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261 - Chapter 270

354 Chapters

제261화

해인은 늘 기가 막히게 알맞은 때에 나타났다.메말라 있던 소년 유호의 마음 한복판에 어느 날 문득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때부터 유호는 아무도 모르게 해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보기 시작했다.한씨 가문의 장남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한유호가, 남들 눈을 피해서 짝사랑이나 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해인은 한 번도 유호를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해인의 시선은 늘 태겸에게만 향해 있었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는 게 정말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가?’유호는 믿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소유욕 때문에, 나중에 유호는 한원랑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오토바이 경기에 나갔다.태겸도 그 경기에 참가했고, 유호에게는 가장 강한 상대였다.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 둔 시점에서 해인의 눈길을 끌고 싶었던 유호는 아주 깔끔한 인코스 추월을 해냈다.하지만 인코스 추월은 몹시 위험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오토바이가 뒤집히고 목숨까지 날아갈 수 있는 방식이었다.그래도 유호는 결국 해냈다. 태겸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시상대 위에 오른 유호를 향해 해인은 정말로 시선을 주었다.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한씨 가문에서는 누구 하나 유호의 우승을 기뻐하지 않았다.대체 어디서 새나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원랑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유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에 갇힌 채 반죽음이 되도록 맞았다.그때 유호는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갔다.그건 수년 동안 한원랑이 가장 크게 화를 낸 날이었다. 채찍질이 끝날 무렵, 한원랑 눈은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고 손바닥까지 떨리고 있었다.“아주 대단하네? 경주 한 번 하겠다고 목숨까지 내놔? 인코스 추월? 차라리 하늘로 날아가지 그랬냐?”“그런 쓸데없는 트로피가 네 목숨 걸 만큼 값어치가 있어? 네가 잘못되면, 진짜 죽으면 어떻게 됐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은 해 봤어?”한원랑은 말을 잇다가 바닥에 엎드린 채 숨만 겨우 몰아쉬고 있는 유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채찍을 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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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태현이 말했다.“고태겸을 그냥 비교 대상으로 써먹어. 그쪽에 붙여 버리는 거지.”유호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붙여?”“생각해 봐. 제수씨랑 고태겸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였잖아. 그런데 지금은 고태겸이 제수씨를 배신한 거고.”“그럼 제수씨도 이제 사랑이라는 걸 쉽게 믿지 못할 거 아니냐.”태현은 점점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근데 네가 고태겸이랑 비교되게 만들면, 고태겸이 엉망이면 엉망일수록 네 진심이 더 도드라져 보이잖아. 제수씨 입장에서는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거고.”말을 마친 태현은 제법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최신 소식도 알고 있거든. 고태겸이 새로 만나는 여자가 생겼더라. 예씨 집안 그 딸이랑 붙어 다닌대.”유호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예씨 집안?”“예지안 말이야. 지난번 예씨 집안 생일 잔치 때 너도 봤잖아.”그 말을 듣는 동안 유호의 표정은 더 싸늘해졌다.‘고태겸이 미쳤나?’예전에 주여진은 예씨 집안과 재혼하면서 해인을 혼자 남겨 두고 떠났다.그 사실은 태겸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고태겸이 예씨 집안 여자를 만난다고?’그건 누굴 불쾌하게 만들겠다는 건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태현은 계속 유호를 설득했다.“유호야, 내 말 믿어. 고태겸이랑 제대로 비교되게 만들어. 그러면 고태겸도 제풀에 꺾일 거고, 제수씨도 네 진심을 더 확실히 느끼게 될 거야.” “네가 제수씨한테 얼마나 잘하는지도 보게 될 거고.”유호는 태현의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해인이 마음속엔 이미 고태겸은 없어. 괜히 그렇게 만들면 해인이만 더 난처해져.”유호는 지난번 방송국 라이브를 떠올렸다. 그때는 온갖 사람들이 전부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몰려들었다.그런 일은 남자에게 미치는 타격보다 여자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훨씬 더 거셌다.생방송이 끝난 뒤 온라인에는 해인을 향한 악담이 수없이 올라왔다. 행실이 가볍다거나 이 남자 저 남자 다 건드리고 다닌다는 등, 입에 담기조차 싫은 말뿐이었다. 본가에서 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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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새로 뽑은 차를 뒤에서 누가 들이받았는데,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대현은 막 화를 내려고 했다. 그런데 차 안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았다.‘어디서 봤더라.’곧 대현은 기억을 떠올렸다.‘저번에 제수씨랑 식당에서 같이 밥 먹던, 그 여자잖아.’대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혹시 네 남편... 그쪽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너 같은 예쁜 애를 두고 왜 보고만 있어?’‘둘 다 성인인데,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한집에 살면서 밤은 긴데, 분위기 잡힐 만한 상황도 많을 텐데 진짜 각방 쓰면서 지내는 거야?’그건 지난번 식당에서 대현이 승아와 해인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속으로 했던 생각이었다.그때도 대현은 느꼈다.승아는 참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탁 트인 곳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목소리를 좀 낮출 생각조차 없어서, 옆에서 밥 먹던 대현이 죄다 듣고 말았으니까.대현은 승아를 알아봤지만, 승아는 대현을 알지 못했다.해인이 그 스포츠카 값이 수십억대일 거라고 말했을 때, 승아는 이미 끝났다고 느꼈다.‘망했다.’승아는 다급하게 외쳤다.“저 돈 없습니다!”브레이크를 아주 늦게 밟은 건 아니지만, 스포츠카의 뒤쪽 범퍼는 움푹 들어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수리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간 뒤에야, 승아는 그 말이 꼭 배 째라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고 깨달았다.승아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톡 지갑 화면을 열었다. 뭐라도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저 진짜 돈 없습니다.”화면 속 통장 잔액은 정말 처참했다. 남아 있는 돈은 고작 10만 원뿐이었다.집이 망한 뒤 승아네가 살던 집마저 은행에 넘어갔고, 부모님은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고 있었다.승아도 며칠 전에 반 년 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고 나서, 가진 돈이라고는 저 10만 원이 전부였다. 월급날이 오기 전까지는 카드로 겨우 버텨야 했다.승아는 고개를 들고 대현을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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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소함청이 말했다.“다들 잠깐 주목해 주세요.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새 직원입니다.”말을 마친 소함청은 지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누구 밑에서 배울지 지안 씨가 정해요.”지안은 망설임도 없이 해인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기세 좋게 말했다.“저는 이분으로 하겠습니다.”해인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소함청이 해인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지안 씨는 인사팀에 가서 등록부터 하고, 이따가 컴퓨터 한 대 받아와요.”소함청은 그렇게 말한 뒤 해인에게 시선을 옮겼다.“강 팀장은 잠깐 내 방으로 들어오세요.”해인은 소함청을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소함청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예지안 씨는 본사 쪽에서 내려 보낸 인턴이에요. 빽이 있는 사람이라 앞으로 반 년 동안 강 팀장 밑에서 실습하게 될 거예요.”“형식상으로는 강 팀장 비서 역할을 맡게 되고요.”해인은 지안이 누구를 겨누고 들어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역시 나를 겨누고 들어왔네.’해인과 지안은 동갑이었다. 지안은 대학을 졸업한 지도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그동안 예씨 집안에서 일이라고는 하지 않은 채 쇼핑이나 다니고 여행이나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지안이 갑자기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니, 해인의 눈에는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다.해인이 와세라에 들어온 지도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이었다. 막 자기 팀을 꾸려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윗선에서 보낸 사람을 해인이 대놓고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더구나 소함청이 아예 지안이 낙하산이라고까지 말해 준 이상, 해인이 거부하면 소함청만 곤란해질 게 뻔했다.소함청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이력서 묶음을 들고 해인에게 건넸다.“이 사람들도 한번 보세요. 강 팀장 눈에 맞는 사람으로 골라서 팀에 같이 넣으면 돼요.”해인은 이력서를 받아 들고 넘겨보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이력서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남자였다.해인은 그제야 소함청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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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역시 너였네.”지안은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맞아, 나야. 그래서 네가 나한테 뭘 할 수 있는데?”지안은 기세등등한 미소를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해인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핸드폰 화면을 두어 번 눌렀다.30분쯤 뒤, 프런트에서 지안 앞으로 택배 하나를 보내왔다.택배 상자 겉면에 태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본 지안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안은 얼른 상자를 뜯어 열었다.그런데 안에 든 걸 확인한 지안은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났다.수의 한 벌과 하얀 가루 한 줌이 들어 있었다.“이게 뭐야? 설마 유골이야?”너무 놀란 탓에 지안의 목소리는 갈라지듯 높아졌다. 지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하이힐이 벗겨지며 발목까지 접질렀다. 꼴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해인의 사무실은 비교적 조용한 곳에 있었고, 이 구역에는 다른 직원도 없었다.지안은 비서 자리라서 해인의 사무실 바로 바깥 칸막이 안쪽에 앉아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해인은 바깥 상황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지안의 얼굴은 백지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두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상자 안 물건에 제대로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눈물이 번지면서 지안의 화장은 엉망이 되었고, 하얀 뺨에는 선명한 눈물 자국 하나가 길게 남았다.그 모습을 본 지안은 단번에 감을 잡았다.‘강해인이 한 짓이구나.’지안은 그대로 해인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따지듯 소리쳤다.“강해인! 너지?”해인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뭐가?”“아직도 모른 척할 거야? 밖에 있는 저 죽은 사람 유골 같은 거, 네가 보낸 거 아니야?”지안은 분에 못 이겨 목소리를 높였다.“강해인, 너 진짜 비열하다! 네가 해 놓고도 발뺌해? 누구 무덤이라도 파헤친 거야? 너 사람으로서 양심도 없어?”해인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면서 지안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는 힘도 거의 실리지 않았고, 오히려 나른한 기색만 어려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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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해인은 언제까지 야근하게 될지 몰라서, 유호가 보내 준 기사를 먼저 돌려보냈다.그런데 해인이 한밤중에 회사에서 나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기사의 아이가 열이 난다는 말을 들은 터라, 이 시간에 다시 와 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해인은 회사 건물 아래에 서서 핸드폰 앱에 떠 있는 택시 대기 화면을 한 번 봤다.비가 오는 날이라 차가 잘 잡히지 않았고, 일반 택시도 블루도 대기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겨 있었다.옆에 선 지안이 비꼬듯 말했다.“쯧, 한 대표랑 그렇게 애정 행각 티 내는 걸 좋아하더니. 한 대표는 왜 안 데리러 와?”유호도 오늘 밤은 야근이었다. KH그룹처럼 큰 회사는 바쁠 땐 그게 일상이었다.말이 끝나자, 회사 건물 아래로 포르쉐 한 대가 멈춰 섰다.지안의 입가에 뽐내는 웃음이 번졌다.“내 남자친구가 날 데리러 왔네.”아니나 다를까 포르쉐 안에서 검은 우산 하나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태겸이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왔다.해인은 지안의 그런 유치한 과시를 상대할 마음조차 없었다.해인이 야근하는 동안 지안이 왜 밤늦게까지 집에 가지 않고 밖에서 버티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해인 앞에서 애정 행각을 보여 주려고 그랬던 거였다.우산이 태겸의 얼굴을 가렸고, 태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지안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태겸이 앞까지 오자 지안은 곧바로 태겸의 팔장을 끼며 말했다.“비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태겸 씨는 진짜 나한테 잘해주네. 날 일부러 데리러 와 주고!”태겸은 애초에 일부러 지안을 데리러 온 게 아니었다.일찍 퇴근해서 친구들과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런데 술을 마시는 도중에도 지안은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평소 같았으면 태겸은 아예 답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술이 좀 들어간 탓에 실수로 대화창을 열었다가 지안이 보낸 위치를 봤다.그곳은 와세라였다.그제야 태겸은 지안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왜 거기에 있는 건지, 해인을 찾아가 시비를 건 게 아닌지 물었다.지안은 지금 와세라에서 인턴 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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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해인은 차갑게 말했다.“괜찮아. 내가 부른 차 곧 와.”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짙은 먹구름까지 휘감고 지나가면서 빗줄기가 한층 더 거세졌다.태겸은 반사적으로 해인의 손목을 붙잡고 건물 안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겼다.빗물이 해인에게 튈까 봐 몸이 먼저 움직인 거였다.해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본능적으로 손을 확 빼냈다.옆에 있던 지안의 표정이 바로 가라앉았다.분명 지안 자신이 태겸의 여자친구고, 빗물에 젖고 있는 건 지안인데도 태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뭐야. 나한텐 눈길도 안 주고, 강해인한테만 저러는 거야?’태겸은 망설이지 않고 해인의 말을 잘라냈다.“앞쪽에 사고 나서 차가 아예 못 들어와. 무슨 수로 차가 와.”이어 태겸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차도 못 타겠다는 거, 해인아, 아직도 나를 못 놓아서 그러는 거 아냐?”해인은 태겸이 일부러 자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도 해인은 끝까지 차갑게 넘기기로 했다.‘저 말에 반응하는 쪽만 우스워져.’지안은 속이 뒤집힐 만큼 분했다.그래도 지안은 억지로 태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그냥 가는 길에 태워 주겠다는 거잖아. 강 팀장, 너무 유난 떨지 좀 마. 얼른 가자. 시간도 늦었는데 괜히 다 같이 시간 버리지 말고.”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두 사람과 더는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 분명했다.태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곧바로 해인 앞에서 지안의 어깨를 불쑥 감싸 안으며 툭 내뱉었다.“저렇게까지 싫다는데, 그냥 가자.”지안은 뜻밖의 반응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당장이라도 태겸의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다.지안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말했다.“태겸 씨, 차에서 기다려. 회사에 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아. 잠깐 올라갔다 올게.”“응.”지안이 돌아서는 걸 바라보면서도 태겸은 바로 차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처마 아래에는 한동안 태겸과 해인만 남았다.해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곁눈질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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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눈 한번 깜빡일 사이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해인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태겸은 줄곧 해인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해인이 몇 걸음 옮기는 동안에도 태겸의 시선은 해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위에서 뭔가가 떨어져 해인을 덮칠 거라는 걸 알아차리자, 태겸은 거의 반사적으로 해인 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해인은 등에 갑자기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 들었다.강한 힘이 뒤에서 밀려들면서 해인을 옆으로 밀어냈다.비가 오는 날이라 바닥이 미끄러워서, 해인은 휘청하다가 그대로 땅에 넘어졌다.거의 같은 때였다.등 뒤에서 태겸의 낮은 신음이 들리더니, 곧바로 화분이 바닥에 부딪친 화분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뒤따랐다.바닥으로 떨어진 화분들은 산산조각이 났다.태겸의 몸도 거세게 바닥에 쓰러졌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번졌다.붉은 피와 빗물이 뒤섞인 광경에 해인은 잠시 동안 머리가 텅 빈 듯 멍해졌다.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리자마자, 해인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층을 올려다봤다.6층 쪽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창가에 놓아 두었던 다육이 화분이 아래로 떨어진 거였다.‘설마... 바람 때문이야?’저 화분들은 원래 해인을 향해 떨어진 셈이었다.‘태겸이 제때 나를 밀어낸 거야...’빌딩 경비원도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와 상황을 살폈다.태겸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머리를 맞은 듯 이마 옆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피가 태겸의 흰 셔츠를 붉게 물들이면서, 태겸은 빗속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더 처참해 보였다.해인은 태겸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지만, 태겸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해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곧바로 쪼그려 앉아서 태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태겸은 눈을 떴다.그런데 태겸이 가장 먼저 한 건 해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일이었다.“괜찮아. 너는? 다친 데 없어?”“안 다쳤어.”해인은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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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태겸의 안색은 갈수록 더 창백해졌다.이마에서 흐르는 피도 점점 많아져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해인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차 안으로 올랐다.“빨리 병원으로 가세요!”오수찬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액셀을 밟았다.차는 밤길을 가르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위층에 있던 지안은 그 장면을 보고 속이 뒤틀릴 만큼 화가 치밀었다.지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막상 그런 때가 되자 태겸이 해인을 밀쳐서 살릴 줄은 정말 몰랐다.‘자기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강해인 대신 자기가 다치겠다고 몸으로 막아?’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지안은 급히 창가에서 물러났다.지안은 해인이 태겸의 차에 올라타는 모습까지 똑똑히 봤다.‘뻔뻔한 년. 여우 같은 게, 또 남의 남자를 꼬시고 있네.’지안이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빌딩 경비원은 안전 문제를 살피느라 분주했고, 지안을 보자 시선이 한 번 더 머물렀다.“나가실 때 조심하세요. 아까 바로 아래로 물건이 떨어져서 사람이 다쳤습니다.”지안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그 물건은 지안이 직접 밀어 떨어뜨린 거니까.지안은 속이 어지러울 만큼 답답했다.방금 태겸을 다치게 해 놓고서 병원까지 따라갈 염치는 없었다.결국 집에 있는 기사에게 먼저 연락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했다....태겸은 그렇게 병원으로 옮겨졌다.의사는 상처를 확인한 뒤, 태겸에게 영상 검사부터 받아 보자고 했다.해인은 핸드폰을 한 번 봤다.원래 해인은 태겸을 병원에만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오수찬 혼자 접수와 병원비 납부도 해야 했고, 태겸을 부축해 검사까지 받게 하려면 아무래도 손이 모자랐다.해인은 납부 대기표를 받아 들고 오수찬에게 말했다.“고 대표 데리고 검사 받으러 가세요. 제가 납부하고 올게요.”태겸이 다친 건 결국 해인 때문이었다.이 일은 작게 넘어갈 수도 있었고, 크게 번질 수도 있었다.방금 의사가 상처를 살펴본 뒤, 가벼운 뇌진탕 가능성이 있고 피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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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태겸은 해인에게서 은은한 향기를 맡았다.예전의 태겸이 가장 좋아하던 향이었다.지금 이렇게 해인이 가까이 있자, 태겸은 심장이 제멋대로 빨리 뛰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태겸은 해인을 정말 좋아했다.특히 해인이 선을 긋고 돌아선 뒤부터는,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감정이 태겸 안에서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태겸은 이 관계를 어떻게든 다시 이어 붙이고 싶었다.오늘 밤만이라도 해인을 여기 붙잡아 둘 수 있다면, 태겸은 해인을 다시 자기 곁으로 돌려 세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한 번만 더. 한 번만 기회를 잡으면 돼.’해인은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태겸은 놓아주지 않았다.태겸은 간절한 목소리로, 억울함까지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해인아. 나한테 좀 있어 줘.”그때 태겸의 손바닥에 딱딱한 감촉이 닿았다.해인의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물건이 손바닥을 눌렀다.태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해인의 약지에는 큼직한 다이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핑크 다이아는 병실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빛났고, 한눈에 봐도 값이 엄청나 보였다.태겸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낮게 물었다.“한유호가 준 거야?”해인도 손을 내려다봤다.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응. 예쁘다고 생각하지? 그것도 새 거야. 우리 그이가 출장 갔다가 직접 들고 온 다이아거든. 다른 여자의 손을 거친 적도 없는 거고.”태겸은 표정이 굳어진 채 해인을 바라봤다.해인이 일부러 그런 말을 꺼냈다는 걸 태겸도 알 수 있었다.예전에 태겸이 건넸던 결혼반지가 다른 여자의 손에서 나온 물건이었다는 걸, 해인이 비웃고 있는 거였다.입술을 다문 태겸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이어서 변명하듯 말했다.“나도 그 반지를 하예주가 몰래 꺼내서 끼워 본 줄은 몰랐어.”태겸도 나중에야 알았다.예주의 핸드폰을 보다가 예주가 올렸던 SNS 게시물을 보고서야, 예주가 태겸이 해인에게 주려던 결혼반지를 몰래 껴 봤다는 걸 알게 됐다.그 게시물은 태겸에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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