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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211 - Chapter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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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1화

김태하는 칠흑 같은 두 눈으로 김무언을 빤히 쳐다봤다. 말끝에 담긴 압박감은 아버지인 김무언조차 압도할 정도였다.“뭐라고?”김무언이 정색하며 묻더니 돌연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어릴 적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늘 서먹했다. 하지만 김태하는 천성적으로 장유유서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아무리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어른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실례를 범하진 않았다.하물며 자신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태하 씨, 그만해...”강지현은 그가 아버지와 충돌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김태하의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그러니 더 신경 쓰지 마세요. 시간이 늦었으니 지현이랑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김태하는 아버지를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강지현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태하야!”김무언의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강지현이 뒤를 돌아보려 하자 품에 꼭 끌어안고 걸음을 재촉했다.이 광경을 지켜보던 지순옥이 얼른 은주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에 은주희가 황급히 김무언의 팔을 붙잡았다.“무언 씨, 애들 일은 이쯤 해요.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버릇없는 것들! 결혼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강지현 쟤가 집안의 화근이야, 화근!”김무언은 김태하에게 받은 화풀이를 고스란히 강지현에게 돌리며 은주희를 뿌리치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한편 김태하에게 이끌려 김씨 저택 밖으로 나온 강지현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태하 씨, 아버님도 다 당신 생각해서 그러신 건데 우리가 이렇게 나와버리면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아니! 절대 걱정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야. 아버지는 내 생각 따위 안중에도 없고, 그저 본인이 정해둔 원칙만이 중요한 사람이야.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랑만 잘 지내면 돼.”김태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쓸쓸함을 강지현은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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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깊은 밤, 실내에 불이 다 꺼지고 통유리창의 커튼 틈새로 도시의 희미한 불빛만이 새어 들어왔다.강지현은 침대에 누워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는데 등 뒤로 김태하의 맑고 시원한 숨결이 느껴지며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잠이 안 와?”강지현은 돌아보지 않고 나지막이 물었다.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김태하는 이미 손님방으로 향한 뒤였다. 방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그가 잠들었겠거니 생각했었다.“응. 널 안고 자고 싶어.”김태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나른하게 깔려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덤덤한 어조였지만 강지현은 그 속에 묻어난 은근한 응석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오늘 나 지켜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아버님께 그런 말까지 하고... 너한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다 알아.”김태하는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우리 사이에 고맙단 말은 하지 말자.”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씁쓸함이 묻어났다.“근데 오늘은... 진짜 마음 안 좋더라.”“나 때문에?”강지현의 마음이 살짝 내려앉았다. 이 남자가 여전히 신경 쓰는 것일까?“네가 그 수모를 겪을 때 난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잖아. 그 생각만 하면...”그는 무언가 덧붙이려 했지만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듯 잠깐 말을 멈췄다.“마음이 너무 괴로워. 그 시간을 네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널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다 지난 일이야.”남자의 말에 강지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김태하의 턱에 콧등을 살짝 스치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이제 내 앞에 네가 있잖아.”“지나간 일이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니잖아.”김태하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으며 억눌린 감정을 드러냈다.“네가 너무 안쓰러워.”이 한마디를 그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내뱉었다.강지현의 가슴 속으로 아릿하면서도 뜨거운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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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태하 씨...”강지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버리고 있음을 느꼈다.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다시는 사랑 따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김태하는 예외였다.그는 너무나도 따뜻했고, 그래서 그의 곁이라면 훗날 상처를 입게 된다 해도 기꺼이 진심을 내어주고 싶었다....다음날, 동틀 무렵, 강지현은 김태하의 입맞춤에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 김태하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채로 침대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일어나. 오늘 나랑 갈 데 있어.”“어디?”강지현이 머리맡의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고작 아침 6시 30분이었다.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올려다보자 한없이 차갑던 남자의 얼굴이 아침 햇살을 머금고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김태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 뵈러 가.”강지현은 순간 멍해졌다.김태하의 어머니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건 그에게 있어 마음 깊은 곳의 상처이자 금기였다.갑자기 그녀에게 먼저 어머니를 뵈러 가자고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강지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꽃다발을 예약했다. 어머님의 취향을 물으며 이것저것 더 준비할 것은 없는지 묻는 그녀에게 김태하는 그저 손을 꼭 잡아주며 대답했다.“더 준비할 거 없어. 너만 봐도 엄마가 엄청 좋아하실 거야.”한 시간 뒤, 차는 교외의 묘지에 도착했다.가는 내내 김태하는 별말 없이 그녀의 손만 잡고 있었다.묘지에 가까워질수록 그를 감싸던 서늘한 기운이 잦아들고 대신 보기 드문 쓸쓸함이 묻어났다.강지현은 조용히 그의 곁을 지키며 그 침묵을 함께 나누었다.김태하는 그녀가 가져온 꽃을 비석 앞에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비석 위의 얇은 먼지를 쓸어내렸다.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묘지는 고요했다.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조심스럽게 비석을 어루만졌다. 마치 긴 잠에 빠진 이를 깨울까 두려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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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그리고 이렇게 훌륭하고 뛰어난 아들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이 말은 김태하의 내면에 가장 깊이 박혀 있던 곳을 건드린 모양이었다.그는 순식간에 강지현의 손을 꽉 쥐어서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김태하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이름 뒤에는 늘 ‘불운’이라는 낙인이 따라붙었다.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더 행복했을 거라고, 네 존재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라고.김태하는 그 잔인한 속삭임 속에서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며 끝없는 절망의 늪으로 침잠했다.밤마다 찾아오는 그 자학적인 생각들은 지독한 악마처럼 그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그런데 지금 강지현은 고맙다고 말하고 있다.연민도, 안타까움도 아닌 진정한 감사였다. 당신을 이 세상에 오게 한 생명의 끈에게,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금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에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그 말은 마치 예기치 못한 한 줄기 빛이 되어 단 한 번도 온기가 닿은 적 없던 김태하의 황무지 같은 내면을 눈부시게 비추었다.뼛속 깊이 새겨져 있던 자기혐오가 격렬하게 흔들렸다.그는 고개를 떨구었고 눈가가 붉게 충혈되었다.남자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꽉 잡은 손에는 경련에 가까운 압박감이 전해졌다.강지현은 지금 그의 내면에서 거대한 해일이 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팔로 김태하의 어깨를 감싸 안아 살짝 낮아진 이마를 자신의 목덜미에 기대게 했다.한참 후, 해가 완전히 솟아오르며 구름을 뚫고 쏟아진 눈부신 햇살이 두 사람 위로 내려앉았다. 차가웠던 마음의 틈새로 비로소 따스한 온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엄마는... 후회하실까?”뜬금없는 질문이지만 강지현은 그 의미를 완벽히 이해했다.“절대 안 하실 거야.”그녀는 괴로움을 꾹 집어삼키며 단호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은 너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셨어.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거야. 어머님의 가장 큰 소망은 아마 네가 평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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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지현아.”주단우를 보자 강지현은 무의식중에 현다영을 자신의 등 뒤로 감쌌다.“부대표님 오늘은 좀 늦으시네요?”주단우는 평소 일에 있어서만큼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직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건 예사였다워커홀릭을 자처하는 강지현조차 그의 근면함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그렇게 됐어. 영웅 구출 작전 좀 펼치느라.”주단우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눈길로 강지현을 거쳐 그녀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다영을 바라봤는데 시선을 피하려는 듯 머리를 더 깊게 파묻었다. 이에 주단우도 스치듯 눈길을 피했다.“어제 꽤 화려한 밤을 보내셨나 봐요.”강지현은 당연히 주단우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다만 주병찬에게 익히 들었던 주단우의 사생활은 그야말로 문란함 그 자체였다. 주변 여자들은 수시로 바뀌고 스타일도 가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게다가 지금 주단우의 옷차림은 넥타이도, 재킷도 없이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영락없이 밤새 클럽을 전전하다 나온 꼴이었다.“화려한 밤이라... 그거라면 우리 지현 동생한테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은데?”주단우가 다시 한번 의도적으로 현다영을 훑었다.뼈 있는 남자의 말에 강지현은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나한테 배운다니요?”“언니, 점심 먹으러 가기로 하지 않았어요?”별안간 현다영이 찔린 듯 강지현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강지현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다영이 너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어디 불편한 거 아니야?”주단우는 콧방귀를 뀌더니 현다영이 더 당황해서 말실수라도 하기 전에 먼저 말을 던졌다.“난 볼일 있어서 먼저 갈게. 아참!”두어 걸음 나아가던 주단우가 갑자기 홱 돌아섰다.마침 현다영과 눈이 마주쳤고 순간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주단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웃으며 덧붙였다.“서강 그룹 프로젝트 계약 건이 드디어 성사됐어. 분기 핵심 사업인 만큼 중요한 자리인 거 알지? 오늘 저녁에 상대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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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오후, 이씨 가문 본가.문수정은 낮잠에서 깨어나 가정부에게 자신이 끓여두었던 전복죽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때, 백하린이 이윤후를 데리고 1층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시끄러워 죽겠네.”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문수정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그때, 가정부가 황급히 돌아왔지만, 전복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사모님, 주방에 전복죽 다시 끓이라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가정부는 잔뜩 겁을 먹어서 안색이 창백해졌다.별안간 문수정이 인상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소리야? 낮잠 자기 전에 미리 올리라고 일러두지 않았어? 치매라도 걸린 거야?”“그게 실은...”가정부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분명히 올렸는데 하린 씨가 가져가서 다 드셨어요.”“뭐?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문수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가정부를 한 번 쏘아봤다. 분노가 삽시간에 치밀어 올라 가정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백하린과 담판을 지으려나 보다.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한 편인데 백하린이 들어온 이후로는 밤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하지만 백하린은 눈치라곤 전혀 없었다. 종일 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소란을 피우거나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며 거슬리는 짓만 골라 했다. 시어머니인 자신에게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 것은 예사였다.친손자인 이윤후를 봐서, 그리고 회사가 중요한 시기라는 점을 고려해 꾹 참고 있건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어른을 무시하고 예의를 밥 말아 먹을 줄은 몰랐다.백하린은 거실에서 한창 이윤후와 술래잡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수정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동작을 멈췄지만, 이윤후는 여전히 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까르르 웃으며 백하린 주변을 뱅뱅 돌았다.문수정이 날카롭게 째려보니 가정부가 재빨리 달려가 아이를 가로막았다.“도련님, 이제 그만 뛰세요. 할머니 오셨어요.”이윤후는 문수정을 무척 두려워했다. 아이는 즉시 백하린의 등 뒤로 숨어 겁먹은 표정으로 문수정을 쳐다보았다.엄연히 친손자건만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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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문수정은 백하린의 체면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윤후가 보는 앞에서 인정사정없이 손을 휘둘렀다.백하린의 뺨은 금세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부어올랐다.이윤후는 엄마가 맞는 것을 보자마자 몸을 버둥거리며 문수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나쁜 할머니! 엄마 때리지 마!”“어디서 버릇없이 굴어! 당장 이 녀석 방에 가둬서 반성하게 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네 엄마가 저 모양이니 애를 이런 꼴로 키우는 거 아니야?”문수정은 백하린의 안색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가정부도 습관적으로 그녀의 명령을 따라 이윤후의 입을 틀어막고는 강제로 끌고 가려 했다.“누가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이때 백하린이 앙칼진 목소리로 가정부에게 쏘아붙였다.“나도 이 집 안주인이야! 우리 윤후 건드리기만 해봐. 당장 월급 정산해서 내쫓을 줄 알아!”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가정부는 당황해하며 문수정의 눈치만 살폈다.“뭐야?”문수정은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백하린, 언제부터 네가 이 집안의 안주인이 됐어? 당장 저 녀석 끌어내!”“어머님 기어이! 저 지금 바로 도운이랑 아버님께 전화할 거예요!”백하린의 말을 들은 문수정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이규진은 그녀에게 집에서는 백하린을 배려해 주라며 신신당부했다. 이도운과의 관계가 알려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하지만 제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앉은 백하린을 보고 있자니 문수정은 분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또 무슨 소란이냐?”그때, 권미숙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두 명의 가정부에게 부축받은 그녀가 느릿느릿 걸어와 이윤후 곁에 섰다.이윤후는 문수정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는데 커다란 눈가는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분에 겨운 듯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콧소리를 섞어 흐느끼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윤후야, 어른들께 예의를 갖춰야지. 할머니나 증조할머니를 보면 바로 인사해야 한단다. 이렇게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권미숙은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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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지금 저더러...”“하린이한테 사과해. 가족끼리 말로 좋게 풀어야지.”권미숙은 문수정의 말을 가로챘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이씨 가문에 시집와 반평생을 떵떵거리며 살아온 문수정에게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억울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가정부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백하린은 턱을 치켜들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시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한 번에 해소되는 듯한 희열이 느껴졌다.“할머님 말씀이 맞으세요. 어머님께 사과받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폭력을 휘두르시면 윤후가 보고 놀라잖아요. 손자 교육을 위해서라도 어른이 먼저 모범을 보이셔야죠... 잘못을 했으면 인정하시고요.”백하린은 더없이 침착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순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뺨을 내리치는 것만큼이나 살벌한 일침이었다.문수정은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으나 권미숙이 짧게 헛기침을 하자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미안하다.”억지로 사과한 뒤 그녀는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하린이 네가 이겼어.”“어머님, 그런 말씀 마세요. 집안이 화목하지 않은데 제가 승자가 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문수정의 굴복을 받아낸 백하린은 더 이상 상대를 할 가치가 없다는 듯 이윤후의 손을 잡았다. 권미숙에게 가볍게 고개만 숙여 보인 뒤, 그녀는 당당하게 거실을 빠져나갔다.문수정은 가슴에 둔한 통증을 느꼈다. 백하린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시어머니를 붙잡고 억울함을 호소했다.“어머님, 지금 저더러 죽으라는 소리예요?”“그만해라. 네가 힘든 거 나도 안다.”권미숙은 백하린을 달랜 뒤 문수정까지 상대할 기운이 없어서 덤덤하게 말했다.“조금만 참아. 몇 달 뒤 회사 상장이 순조롭게 끝나면 하린이 다시 제집으로 돌려보낼 거야.”말을 마친 권미숙은 더 이상 문수정을 거들떠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어르신 역시 가정부가 올린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뒤엎어버렸다.백하린의 그 안하무인 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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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아니 그건...”이도운은 미간을 찌푸린 채 순간 할 말을 잃었다.“왜? 싫어?”문수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평소 혈색이 좋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영락없이 초췌해졌다.문수정은 아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나랑 하린이 중에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너 설마 하린이 택할 거야?”“엄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왜 꼭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해요?”이도운은 서둘러 어머니를 달래려 애썼지만, 워낙 급하고 극단적인 문수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혹여라도 다시 화를 낼까 봐 노심초사했다.“하린이가 엄마한테 마음 상한 게 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잘 달래서 좋게 얘기해 볼 테니 이제 그만 노여움 푸세요.”“좋게 얘기를 해? 걔는 내가 미워서 확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야. 네가 하는 말을 진심으로 들었다면 지금 날 이런 꼴로 만들었겠니? 너희 둘 일을 시댁 어른들 앞에서 낱낱이 까발렸겠냐고?”문수정의 말이 듣긴 거북해도 한마디 한마디가 이도운의 정곡을 콕콕 찔렀다.그와 백하린은 겉으로는 더없이 화목한 세 식구처럼 보였다.하지만 백하린이 몰래 그를 배신하고 위협했던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신뢰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을 내고 말았다.요 며칠 이도운은 야근으로 밤늦게 들어오고 본가에서 백하린과 함께 있어 주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저녁 식사 시간에 이윤후를 잠시 보는 정도였다.오늘 문수정이 부르지 않았다면 이리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백하린과 10년을 함께했지만 이도운은 지금 처음으로 그녀 곁에서 극심한 피로감과 답답함을 느꼈고 어디라도 좋으니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다.그렇지만 책임감과 약속, 그리고 지난날의 은혜 때문에 그는 여전히 백하린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어쩌면 사랑이라는 게 다 이런 건가 보다. 늘 바닥을 치는 고비가 있기 마련이고 그저 묵묵히 견뎌내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괜찮아질 테니까.하지만 문수정의 말을 듣자 그는 순간 멍해졌다.만약 백하린과 이혼한다면...강지현과 다시 시작할 기회가 생기는 걸까?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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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이윤후는 강지현에게 교육을 받은 뒤로 계속 반항적이었다. 처음에는 강지현도 인내심을 갖고 타이르고 가르쳤지만, 아이가 고집이 세서 좀처럼 따르지 않았다.한 번은 강지현이 이윤후를 강하게 벌주려 하자 이도운이 나서서 애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만류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강지현의 말이 옳았다.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더니 이윤후는 이도운의 비뚤어진 집념과 백하린의 안하무인 격인 성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제멋대로 규칙을 무시하는 그 영악함까지도 말이다.이 장난감 총만 해도 사람에게 겨누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이윤후는 매번 똑같았다.이도운은 아들의 작은 손을 잡고 엄하게 말했다.“아빠가 방 안에서 총 가지고 놀면 안 되고 말했지! 사람에게 절대 겨누지 말라고 했잖아.”“네...”이윤후는 이도운에게서 느껴지는 냉기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몸을 뒤로 빼며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이도운이 그를 확 붙잡았다.“알면 고쳐야지! 벌 받을래?”“...”이윤후는 눈알을 굴리더니 황급히 백하린 쪽을 쳐다보며 도움을 청했다.이에 백하린이 즉시 다가왔다.“됐어, 윤후야, 아빠한테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만 해.”그녀는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네가 맨날 이렇게 오냐오냐하니까 애가 겁 없이 제멋대로 구는 거 아니야!”이도운은 그녀에게 대꾸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이윤후의 작은 팔을 꽉 붙잡더니 그대로 아이의 손바닥을 내리쳤다.이윤후는 아빠에게 이토록 심하게 혼 난 적이 없던지라 극도로 겁을 먹었다. 게다가 이도운의 손힘이 너무 세서 아픈 나머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왜 애를 때려!”아들이 울자 백하린은 억장이 무너졌다. 그녀는 황급히 달려와 이도운과 아이를 떼어놓으려 했다.그런 그녀의 반응에 이도운은 오히려 더 노기를 띠었다. 그는 아이를 옆으로 번쩍 안아 올리더니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가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엄마! 살려줘요, 엄마.”이윤후는 목이 터지라 울부짖으며 백하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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