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61 - Chapter 70

354 Chapters

제61화

주헌은 사실대로 말했다.“말 그대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그럼 됐어.”유호가 단정하듯 말했다.“너는 미인계에 당한 거야. 그 여자는 여우 같은 여자거든.”주헌이 유호의 비서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제치고 살아남아야 했다.그런 주헌마저 판단을 흐릴 정도였다면, 유호는 그 여자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역시 계산적인 여자였군.’주헌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도련님은 언제 시간이 되시는지요? 가정법원 일정 잡아야 해서요.”결혼은 서류로 끝낼 수 있었지만 이혼은 달랐다.본인이 직접 가정법원에 출석해야 했고, 게다가 한 달의 이혼숙려기간도 존재했다.유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이런 건 빠를수록 좋지.”“그럼... 사흘 뒤로 잡을까요?”주말이 끼어 있어서, 가장 빠른 일정이 사흘 뒤였다.“그래.”...해인은 이른 아침부터 승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해인아, 너 우리 사촌 오빠하고 무슨 사이야? 어제 재준 오빠가 너 집에 데려다줬다면서?]어제 술을 마신 탓에 해인은 유난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시계를 보니 오전 열한 시였다.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해인은 전화기 너머로 조용히 대답했다.“응...”전승아는 표정이 훤히 보일 것 같다는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사촌 오빠가 아침부터 네 카톡 좀 알려 달라고 난리였어. 솔직히 말해서... 오빠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지 않아?]그제야 해인의 정신이 조금 또렷해졌다.해인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무슨 관심이야. 나 결혼했잖아.”[그건 그렇지.]승아가 말을 이었다.[계약결혼이긴 해도 혼인신고는 했으니까. 근데 말이야...]잠시 뜸을 들인 뒤, 승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가 너 때문에 ‘내연남’이 되겠다고 하면 어쩔 건데?]“풉...!”해인은 물을 마시다 그대로 뿜어냈다.“장난 좀 치지 마. 네 오빠도 그런 사람은 아니야.”말을 마친 뒤, 해인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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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집을 구하는 일은 하루이틀 안에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해인은 당분간은 호텔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다행히 짐은 많지 않았다.“승아야, 이만 끊을게. 나 짐 좀 정리해야 돼.”승아가 서둘러 말했다.[너 혼자 괜찮아? 아니면 내가 우리 오빠 보내서 도와줄까?]“괜찮아. 옷 몇 벌밖에 없어. 그리고...”해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 새 남편도 자기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거 안 좋아할 것 같아.”...30분쯤 뒤, 해인은 커다란 가방 몇 개를 들고 단독주택을 나섰다.캐리어를 끌고 다니자니 이동이 불편해, 근처 호텔에 방을 하나 잡고 짐부터 풀었다.모든 걸 정리한 뒤, 해인은 택시를 타고 KH그룹으로 향했다.KH그룹 본사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B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유명했다.꼭대기 층에 서면 도시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자체가 자본의 정점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해인이 차에서 내리자, 정문 앞 경비원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한 해인은 곧장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안녕하세요. 한 대표님을 뵙고 싶은데요.”안내데스크 직원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해인을 훑어봤다.“예약이 있으신가요?”해인은 잠시 멈칫했다.‘어제 한유호랑 통화는 했는데... 이게 예약이 되나?’‘그때 분명 확답은 안 했던 것 같은데.’해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지금 예약하면 안 될까요?”“죄송합니다. 한 대표님 일정은 이미 보름 이상 꽉 차 있어서요. 최소 2주 뒤에 다시 문의해 주세요.”해인은 그 말이 완곡한 거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KH그룹은 다른 회사들보다 보안도 출입 관리도 훨씬 까다로웠다.안내데스크에서 막히면, 위로 올라갈 방법은 없었다.잠시 고민한 끝에 해인은 핸드폰을 꺼내 유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네댓 번 울리고 나서야 연결됐다.[누구시죠?]“한 대표님, 저예요.”‘어제 메시지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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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유호는 해인과 50cm쯤 떨어져서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은 해인의 도자기처럼 하얀 뺨 위에 머물렀다.“밥 사준다며. 왜 멍하니 서 있어?”전화기 너머의 음성과 현실의 목소리가 겹치며 들렸다.해인은 고개를 들어 유호를 바라봤다.유호의 얼굴은... 열 번이 아니라 만 번을 봐도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이었다.그가 나타난 이후 주변의 소음도 한층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졌다.해인이 물었다.“뭐 드실래요?”유호가 직접 내려온 걸 보자, 데스크의 직원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채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인에게 향했다.그제야 직원은 알아차렸다.해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브랜드로 도배를 했고, 태도에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눈매 사이로 드러나는 차분함만 봐도 평범한 집안 사람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근데 이 여자분은 대표님이랑 무슨 사이야?’‘대표님이 직접 내려와서 사람을 맞이하다니.’‘이건 정말 처음 보는 장면인데.’‘...’해인은 유호의 롤스로이스 컬리넌을 타고 자리를 옮겼다.두 사람이 향한 곳은 비교적 담백한 음식을 하는 고급 식당이었다.왜 하필 담백한 식당이냐면, 유호가 직접 고른 곳이었고 이유는 간단했다.위에 부담이 없다는 것이었다.‘한유호는 젊은데 벌써 위가 안 좋은 건가?’해인은 속으로 잠깐 의아해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룸으로 안내를 받았고, 곧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유호는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고 앉았다.한 손은 테이블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두고 있었는데, 자세는 편안했지만 태도에는 타고난 품격이 묻어났다.유호의 시선은 해인이 아니라 음식 위에 머물러 있었다.보기에도 부담 없고, 깔끔한 상차림이었다.해인의 예민한 위에도 무리가 없을 메뉴였다.해인은 유호의 맞은편에 단정하게 앉았다.처음에는 태겸이 말했던 것처럼 이 남자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병원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는 다른 면도 보였던 게 사실이었다.어쩌면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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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해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볍게 연애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유호에 대한 인상이, 마음속에서 한결 더 두터워졌다.‘한유호는 노는 것뿐만 아니라... 꽤 무책임한 사람 같네.’권영자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에서도 격앙돼 있었다.울분이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난 몰라! 그 아가씨는 날 구한 은혜가 있는 사람이야. 네가 감히 이혼하겠다고 하면, 오늘 밤에 집에서 목 매달고 죽을 거야! 내일 넌... 본가에 와서 내 시신이나 거둬!]딱! 분노를 참지 못한 권영자는 소리를 치면서 전화를 끊었다.유호는 이런 반응에 이미 익숙했다.‘늑대가 나타났다’는 식의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웬만한 협박에는 흔들리지도 않았다.게다가 권영자는 1년에 열 번은 넘게 ‘목 매달겠다’는 말을 입에 올렸지만, 실제로 실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전부 유호를 압박하기 위한 말뿐이었다.유호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유호는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 해인의 시선과 마주쳤다.유호는 잠시 고민했다.‘방금 통화 내용을... 해인이 어디까지 들었을까?’‘혹시... 내가 이미 ‘기혼자’라는 걸 알게 된 건가?’유호의 눈에 짜증이 살짝 어렸다.해인은 말 없이 차를 따랐다. 자신의 컵을 채운 뒤, 유호 앞의 컵에도 조심스럽게 찻물을 부었다.유호의 사적인 일에 대해서 해인은 물어볼 이유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다만 유호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건 분명했다.‘여자 문제로 다툰 것 같은데...’‘괜히 그 여파가 나한테까지 튀면 곤란한데.’해인은 오늘 이 자리가 틀어질까 봐 괜히 더 조심스러워졌다.“유호 오빠, 이건 YD그룹 이번 분기 재무 자료예요. 연구 쪽이든, 시장 쪽이든 특별히 빠지는 부분은 없어요.”해인은 파일을 식탁 위에 올려 유호 쪽으로 천천히 밀었다.화제를 돌리려는 의도였다.하지만 유호의 시선은 파일이 아니라 해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치 해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해인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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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유호가 보기에는 태겸과 해인의 관계는 쉽게 끝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태겸이 있는 곳에는 늘 해인이 있었고, 태겸과 해인의 이름은 언제나 함께 따라다녔다.학생 시절부터 이미 그랬다.해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조용히 말했다.“완전히 끝난 거예요. 저는 고태겸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아요. 오빠도 아시잖아요. 고태겸은 YD그룹 임시 대표이사예요. 회사를 팔지 않으면... 저는 고태겸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요.”말을 절반쯤 했을 때, 해인은 유호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유호의 눈빛은 묵직했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해인은 이유 없이 등골이 서늘해져서, 술잔을 들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속에 올라오는 불안을 눌러보려는 행동이었다.잠시 후, 생각에 잠긴 듯했던 유호가 입을 열었다.“꼭 회사를 팔아야만 하는 건 아니야.”해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네?”“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만든 회사잖아. 정말로 포기할 수 있어?”해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YD그룹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고, 해인에게는 가족의 기억 그 자체였다.하지만 YD그룹에는 수천 명의 직원이 있다.자신의 미련 때문에 해인이 그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버틸 수는 없었다.상장기업은 감정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아니다.해인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시장은 해인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경쟁자는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다.알면서도 버티는 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할 뿐이다.약점을 드러낸 채 서 있는 건... 자신의 손으로 적을 초대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차라리 아프더라도 놓아주는 게 맞는 선택일 수 있었다.유호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회사를 지키면서도 고태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해인의 시선이 다시 살아났다.기대가 담긴 눈빛이었다.“어떤 방법인데요?”해인을 바라보는 유호의 시선은 그윽하면서 느긋했다.“결혼.”해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몇 초 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유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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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유호는 해인의 붉어진 뺨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야기 좀 했다고 벌써 부끄러워하네.’“네가 나를 찾아와서 YD그룹을 인수해 달라고 한 이유가 뭐겠어.”유호의 목소리는 낮았다.“내 능력을 본 거잖아. YD그룹을 더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유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그렇다면 결혼... 꽤 괜찮은 제안 아니야? 이렇게 하면 네가 안고 있는 문제도 다 정리되고.”해인은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이거... 내가 방금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 거지?’‘이게 도대체 어떻게 전개되는 거야.’‘한유호는 방금 전까지도 전화로 여자친구랑 다투고 있었잖아.’‘관계를 정리할 것처럼 말하더니, 바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해인의 머릿속에 이전에 회사에서 마주쳤던 장면이 스쳤다.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유호가 숨이 닿을 만큼 딱 붙어서 입을 맞췄던 그때.‘설마... 그때부터였어?’‘그때부터 한유호는 나한테 관심이 있었던 거야?’그렇게 생각하자 해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그럼 혹시... 한유호가 여자친구하고 틀어진 이유도 나 때문인 건가?’‘내 존재 때문에, 다른 여자가 상처받는 건 싫어.’‘한유호 여자친구는 어떻게 되는 거야.’‘이 남자, 여자를 바꾸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네.’‘앞사람이 완전히 정리되기도 전에 다음을 생각하는 타입이잖아.’‘역시... 가볍다.’‘여자하고 즐길 줄만 아는 사람 같아.’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해인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다만 눈빛에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나랑 결혼하면...”유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말했다.“후회 안 할 거야. 충분히 값어치 있어.”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해인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하지만... 저는 이미 결혼한 몸이에요.”그 말에 유호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투에도 싸늘한 기운이 섞였다.“강해인.”“거절하고 싶다고 해도 이런 농담까지 할 필요는 없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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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해인은 길가에 서 있는 유호를 보게 되었다.차에 기대고 서 있는 유호 앞에는 막 내뱉은 듯한 담배 연기가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해인은 잠시 멈춰 섰다.유호는 느슨하게 서 있었지만 훤칠한 모습이었다.‘어떻게 저 사람은... 담배 피우는 모습까지 눈길을 끄는 거지?’한참이 지나서야 해인은 시선을 거두었다.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며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 유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사람이 서 있는데 안 보여?”해인은 고개를 돌려 유호를 바라봤다.“절 데려다 주시려고요?”“괜히 감동할 필요 없어. 타.”유호는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었다.해인이 여전히 서 있자, 유호가 덧붙였다.“걱정 마. 안 잡아먹어.”잠시 망설인 끝에 해인은 조수석 쪽으로 걸어갔다. 마음속에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괜히 피할 이유도 없었다.유호는 내비게이션을 켰다. 화면에는 며칠 전 해인이 묵고 있던 호텔이 떠 있었다.해인은 고개를 돌려 몽롱한 눈으로 유호를 바라봤다.“저... 이사했어요. 하늘빌로요.”유호는 멈칫했다. 잠시 말이 없더니 유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언제 이사했어?”‘우리가 같은 단지에 살고 있었다고?’그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해인은 차창에 기대었다.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면서 눈을 크게 뜬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네온사인의 불빛이 해인의 하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유호의 질문이 들렸지만, 해인의 반응은 한 박자 늦었다.마치 느린 화면처럼 해인은 고개를 돌렸다.차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해인은 유호를 보고 살짝 웃었다.그 한 번의 시선으로 유호는 확신했다.지금의 해인은 술이 꽤 오른 상태였다.콘솔 쪽으로 손을 뻗은 유호는 담요 하나를 꺼내서 바로 해인에게 던졌다.짙은 나무 향이 퍼지며 해인을 감쌌다.그 안에서 눈을 감은 해인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20분 남짓한 거리였다.길다고 하기에도 짧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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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해인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하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온몸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침대 위로 쓰러졌다.‘어제도 술을 마시긴 했는데, 그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역시 식당에서 마신 술이라 그런가. 뒤끝이 너무 세네.’의식이 흐릿한 상태에서 해인은 자신이 이미 호텔로 옮겼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침대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잡아당겼다.몇 번을 애써 봐도 소용이 없자, 결국 해인은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아래층에서는 유호가 불이 환하게 켜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유호는 담배를 하나 물고 천천히 연기를 들이마시며, 시선을 내내 3층으로 이어진 계단 쪽에 두고 있었다.연달아 몇 대나 피웠지만, 위층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전해지지 않았다.들어오자마자 바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유호는 겨우 마음을 좀 진정할 수 있었다.운명이라는 건, 정말 잔인한 농담을 던질 줄 아는 것 같았다.‘이게 말이 되나?’몇 분 뒤, 유호는 주헌에게 전화를 걸었다.“오고 있어?”[네, 지금 막 집 앞입니다.]통화를 마치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유호는 주헌이 들고 있던 서류를 말없이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주헌은 한밤중에 어제 서명했던 이혼 서류를 다시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결국 유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이 서류에 문제가 있습니까? 수정이 필요한 조항이라도 있나요?”유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익숙한 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해인. 반듯하고 단정한 필체로 또렷하게 적힌 서명.유호의 시선이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음 순간 서명된 이혼합의서 두 부를 단숨에 찢어 버렸다.옆에 서 있던 주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아까 까지만 해도 이혼을 밀어붙였던 유호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주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호가 찢어버린 이혼 서류를 쓰레기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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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유호는 메시지를 확인하자 잠시 멈칫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고개를 돌린 유호가 주헌을 매섭게 노려봤다.‘이 자식, 뒤에서 해인이한테 도대체 뭐라고 말한 거야?’‘가정폭력? 무슨 가정폭력이야.’주헌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압박에 이유도 모른 채 목을 움츠렸다.유호 쪽으로 몸을 기울인 주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무슨 지시라도 있으십니까?”유호는 냉소를 흘리며 주헌의 어깨를 한 번 세게 쳤다.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네가 그렇게 대단한데, 내가 무슨 지시를 하겠어?”주헌은 이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유호는 원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치켜세우는 성격이 아니었다. 말끝에 실린 날 선 기색을 느끼자, 주헌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면서 반사적으로 책상을 짚었다.유호는 핸드폰을 주헌에게 던지듯 건네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핸드폰을 받고 해인이 1분 전에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자, 주헌은 손에 든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주헌이 목소리를 낮춰서 유호에게 해명했다.“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 그럼 강해인이 피해망상이라도 있는 거야? 강해인 혼자 내가 가정폭력을 저지른다고 상상한 거야?”주헌은 유호가 해인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그날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친 것도 도련님이었는데...’해인이 괜히 문제를 키우면서 매달리지 못하게 하려던 것도 사실이었고, 이혼을 빠르게 정리해서 유호의 골칫거리를 없애려는 의도도 있었다.그래서 주헌은 나름대로 수를 쓴 것이었다.‘그런데 이 반응을 보니까... 강해인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주헌은 핸드폰을 쥔 채 메시지를 입력했다.[아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 도련님은 가정폭력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습니다. 성품도 좋고, 부하 직원들에게도 잘하시고, 아내에게는 더 잘하십니다.]해인은 그 메시지를 보며, 주헌이 마치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이 문장은 누가 봐도 강요에 의해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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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유호의 사무실.주헌은 옆에 앉아 있는 유호를 힐끗 바라본 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아닙니다. 저와 도련님은 함께 있지 않습니다. 도련님 혼자 출장 가셨습니다.]해인은 정말로 말문이 막혔다.‘이혼하자고 한 것도 그쪽이고, 안 하겠다고 한 것도 그쪽이네.’하지만 해인은 더 따질 기력도 없었고, 저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낼 마음도 없었다.“그럼 그분이 돌아오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그 말을 끝으로 해인은 전화를 끊었다.핸드폰 화면을 힐끗 본 주헌은, 다시 책상 앞에서 만년필을 쥔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유호를 바라봤다.유호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그 시선을 받은 주헌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한동안 입도 열지 못했다.그러다 유호의 시선이 자신의 핸드폰에 머문 걸 보자 곧바로 반응했다.“제 핸드폰을 일단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필요 없으실 때 돌려주셔도 됩니다.”유호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유호는 해인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메시지는 며칠 전, 해인이 보낸 ‘월요일에 뵙죠’에서 멈춰 있었다.유호는 해인의 프로필을 상단에 고정하고, 그대로 글자를 입력했다.[그래서 이번 한 달 동안은 하늘빌에서 마음 놓고 살아도 됩니다.]해인은 메시지를 대충 훑어본 뒤, 그대로 대화창을 닫았다.주헌이 지나치게 참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어디에 사는지 비서가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그렇다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유호가 한참을 기다렸지만 해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유호는 주헌의 핸드폰을 옆으로 던져 놓았다....이날은 월요일이었다.가정법원에 가기 위해 해인은 반차까지 냈다.회사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예주를 둘러싸고 연신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아침 일찍부터 사내 메일로 예주의 과장 승진 공지가 연달아 도착한 모양이었다.축하 겸... 예주는 전 직원에게 밀크티를 돌렸다.HJ그룹 직원 수만 해도 수백 명이 넘었는데, 예주는 아낌없이 돈을 쓴 듯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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