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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1화

계연수가 마차에 올라탔을 때, 심서준은 이미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쉬고 있었다.길게 뻗은 몸선은 단정하고도 우아했으며 고개를 살짝 젖힌 채 드러난 얼굴은 준수하면서도 귀하게 빛났다.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연꽃 무늬 청동 등불 아래에서 그의 표정에는 은은한 피로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또렷이 보이지 않을수록 오히려 더 고귀한 기색이 짙어졌다.마차 안은 실로 어두웠다. 어두워서 옷자락의 무늬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계연수의 시선이 탁자 위 등불로 향했다. 등불의 입구가 유난히 좁은 것을 보니, 심서준이 일부러 불을 낮춰 둔 듯했다. 눈을 감고 쉬기 위해서였으리라.계연수가 들어왔을 때에도 심서준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심 대인?”심서준이 쉰 기운이 어린 목소리로 짧게 응했다.“그래. 연수야, 이리 와서 내 곁에 앉거라.”마차 안에는 그의 곁 말고는 앉을 만한 자리조차 없었다.계연수는 문득, 예전에 심서준이 타던 마차는 훨씬 널찍해 양쪽에 사람을 앉힐 수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 마차를 쓰지 않는 것일까.게다가 그의 목소리에는 낮게 깔린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그 탓에 그녀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의 드러난 목울대에 머물렀다가 이내 황급히 거두어졌다.그녀는 단정히 자세를 가다듬고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았다.그러나 막 자리에 앉자마자, 무릎 위에 얹어 두었던 손이 그의 손에 붙잡혔다.그의 검지에 끼워진 옅은 녹빛 반지는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 차가운 감촉이 계연수의 손바닥에 닿자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계연수는 순간 놀라,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심서준의 손은 단단히 그녀를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그녀는 놀람과 당혹이 섞인 눈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불렀다.“심 대인…?”심서준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을 천천히 쓸어내렸다.그녀가 손을 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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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2화

몸이 한층 더 깊이 심서준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그의 쉰 듯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내일 화연에 너를 부른 모양이다. 겁낼 것 없다. 내 일만 마치면 곧장 가겠다.”계연수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짧게 답했다.“예.”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허리를 밀어보려 했다. 너무 단단히 안겨 있어 가슴에는 손이 닿지 않아 겨우 허리 쪽을 밀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살짝 힘을 주었을 뿐인데 심서준의 낮고 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계연수는 그대로 얼어붙듯 움직임을 멈추었다.이내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연수야, 움직이지 말거라.”계연수는 순간 굳어 버렸고 그의 허리에 얹은 손가락마저 어찌할 바를 몰라 허공에 머물렀다.그의 몸은 묵직하게 그녀를 짓눌렀다. 숨이 조금 막힐 듯했지만 그는 그저 그녀를 안은 채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한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등을 부드럽게 눌러 안고 있었다.그의 몸에서는 종이 냄새와 침향, 그리고 은은한 술 향이 섞여 흘러나왔다. 이상하게도 그 향은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마음을 흔들었다.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가운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내일... 내가 없을 때 누가 널 곤란하게 하면 나에게 말하거라. 원래는 네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원치 않았다. 헌데 황명이 내려졌으니, 황후 마마께서 여는 화연에는 갈 수밖에 없겠지.”계연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내일 그 화연은 황후 마마께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심서준은 여전히 쉰 목소리로 낮게 응했다.“그래.”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 가까이 다가갔다.희미하게 풍기는 그녀의 향기를 들이마시듯 머무르며 낮게 덧붙였다.“연수야, 내 말을 잊지 말거라. 내가 널 택했으니 내게는 너뿐이다. 다른 이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무엇을 듣게 되든 나만 믿거라.”차분하면서도 단단한 그 목소리는 묘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계연수는 잠시 멈칫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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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3화

심서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계연수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몸을 바로 세우는 순간, 그의 입술이 스치듯 그녀의 귓가를 지나갔다. 그곳은 유난히 예민한 곳이라 계연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조금 전까지는 그가 취했다고 생각해 마음을 다잡고 있었지만 이렇게 귓가에 그의 입술이 스치고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자 그녀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굳어 버렸다.심서준은 그 반응을 느끼고 소리 없이 웃었다. 만약 그 자리를 물어버린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그는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조금만 더 나아가도 그녀는 놀라 달아나 버릴 테니까.그는 한 손을 마차 벽에 짚고 여전히 취한 듯한 태도를 유지한 채 계연수를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고개를 숙여 뜨거운 숨을 그녀의 귓가에 흩뿌렸다. 그녀의 희고 고운 귓바퀴가 옅은 분홍에서 점점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심서준은 그녀가 아래로 시선을 내려뜬 눈꺼풀이 어쩔 줄 몰라 떨리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았다.마지막으로 그녀의 오뚝한 코끝에 시선이 머물렀다. 참으로 사랑스러웠다.그는 티 나지 않게 그녀를 건드리고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적절한 선에서 멈추며 그녀의 마음까지도 함께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다.오늘 밤, 그녀는 분명 이 순간을 떠올리며 뒤척이게 될 것이다. 이 애매한 거리감과 닿을 듯 말 듯한 기운 때문에.그는 계연수가 자신의 몸과 손길을 조금씩 갈망하게 되기를 바랐다.이쯤이면 충분하다.심서준은 몸을 곧게 세우며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었다.그의 시선이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의 품에서 벗어나 아직도 어딘가 멍한 눈을 하고 있는 그녀를 향했다.그녀의 뺨에 은은하게 번진 붉은 기색을 바라보자 깊은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목울대가 조용히 움직였다.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오자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마치 그녀가 안심하고 자신을 바라보도록 허락하듯.조금 더 오래 자신의 얼굴을 보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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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4화

문하는 계연수를 잠시 따라오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계 아가씨, 염려 마십시오. 저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혹 일이 생긴다면 나으리께서 바로 오실 겁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행궁의 정원에는 수많은 귀족 규수들이 오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모습이 마치 봄날 한꺼번에 피어난 꽃들처럼 서로의 아름다움을 겨루고 있는 듯했다.계연수는 안내를 받아 한 누각 앞에 이르렀다. 고개를 살짝 들자, 그 위에 앉아 있는 황후가 보였다. 그 곁에는 또 여러 젊은 규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높은 자리에 앉은 황후는 시선을 낮추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심서준과도 닮은, 타고난 고귀함이 담겨 있었다.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저 멀리 떨어진 듯한 거리감과 자연스러운 위엄.계연수는 그 시선을 느끼고 잠시 눈을 마주쳤지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 한 번의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다.계연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궁인들의 안내를 따라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누각 위로 올랐다.누각 안에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지는 않았다. 황후 곁에는 젊은 규수들과 단정하면서도 품위 있는 두 명의 귀부인이 자리하고 있었다.그 두 사람을 계연수는 알고 있었다.한 사람은 영청후부의 후작부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복안공주였다.영청 후작은 태후의 친정 쪽 조카로 비록 손에 쥔 실권은 크지 않지만 광대한 전답과 장원으로 이미 부귀를 누리고 있는 집안이었다.복안공주는 여 태비의 딸로 평소 황후와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기에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계연수가 올라서자마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탐색하듯 바라보는 눈빛도 있었고 다른 뜻을 품은 시선도 있었다.계연수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차분한 태도로 다가가 하나하나 예를 올렸다.복안공주는 계연수를 알아보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이 아가씨는 어느 집안 자제냐?”말을 하면서도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이 자리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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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5화

그 목소리는 무척 고왔다. 계연수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연분홍과 흰빛이 어우러진 보상문 깃달린 치마를 입은 한 여인이 서 있었다.피부는 눈처럼 희고, 이목구비는 단아하면서도 고아했으며, 몸에는 은은하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눈길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알려주었다.태후의 외종손녀, 명창군군라 했다. 계연수는 서둘러 예를 올리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자리에 앉자마자 손보경이 계연수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웃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규수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다.계연수는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았다.이곳에 앉은 이들은 황실과 가까운 집안의 딸이거나 황후가 특별히 아끼는 규수이거나 혹은 심가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었다.곁에는 심소연도 앉아 있었고 지난번 심부 시회에서 보았던 이수옥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계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사람씩 예를 갖추었다.황후가 계연수를 향해 말했다.“보경은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예와 도리에 밝은 아이다. 어느정도 지내다 보면 너희 둘이 가장 잘 통할 것이다.”계연수는 그 말에 공손히 답했다.잠시 뒤, 황후는 사람을 시켜 한 화분을 들여오게 했다.활짝 핀 요대옥봉 국화였다.황후는 웃으며 말했다.“이 국화는 보경의 부친이 선주에서 보내온 이종이다. 비록 가을꽃이지만 봄에도 이처럼 화사하게 피었으니 오늘 화연에 한층 풍류를 더해주는구나.”그리고 손보경을 보며 덧붙였다.“보경, 네 아버지가 보내온 꽃이니 네가 시 한 수를 붙여 보거라.”손보경은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외숙모께서 이렇게까지 추켜세워 주시니, 감히 한 번 지어보겠습니다. 다만, 나중에 웃지는 마세요.”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예전에 들은 구절이 있습니다. ‘차라리 가지 끝에서 향기를 안고 죽을지언정’이라는 구절이었죠. 이 국화는 봄에 피어나 서리의 기운을 보지 못했으니 이 구절이 도리어 더 쓸쓸하게 느껴집니다.”그녀는 두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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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6화

계연수는 봉녕군주가 자신을 향해 보내는 시선을 느꼈다.그녀는 여전히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살짝 곁눈질로 시선을 돌려 봉녕군주와 눈을 마주쳤다.그 눈빛 속에는 노골적인 교만과 업신여김이 담겨 있었는데 조금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계연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곁에 앉은 손보경을 힐끗 바라보며 어렴풋이 상황을 짐작해냈다.이들은 모두 태후 쪽 사람들이었다.그때, 누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군주께서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신가 보네요? 저희도 좀 재미있게 들어봅시다.”봉녕군주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말해도 좋지요. 다만 재미로만 듣고 누구인지 맞춰보진 마세요.”손보경이 봉녕군주를 보며 말했다.“그만두는 게 좋겠다.”봉녕군주는 웃으며 답했다.“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니 괜찮아요.”그러고는 입을 열었다.“얼마 전 시회에 참석했는데, 어떤 여자가 왔어요. 서향문벌 출신이라 모두들 시를 잘 지을 거라 기대했지요. 헌데그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웃겨서 배꼽 잡을 일이었답니다.”사람들의 호기심이 단번에 끌렸다.“무슨 일이었습니까?”계연수는 조용히 봉녕군주를 바라보았다.봉녕군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 여자는 시문이 평범한 것도 모자라 자기 여동생을 도와서 부정을 저질렀어요. 헌데 정작 그 여동생이 실력이 없어서 시를 잇지도 못하고 결국 울면서 도망쳤죠. 완전히 망신이었어요.”곁에 앉아 있던 심소연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슬쩍 옆에 앉은 이수옥을 바라보았다.이 일은 원래 셋째 오라버니가 밖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봉녕군주와 친하긴 했지만 이 이야기를 밖에 한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수옥 또한 봉녕군주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분명 그녀가 전한 것이었다.이수옥은 심소연의 시선을 느끼고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 낮게 속삭였다.“언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런 사람 체면까지 살려줄 필요가 있나요?”심소연은 입술을 다물고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다음부터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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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7화

그때, 장내가 조용해졌다.계연수는 이수옥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그리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남의 시선이야 제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떠도는 이야기로는 진실과 거짓을 가리기 어려운 법이지요. 같은 여자로서 저 또한 다른 여인을 함부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이수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계연수가 이렇게 태연할 줄은 몰랐다. 조금의 당황도 없이 오히려 자신을 향해 ‘소문만 듣고 판단한다’며 돌려 비꼰 셈이었다.그때 한 규수가 입을 열었다.“계 아가씨 말씀도 틀리지 않네요. 떠도는 이야기로 진실을 알 수 없는데 어찌 한 여인의 명성을 쉽게 깎아내릴 수 있겠습니까?”이수옥은 이를 악물고 더 말하지 못했다.손보경은 이수옥을 한 번 보고 곧 황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오늘 화연을 맞아 그저 꽃만 감상하기엔 다소 아쉬운 듯합니다. 차라리 꽃 이름으로 비화령(飞花令: 정해진 글자나 주제를 넣어 시를 이어가는 전통 시 짓기 놀이)을 하는 건 어떨까요? 꽃을 주제로 시를 잇되, 잇지 못하면 술 한 잔 벌로 받는 식으로 말입니다. 조금 더 흥을 더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황후는 손보경과 이수옥을 한 번 바라보았다.오늘 계연수를 부른 데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이수옥이 아직 계연수의 신분을 모르고 있었다 해도 만약 심서준이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계연수는 곧 심가 사람이 된다. 심가 사람을 이 자리에서 모욕한다는 것은 곧 심가를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손보경의 제안에 담긴 뜻 또한 황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계연수를 보며 물었다.“네 생각은 어떠하냐.”이 한마디에는 계연수를 지나치게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해도 동생이 좋아하고, 어떻게든 맞이하려 하는 사람이었으니까.계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답했다.“명창군군의 제안이 좋습니다. 흥을 더하기에도 알맞을 듯합니다.”황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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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8화

이때까지 시를 잇지 못한 이는 이제 계연수와 손보경 둘뿐이었다.손보경이 미소를 머금고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아가씨께서 먼저 하시겠습니까?”계연수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괜찮습니다. 군군께서 먼저 하시지요.”손보경은 계연수를 깊이 바라보았다.자신의 신분으로는 애초에 누군가를 깔보는 일 따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계연수를 보니 도무지 눈에 차지 않았다.진짜 실력도 없이 끝까지 버티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더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아까 봉녕군주의 시 속에 담긴 비꼼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건 그녀가 스스로 택한 길이었으니까.손보경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옥산이 무너져 눈이 옥경에 쏟아지고, 난초밭을 옮겨 심어 저녁 하늘 아래 맑아지네. 따뜻한 계절을 버리고 홀로 서 있다 놀라지 말라, 세상에 맑게 깨어 있는 이는 드문 법이니.”그 시가 끝나자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옥산이 무너져 눈이 옥경에 쏟아진다’는 첫 구절은 기세가 웅장했고 난초밭을 옮겨 심었다는 구절은 굴원의 향초 고사를 은근히 끌어와 격조 또한 높았다.순식간에 앞서 나온 모든 시를 압도해버렸다. 복안공주도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군군은 정말,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인재로구나.”손보경은 끝까지 단정하고 고요한 얼굴로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이미 이런 찬사를 익숙하게 받아온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복안공주에게 예를 갖춘 뒤, 다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아가씨께서는 준비되셨습니까?”계연수는 시선을 내려 누각 밖에 핀 옥란화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옥빛 눈옷 입고도 헛되이 귀하다 하나, 바람 한 번 스치면 속의 티끌 드러나네. 진흙에 떨어져도 겉모습은 여전히 고운 체, 동군마저 봄이라 착각해 비웃게 하구나. 삼천 세계 밖에 어른거리는 정묘한 그림자, 열두 난간마다 등불 하나씩 켜지듯, 동풍은 끝내 그 고단함 헤아리지 못하고, 한 그루 나무마다 슬픔과 기쁨 제각각이로다.”계연수가 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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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9화

계정윤은 본래 몹시 준수한 인물이었다.그 준수함은 지나칠 만큼 화려했고 몸에는 한 줄기 거침없는 기세까지 배어 있었다.그는 황제의 장인의 총애를 받던 제자였고 황제 역시 한때 그를 깊이 신뢰했었다.그러나 그해의 일. 요서(辽西: 지역) 전선이 연이어 무너져 내리던 때, 황제는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그날 밤, 계정윤은 황제의 전각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탄핵 상소문을 받들고 있었다.그 안에 담긴 내용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군중에는 실제로 수많은 세가 자제들이 끼어 있었고 그중에는 황제를 지지해 온 공신의 후손들도 있었다. 그들은 선대의 공을 믿고 공을 탐해 무리하게 나아가며 지휘를 따르지 않았고 결국 큰 화를 불러왔다. 심지어 군량을 빼돌리고 전공을 조작해 보고하는 자들까지 있었다.하지만 그때 황제는 즉위한 지 겨우 다섯 해째였다.사람들의 마음을 아직 완전히 모으지 못한 상황에서 계정윤이 탄핵한 인물은 너무도 많았다.게다가 당시 요서의 형세는 이미 위태로웠다.그들을 모두 처벌한다면 요서는 더욱 공백이 생기고 조정 또한 큰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백성들의 원망은 이미 높았고 전쟁은 촉박했으며 군중의 많은 이들이 여전히 황제를 지지하던 자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쉽게 손을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설령 처벌을 한다 해도 그때는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잘못은 계정윤에게 있지 않았지만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그의 죄를 확정지어 흔들리던 민심을 달래고 그 일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인심을 거둬들이며 명분을 만들어 요서의 인물들을 교체해야 했다.그렇게 계정윤은 희생되었다.그런데 지금, 심서준은 계정윤의 딸을 부인으로 맞으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경공주마저 계연수를 크게 칭찬하고 있었다.황제는 시선을 거두며 심서준을 한 번 바라보았다.“화리한 여인이다. 네 눈에는 그 여자가 보경보다 더 나으냐.”심서준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신의 마음에 있어 한 여인을 좋아하는 데 과거의 혼인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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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0화

그때, 봉녕군주가 나서서 말했다.이미 모두 시를 이었으니, 그중 가장 뛰어난 두 사람을 가리고 나머지는 벌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황후는 계연수를 깊이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각자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시를 하나씩 고르게 했다.한 차례가 지나고 나니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은 이는 손보경과 봉녕군주였다.계연수의 눈빛은 살짝 가라앉았다.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 조금도 불공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이 자리에서 선택되는 것은 재능이 아니었으니까.벌주가 눈앞에 놓였을 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잔을 들어 마셨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보경의 얼굴에는 기쁨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이내 꽃으로 만든 궁중 다과들이 차려졌다.황후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맛보고 담소를 나누라 말한 뒤, 복안공주와 영청 후작부인과 함께 안쪽의 아담한 방으로 들어가 차를 마셨다.규수들만 남겨 좀 더 편히 이야기 나누게 하려는 뜻이었다.황후가 자리를 뜨자 분위기는 확실히 한층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 활기는 계연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이 자리에 모인 규수들은 아직 혼인하지 않았고 서로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계연수는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있었다.이수옥은 봉녕군주의 부추김을 받아 은근히 앞장서서 배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계연수에게 말을 걸려 하면 곧바로 다른 이들이 끌어내어 막아버렸다.그들은 계연수가 곤란해지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를 웃음거리로 삼고 싶어 했다.계연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자신을 배척하고 비웃는 이들과 굳이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난간가에 앉아 꽃을 바라보며 혼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편안했다.봉녕군주는 계연수가 조금도 곤란해하지 않고 오히려 한가롭게 꽃을 감상하며 다과까지 즐기는 모습을 보고 얼굴빛이 살짝 굳었다.하지만 이제는 더 나설 수 없었다.그녀는 손보경을 끌어당겨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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