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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1화

“그래서요?”최동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서지아의 얼굴에 홍조가 돌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거실에서 나 좀 지켜주면 안 돼요? 누가 옆에 있어 주길 바라니까... 내가 잠들고 나면 그때 가요.”“그건 좀 곤란해요.”최동윤이 망설였다.“나 내일 아침 비행기인데...”서지아가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돌아온 것이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날 리 없다는 것을.결국 끝내 마음이 약해졌다.정말로 김태하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이었다면, 출국 직전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이미 강지현을 찾아가고도 남았을 터였다.이제야 분명해졌다. 둘은 완전히 끝난 사이라는 사실이.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마음은 없었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김태하와 강지현이 약혼한 뒤로 그녀는 매일 친구와 밤새 통화를 하거나, 문밖을 지키는 어시스턴트가 있어야만 겨우 잠이 들었다.하물며 두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온 오늘 같은 밤은 혼자서는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그런 그녀의 눈앞에 마침 최동윤이 있었다.말투는 무뚝뚝해도 사람은 믿을만했고, 성격도 꽤 단순한 편이었다.무엇보다 줄곧 김태하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지 않은가. 마치 그림자처럼.서지아는 귀신에 홀린 듯 그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최동윤은 거절하려 했으나, 서지아의 수척한 얼굴을 보니 순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연애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상사병의 고통까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사랑하는 연인들이 달콤한 만큼, 이별한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알고 있었다.“서지아 씨, 저기...”최동윤이 몇 초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제 일당이 60만 원이거든요. 숙박비는 따로 안 받겠습니다. 내일 공항 가실 때까지 곁에 있어 드릴 테니, 50만 원만 주시죠.”그녀가 비행기를 타는 것까지 확인하는 게 대표님을 위해서도 좋을 터였다.정작 서지아는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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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2화

김태하는 강지현의 머리를 팔로 받쳐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나 김태하인데.”“앗! 대표님? 제, 제가 혹시 방해한 건 아니죠?”나지막한 숨소리, 잠에서 깨지 않은 기척, 그리고 함께 있는 두 남녀.현다영은 즉각 상황을 파악했고, 머릿속엔 이미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완벽한 비주얼의 김태하와 강지현이 아침의 몽롱한 햇빛 속에서 뒤엉켜 있는 모습이라니.‘이걸 내가 감히 엿들어도 되는 거야?’현다영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응, 다만 지현이가 아직 잠에서 깨질 못해서.”김태하의 목소리는 갈수록 부드러워졌고, 그 달콤한 음색에 듣고 있는 현다영마저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두근거렸다.“괜찮다면 오늘 지현이 대신 사무실에 말 좀 전해줄 건가? 당분간 휴가를 낼 생각이라.”“네, 네, 그럼요!”김태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다영이 잽싸게 대답했다.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지현 언니 휴가 신청서 진작 올라와 있었는데 제가 깜빡했나 봐요. 두 분 편히 쉬시고, 대표님도 얼른 쾌차하세요! 그리고 꼭 득남하시고요!”현다영은 자기가 왜 이렇게 긴장하는지도 모른 채, 할 말을 단숨에 쏟아내고는 얼떨결에 전화를 끊어버렸다.김태하는 어안이 벙벙했다.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 했는데, 참 과감하게도 전화를 끊는다 싶어 헛웃음이 났다.통화가 끝나자 강지현이 웅얼거리며 다시 휴대폰을 더듬어 가져갔다.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듯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요 며칠 고단함이 쌓인 데다, 어젯밤은 평소보다 훨씬 더 체력을 소진한 탓이었다.그래도 김태하와 현다영이 나눈 대화는 몽롱한 와중에도 선명하게 들렸다.‘맞다, 나 휴가였지?’“지현아, 깼어?”김태하는 자신이 전화를 대신 받은 것이 그녀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일임을 알았다.눈은 감고 있어도 그가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미세하게 달싹이는 입꼬리가 증거였다.강지현은 대꾸하기 귀찮았는지 일부러 몸을 돌려 누웠다.그러자 김태하가 그녀의 허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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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3화

강지현이 해준 밥이 워낙 맛있었기에 무엇보다 가장 먼저 떠올렸다.영화 보는 걸 워낙 좋아하니, 같이 보러 가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반면, 신혼집은 그에게 제일 큰 숙제였다.하루빨리 계약을 마치고, 웨딩 사진도 찍고, 결혼식까지 올리고 나면, 그때는 강지현도 낙장불입이 될 터였다.김태하의 고백에 강지현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그녀는 대답 대신 입맞춤으로 화답했다.어젯밤의 키스가 워낙 기분 좋았던 탓에, 오늘 눈을 뜨자마자 김태하의 입술 끝에 머물던 온기가 그리웠던 참이었다....두 사람은 모처럼 아주 푹 쉬고 오후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김태하의 휴대폰엔 부재중 전화가 십여 통, 강지현에게도 여러 통 와 있었다.대부분 업무 관련 연락이었다.대충 훑어보니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고, 사소한 보고들이 주를 이뤘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지순옥의 부재중 전화가 유독 눈에 띄었다.그래서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어제 지순옥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는지, 한밤중에 강지현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 김태하를 많이 이해하고 보듬어달라고 당부했다.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는 법이다.사건의 내막을 상세히 알 리 없건만, 지순옥이 보낸 문자는 구구절절 두 사람의 정곡을 찔렀다.마치 이들이 왜 다퉜는지 이미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단순한 정략결혼이었다면 모든 결정은 실익을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하지만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은 굳건했고, 지순옥과 김윤석 역시 계약이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였다.이런 감정은 결코 흔치 않은 것이기에 단순히 규칙이나 상식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다.마음으로 맺은 인연이니, 그 끝 또한 진심이어야 했다.지순옥이 강지현에게 건넨 위로는 사실 김태하를 향한 충고나 다름없었다.아무리 감정이 불꽃처럼 뜨거울지언정, 손자며느리의 강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감동한 강지현은 할머니를 안심시키는 답장을 보낸 뒤, 대화 내용을 캡처해 김태하에게 전송했다.그러고는 장난스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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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4화

신도, 귀신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부질없었다.삶이 고통스럽고 막막할 때면 그저 서로를 믿으면 그만이었다.그들은 이제 부부였다.두 사람의 세계에서 ‘나’는 흐릿해지고, 오직 ‘우리’만이 존재할 뿐이다.오후가 되자 최동윤은 집사와 보디가드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김태하와 강지현의 신혼집 후보지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다.이미 엄선된 매물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제일 사치스러운 곳은 단연 ‘서운각’이었다.김씨 저택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풍경과 시설 모두 완벽에 가까웠다.한때 국가 홍보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되었을 정도로 상징적인 이 저택은 가격 또한 어마어마했는데, 경매가만 이미 100억 원을 웃돌고 있었다.김태하는 강지현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품질은 물론 가격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그는 추가금을 얹어서라도 당장 서운각을 낙찰받을 기세였다.강지현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 같아 조금 더 낮은 수준의 거처로 바꾸려 했으나, 오직 그녀의 만족만을 묻는 김태하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렸다.서운각이 두 사람의 신혼집이 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세상이 얼마나 떠들썩해질지 불 보듯 뻔했다.신혼집이 확정되자마자 계약 절차와 리모델링은 모두 최동윤에게 맡겨졌다.물론 세부적인 인테리어와 가구 배치는 전적으로 강지현의 취향을 반영해 최종 승인을 거치기로 했다.투어를 마치고 나자 피곤함이 밀려왔다.강지현은 김태하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혹시라도 몸에 무리가 갔다면 지체 없이 쉬게 할 생각이었다.“힘들진 않아. 벌써 해가 저무네. 장 보러 갔다가 이제 집으로 가자.”김태하는 언젠가 강지현과 함께 보았던 영화 속 대사를 떠올렸다.‘해가 저물어가니, 이제 우리 같이 집으로 돌아가야지.’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말인 듯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서운각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고개를 들자 정말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붉은 노을이 하늘 절반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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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5화

정면에 있는 진열대 통로 너머, 카트 옆에 강지현과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상대방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 안은 채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훤칠하고 늠름한 체구의 남자는 여자를 품 안에 꼭 안고 다정한 눈빛으로 화답했다.두 사람은 손에 든 젤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오직 서로의 눈동자만 바라보았다.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강지현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홍조가 번진 얼굴은 이도운이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대학 시절 처음 만났던 그 순간보다도 눈이 더 부셨다.남자는 그녀의 장난에 맞장구치며 손에 들린 젤리를 가져가더니, 이내 진열대에 있던 젤리 한 줄을 통째로 카트에 쏟아부었다.강지현이 말리는 듯 남자의 손을 붙잡았지만, 두 사람의 입꼬리는 내려갈 기미가 안 보였다.남자는 강지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어뜨리고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반면, 강지현은 고개를 쳐든 채 반짝이는 눈동자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한없이 다정한 남자와 수줍음 가득한 여자.두 사람의 세계에는 서로 외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이도운은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다. 그러나 손발이 저리며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죽어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둘은 외모부터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한 쌍이었다.지나가던 행인조차 가던 길을 멈추고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낼 정도였다.강지현의 곁에 있다던 그 남자가 실존 인물이라니.그녀가 정말로 마음이 변했다.심장이 점점 옥죄어 왔다. 눈앞의 생생한 광경에 마치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난 듯,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예전 같았으면 그 남자와 한번 겨루어 볼 자신이라도 있었을지 모른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그는 얼굴은 핼쑥하고 꼴은 형편없이 초라했다. 고작 상대방의 얼굴조차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오늘 이도운은 온종일 강지현의 아파트 밖을 서성였다.어떻게든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지난 며칠 동안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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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6화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오히려 손으로 강지현의 팔을 붙잡더니, 제 품으로 끌어안으며 다시 정면을 향해 돌려세웠다.“태하야...”“전 남친 눈에 띄는 게 왜? 내가 뭐 어디 데리고 다니기 부끄러운 수준이라도 돼? 아니면 아직도 미련 남아서 눈치라도 보는 거야?”김태하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 느긋했다.평온한 어조였지만, 말투에 서린 장난기가 되레 그의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강지현이 이도운을 마주칠 때마다 단 한 번도 좋은 낯빛을 보여준 적이 없었음에도 김태하는 매번 질투했다.다시 말하면 이도운이라는 존재가 눈앞에 서성거리는 한, 그리고 그가 여전히 강지현을 탐내고 있는 한,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당연히 아니지. 그냥 꼴 보기 싫어서 그래.”강지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본능적으로 이도운을 피하려 했던 이유는, 그를 보는 순간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트라우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생리적인 혐오감과 거부감이 치밀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모습은 황당함을 넘어 그저 진저리가 날 뿐이었다.하지만 김태하의 품에 안기는 순간 이성이 서서히 돌아왔고, 본능적인 거부감도 가라앉았다.잘못을 저지른 건 이도운이지, 그녀가 피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무엇보다 예민하고 눈치 빠른 김태하에게 조금의 오해도 사고 싶지 않았다.“어떻게 해야 저 자식 영혼까지 처참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 알아?”김태하가 강지현의 귓가에 속삭였다.귓바퀴를 간지럽히는 온기가 가시기도 전, 그녀의 턱을 가볍게 치켜올리더니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강지현!”이도운은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족쇄라도 채운 듯 무겁던 다리가 그제야 움직였다.그는 어떻게든 강지현의 시선을 돌려놓고 싶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하지만 김태하는 원천 차단하기 위해 쇼핑카트를 냅다 밀쳐 버렸다.묵직한 카트가 회전하며 이도운의 정강이를 들이받았고, 그는 극심한 통증에 저절로 몸을 웅크렸다.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끝까지 이를 악물었다.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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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7화

이도운은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 내듯 한 자 한 자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지현아, 내가 네 앞에 설 자격이나 있겠냐만은... 그래도 이제 내 마음이 뭔지 확실히 알겠어. 너 없으면 나 진짜 죽어!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사실 발걸음을 멈춘 건 강지현이 아니라 김태하였다.주변 사람들이 이도운의 처절한 고백에 몰입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도, 정작 강지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신경은 온통 옆쪽 진열대를 바라보는 김태하에게 쏠렸다.“이 젤리도 새로 나온 맛이네.”“그러네.”김태하는 자연스럽게 진열대에서 젤리를 집어 강지현에게 건넸다.그리고 다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쩌지?”“뭐가?”강지현은 그가 아직도 질투하고 있는 건가 싶어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자기 단 거 엄청 좋아하잖아. 이거 다 못 먹으면 내가 같이 먹어 줘야 할 텐데, 그러다 나 살쪄서 미움받으면 어떡해?”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김태하의 표정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미간에 깊은 주름까지 잡힐 정도였다.강지현은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그리고 대답하기 전, 일부러 남자의 허리와 복부 주위를 더듬거리다 가볍게 꾹 눌렀다.김태하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강지현은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복근이 이렇게나 짱짱한데, 평생 단 거만 먹고살아도 끄떡없겠어.”“장난치지 말고.”김태하가 헛기침했다. 어느새 귓불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강지현의 손길에 아랫배에서 뜨거운 열기가 파도처럼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웃어댔고, 이내 통로를 빠르게 지나쳐 갔다.반면, 등 뒤에 남겨진 이도운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무시당했다.아찔한 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강지현이 정말로 그 남자와 함께 떠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쫓아가려 몸을 일으켰다.하지만 중심을 잡기도 전에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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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8화

강지현이 다른 남자를 다정하게 “여보”라 부르며 팔짱을 낀 채 마트를 누비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강지현,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잔인한 거야?”이도운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답을 찾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어떻게 사람 마음이 한순간에 돌아서고, 이토록 잔인할 수가 있을까.설마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에게 베풀었던 다정함도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다 문제없으니까.”주단우가 대답하다 말고 슬그머니 조수석으로 시선을 던졌다.여자는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듣고 있는 듯, 통화 내용에는 무관심한 모습이었다.수화기 너머의 엄경미는 주상 그룹의 동태를 살피느라 혈안이 되었다.강지현은 주호석과의 만남을 앞두고, 이번 주에 휴가를 내고 김태하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그녀가 자리를 비웠음에도 회사는 기이할 만큼 평온했다.강지현 역시 떠나기 전,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인계해 둔 상태였다.다만, 평소와 달리 주단우의 대답이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게 걸렸다.엄경미의 목소리에 의구심이 묻어났다.“너 옆에 누구 있니?”“아니요.”주단우는 찰나의 동요도 없이 딱 잘라 말했다.“그럴 리가요. 지금 운전 중이라서 그래요.”“운전이라니,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는데?”엄경미가 시간을 확인했다. 시차가 있는 탓에 그곳은 이미 한밤중일 터였다.“아, 친구가 일이 좀 생겼다고 해서 가보는 중입니다.”주단우가 능청스레 웃었다.수화기 너머로 불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처신 똑바로 해. 아무나 친구랍시고 곁에 두지 말고. 어디에 있든 너 역시 주씨 가문을 대표하는 몸이라는 걸 잊지 마.”어릴 때부터 엄경미의 숨 막히는 통제 속에서 자란 탓인지, 주단우는 학창 시절 내내 친구가 거의 없었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뒤늦게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물론 같이 어울리는 재벌가 자제들이나 유명 인사 중 대부분은 엄경미가 정보망을 넓히고 그의 배경을 탄탄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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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9화

“소리는 왜 질러?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냐?”주단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차에 탄 순간부터 무슨 택시 승객이라도 된 양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니, 진짜 자기를 공짜 기사로 아는 건가? 사실 밤늦게 운전대를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퇴근길에 회사 정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택시를 잡으려 애쓰는 현다영을 목격하기 전까지는.넋이 나간 채 허둥지둥하는 꼴이 대번에 큰일이 터졌음을 짐작게 했다.주단우가 다가가 슬쩍 묻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남동생 현시우가 학교에서 싸움에 휘말려 인근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었다.현시우가 다니는 학교는 이웃 도시에 있어 차로 두 시간 반이면 도착했지만, 문제는 그 주변이 지나치게 외진 깡촌이라는 점이다.이 야밤에 여자 혼자 가기엔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날이 밝으면 아침에 가라고 말려보았지만, 이미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간 현다영의 귀에 그의 만류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결국 그녀를 제 차에 반강제로 밀어 넣다시피 태우며 데려다주겠노라 선언했다.현다영에게 자신은 그저 굶주린 맹수나 다름없을 터라, 몇 번이고 내빼며 실랑이를 벌일 줄 알았다.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군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타 고맙다는 인사까지 건넸다.물론 딱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현시우와 통화를 마치고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현다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사실 주단우는 내심 ‘신뢰받았다’는 기쁨에 도취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심란해하는 현다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조용히 운전만 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이성이 번뜩 돌아왔다.자신이 도대체 왜 그녀의 반응 하나에 일희일비해야 한단 말인가.본래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아무런 대가도 없는 이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가 뭐 있겠는가.“아니, 갑자기 왜 때려요? 깜짝 놀랐잖아요.”현다영이 원망 섞인 눈초리로 미간을 찌푸렸다. 얄밉다는 듯 그를 힐끗 쏘아보는 시선이 따가웠다.“그게 어딜 봐서 때린 거야? 불러도 대꾸를 안 하니까 그렇지.”주단우가 콧방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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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0화

“가족이니까 걱정되는 게 당연하죠.”현다영은 당당하게 말했다.이내 멈칫하다가 생각에 잠기더니, 주단우의 질문에 차근차근 답을 이어 나갔다.“형제자매가 있다는 건, 무슨 일이 생기든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거예요. 기쁜 일은 같이 나눌 사람이 있고, 상처받고 힘들 땐 마음속에 작은 버팀목이 되어주거든요. 시우가 철없어 보여도, 제가 어디 가서 무시당하고 오면 앞뒤 안 가리고 쫓아가서 따져 줄 애예요. 비록 본인도 무서워서 벌벌 떨지언정. 예전에 아버지가 저를 때리려고 했을 때도 늘 제 앞을 막아주었죠.”현다영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주단우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니, 그저 이런저런 소소한 기억을 꺼내놓는 것뿐이었다.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 그녀와 달리, 좁은 차 안을 채우는 나긋한 목소리는 주단우의 귀에 더없이 다정하게 들렸다.밤공기가 너무 고요한 탓일까, 잔물결에도 사람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일렁거렸다.현다영이 묘사하는 남매간의 정은 그가 평생 보고 자란 세계와 달랐다. 오직 이익만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재벌가의 관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주단우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이윽고 냉소를 지었다.“좋네. 그게 말로만 듣던 ‘가난한 집 자식일수록 더 똘똘 뭉친다’라는 건가?”그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현다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네, 맞아요. 가난하니까 서로의 온기라도 나눠 가져야죠.”주단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결국 대화는 뚝 끊기고 말았다.주단우가 불쾌함에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는 걸 보며, 현다영은 속으로 은근히 고소했다.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뜬금없이 또 한마디를 던졌다.“네 어머니는 너한테 잘해 주셔?”“그럼요.”현다영이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우리 엄마는 저한테 엄청 잘해 주셨어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예요.”“하.”그 말을 들은 주단우는 대놓고 실소를 터트렸다.“제일 좋은 엄마? 네 어머니는 가난해서 제 앞가림하기도 벅찼을 텐데, 그래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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