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331 - Chapter 340

354 Chapters

제331화

예전의 태겸은 다정한 사람이었다.그런데 해인과 약혼 관계가 끝난 뒤부터, 태겸의 감정은 자꾸만 불안정해지는 것 같았다.해인은 이마에 힘줄이 불거진 태겸을 바라봤다.지금 눈앞에 있는 태겸은 해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그래서 해인은 더럭 겁이 났다.태겸은 무슨 일이든 극단적으로 저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래도 해인은 태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날 유호 씨가 나를 구한 건 맞아. 근데 그때만 해도 나는 유호 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내 마음이 정말로 돌아선 건, 그 뒤로 네가 나를 계속 외면했기 때문이야.”“해인아, 그래서 내가 지금 너무 후회하고 있어.”태겸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그는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괴로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런 태겸을 보고도 해인은 아주 차분했다.문득 고개를 든 태겸이 진지한 눈으로 해인을 똑바로 바라봤다.“해인아,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돼?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예전보다 훨씬 더 잘하고 더 많이 사랑할게.”“그럴 일은 없어.”해인의 눈은 잔잔했다.조금의 물결도 없었다.“잘못한 건 너잖아. 그런데 왜 내가 네 후회를 대신 감당해 줘야 해?”“그래도 너도 아직 나를 신경 쓰잖아. 그날 화분이 떨어졌을 때도 나를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은 너였잖아.”해인이 담담하게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 되는데? 그때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너 말고 다른 사람이었어도, 나는 그냥 두고 못 갔어.”해인을 바라보는 태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못 믿겠어. 네가 정말 나를 하나도 안 사랑한다는 거.”그 말과 함께 태겸이 다시 액셀을 밟았다.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또 어디로 가려고?”“날 안 사랑한다며.”처연하게 웃는 태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눈에는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내가 한유호한테 전화했어. 지금쯤 여기로 오고 있겠지. 내가 지금 너를 데리고 한유호한테 갈 거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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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2화

태겸은 처연하게 웃었다.‘포기?’‘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어?’태겸은 요즘 들어 수없이 스스로에게 말했다.고작 첫사랑일 뿐이라고, 이제는 그만 놓아버리자고.그런데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 거세졌다.예전에 해인과 함께했던 기억들은 쉴 새 없이 태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태겸과 해인 사이의 얽힘은 너무 깊었다.사람들은 다들 16살 이후의 해인은 태겸 없이는 못 사는 줄 알았다.그런데 아무도 몰랐다.정작 놓지 못한 쪽은 태겸이었다는 걸.‘해인아... 나는 아직도 안 되는데...’...“해인이 어디 있어요?”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유호는 전화 두 통을 받았다.한 통은 최수나가 건 전화였다.최수나는 본가 운전기사인 장 기사가 누군가에게 매수되었고, 돌아가는 길에 해인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고 알렸다.유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밖으로 나갔다.유호는 아는 사람들을 움직였고, 결국 한 병원 정문 앞에서 장 기사가 탄 차를 막아 세웠다.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본 장 기사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작은 사모님은 벌써 내리셨습니다... 아직 집에 안 들어가셨습니까?”유호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지면서 검은 눈동자에는 싸늘한 기운이 서렸다.“해인이 어디 있는지 말해요.”장 기사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대표님, 진짜입니다. 저는 작은 사모님한테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유호의 눈이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내가 너무 봐줬나 보네.’‘이제는 아무나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서려고 해.’바로 그때, 두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태겸이었다.해인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태겸이 직접 말했다.유호는 두 사람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차에 올랐다.그리고 곧장 교외 쪽으로 차를 몰았다....태겸이 해인을 데려온 길은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외진 도로였다.평소에도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해인은 멀리서 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봤다.한참 떨어져 있었는데도, 해인은 단번에 알아봤다.운전석에 있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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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3화

뉴스에서는 교외에서 40km쯤 떨어진 지점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주여진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처음에는 그저 집 안이 너무 조용해서 소리라도 틀어 두려는 마음이었다.그런데 앵커가 그 사고가 인위적으로 벌어진 일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하는 대목에서, 주여진의 눈길이 멈췄다.주여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카메라는 한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크게 놀란 상태인 해인은 입술에 핏기조차 돌지 않았다.사고 현장에서는 불길이 거세게 치솟고 있었다.차 두 대는 이미 새까맣게 타 버려 뼈대만 남은 상태였다.B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재벌가의 젊은 후계자 두 사람이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두 사람의 상처가 워낙 심한 탓에, 오히려 해인이 더 눈에 들어왔다.현장에서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은 해인뿐이라고 했다.불이 본격적으로 번지기 전에, 해인이 이미 형체가 망가진 차 안에서 두 사람을 끌어냈다는 말도 이어졌다.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주여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텔레비전 속 해인의 얼굴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어디 다친 건 아닌지, 주여진은 더럭 겁이 났다.교통사고라는 말만 들으면, 주여진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그날 밤이 제멋대로 되살아났다.그 장면이 눈앞을 스치자, 주여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손마저도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주여진은 곧장 몸을 돌려 핸드폰을 찾았다.가장 위에 고정해 둔 번호를 눌러 해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해인아, 제발... 너는 아무 일 없어야 해.’하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였다.주여진은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눈가를 붉히면서 허둥지둥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문득 부엌에 갈비찜을 올려둔 게 떠올랐다.주여진은 가사도우미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따가 갈비찜 불 좀 꺼 줘요.”가사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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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4화

지안이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모습을 보자, 예철진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동안 방에서 한 번도 안 나오더니, 고태겸이 사고 났다는 말에 이렇게 허겁지겁 뛰어나와? 네가 그런다고 고태겸이 고마워할 것 같아?”지안이 홱 돌아서서 예철진을 노려봤다.“제가 제 행복을 찾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인데요?”예철진이 콧방귀를 뀌었다.“행복은 무슨. 거울은 보고 다니냐? 지금 네 꼴이 어떤 줄 알아? 그러고 나갔다간 사람들 식겁하겠다. 고태겸이 너를 제대로 봐 준 적이나 있었어?”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지안은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보름 넘게 한 번도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방 안에 틀어박힌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제대로 씻지도 꾸미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이런 모습으로는 안 돼.’이런 모습으로는 태겸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한 지안은 곧바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씻고 머리를 정리한 뒤 옷도 갈아입었다.예철진은 옆에 서 있던 집사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경호원 둘 불러. 지안 아가씨 방 앞에 세워 두고 잘 지키도록 해. 내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해.”집사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예, 알겠습니다.”집사는 곧장 사람을 부르러 갔다.한 시간쯤 뒤, 지안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아빠, 저를 감금한 거예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런 식으로 하세요?”문밖에서 예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이 어느 때든 나는 네 아버지야. 얌전히 있어.”지안은 예철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예철진은 한 번 말한 건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이다.지안은 더 문을 두드려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았다.지안은 울먹이며 태상에게 전화를 걸었다.자기를 도와달라고, 제발 한 번만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두 시간 뒤, 지안과 태상은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오는 내내 태상이 지안을 달랬다.“지안아, 아버지 너무 원망하지 마. 아버지도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러신 거야.”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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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5화

희정은 예씨 집안 남매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희정은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대신 병원 뒤편에 붙어 있는 업무동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최상층 버튼을 누른 뒤, 문이 열리자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희정은 가장 넓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서진을 보자마자 희정은 말끝을 돌리지도 않았다.“서진아, 나 뭐 하나만 좀 알아봐 줘.”희정이 부탁하면 서진은 대체로 거절을 잘 못 했다.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금테 안경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 올리면서, 서진이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뭔데?”“사람 머리 안에 칩 심는 연구, 실제로 한 데가 있어? 칩 이식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알고 싶어.”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희정을 보는 눈에 의문이 어렸다.“갑자기 그건 왜?”영화감독인 희정은 의학 쪽과는 원래 접점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그런 희정이 느닷없이 이런 걸 묻는 건 아무래도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서진이 키보드를 두어 번 두드리자, 곧 화면에 웹페이지 하나가 떴다.서진은 잠시 내용을 훑어본 뒤 말했다.“실제로 그런 연구를 하는 실험실은 있어. 다만 외국 쪽이야. 거기는 이미 테스트 단계까지 간 것 같아. 대신 적용 대상은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 환자나, 전신마비로 말을 못 하는 환자들 위주였어.”희정이 책상 쪽으로 다가가자, 서진과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희정은 망설이지 않았다.“그럼 너... 그 칩 구해 줄 수 있어?”진씨 집안은 원래 의료계와 연결된 일이 많았다.그래서 희정은 이 일이 서진에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부탁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서진의 표정이 굳어졌다.“희정아, 아직도 말 안 했잖아. 그 칩을 어디에 쓰려고?”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희정의 눈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욕망이 담겨 있었다.서진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숨을 들이마셨다.“설마... 한유호한테 쓰려고 하는 거야?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알아. 너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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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6화

희정의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이 서진의 손목 안쪽으로 흘러내렸다.희정의 눈물도 그대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서진의 시선은 희정의 얼굴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희정의 눈을 보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분홍빛 입술 위에 멎었다.“희정아...”희정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너도 알잖아.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가 죽은 그 일에서 못 벗어났어. 강해인의 친엄마가 그렇게 우리 차씨 가문 집 안으로 들어왔고...”“그런 여자가 낳은 딸한테라도 갚아 줘야 겨우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아니면 이건 나한테 평생 풀리지 않는 응어리로 남을 거야.”희정은 끝내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사람들은 늘 희정을 차씨 가문의 외동딸,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라고 말했다.하지만 정작 실상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희정이 기억하기 시작한 때부터, 집 안 공기는 늘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는 걸....희정의 어머니 조수경은 부시장 집안의 외동딸이었다.귀하게 자란 사람이었다.조수경은 차장섭에게 마음을 줬다.그래서 외할아버지에게 매달려서라도 차장섭과 결혼하겠다고 했다.그때 차장섭은 아직 말단 자리에 있던 공무원이었다.자기보다 훨씬 나은 집안에서 먼저 혼담이 들어오자, 차장섭은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차씨 가문은 분명 약속했다.결혼만 하면 조수경을 아끼고 잘 대해 주겠다고.그런데 결혼식이 끝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차장섭은 공무로 지방에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비웠다.그렇게 떠난 뒤 석 달이나 돌아오지 않았다.석 달이 지나자 조수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차장섭은 그곳 사정이 너무 열악하다고 했다.씻는 것조차 불편한 곳이라, 곱게만 자란 조수경이 오면 버티기 힘들 거라고 했다.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조수경은 결국 사람을 시켜서 몰래 알아보게 했다.그제야 조수경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차장섭이 그곳에서 도수희와 함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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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7화

그때 도수희는 병색이 짙었다.입술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몸에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겨우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였는데도, 겉모습은 쉰을 훌쩍 넘긴 사람처럼 보였다. 머리카락도 반백이 되어 있었다.조수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대체 자기와 도수희 사이에 무엇이 그렇게 달랐는지.조수경은 집안도 도수희보다 나았고, 생김새도 더 빼어났고, 받은 교육도 더 좋았다.자기관리에 들인 시간도 많아서 여전히 젊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다.조수경과 도수희가 나란히 서 있으면, 마치 서로 다른 시대에서 온 두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그런데도 조수경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차장섭의 마음을 한 번도 얻지 못했다.조수경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조수경은 병원에서 크게 소란을 피웠다.도수희는 병실에 더 머무르지 못하고 급히 퇴원해야 했다.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뒤, 차장섭은 조수경과 크게 다퉜다.차장섭은 조수경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괴롭혔다고 몰아세웠다.차장섭은 조수경과의 결혼은 애초부터 웃음거리 같은 일이었다고도 했다.이제는 더는 조수경과 같이 살 수 없다며,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몰아붙였다.승부욕이 강했던 조수경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못하다고 여겼던 여자에게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틀 뒤, 조수경은 자기 방의 문을 잠근 채 손목을 그었다.희정의 외할아버지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그 말은 곧 조수경 쪽에는 더 이상 조수경을 지켜 줄 가족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그런데 차장섭은 이미 장인의 생전 인맥을 발판 삼아 시장 자리까지 올라 있었다.예전 장인보다도 더 큰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희정의 어머니는 그렇게 손목을 그어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일은 너무도 허망하게 그대로 묻혀 버렸다.희정은 그날을 잊지 못했다.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마주했던 그 장면을.어머니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피는 바닥 위로 흥건하게 퍼져 있었다.겨우 한 줄기 숨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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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8화

서진은 희정 부모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희정의 어머니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서진은 희정의 뺨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감싸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희정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알겠어. 그래도 네가 나랑 결혼하면 그 집안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게다가 그분도 원래 큰 병을 앓고 계셨고, 이제 남은 시간도 많지 않은데... 네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정이 말을 끊어 버렸다.“강해인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준 고통은 진짜였어. 우리 엄마는 결국 한을 품고 돌아가셨어.”“서진아, 너는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컸잖아. 온 가족이 너 하나만 바라보는 집에서 자랐고. 그러니까 너는 절대 내 마음을 알 수 없어.”사실 조수경은 가끔 희정에게도 화를 쏟아 냈다.큰소리로 몰아붙였고, 감정 기복도 심했다.희정은 오랫동안 대체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희정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조수경은 곧장 희정을 끌어안고 울었다.미안하다고 하면서.이런 집안에 희정을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처음에는 희정도 그런 어머니가 무서웠다.그러다 차츰 익숙해졌고, 끝내는 무뎌졌다.같은 여자로서 희정은 조수경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조수경이 얼마나 외롭고 막막했는지도 알았다.서진이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그게 강해인이랑 무슨 상관이야. 강해인은 강씨 가문에서 자랐어. 친엄마 얼굴도 보려고 하지 않았고, 네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없잖아.”희정이 허탈하게 웃었다.“왜 상관이 없어? 강해인 몸에도 도수희 피가 흐르잖아. 도수희한테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강해인이고.”“도수희와 차 시장이 우리 엄마를 죽게 만들었고, 내 가슴에도 이런 고통을 박아 넣었어. 그럼 나는 억울하지 않은 거야?”말을 마친 희정은 몸을 돌렸다.“됐어. 나도 너한테 끝까지 강요하고 싶진 않아. 오늘 내가 한 말은 그냥 이야기 하나 들은 걸로 생각하고 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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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9화

병원 최상층 사무실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뜨겁게 맞물려 있었다.서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들을 쓸어버리자, 서류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희정은 머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천장을 바라봤다.자기 손에 완전히 휘말린 서진을 보며, 희정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웃음이 스쳤다.‘됐어. 서진이 여기까지 왔으면, 절반은 이미 넘어온 거야.’희정은 잘 알고 있었다.서진이 한 번 승낙한 이상, 이 일은 이미 반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이 병원 전체가 진씨 가문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서진은 어릴 때부터 병원에서 자랐고, 서진의 아버지는 병원장이었다.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의사들이라면 서진을 모를 수가 없었다.서진 역시 이 병원의 차기 후계자로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서진이 희정에게 직접 약속한 일 가운데 지키지 않은 일은 거의 없었다.서진의 입술이 희정의 눈가와 이마를 천천히 더듬었다.서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희정아, 내가 널 도와도 이건 우리 가문 일이 아니야.”희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야?”서진이 희정을 바라봤다.“그 수술... 내가 직접 할 거야.”그 말은 곧 이 일은 어디까지나 서진 개인의 판단이고, 훗날 일이 드러나도 모든 책임은 서진 혼자 짊어지겠다는 뜻이었다.서진은 이미 각오를 끝낸 눈빛이었다.이 일을 진씨 가문까지 끌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필요하다면 가족과도 등을 질 각오를 한 사람처럼 보였다.희정은 문득 서진을 올려다봤다.서진은 화목한 집안에서 자랐다.부모와 가족에게 사랑받으며 큰 사람이었다.그런 서진이 지금은 자기 때문에 가진 걸 전부 걸고 있었다.‘정말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구나.’밀려오는 열기 속에서 희정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죽마고우를 바라봤다.서진이 자기에게 진심이라는 건 희정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희정은 서진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희정에게 서진은 그저 가까운 친구였고, 아주 오래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다.그 이상은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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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0화

간호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돌아서서 간호사실로 들어갔다.소식을 들은 고민건과 이소정이 밤늦게 병원으로 달려왔다.두 사람은 이미 한동안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마침 해인이 간호사와 나누던 말을 들은 고민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해인아, 간호사 말이 맞아. 너도 다쳤잖아. 우선 병실에 가서 쉬어. 태겸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사람을 보내서 바로 알려 줄게.”하지만 이소정은 다른 말을 꺼냈다.“해인이 어디 우리 아들 살고 죽는 걸 걱정해서 저러는 것 같아? 당신은 아직도 모르겠어? 해인이가 걱정하는 건 한유호잖아.”고민건은 미간을 찌푸렸다.옆에 서 있던 이소정을 한번 봤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소정은 아들이 걱정돼서 이미 몇 번이나 운 상태였다.그래서인지 목소리도 푹 잠겨 있었다.“해인아, 아무리 태겸이가 잘못했다고 해도 너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잖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까지 매정해야 했어?”이소정은 해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갑자기 태겸이 곁을 떠나 버리면, 태겸이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잖아. 그럴 땐 좀 달래 주고, 부드럽게 말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꼭 그렇게 태겸이랑 부딪쳐야 했어? 태겸이가 저런 극단적인 짓까지 하도록, 그대로 두고만 봐야 했냐고!”해인은 말없이 이소정을 바라봤다.하지만 해인의 눈은 어딘가 풀려 있었다.마치 이소정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같았다.이소정은 멈추지 않았다.“애초에 너를 우리 집으로 데려온 것도 태겸이였잖아. 태겸이가 아니었으면, 네가 그때 어디서 어떻게 지냈을지 누가 알아?”“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재가하셨잖아. 나하고 태겸이 아빠가 네 친부모가 아니라서, 평소엔 이런 말 함부로 안 하려고 했어.”“그래도 지금은 말해야겠다. 사람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매정하면 안 되는 거야.”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교통경찰은 고민건과 이소정을 따로 불러 사고 경위를 설명해 줬다.두 사람은 이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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