았다.고씨가 시집을 갈 때 혼수도 적지 않았다. 고씨 노부인은 가진 재산 모두 털어 고씨의 혼수를 마련해줄 것처럼 부지런히 장만했고 집안의 친척들도 귀한 선물을 보내왔다.그런데 그것들은 이제 모두 몰수당하여 국고에 들어갔고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고씨와 혼인한 후, 계정윤은 계속 승승장구하여 마흔 살 어린 나이에 병부상서의 관직에 올랐다. 몇 년이 더 지나면 더 높은 곳을 바랄 수도 있었다.노부인도 사위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계정윤 덕분에 고씨 가문의 입지도 나날이 탄탄해졌고 혜란원은 고씨가 가끔 계연수를 데리고 친정에 와서 하루이틀 자고 가기는 했지만 사람이 들지 않았을 때도 매일같이 청소를 하고 정원을 가꾸었다.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에 혜란원은 사람 손이 가지 않아 지금의 삭막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방 안에 남은 계연수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발치에서 타는 난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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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6화

계연수는 한없이 다정한 외할머니의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할머니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말이 가슴에 무겁게 와닿았다. 가장 힘들고 방황할 때, 외할머니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외할머니 앞에서만 그녀는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숟가락을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계연수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감정을 꾹 눌러 참으며 외할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그녀는 갈라진 듯한 가는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할머니, 저는 정말 시댁에서 잘 지내려고 노력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를 이렇게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제가 부덕해서 혼인도 지키지 못했어요.”오늘 큰 외숙모가 한 말들은 그녀의 마음 깊이 새겨져 버렸다.경성의 세가들 중에 여인들이 화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옥현도 대놓고 그녀를 함부로 대했고 그녀가 화리를 고집할 때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그녀는 오로지 자기 생각만 고집하며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입장을 돌보지 못했다.고씨 노부인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계연수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연수야,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내가 네 성격을 몰라? 넌 늘 이해심 많고 남을 배려하던 아이였다. 그러니 이유도 없이 그런 결정을 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사옥현이 첩까지 들였으니 그쪽에서 잘못한 것이지 네 잘못이 아니란다.”“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사옥현이 감히 너를 홀대했겠어? 그 댁 노부인이 손자가 못된 짓을 하는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겠느냐?”“그들이 너에게 잘못한 게야. 그러니 거기 남아서 수모를 당할 이유가 없지. 걱정 말거라. 이 할미가 네 앞길을 잘 닦아주마. 다른 사람들은 네가 힘들게 살기를 바랄지 몰라도 이 할미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없다. 화리한 처자라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느니라.”비슷한 얘기를 계연수는 얼마 전에도 들은 적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앞길을 닦아준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할머니?”고씨 노부인은 계연수의 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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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7화

계연수는 어머니 앞에서 자신이 사씨 가문에서 겪었던 서러움들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약을 다 먹고 이불을 위로 잡아당기고 돌아누운 어머니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춘화에게 그릇을 건네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계연수는 작은 소리로 춘화에게 고씨를 잘 보살필 것을 지시하고는 손을 씻으러 나갔다.용춘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준안 도련님께서 어젯밤 늦게 돌아오셔서 얘기를 듣고는 보약을 보내주셨더라고요. 준안 도련님도 어려우실 텐데 부인을 생각해 주시다니. 큰 부인보다 훨씬 낫네요.”“아침 일찍 오셔서 지금은 밖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세요. 참으로 자상한 분이지 않나요.”계연수는 손을 씻으며 용춘의 말들을 듣고 있었다.‘준안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상하고 세심한 사람이었지?’너무 많이 변해서 어릴 적의 장난기 많던 모습이 흐릿해질 정도였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들을 세세히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용춘을 불러 머리와 옷매무시를 정돈한 후, 고준안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곧장 밖으로 나갔다.대문을 나가기도 전에 멀리서 청색 옷을 입은 고준안이 보였다.계연수는 가까이 다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 다음에 오시면 바로 안으로 들어오세요.”고준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다. 내가 들어가면 불편할 것 같아서.”계연수는 고준안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어머니는 잠옷 바람에 계시고 그녀 역시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지 못한 상태였기에 사내인 고준안을 대접하기 불편한 게 맞았다.고준안이 물었다.“고모님은 좀 괜찮아졌느냐?”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예, 많이 나아졌습니다.”고준안은 더 묻지 않고 소박한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선 계연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뜻 궁핍해 보이는 차림이지만, 그녀가 입으니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슬며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이만 출발하자꾸나.”말을 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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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마차 앞에 이르니 고준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연수는 문득 아까 본 눈빛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용춘이 부축해 주면 됩니다.”고준안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숙여 계연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에 두고 기다란 속눈썹으로 눈빛을 감추고 있어 무슨 표정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리고 뒤로 비켜섰다. 계연수가 용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오르자 그의 눈빛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마차 안, 용춘이 작은 소리로 계연수에게 말했다.“준안 도련님은 성격도 이리 좋으시니 앞으로 부인될 분이 복받으셨네요.”“아가씨는 모르죠? 지난번에 같이 도찰원에 갔을 때, 아씨는 도어사 대인을 만나러 가고 큰 부인은 뒤에서 아씨의 흉을 봤는데 준안 도련님이 말렸어요.”계연수는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라버니는 현재 국자감에서 일을 하시니 혼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하물며 외숙모는 치밀한 분이시니 당연히 좋은 혼처를 찾아주실 거야.”“난 사씨 가문에 다녀오는 게 더 걱정이구나.”비록 어제 이미 짐을 가지러 간다고 전갈을 보내기는 했지만 큰 부인 임씨 성격에 아마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올 것이다.용춘도 그 말을 듣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사씨 저택 대문 앞에 도착하니 문지기가 계연수에게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인사했다. 원래대로라면 계연수는 다 정리된 짐을 임씨 어멈을 시켜 대문 앞까지 가져다 달라고 방문장에 부탁했는데 지금 보니 사씨 가문은 그 요구를 무시한 모양이었다.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사씨 노부인이 잠깐 만나고자 하니 노부인의 처소로 먼저 가자고 말했다. 만약 사씨 노부인이 약속대로 사옥현과 그녀의 화리에 동의했더라면 가서 뵙고 인사를 드릴 의향이 있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만날 필요가 없어 보였다.그녀는 시녀에게 오늘 급하게 와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하니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전하도록 했다.어차피 사씨 가문과는 완전히 틀어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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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계연수는 한 번도 사씨 가문의 물건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어투로 답했다.“걱정 마십시오, 부인. 제 것이 아닌 물건은 손도 대지 않겠습니다.”부인이라는 호칭에 임씨는 화가 치밀었다.예전에는 그렇게 순종적이고 온순하던 며느리가 어느 날 갑자기 화리한다고 관아까지 찾아갈 줄이야.그녀가 화가 나는 건 아들며느리가 화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삼년이나 지났음에도 자식 하나 보지 못한 며느리가 먼저 화리를 제기했다는 점이었다.화리를 제기하더라도 이는 그들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이제 와서 며느리가 아들과 화리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릴지 몰랐다. 비록 아직까지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택 안 사람들, 특히나 둘째 동서는 매일 자신을 찾아와 얄미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둘째 동서는 그렇게 며느리를 도둑 취급하듯 경계하더니 사실 며느리는 사씨 집안의 재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더 화가 나는 건 이 일로 부군과 시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나무랐으니, 그동안 받은 수모를 계연수에게 화풀이할 작정이었다.무덤덤한 계연수의 얼굴을 보니 임씨는 분노에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녀는 계연수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며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너 우리 집안 재물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며 장부까지 기록하지 않았니. 좋다, 그럼 오늘 장부에 적힌 대로 따져보자꾸나.”“넌 사씨 가문 며느리로 지내는 동안 입는 것, 쓰는 것 모두 우리 집안에서 지급했다. 그러니 하나도 가져갈 수 없어.”이명유는 계연수가 언제까지 자존심을 부릴까 궁금해서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녀는 계연수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몸에 착용하던 장신구와 품질 좋은 의복, 어느 것 하나 사씨 가문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계연수가 과연 그것들을 모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까?사옥현의 시선 또한 계연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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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그는 문득 도찰원 내청에서 심 후작을 독대하던 일이 떠올랐다.심 후작은 화리서 한장을 그의 앞으로 내밀더니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사씨 가문에서 먼저 서약을 어겼으니 심문을 시작하더라도 화리하는 길밖에 없다는 뜻이었다.만약 양가가 합의한다면 이는 양가의 집안일로 처리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정식 심문을 시작하는 경우, 심 후작은 그가 한 일을 상부에 알리게 될 것이다.사옥현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그가 화가 나는 건, 만약 계연수가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절대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날 밤에 심 후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이틀간 그는 밤잠도 자지 않고 왜 계연수와의 사이가 이렇게까지 틀어졌는지 이유를 생각했다.마치 꿈을 꾸다가 갑자기 깼는데 모든 게 바뀐 느낌이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한이불 덮고 자던 부인이 갑자기 그와의 모든 옛 정을 저버리고 홀연히 떠나버린 것 같았다.그는 의자 손잡이를 꽉 잡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이명유가 다급히 다가와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오라버니, 어딜 가시려고요?”사옥현은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명유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차마 이명유에게 화풀이를 할 수 없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서 보고 와야겠다.”말을 마친 그는 이명유의 손을 밀쳐냈다.한편, 계연수가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자신의 물건만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멈들이 앞을 막았다.“혹시 사씨 집안 물건이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 저희가 확인하겠습니다. 그림을 펼치고 상자를 열어주십시오.”용춘은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 울음이 나왔다.예전에 집안에서 지급하던 옷이나 장신구들을 가져가지 말라는 건 그렇다 쳐도 사람을 도둑 취급하면서 모욕을 주다니.계연수가 이 집에 시집을 와서 삼 년 동안 서러움을 참고 견디며 헌신한 모든 것들을 부정한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모멸감을 줄 줄이야.계연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여지고 안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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