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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의 모든 챕터: 챕터 581 - 챕터 590

725 챕터

제581화

심서준은 계연수의 말을 듣고 그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가늘게 눈을 접은 채 졸음에 잠긴 얼굴을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맡고 싶지 않느냐?”턱을 쥔 손끝에 힘이 조금 들어가 있었다. 계연수는 나른하게 눈을 들어 올리며 흐릿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싫다고 하면 안 해도 되는 건가요?”심서준의 엄지가 천천히 계연수의 뺨을 쓸었다.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마저 한층 잠겨 들었다.“지금 당장은 마음이 없다면, 나중에 맡아도 된다.”그 말을 들은 계연수는 그제야 심서준의 뜻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지금 미루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맡게 된다는 뜻이었다.문득 지금 와서 손을 떼 버린다면 심씨 노부인이 또 자신을 못마땅해할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배우는 게 낫겠네요. 폐하께서 맡기신 일부터 마무리한 뒤에 살림을 배우기로 형수님과 이야기해 뒀어요. 게다가 지금 당장 부엌 일을 넘겨받기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고요.”심서준은 계연수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그녀의 느슨하고 힘 빠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꼭 계연수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고 싶은 건 아니었다.다만 그는 본래 심가의 종손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었고, 훗날 분가하게 되면 계연수 역시 안채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아직 그는 계연수에게 자신이 가진 사재가 얼마나 되는지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심가가 지닌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만약 알게 된다면, 결국 직접 돌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될 터였다.지금은 그저 천천히 익숙해지게 하는 단계일 뿐이었다. 그녀가 모든 일에 익숙해지면, 그때는 자신이 가진 사재까지 전부 그녀 손에 맡길 생각이었다.심서준의 사재는 대부분 후작에 봉해진 뒤 황제가 내린 하사품과 전답, 장원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심가 장부에 속한 재산이 아니었고, 그가 몇 해 동안 손수 굴리며 이미 몇 배로 불려 놓은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언젠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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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2화

그는 아침마다 몸단장을 하는 이 짧은 시간마저도 이상하리만치 따스하게 느껴졌다.무엇보다 계연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자잘한 표정들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심서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는 서재도 네가 쓰고 싶을 때 쓰거라. 네 물건도 들여놔도 되고.”계연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어젯밤 보니까 안에 문서가 엄청 많던데요. 전부 후작의 물건 아닙니까? 괜히 제가 건드렸다가 어지럽히면 어떡합니까?”심서준은 그녀 얼굴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괜찮다. 서안도 넓으니 내 물건만 조금 정리해서 한쪽에 두고, 네 물건도 같이 놓으면 된다.”계연수는 조금 조심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제가 직접 정리해도 되는 건가요?”그녀는 심서준의 물건들이 중요한 것들일 테니 아무나 함부로 손대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심서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내 서재에는 청소하는 하인들 말고는 들어오지 않는다.”그제야 계연수는 뜻을 이해했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심서준이 나간 뒤에야 계연수도 세면과 몸단장을 하러 갔다.화장대 앞에 앉아 있자 방 어멈이 여러 장의 첩자를 들고 들어와 계연수 손에 올려두었다.모두 지난 한 달 사이 들어온 초대장이었다. 그동안 계연수는 입궁도 했고, 이후 풍한까지 앓으며 몸을 추스르고 있었기에 방 어멈도 계속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는 또 일이 많아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이제야 그녀가 단장하는 틈을 타 가져온 것이었다.계연수는 하나씩 펼쳐 보았다. 봄 연회니 다회니 하는 초대부터, 인연을 맺고 싶다는 뜻을 담은 것까지, 한 달 남짓 사이 쌓인 것만 해도 열 장이 넘었다.그중에는 사금희가 보낸 첩자도 몇 장 섞여 있었다.계연수는 그걸 보고는 피식 웃더니 용춘에게 넘겨주며 태워 버리라 했다.남은 것들을 다시 훑어보던 그녀는 한 장만 따로 손에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옆으로 밀어 두었다.대부분 교분을 맺기 위한 자리들이었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워낙 바빴고 굳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 마음도 없었다.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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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3화

최씨는 백씨 곁을 따라 밖으로 나온 뒤, 한참을 걸어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우리가 문안 드리러 오면 노부인께서 어머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잖아요. 웃고 떠들면서 여러 도련님들 이야기도 물으시고, 아가씨들 규방 예절이나 혼사 이야기도 챙기시고요. 심지어 우리 복이도 가끔 품에 안고 좋아하셨는데 오숙모께서 들어오신 뒤로는 아침마다 어머님과 별로 이야기도 안 나누시고, 저희까지 전부 내보내 버리십니다. 요 며칠은 오숙모만 따로 남겨 두시던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백씨 표정은 이미 좋지 않았다. 그녀는 최씨를 힐끗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노부인께서 네 오숙모를 궁에 들여보내 예법을 배우게 한 게, 정말 예법만 배우라고 그런 줄 아느냐? 내가 집안 다스리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까 걱정되니, 아예 궁으로 보내 황후 마마께 직접 배우게 한 거다. 덤으로 궁 안에서 견문까지 넓히게 하고. 밖에서는 다들 그녀가 황후 마마 곁에서 지냈다는 것만 보고 있지 않느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궁 안에 들여 매일 눈앞에 두겠느냐?”그러고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노부인께서 편애하실 수는 있다. 헌데 저렇게까지 한쪽만 감싸니, 사람 속이 어떻게 편하겠느냐.”최씨는 백씨 안색이 더욱 어두워진 걸 보고 다시 조심스레 달랬다.“제가 보기엔 오숙모께서는 말수도 적고 조용한 분이라, 꼭 노부인의 총애를 받는 것 같지도 않던데요. 정말 집안 살림 솜씨를 따지자면, 분명 어머님만 못할 거예요.”백씨 얼굴이 한층 싸늘해졌다.“못하면 또 어떠냐. 노부인께서 기어이 저 자리에 밀어 올리려 하시는데. 나도 한번 두고 보마. 과연 그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말을 마친 그녀는 최씨 품에 안겨 있던 돌 지난 복이를 받아 품에 안고 한동안 웃으며 달래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담담히 덧붙였다.“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한편 계연수는 심씨 노부인 처소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그녀의 얼굴만 봐도, 또 한 차례 난항을 겪어야 하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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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4화

하나하나 이어지는 추궁에, 계연수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지 않았더라면 거의 받아내지 못할 뻔했다.그녀가 서둘러 부엌 일을 맡지 않겠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부엌에서 막 일이 터진 직후라 내쳐지거나 벌을 받은 사람이 가장 많았고, 그만큼 원망도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만 시간을 두어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면, 그 뒤에는 무엇이든 정리하기 수월해질 터였다.하지만 심씨 노부인은 강단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괜히 조목조목 따져 맞서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더구나 윗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지도 계연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계연수는 고개를 숙인 채 순하고 얌전한 모습을 지어 보였다. 심씨 노부인이 마음껏 불만을 쏟아낸 뒤에야,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부엌 일을 맡기 싫어 핑계를 댄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분부인지라 감히 소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양쪽 일을 한꺼번에 챙기다 모두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두려워 형수님께 며칠만 미루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우선은 폐하께서 맡기신 일을 끝마친 뒤에야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제가 일부러 태만히 군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이제 막 일을 넘겨받은 터라, 제대로 해내어 어머님을 흡족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또 이런 일은 마땅히 후작께서 판단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일을 후작께 말씀드린 것이고, 그저 후작의 뜻을 여쭙고자 했을 뿐입니다. 다만 후작께서 어머님께까지 이 일을 말씀드릴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말을 마친 계연수는 더욱 몸을 낮추었다. 고개를 살며시 숙인 채, 간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이번 일은 전부 제가 세심하지 못했던 탓입니다. 비록 폐하의 분부가 있었다 해도, 마땅히 집안일을 먼저 살폈어야 했습니다. 잠시 후에는 형수님을 찾아가 부엌 일을 배우겠습니다.”심씨 노부인은 계연수의 순순한 태도를 바라보았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나긋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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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본래는 계연수를 한 번 몰아세워 단단히 눌러 둘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트집 잡을 구실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심씨 노부인이 품고 있던 계연수에 대한 인상도 조금은 나아졌다.사실 그동안 지켜본 계연수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몸을 낮추고 함부로 나서지 않았으며, 무슨 일이든 꼭 알맞게 처리해 냈다. 지난번 부엌 하인들을 심문하던 때만 해도 심씨 노부인은 계연수에게 그런 수완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제야 대장공주가 왜 그토록 그녀를 칭찬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자기 아들이 저토록 계연수를 아끼고 신경 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심씨 노부인의 마음속 응어리였다.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담담한 기색만 어려 있었다. 만족스러운지 아닌지, 도무지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마침내 식사 시중이 끝나고서야 계연수는 조용히 숨을 돌리며 물러날 수 있었다.송학원으로 돌아오자 방 어멈이 곁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계연수가 노부인 처소에서 제대로 먹지 못했으리라 짐작하고는, 연지빛 거위 간 요리를 한 접시 더 내오게 해 허기를 달래주었다.심씨 노부인은 원래부터 규율과 예법이 몹시 엄격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존귀하게 살아왔고,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처럼 자라 자연스레 남의 시중과 받듦에 익숙해져 있었다.게다가 그녀는 당시 조정에서 가장 명망 높던 손 태부의 장녀였다. 청류 명문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귀족 집안 출신이라 집안 자체가 예법을 무엇보다 중히 여겼다. 손 태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선황제로부터 ‘문정’이라는 시호까지 받았으니, 이는 수많은 문인들이 평생을 바라 마지않는 영예였다.지금에 이르러서도 손씨 가문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고, 청류 문인들 사이에서는 대대로 이름난 명문이었다. 그만큼 규율 또한 엄격했다.계연수는 이런 사실을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심씨 노부인의 까다로운 규율에 대해서도 딱히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다만 그녀는 백씨를 진심으로 대단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모시기 까다로운 심씨 노부인 곁에서 수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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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6화

심서준이 몸을 돌려 나가자 방 어멈이 낮은 목소리로 오늘 계연수가 또 노부인에게 따로 불려 남았던 일을 전했다. 다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그녀 역시 밖으로 물러나 있었기에 듣지 못했다고 했다.방 어멈은 원래 심서준의 분부를 받아 계연수 곁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었고, 자연스레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도 함께 보고하곤 했다.심서준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대답한 뒤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을 마친 뒤에도 그는 오늘 밤 다시 서재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시켜 계연수가 좋아하는 다과 두 접시와 따뜻하게 데운 앵두주 한 병을 준비하게 했다.방 어멈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심서준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다가와 그의 긴 머리카락을 닦아 주었다.수년 동안 심서준을 모셔 온 터라 이미 익숙한 일이었고, 심서준 역시 방 어멈을 쓰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어린 하녀들이 가까이 붙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하지만 오늘 방 어멈이 수건을 들고 다가오자, 심서준은 문득 서재 안의 사람을 떠올렸다.물론 계연수를 방해하지 말라고 직접 명한 건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은 묘하게 편치 않았다.정말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자신이 돌아온 걸 분명 알아차렸을 텐데.갓 혼인한 심서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부드러운 기대감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바쁜 와중에도 문득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감정.자신의 뜰 안에 언제나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답답하고 끝없는 공무 속에서도 그 생각 하나만으로 희미한 기쁨이 스며들곤 했다.예전의 그는 공무 외에는 동료들의 사적인 이야기에 끼어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점심에는 웬일인지 회랑 아래 부하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잠시 들렀다.멀리서 한 부하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자기 신발을 가리키며, 부인이 직접 만들어 준 것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심서준은 마치 홀린 듯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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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거의 십 년 만이었다. 후작이 자신을 두고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 것이.방 어멈은 서러움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다시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심서준이 또 입을 열었다.“오늘 많이 피곤한가 보군, 어멈.”방 어멈은 화들짝 놀라 급히 다가와 사죄하려 했다. 하지만 심서준이 먼저 그녀를 붙잡아 세우며 낮게 말했다.“요즘 고생이 많았으니 오늘은 일찍 쉬거라.”방 어멈은 순간 멍하니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화가 난 것은 아닌 듯했다.생각해 보면 후작은 늘 그녀에게 각별한 체면을 세워 주었지, 한 번도 박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후작의 유모가 된 뒤로는, 아들의 노비 신분까지 벗겨 주고 도찰원에 조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손자에게는 심가의 족학에서 글을 배울 기회까지 내렸다.그야말로 하늘 같은 은혜였다.그런데도 방 어멈의 마음속 죄책감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아직 반쯤 젖은 채 길게 흩어진 심서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저는 후작을 모시는 걸 힘들다 여긴 적이 없습니다.”심서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늘한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들리더니 방 어멈을 향했다.“어멈도 가끔은 쉬어야 한다.”그 눈빛을 마주한 방 어멈은 순간 멈칫했다.오랫동안 심서준을 모셔 온 그녀가 어찌 그 뜻을 모르겠는가.후작은 늘 그녀에게 예우를 다했지만, 어릴 적부터 성정만큼은 한결같았다. 말수가 적고 냉담했으나,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고, 심지어 돌아가신 심 수보조차도 그 뜻을 꺾지 못했다.방 어멈은 그제야 후작의 속뜻을 깨달았다.더는 감히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했다. 그저 아직도 젖은 머리카락이 마음에 걸려 걱정스러운 눈빛만 남긴 채 조용히 물러났다.*그 시각, 서재 안의 계연수는 막 가장 마음에 드는 초본 하나를 완성한 참이었다. 내일이면 이제 먹선을 딸 수 있을 듯했다.오후 내내 수없이 많은 초본을 그렸지만 번번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런데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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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심서준은 정말이지 온몸이 요사스럽도록 눈길을 끄는 사내였다. 특히 반쯤 느슨하게 풀어진 옷깃 아래 드러난 가슴께는 더더욱 그랬다.계연수는 황급히 시선을 그의 헐거운 옷깃에서 떼어 내고는 서둘러 물었다.“머리는 아무도 말려드리지 않았나요?”심서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방 어멈이 몸져누웠다. 나는 원래 하녀들 손 타는 걸 좋아하지 않고.”그 말을 들은 계연수는 한쪽에 놓인 비단 수건을 발견하고 얼른 집어 들었다.“그럼 제가 머리를 말려드릴게요.”심서준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이 계연수가 다가온 뒤 가느다란 허리춤 위를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잠시 후, 낮게 응답했다.“그래.”계연수는 그의 뒤로 다가섰다가, 심서준의 옷 등이 이미 커다랗게 젖어 있는 걸 발견했다. 검은 천 위로 짙은 물자국이 넓게 번져 있었다.그녀는 수건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닦아 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옷까지 다 젖었네요. 새 옷 가져오라고 할게요.”심서준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음.”계연수는 밖으로 나가 하녀에게 옷을 가져오라 이른 뒤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심서준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심장이 괜히 움찔 내려앉았다.그가 대체 자신을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손발을 어디에 둬야할 지 모를 것만 기분만 들었다.계연수는 다시 마른 수건으로 바꿔 들고 그의 뒤에 섰다.그때 심서준이 물었다.“그림은 다 그렸느냐?”계연수는 숨김없이 답했다.“아직요. 초본만 끝냈어요.”심서준 손끝에는 백옥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안의 따뜻한 앵두주가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술빛 사이로, 강한 소유욕이 서려 있는 그의 눈동자가 어른거렸다.잠시 뒤 바깥에 있던 추운이 옷을 들고 들어왔다. 검은빛 학무늬 장포였다.계연수는 원래 추운에게 시중을 맡기려 했지만, 추운은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물러나 버렸다. 결국 그녀가 직접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손끝이 심서준 어깨 피부에 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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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9화

심서준은 손에 들고 있던 앵두주를 계연수에게 내밀었다.“따뜻하게 데운 거다. 몸에도 무리 없고.”계연수는 원래 과실주를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겨울밤 잠들기 전 한 모금 정도만 마셨다. 잠이 잘 오기도 했고, 그중에서도 유독 앵두주를 좋아하긴 했다. 다만 심서준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사실 지금은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심서준의 시선이 조용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걸 보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머금었다.입안 가득 퍼지는 짙은 술향. 처음에는 은은한 신맛과 떫은 기운이 감돌다가, 곧 부드럽고 길게 이어지는 옅은 단맛이 혀끝에 남았다.심서준은 그녀가 딱 한 모금만 마시는 걸 보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입에 안 맞는 것이냐?”계연수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심서준은 눈앞의 촉촉하게 물기 어린 살구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몸은 아직 아픈 것이냐?”계연수는 잠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아프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애매했다. 뼈마디까지 욱신거리던 느낌은 많이 가셨지만, 조금만 힘이 들어가도 아직은 은근히 아팠다.심서준은 그녀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또 물었다.“술은 맛있고?”“맛있어요.”“탁자 위 다과도 네가 먹으라고 준비해 둔 거다.”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내리깔고 손등으로 이마를 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흔히 여자 마음은 알 수 없다고들 하지만, 계연수는 심서준 마음이야말로 여자 천 명보다 더 알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이마를 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 늘어진 머리카락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본래도 냉담하고 아름다운 얼굴인데, 지금은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선인 같았다. 그제야 겨우 사람다운 온기가 조금 묻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계연수는 눈앞의 다과 두 접시를 내려다보았다.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심서준이 자신에게 먹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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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계연수는 황급히 부정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애초에 품어선 안 될 생각들을 억지로 끊어 내고 싶었다. 그런데 심서준이 몇 마디 말만 던졌을 뿐인데도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려 버렸다.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이제는 그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마음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후작께서 아까 말씀하신… 작은 걸 버리고 큰 흐름을 살리는 수를 어떻게 두는 건지 생각하고 있었어요.”심서준은 천천히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짙게 가라앉은 눈빛이 그녀를 붙들었다.“답은 찾았느냐?”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에 계연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처럼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아직은요…”심서준은 그녀 얼굴 위로 천천히 번져 가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았다.은근히 사람을 홀리는 눈빛도, 그의 소맷자락을 붙든 손가락이 조금씩 움켜쥐어지는 움직임도, 전부 그녀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그녀 역시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심서준은 이미 충분히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고 느꼈다. 그러니 더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그는 마침내 그녀 바람대로 향기롭고 부드러운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품 안의 사람은 조금의 저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긴 채 천천히 나한탑 위로 눕혀졌다.작은 탁자는 한쪽으로 밀려나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계연수는 정신이 몽롱했다.그녀는 심서준 옷깃을 꼭 움켜쥔 채 흐릿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이미 물기 어린 색과 아찔한 흔들림이 겹겹이 번져 있었다.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채, 그녀는 심서준을 한 걸음씩 무너뜨리고 있었다.심서준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계연수 몸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본능처럼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그녀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분명 그의 입맞춤에 응하면서도, 옷깃 위에 올려 둔 손끝으로는 가볍게 밀어내고 있었다.심서준은 그래도 그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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