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배윤제는 잔을 들어 술을 조금 마신 뒤 냉랭하게 말했다.“신경 쓰지 마. 계속 그렇게 강단 있게 구는 게 나한테도 좋으니까.”다른 사람들이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맞아. 강하율은 신경 쓰지 말고 다들 술이나 마시자. 어쩌면 잠시 뒤에 올지도 모르니까.”...강하율은 아주 이상한 꿈을 꿨다.꿈속에서 강하율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를 붙잡고서 빨개진 얼굴로 남자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었다.남자는 강하율의 손을 떼려고 하면서 중얼거렸다.“지금 은근슬쩍 뭐 하는 거야?”강하율은 눈을 감은 채 남자의 섹시한 울대뼈 위쪽을 바라보았다.남자의 얼굴이 보이려는 순간, 꼬르륵 소리가 들려오며 강하율은 꿈에서 깼다.강하율은 눈을 번쩍 떴고 이상하게 갈증이 났다.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물을 마셨지만 배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났다.강하율은 배가 고팠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생각이었는데 근처 가게에는 그녀가 먹고 싶은 메뉴가 없었다.요리를 배운 뒤로 강하율은 배달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드물었다.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보니 비는 이미 그쳤고, 너무 늦은 시간도 아니었기에 강하율은 밖에 나가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강하율은 옷을 갈아입은 뒤 외출하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가게를 찾았다.그러다가 마침 인터넷에서 추천한 레스토랑을 보게 되었다.강하율은 교통사고로 다친 탓에 요즘 들어 간이 약한 음식들만 먹었는데 오랜만에 매운 음식을 먹고 싶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한 뒤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배윤제 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강하율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한때 친구였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하하, 내가 뭐라고 했어? 강하율은 틀림없이 올 거라고 했잖아.”“강하율, 내가 친구로서 너를 과대평가했나 봐.”그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조금 전 강하율이 배윤제를 포기했을 거라고 추측했던 박도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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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강하율은 비록 배가 매우 고프긴 했지만 배윤제 일행 때문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그리고 매운 음식을 먹으니 눈물이 났다.음식이 매운 탓도 있었지만 서글픈 탓도 있었다.강하율은 본인이 조금 더 단호하게 굴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그녀는 한편으로는 그들과 선을 그으면서도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집안이 망했을 때 강하율은 매우 슬퍼했었고 당시 그녀의 곁에는 배윤제를 제외하면 그 친구들뿐이었다.그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서 즐겁게 웃고 떠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으나 현실은 더없이 차가웠다. 어렸을 때의 사랑도, 우정도 믿을 게 못 됐다.강하율은 자신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이때 지배인에게서 전화가 왔다.강하율은 눈가를 닦으면서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지배인님.”“강 팀장, 몸은 좀 나았어?”“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으세요?”강하율은 곧바로 업무 상태에 돌입했다.“이틀 뒤 중요한 분이 투숙할 예정인데 강 팀장이 응대해 줄 수 있을까?”“네, 물론이죠. 그런데 어떤 분이시죠?”강하율은 곧바로 가방 안에서 펜과 메모장을 꺼냈다.“비밀이야.”“네?”강하율은 펜을 쥐고 흠칫했다.“윗선의 지시야. 강 팀장은 시간 맞춰 대기하기만 하면 돼.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승진에 큰 도움이 될 거야.”“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강하율은 메모장에 적은 물음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누구길래 이렇게 신비주의인 거지?’...룸 안, 배윤제는 술을 마신 뒤 카드를 내려놓았다.테이블 위,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렸고 배윤제는 자기도 모르게 휴대폰을 힐끗 봤다.그러나 아무런 알림도 없었다.오히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휴대폰을 들고 확인해 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강하율이 웬일로 강하게 나온다 싶었는데 사실은 몰래 숨어서 울고 있었네.”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을 보냈다.사진 속에서 강하율은 창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고 있었다.“어디서 난 사진이야?”누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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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놀면서도 일 얘기는 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예 쉴 틈이 없는 건 강하율도 처음이었다.강하율은 서비스가 최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상대 자료를 확인하자마자 비즈니스 센터에 전화해 요구 사양에 맞는 회의실을 먼저 예약했다.“다과는 메모해 줘. 준비는 내가 할게.”“부 총지배인님, 큰손 고객인가 봐요. 이런 것도 직접 준비하시네요.”“무슨 부 총지배인이야. 농담하지 마.”강하율이 급히 말을 끊었다.“부 총지배인 자리는 강 팀장님밖에 없죠. 저희는 강 팀장님이 제일 유력하다고 봐요.”“그날 되면 그때 말하자.”“강 팀장님, 지배인님한테 들었는데요. 비밀 남자 친구랑 드디어 헤어지셨다면서요? 그럼 우리 매니저도 아직 기회 있는 거예요?”강하율이 멈칫하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가볍게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하율은 얼른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다.“그만 얘기하자. 전화 왔어.”전화를 끊고 나서야 강하율은 한숨을 돌렸다.처음 윌른 호텔에 들어왔을 때 강하율에게는 구애하는 사람이 꽤 있었고 동료뿐 아니라 고객도 적지 않았다. 번거로움을 줄이려고 강하율은 남자 친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정체는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강하율은 다시 컴퓨터 파일로 시선을 돌려 자료를 세 번이나 확인했다. 대충 봐도 상대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같았다. 강하율은 경험상 별장 배치부터 하루 세 끼까지 필요한 사항을 메모해 두었고 끝내 혼잣말이 튀어나왔다.“사진 한 장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잘못 알아보면 얼마나 민망한데.”강하율은 하품을 하고는 씻고 잠들었다. 잠에 빠져들 무렵, 인터넷에서 어떤 일이 퍼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다음 날 강하율을 깨운 건 알람이 아니라 안혜슬의 전화 폭격이었다.“아직 자? 너 지금 난리 났어, 인터넷에 떴어!”강하율은 휴대폰을 멀리하고 눈을 비볐다.“뭐라고?”“너, 강하율! 네 고백 영상이 올라갔어. 지금 온 인터넷이 너보고 망상녀래. 근데 제일 문제는...”안혜슬의 목소리가 미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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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정체가 폭로되자 강하율은 순식간에 전 국민의 표적이 됐다.[저런 인간의 딸은 세상에 살아 있을 자격도 없어! 배씨 가문 도련님을 꼬시려고 하다니 제 주제나 알지.][둘째 도련님이 정다인이랑 공식 발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강하율 고백 영상이 올라왔잖아. 분명 본인이 올린 거지. 설마 둘째 도련님 좋아하는 거야?][정다인 같은 보석이 있는데 둘째 도련님이 살인범 딸을 눈에 담겠냐.][그럼 남는 건 배씨 가문 그분뿐이네? 강하율 진짜 별 희한한 망상을 다 한다.][제일 힘들고 슬펐던 순간? 손을 잡아 줬다? 이게 무슨 고백이야. 완전 어떤 암시잖아.][강하율, 나도 손이 있어. 잡아 줄게. 어서 와라 ㅋㅋ]강하율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휴대폰을 꽉 쥐었다.강하율은 아버지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거라고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 가족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강하율은 그 뒤로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녔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단서 하나 잡기 어려웠다.가슴이 미세하게 떨렸고 무력감이 목까지 차올라 강하율을 숨 막히게 했다.무엇보다도 강하율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한때 강하율을 지켜 주겠다고 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강하율은 겉옷을 걸치고 문으로 갔다. 도어캠 너머로 사람을 확인하자, 가지런한 정장 차림에 학 모양 가문 문장을 단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강하율은 다시 무거운 현실로 곤두박질쳤다.강하율이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열자 상대는 차갑게 고개만 끄덕였다.“하율 씨, 사모님께서 부르십니다.”“옷만 갈아입고 갈게요.”‘올 것이 왔구나.’...배씨 저택.강하율은 이곳에서 7년을 살았다.강씨 가문과 배씨 가문은 원래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배윤제의 할머니 조윤서와 강하율의 어머니는 서로 절친이었다. 그러다가 강하율의 아버지가 갇히고 어머니마저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조윤서는 강하율을 안쓰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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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리고 배윤제는 늘 작은 선물을 하나씩 사 왔다.어느 날은 귀여운 인형이었고 어느 날은 지나가는 길에 사 온 간식이었다. 하나하나 값비싼 건 아니었지만 강하율은 그 안에 마음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배윤제는 애초에 강하율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선물은 길거리 어디에나 있는 것들이라 설령 누가 봐도 배윤제와는 연결되지 않았다.강하율이 진심으로 믿었던 그 사실이, 이제는 강하율이 딴마음을 품었다는 증거가 되어 돌아왔다.강하율은 손끝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오자 오히려 정신이 차분해졌다.강하율은 배윤제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조가 섞인 미소만 지었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배씨 가문은 강하율을 거둬 준 은혜가 있었기에 강하율에게는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게다가 반박한다 한들, 누가 믿어 줄까. 배윤제가 기억이 없다는 한마디면 강하율은 또 한 번 억지로 덮어씌운다는 말까지 뒤집어쓰게 된다.차라리 입을 다물면 예전처럼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배윤제의 대답을 들은 조윤서는 그제야 마음을 놓는 듯했다. 조윤서는 가장 아끼는 손자가 이런 여자와 얽히는 걸 원치 않았고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도 없었다. 강하율이 부모를 닮았으니 집안이 망한 것도 자업자득이라는 듯했다.조윤서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눈빛만은 날이 서 있었다.“강하율, 우리 가문이 너를 박하게 대하진 않았다. 보답을 바라진 않아도 너도 이런 뻔뻔한 짓은 하면 안 되지.”강하율은 오늘 이 꾸지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먼지 하나 없는 원목 바닥만 바라보며, 주변의 경멸 어린 시선을 묵묵히 받아냈다.“강하율, 잘못했으면 잘못한 태도를 보여야지.”조윤서가 찻상을 톡톡 두드렸다. 강하율은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해 손을 빼려 했지만 하인이 이미 찻잔을 강하율 손에 쥐여 줬다.하인이 담담하게 말했다.“하율 씨, 어르신께 차 한 잔 올리고 잘못했다고 하세요.”말이 끝나자 뜨거운 물이 찻잔에 넘치도록 부어졌고 차향이 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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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말이 끝나자마자, 강하율 등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조윤서만 빼고는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배윤호는 강하율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담배 냄새가 옅게 떠돌았고 위에서 눌러오는 듯한 압박감이 따라붙었다.배윤호는 천천히 앉았다. 깊게 파인 이목구비는 차갑고 단단했고 검은 눈이 가볍게 들리자 주변 공기까지 얼어붙는 듯했다.“앉으세요.”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배윤제가 피식 웃으며 노골적으로 떠봤다.“형, 타이밍 좋네. 하율이가 형 짝사랑하는 것도 알고 온 거지?”강하율은 얼굴이 화끈해져 고개를 숙였다. 배윤제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고 배윤호는 애초에 떠올리는 것조차 겁났다.하지만 지금은 판이 이미 짜여 있었고 강하율은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일 뿐이었다.어차피 끝이 이렇게 날 거라면 차라리 배윤호 손에서 끝나는 게 나았다. 적어도 그때 고백한 사람이 배윤제였다고는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착각인지, 배윤호가 강하율을 한번 본 것 같았다. 그 눈빛이 묵직했고 속을 알 수 없었다.강하율이 찔끔 눈을 들자, 손바닥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뜨거운 찻잔이 배윤호 손으로 옮겨가 있었다.배윤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알겠어.”강하율은 얼어붙었다.‘알겠어? 무슨 뜻이지?’이건 배윤제가 원한 대답도 아니었다.배윤제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셋 사이에 뭔가 손에 잡히지 않는 기류가 번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배윤제는 강하율이 예전부터 자신에게 얼마나 매달렸는지 떠올렸다. 끝까지 반박도 안 하는 걸 보면 결국 자기편 들어 배윤호를 견제해 주려는 거겠지.신상까지 다 털린 강하율을 감히 누가 받아 주겠나. 결국 자신 말고는 없을 테니 오늘 김에 기세나 좀 꺾어 두자는 생각이 들었다.몰래 만나는 사이라면 그 정도 자각은 있어야 하니까. 배윤제는 그렇게 정리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고개를 돌려 배윤호를 바라봤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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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강하율은 배윤제 때문에라도 배씨 가문에 섞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이상할 만큼 잔잔했다.강하율은 조윤서를 한번 배윤제를 한번 바라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그리고... 둘째 오빠가 오해한 거면 미안해. 난 오빠를 그냥 오빠로만 생각했어. 다인 씨랑 행복하게 잘 살아.”‘둘째 오빠’라는 호칭은 사실 배씨 저택에 들어온 첫날부터 불렀어야 했다. 배윤제가 계속 모르는 척하고 싶다면 강하율도 그에 맞춰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면 된다.그런데 배윤제가 벌떡 일어섰다.“강하율, 나 뭐라고 불렀어?”“둘째 오빠. 할머니가 늘 그렇게 소개했잖아. 오빠가 잊었을 수도 있고.”강하율은 말 잘 듣는 후배처럼 얌전하게 대답했다.배윤제는 대꾸하지 못한 채 얼굴빛만 미묘하게 일그러졌다.강하율은 더 얽히지 않았다.“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갈게.”강하율이 나가면 이 소동도 끝이었다.잠시 뒤, 배윤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낮게 말했다.“온라인에 올라온 일은 벌인 사람이 알아서 정리하세요. 해 지기 전까지 배씨 가문과 강하율 이름이 엮이는 일은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안 그러면... 책임은 본인이 지세요.”배윤호의 차가운 시선이 거실을 훑다가 누군가에게서 잠깐 멈췄다. 위에서 찍어 누르는 듯한 기압에 거실 분위기가 뚝 가라앉았다.역시 배윤호는 냉정했다. 눈에는 가문 이익밖에 없고 강하율은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배윤호가 떠난 뒤에야 거실의 숨이 조금씩 돌아왔다.조윤서는 배윤호가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게 분해서 관자놀이를 붉게 문지르더니 배윤제에게 말했다.“윤제야, 너랑 다인의 결혼 얘기도 슬슬 꺼내야겠다.”배윤제는 휴대폰만 내려다본 채 건성으로 대꾸했다.“네.”정다인은 기쁜 얼굴로 웃음을 띠우려 했지만 배윤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할머니 저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정다인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따라갔다. 배윤제가 강하율 쪽으로 가자 정다인은 입술을 깨물고 서둘러 뒤따라 나갔다.처마 밑으로 나오니 밖에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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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강하율은 배씨 저택을 나가기 전에 조윤서에게 인사부터 하고 싶었다.하지만 하인 말로는 조윤서가 산에 올라가 예불을 드리러 갔다고 했다. 강하율은 더 묻지 않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대문을 막 나서는 순간, 축축하게 식은 공기 속으로 빗방울이 다시 성글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었다. 다시 들어가면 괜히 눈엣가시만 될 것 같아 강하율은 그냥 빗속으로 뛰어들어 길모퉁이 쪽으로 달렸다.그런데 얼마 못 가 미끄러졌다.뜨거운 물에 데어 벌겋게 부은 손바닥이 젖은 바닥에 쓸리며 피가 배어 나왔다. 아픈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강하율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겨우 일어나려다 좋아하던 치맛자락이 찢어진 걸 봤다. 그 순간 온몸 힘이 풀려 강하율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빗방울이 촘촘히 맺혔다가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비인지 눈물인지 구분도 안 됐으며 그냥 서럽고 답답했다.그때 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 창문이 살짝 내려가더니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타.”두 글자뿐인데도 하늘이 통째로 눌러앉는 기분이었다. 강하율은 급히 일어서며 얼굴을 가렸다. 창문 틈으로 안을 보자 배윤호의 차가운 눈이 마주쳤는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태워 줄까?”배윤호가 다시 묻자 강하율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 아니요. 앞에만 가면 택시 잡을 수 있어요. 저 혼자 갈게요.”한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아 강하율은 돌아서려 했다.그때 철컥, 차 문이 열리더니 우산이 강하율 머리 위로 펼쳐졌다. 강하율이 반사적으로 올려다보는 순간, 남자 재킷이 머리 위로 툭 덮였다. 젖은 얼굴도 엉망이 된 모습도 가려졌다.강하율이 뭘 말해 볼 틈도 없이 우산이 살짝 기울더니 배윤호가 앞을 가로막았다. 숨이 턱 막혀 강하율은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배윤호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다시 떨어졌다.“타.”강하율은 재킷을 꽉 움켜쥐고 목을 움츠리더니 더는 버티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차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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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배윤호는 반쯤 가려진 얼굴을 빛과 그림자 사이에 묻은 채, 눈빛만 옅게 번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그 시선에 붙잡히는 순간, 강하율은 자기가 사냥감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차 안을 짓누르던 침묵을 배윤호가 먼저 끊었다.“됐어. 온라인에 올라온 건 함부로 대응하지 마.”뭐가 ‘됐’는지도 왜 그렇게 말하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차는 금세 강하율이 사는 곳 앞에 멈췄다.강하율은 얼른 문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알겠어요. 안녕히 가세요.”그러고는 재킷을 벗어 돌려주려는데 배윤호가 말했다.“옷은 그냥 입고 가.”“아니요, 괜찮...”“깨끗하게 돌려줘.”더 말할 여지가 없는 목소리였다.강하율은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말만 남기고 강하율은 거의 도망치듯 뛰어 올라갔다.조수석에 앉은 배윤호의 비서 양승아는 뒤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대표님, 아까는 왜 칼까지 꺼내셔서 하율 씨를 겁주셨어요?”배윤호는 손끝으로 무언가를 천천히 문지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승아가 또 말을 붙였다.“그리고 하율 씨... 둘째 도련님한테 좀...”배윤호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그 표정 하나로 ‘그만’이란 뜻이 확실했다.양승아는 혼자 결론을 내리듯 능청스럽게 웃었다.“아, 알겠네요. 대표님은 지금... 불난 틈 타서 확 들어가려는 거죠.”“...”“그런데 그 재킷은요. 아무리 봐도...”“입 다물어.”...강하율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숨부터 돌렸다. 젖다 만 옷이 살에 들러붙어 불쾌했고 머릿속도 뒤죽박죽이었다. 결국 샤워부터 하고 차분히 정리하자 싶었다.장갑을 끼고 씻긴 했지만 씻고 나오니 물이 조금은 닿을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집에 화상 연고가 없다는 게 떠올라 휴대폰으로 약을 주문하려고 가방을 더듬는데 손끝에 작은 봉투 하나가 잡혔다.안에는 조금 전 배윤호가 발라 준 화상 연고가 들어 있었다.설명서에는 주의 사항이 펜으로 표시돼 있었는데 거기에는 또렷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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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강하율은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름이 배윤호로 떠 있는 걸 확인하고도 프로필에는 해 뜨는 사진만 달랑 걸려 있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흔한 감성 계정 같아서 이게 정말 배윤호가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강하율은 괜히 시간을 끌 수 없어 바로 수락을 눌렀다.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메시지도 보냈다.[오빠,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재킷을 세탁했다가 망가뜨렸어요. 얼마든지 물어드릴게요.]곧바로 답이 왔다.[2천만.][...]그 숫자를 보는 순간, 강하율은 숨이 턱 막혔다.요즘 강하율은 2천만 원은커녕 천만 원도 당장 꺼낼 돈이 없었다.대학생 때는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를 해결하면서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쪽도 챙겨야 했다.취업하고 나서는 벌어들이는 돈 대부분을 아버지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데 쏟아부었다. 일을 하면서도 당시 증인을 찾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시간이 쌓이니 업무도 자꾸 밀렸다.지배인은 그런 강하율 사정을 알아채고 어떤 일은 내려놓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 사건은 너무 오래됐고 강하율 혼자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었다.그래서 강하율은 더 악착같이 일하고 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돈으로 사설탐정을 붙여 사람을 찾고 남는 돈은 배씨 가문에 갚았다.예전에 조윤서가 강하율을 지키겠다고 강씨 집안 빚 60억을 대신 막아 준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배씨 저택에서 어떤 취급을 받든 강하율은 늘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눌러 왔다.그때 배윤호 메시지가 다시 떴다.[문제 있어?]강하율은 입술을 깨물었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조심 글자를 눌렀다.[저... 차용증 써도 될까요?][그래. 나중에 써.]망설임 한 점 없는 답이었다. 강하율은 그 한 줄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배윤호가 냉정하고 손해 안 보는 사람이라고들 하던데 진짜 딱 그 말 그대로였다.‘이미 한 번 입은 옷인데 그래도 조금은 깎아줄 법도 한데.’하지만 곱씹어 보면 배윤호가 틀린 것도 아니었다. 결국 강하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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