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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정루아는 눈을 크게 뜨고 거칠게 몸을 비틀며 구태윤을 밀어냈다. 숨결이 흐트러졌고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었다.“미친 거 아니야?”구태윤의 숨결도 한층 무거워졌고 길게 찢어진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자초지종은 제대로 알고 말하는 거야?”“무슨 뜻이야?”구태윤은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이연희가 먼저 선을 세게 넘었어. 훈수 좀 둔 걸 가지고 왜 그래?”정루아의 눈빛이 흔들렸다.“연희가 무슨 선을 넘었다는 건데?”구태윤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낮게 말했다.“이연희가 먼저 형수님을 건드렸어.”또 정시연이었다.정루아는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고 손등까지 하얗게 질렸다. 이내 비웃음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연희가 정시연을 건드린다고? 내가 연희한테 분명히 말했어. 네가 정시연을 감싸고 돌 게 뻔하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걔가 무슨 배짱으로 네 심기를 건드리겠어?”정루아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꼬리는 붉게 물든 채 젖어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웠다.“내 말 알아들어? 연희가 그랬을 리 없어.”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쑤셨다. 구태윤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루아야,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정루아의 눈시울이 심하게 시큰거렸다. 처음에 느꼈던 분노는 이미 사라졌고 그 자리에 슬픔과 괴로움만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그를 바라봤다.“내가 당신을 어떻게 봐야 하는데? 당신이 정시연을 위해 나선 게 한두 번이야? 이제는 내 친구까지 건드려놓고... 도대체 어떤 얼굴로 당신을 마주해야 할까!”구태윤의 짙은 검은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턱 옆 근육이 단단히 꿈틀거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이연희를 병실로 데려와.”정루아의 얼굴이 굳었다.“뭐 하려고? 연희는 잘못한 거 없다니까!”구태윤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그건 얼굴 보고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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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이연희, 너 뭔데! 감히 주제넘게 형수님을 때려?”구태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정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연희 씨도 루아 편 들어주느라 그런 거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루아랑 연희 씨 마음만 괜찮으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아, 진짜 열받게 하네!”이연희가 욕설을 내뱉으며 앞으로 달려들었다.정시연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구태윤의 뒤로 몸을 숨겼다.구태윤은 차갑게 이연희를 내려다봤다.“이러고도 아니라고 발뺌할 거야? 손이라도 자르겠다고 해야 인정할 건가?”이연희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스쳤다. 그러나 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다.“내가 정시연을 때렸다고? 어느 손으로? 언제? 누가 봤어?”그때 정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침에 루아 만나러 갔을 때... 홧김에 내 뺨을 때렸었잖아...”이연희의 어안이 벙벙해졌다.“뭐라는 거야, 미쳤어?”정루아도 그제야 상황을 읽어냈다. 그녀는 이연희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구태윤과 정시연을 번갈아 보며 차갑게 물었다.“정시연, 연희가 널 때렸다고 네 입으로 말한 거야?”정시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곧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난 괜찮다고 했어. 이미 지난 일이니까.”그녀는 구태윤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태윤 씨, 이런 일로 루아랑 더 다투지 마세요.”“웃기고 있네. 따라 나와, 제대로 말해!”정루아가 다가가 정시연의 팔을 잡아끌었다.구태윤이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형수님 얼굴에 손자국 있는 걸 내가 봤어. 너 아니면 이연희야. 내가 괜히 몰아가겠어?”“놔!”정루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사과만 하면 이쯤에서 끝낼게.”“놓으라고 했지!”정루아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아침에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연희는 정시연을 때린 적 없어. 정시연이 연기한 거야.”‘늘 그랬던 것처럼...’정시연은 예전에도 그랬다.그네에서 스스로 떨어졌었고 계단에서도 자기 실수로 굴러떨어졌었다. 하지만 화병 하나 깨뜨린 사소한 일조차 정루아의 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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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이연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버둥 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얼굴의 핏기가 서서히 사라졌다.입술을 달싹이며 욕하려 했지만 끝내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정루아는 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눈이 점점 붉어졌고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때린 건 나야. 그러니까 정시연을 괴롭힌 것도 나라고. 그러면 나를 겨냥해! 왜 죄 없는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거야!”구태윤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의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너도 네가 형수님을 괴롭혔다는 건 아는 모양이네.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웠으면 이제 충분한 거 아니야?”정루아는 양옆에 늘어뜨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곧 입안에 피 맛이 퍼졌다.그 모습을 본 구태윤의 눈동자가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분노를 억누른 채 말했다.“이제 그만해, 루아야. 우리... 이만 화해하자.”정루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떨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싫다고 하면?”구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경호원을 힐끗 바라봤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그는 이연희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정루아의 눈물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고, 마지막 말은 결국 울음에 막혀 더 이어지지 못했다.정루아는 이렇게 나약한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눈물을 거칠게 훔쳐내고 정시연을 바라봤다.“어떻게 해야 연희를 놔줄 거야? 내가 무릎 꿇으면 되겠어?”정시연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방금 맞은 쪽 얼굴이 얼얼하게 아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루아는 그대로 무릎을 꿇으려 했다.“루아야!”그 모습을 본 이연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내가 잘못했어! 구태윤... 아니, 구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정시연 보면 피해 갈게요. 앞으로 숨죽이고 살게요. 그러니까 루아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루아는 그렇게까지 당신을 사랑하는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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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그해 지진 속에서 정루아는 구태윤을 구해냈다.그리고 그와 결혼하기 위해, 폭우 속에서 무릎을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 구씨 가문이 내건 조건까지 받아들였다. 유학을 위해 해외로 나갈 수 없다는 조건까지도.그녀의 사랑은 뜨겁고 깊었다. 단 한 번도 진실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수줍은 미소를 띠면서 구태윤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에는 늘 진심이 담겨 있었다.그 모든 시간은 그녀가 그를 사랑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그래서 기념일 이후 벌어진 모든 일들조차, 구태윤은 그녀가 괜히 억지를 부리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라고 여겼다.단지 자신이 기념일을 끝까지 함께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토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구태윤은 정루아가 모든 걸 끝내겠다고 말하는 이 순간이 현실이라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그는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숨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낮췄다.“루아야, 결혼이 장난이야? 결혼도, 이혼도, 모두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평생을 같이 하자고 했던 약속, 정말 잊었어?”정루아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한때는 눈, 코, 입, 모든 것이 좋았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낯설게만 느껴졌다.“평생 같이 해? 우리가? 애도 없이? 우리 인생도 없이 정시연이랑 구하준 옆에서 평생 보호자로 살아가겠다는 거야?”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따져 물었다.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구하준은 이제 세 살이었다. 그를 곁에서 돌보고 함께한 시간은, 작은 아빠로서 해야 할 역할의 범위를 이미 훨씬 넘어선 상태였다.‘평생이라니, 나까지 그 지옥에 묶어 두겠다는 거야?’정루아는 그를 세게 밀어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꿈도 꾸지 마. 구하준은 구씨 가문 핏줄이야. 평생을 바쳐 돌보고 싶다면 당신이 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구태윤이 분노를 억누른 채 말했다.“하준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더 이상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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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눈가에 따뜻한 감촉이 스쳤다. 흘러내리던 눈물이 닦여 나갔다.병실 안에는 흐트러진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뒤엉킨 숨결과 체온의 흔적이 아직도 공기 속에 맴돌았다.구태윤은 그녀를 안아 올려 병상 위에 눕혔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젖은 수건을 들고 돌아왔다.그는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정루아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연희는 우리 일과 무관한 거지?”구태윤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서 격렬한 감정이 요동쳤다.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네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내가 이씨 가문을 놓아주지 않으면 말이 안 되겠지.”정루아는 눈을 감았다. 이마에는 아직 땀이 맺혀 있었고 눈꼬리는 살짝 부어 있었다. 게다가 숨결도 여전히 흐트러져 있었다.격렬한 여운이 지나간 뒤,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떠올라 연약하면서도 생기를 띈 얼굴처럼 보였다.구태윤은 젖은 수건으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를 끌어안았다.예전에도 그랬다. 뜨거운 밤이 지나간 뒤면 그는 늘 이렇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일부로 녹여 버리려는 것처럼.하지만 정루아는 예전과 달랐다.“그래 봤자 소용없어. 어차피 아이를 가질 수 없잖아.”구태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아이를 갖고 싶은 거야?”정루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구태윤이 가증스럽다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정루아는 그저 극심한 피로감만 느꼈다. 가느다란 통증과 함께, 심장이 수천 개의 바늘에 꿰뚫리는 것처럼 아팠다.조금 힘이 돌아오자, 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구태윤이 미간을 좁혔다.“어디 가?”정루아는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리했고 표정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할 일은 다 끝났잖아. 더 있을 이유 없어. 더 있으면... 당신이랑 정시연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루아야!”구태윤은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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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구하준인 걸 확인하자, 구태윤의 얼굴에 서려 있던 냉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눈매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다정하게 손짓까지 했다.“하준아, 어서 와.”구하준은 곧장 달려와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작은아빠, 기분 안 좋아요?”고개를 들어 구태윤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검은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아이의 얼굴은 구태윤의 형인 구승태를 똑 닮아 있었다.그 얼굴을 보는 순간, 구태윤의 머릿속에 구승태의 모습이 떠올랐다.구승태는 원래부터 차분하고 듬직한 성격이었고, 반대로 그는 어릴 적 몹시 장난기가 많았다. 어느 날 혼자 몰래 밖에 나갔다가 구승태가 그를 찾으러 나섰다.마침 그날따라 구씨 가문을 노리고 있던 자들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이들 형제가 외출한 것을 발견한 그들은 그대로 납치극을 벌였다.납치된 시간은 사흘이었다.그 기간, 하루에 주어지는 음식은 고작 찐빵 하나가 전부였다.그런데 구승태는 그 찐빵을 늘 구태윤에게 넘겨주었다. 물을 주면, 그것조차 먼저 마시게 했다.심지어 납치범들이 그를 끌고 나가 채찍질하려 할 때도 구승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 대신 맞았다.그때 들렸던 형의 억눌린 신음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작은아빠?”구하준이 두 번이나 부르자, 구태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아니야. 기분 좋은데?”아이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병원에 있어?”구하준은 무의식적으로 문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작은아빠가 기분 안 좋아 보여서... 걱정됐어요.”구태윤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작은아빠는 괜찮아. 늦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 엄마 말 잘 듣고.”하지만 구하준은 놓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다리를 꼭 붙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작은아빠... 다른 애들은 다 아빠가 있는데, 왜 저는 없어요?”구태윤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하준이 아빠는... 아주 멋진 영웅이야. 눈에는 안 보여도, 항상 네 곁에서 널 지켜주고 있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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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이연희는 정루아와 허도준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이 분위기는 뭐지?’두 사람은 아는 사이 같으면서도 서늘한 기류가 감돌았다.허도준도 정루아의 냉담한 태도를 느꼈는지 괜히 헛기침을 했다.“루아야, 나 이제 막 들어왔어. 너희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는지 몰랐어. 내 기억은 아직도 5, 6년 전이라... 그땐 너희 진짜 서로밖에 몰랐잖아. 그래서 내가 오해일 거라고 단정 지었던 거야.”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좀 알아보니까... 네가 왜 상처받았는지 이해가 되더라. 내가 너무 성급했어. 미안해...”정루아의 또렷한 눈동자에 순간 놀람이 스쳤다.“벌써 다 알아봤다고?”허도준이 머쓱하게 웃었다.“태윤이가 형수를 감싸다가 아내랑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을 들었어. 이미 다 돌았어. 굳이 깊게 알아보지 않아도 네 마음이 어떨지 알겠더라.”정루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때 이연희가 대신 쏘아붙였다.“그래서 뭐야? 사과하러 온 거야, 아니면 상처에 소금 뿌리려는 거야?”“사과야, 사과.”허도준이 곧장 손을 드는 제스처를 취했다.“진짜 미안해.”그의 눈에는 약간의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정루아는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괜찮아. 어차피 구태윤과 정시연은 언젠간 한 쌍이 될 거니까.”허도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대기 중인 사람들이 많았다.“여기 서서 얘기할 분위기도 아니고... 내가 예약한 방으로 갈래? 나 혼자 먹으려니까 좀 쓸쓸해서 그래.”순간 이연희의 눈이 반짝였다. 번호표 순서대로 들어가려면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하지만 정루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우리는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으면 돼.”허도준이 한숨을 쉬었다.“아직도 안 풀린 거야? 한 번 더 사과할까? 우리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됐다, 루아야. 이 일로 계속 나를 피할 건 아니지?”그렇게까지 말하니, 정루아도 계속 차갑게 굴기 어려웠다.이연희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루아야, 잘생긴 오빠 덕 좀 볼까? 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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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이연희는 성격상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진짜 구태윤이랑 맞붙겠다는 거야?”허도준은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눈 밑으로 스치는 생각을 눌러 담은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다.“난 그냥 루아를 돕겠다는 거야. 아직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대충 흐름은 알겠어. 형수랑 아내 사이에서 태윤이가 뭔가를 잘못한 건 맞잖아. 잘못했으면 책임을 져야지.”“와, 멋있는 사람이었네.”이연희가 엄지를 번쩍 들었다.“난 또 구태윤이랑 한패인 줄 오해했잖아. 둘이 친구라길래 똑같을 줄 알았네.”허도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태윤이가 내 친구인 건 맞아. 그렇다고 걔가 하는 일 다 맞다고 편들 이유는 없지.”“어머,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더 멋있어 보여!”이연희가 정루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루아야, 가자. 소송 걸어. 그 인간은 이제 멀리 치워 버려.”정루아는 이미 여러 번 문전박대를 당한 터라 거의 체념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뜻밖의 제안을 듣게 되자,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너... 진심이야?”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자칫 친구 사이가 소원해질 수도 있는 일이야.”허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음... 내가 돕는 건 비밀로 하자. 내가 직접 나서진 않을 거야. 사람을 붙여서 너를 도울게. 소송 들어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하도록 할 거야. 그렇게 하면 태윤이는 소장이 송달된 뒤에야 알게 되겠지.”정루아의 눈빛이 또렷하게 살아났다.“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허도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빛은 제법 진지했다.“가능해. 대신 네 마음부터 확실히 정해야 해. 진짜로 이혼할 거야?”“난 이미 결정했어.”정루아는 단호했다.“구태윤이랑 끝낼 거야. 그 얼굴... 다시는 안 보고 싶어.”허도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오케이, 내가 도와줄게.”육수가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짙은 마라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고 뜨거운 김이 테이블 위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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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정루아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저는 형제가 없는데요. 조카라니요?”“너 정말 끝까지 버틸 거야?”정석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당장 와!”정루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거절하려다 문득 생각을 바꿨다.“그래요. 갈게요. 대신 조건 있어요. 돈부터 보내세요.”“뭐? 조건? 돈?”정석주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닐지 귀를 의심했다.“조카 생일잔치에 참석하는데 조건을 내세우는 이모가 어디 있어!”정루아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저는 정시연을 좋아한 적 없어요. 오늘 같은 날 굳이 가서 얼굴 비추길 원하신다면 성의 표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안 그러면 가서 판을 엎어버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창피한 건 아버지지, 제가 아니잖아요.”“이... 이 망할 것...”정석주는 숨이 넘어갈 듯 씩씩댔다.정루아는 느긋하게 펜을 굴렸다. 조급할 건 없었다.정석주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정시연과 정루아 자매가 겉으로라도 화목해 보이는 그림, 집안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었다.“얼마면 돼!”억누른 분노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정루아는 미소를 지었다.“요즘 좀 빠듯해서요. 한 16억 정도만 보내세요. 급한 대로 쓰게요.”잠시 정적이 흘렀다.이내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보냈다. 와서 괜히 소란 피우지 마.”정루아는 웃으며 답했다.“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통장에 입금 알림이 뜨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역시 현금이 최고네.’가볍게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는 곧장 구씨 가문 본가 저택으로 향했다.박정란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본가로 돌아와 요양 중이었다. 주치의가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잔치는 야외 잔디에서 열리고 있었다. 넓은 잔디 위에 천막과 테이블이 세팅돼 있었고 손님들은 아이를 데리고 모여 있었다.정루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곧 몇몇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직까지 그녀는 ‘구씨 가문 작은 사모님’이었으니까.“작은 사모님, 혼자 오셨어요? 구 대표님은 아까부터 와 계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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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하...”정루아가 코웃음을 쳤다.“이미 다 소문난 걸 모르는 거야? 진작에 웃음거리가 됐어. 이제 와서 체면? 나한테 그딴 게 아직 남아 있는 줄 알아?”그 말에 구태윤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무슨 소문이 돌았다는 거야?”정루아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몇 번이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오히려 팔이 더 단단히 조여 왔다.“너랑 네 형수의 스캔들. 설마 아직도 비밀인 줄 알았어?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내 체면을 짓밟은 건 너야. 이제 와서 몰랐다고?”구태윤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난 진짜 몰랐어. 확인해 볼게. 헛소문 싹 다 정리할 거야. 다시는 그런 말 안 들리게 할게.”정루아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사람들의 입을 막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입을 틀어막는다고 해서 눈까지 가릴 수는 없을 테니까.구태윤이 정시연을 얼마나 감싸고 도는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사람들이 보기에, 정루아는 ‘구씨 가문 둘째 사모님’이라는 타이틀만 간신히 챙긴 ‘장식품’일 뿐이었다.“돈 보내.”정루아가 담담하게 말했다.“안 그러면 내가 직접 말하고 다닐 거야. 남들 입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입은 못 막잖아.”구태윤은 한숨을 삼켰다. 답답함이 가슴에 걸렸다.“알았어...”짧은 타협이 끝나자, 정루아의 속이 조금은 풀렸다.“이제 놔. 나 뭐 좀 먹어야겠어.”“같이 가.”구태윤은 여전히 어깨를 감싼 채 그녀를 데리고 움직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몇 걸음 걷지 않아 정루아는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겉으로는 사이좋은 부부인 척하려고? 이렇게 하면 형수님과의 스캔들을 덮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 그림을 만들려는 거지?’그리고 속이 더 싸늘해졌다.“쳇, 연기 수당도 줘.”구태윤이 멈춰 섰다.“무슨 연기?”그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우린 부부야. 나란히 함께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정루아는 일부러 돈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광기 어린 맑은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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